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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스트레인지러브 혹은: 나는 어찌하여 근심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 Dr. Strangelove or: How I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스포일러 주의
핵전쟁 혹은 강대국들이 어찌하여 근심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많은 사람은 인류 역사에서 이젠 더 핵전쟁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핵을 발사하면 상대국도 보복 공격을 할 것이고 결국 핵 공격을 한 나라, 받은 나라 할 것 없이 모두 망할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바보 중의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섣불리 선제공격을 감행할 지도자는 없을 것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핵전쟁의 위험성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대국들은 비밀리에 핵무기를 중심으로 한 군비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영국의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한 인류의 무지를 비판하고 있는데 군사 강대국들이 핵무기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이유를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처음에 나는 사람들에게 핵전쟁의 위험성을 일깨우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자기 보존 동기는 매우 강력해서 그 동기가 작동되면 대개는 다른 모든 동기를 압도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확신에 공감하는 입장이었다. (중략)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었다. 사람들에게는 자기 보존보다 강한 동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을 앞지르려는 욕망이었다.
-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에서 재인용, pp 47~48 -
정치 권력자들이 인류의 대종말이라는 근심을 멈추고 무시무시한 폭탄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핵무기는 단 한 대라도 보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세계의 패권을 한번에 쥘 수 있는 강대국들이 좋아하는 '조커' 이다.
1963년에 개봉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혹은 나는 어찌하여 근심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는 미사일 개발을 둘러싼 미소 냉전 시대를 냉소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영화 속 내용과 등장인물들에 대해서 '어떤 인물도 실존했거나 실존한 적이 없다' 라고 영화 오프닝 때부터 자막으로 알리고 있지만 영화가 개봉되기 일 년 전에 실제로 핵미사일 배치 논쟁으로 인한 미국과 소련 간의 국제적 위기가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생각하면 큐브릭이 비판하려고 하는 대상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촉발한 흐루시초프 소련 서기장(左)와 케네디 미국 대통령(右)을
풍자한 만화
1962년 미국은 소련의 중거리탄도미사일의 발사대가 쿠바에 건설 중임을 공중촬영으로 확인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 대통령 J.F. 케네디는 소련은 서반구에 대하여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기지를 쿠바에 건설 중이라고 공포하고, 쿠바에 대하여 해상봉쇄조치를 취하였다. 케네디는 소련의 흐루시초프 서기장에 국제연합의 감시하에 공격용 무기를 철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전세계의 긴박감 속에서 소련은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한다면 미사일을 철거하겠다는 뜻을 미국에 전달하고, 그 다음날에는 쿠바의 소련 미사일기지와 터키의 미국 미사일기지의 상호철수를 두 번째로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전자의 소련의 제안을 무시하고, 후자의 제안을 수락할 것을 결정하였다. 결국 흐루시초프는 미사일의 철거를 명령하고 쿠바로 향하던 소련 해군함정을 소련으로 돌림으로써 미소 간의 대립 위기는 사라졌다.
전면전이 감돌던 위기일발의 분위기는 단 11일 간이었지만 쿠바 미사일 위기는 제3차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었던 가장 공포스러운 사건 중 하나였다.
냉전 이데올로기가 낳은 군비 대립으로 인해 핵전쟁의 위기가 있었지만 큐브릭은 다음 해 자신이 만든 영화 속에서나마 못 다 이룬(?) 핵전쟁과 이로 인한 인류의 멸망을 실현시켰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 군상
핵전쟁만이 공산주의자들을 척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지독한 반공주의자 '잭 리퍼 장군'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냉전 시대 속에서 '공산주의' 진영을 배척하는 비이성적인 '자유주의' 진영의 정치 및 군사 세력을 상징하고 있다.
영화 속의 잭 리퍼 장군은 좌익 혐오증 수준을 넘어선 비정상적인 광기에 사로잡힌 무시무시한 인물이다. 그는 미국 땅에 잠입한 소련의 스파이들이 수돗물에 불소을 타 미국인의 영혼을 더럽히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기지 안의 라디오를 모두 없애버리라고 지시한다. ‘빨갱이’ 들은 주로 라디오로 명령을 수신한다는 이유였다. 장군에게는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적은 '공산주의자' 들이다. 그는 미국이 선제 핵 공격을 하게 되면 평화를 위한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 마디로 결벽증과 피해망상증, 거기에 공격성까지 가미된 '정신병자' 였다.
장군은 드디어 핵무기를 장착한 폭격기 부대에 공격 명령을 내린다. 핵 공격이 인류의 멸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고민할 겨를도 없이 핵무기 공격 명령을 너무나 쉽게 내릴 정도로 그의 두뇌는 이미 합리적 판단능력을 상실된 상태였다. 결국 리퍼 장군은 자신의 계획이 뜻대로 실현되지가 않자 스스로 욕실에서 목숨을 끊어버린다. 장군의 자살은 '독일 순수 혈통' 으로 자부한 게르만 족을 규합하여 세계지배를 실현하려고 했던 히틀러의 최후를 연상케 한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전략상황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겉으로 보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머킨 머플리 대통령은 지극히 합리적이면서 냉정하게 사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실상 그는 군 장성에게 휘둘리는 나약한 허수아비일 뿐이다. 자신이 승인한 “R” 작전에 의해 이런 상황이 도래하였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는 합동참모장인 벅 터지슨의 “기왕에 이리 된 거 대대적인 핵공격을 감행하자”는 주장에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호색한' 벅 터지슨 장군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군 장성이라고 하기에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펼치고 있다.
터지슨은 리퍼 사령관의 복사판일 정도로 좌익 혐오증에 사로잡힌 전쟁광이다. 그는 인류의 평화와 자유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리퍼 사령관과 동일한 사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실상 두 장성은 지독한 냉전 이데올로기의 흑백논리와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군인일 뿐이다. 큐브릭은 이 두 인물을 통해 관료주의와 편협한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잘 보여주고 있다.
'Strange' 라는 특이한 이름의 인물답게 스트레인지 박사는
인류의 파멸에 관심이 없으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궤변만 늘어놓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나치 출신의 과학자 스트레인지 러브 박사의 등장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희극적 요소이다. 그는 소련이 미국의 핵공격에 맞서기 위해 만든 최후의 병기 '둠스데이' 에 대한 개념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다. 기계팔과 휠체어에 의지하는 러브 박사는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 백 미터의 갱도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자 1명에 여자 10명이라는 비정상적인 가족 구조를 유지하면서 100년 정도 땅 속에 살면 인류는 다시 번성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스꽝스럽게도 그들이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 남자의 헌신적인 봉사를 위해 성적인 특징이 발달되어 있는 여성만을 엄선해서 선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치 출신 과학자답게 인류의 번영을 위해서 건전한 유전자를 가진 인류를 증가하는데만 중점을 두고 있는 우생학적 대안을 제안하고 있다.
우리는 다시 만날거예요. 어디서 언제일지도 몰라도...
큐브릭이 영화를 통해서 비판하고자해던 것은 냉전 시대의 부조리한 상황일 것이다. 그리고 그 부조리한 상황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좌충우돌하는 권력자들의 우스꽝스런 모습일 것이다. 그는 관료주의와 편협함에 사로잡힌 권력자들을 냉소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핵전쟁이라는 초유의 사태에서도, 인류 공멸의 위기 속에서도 반공사상에 사로잡힌 광기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 We' ll meet again, don't know where, don't know when,
but I know we' ll meet again, some sunny day. ♪
우리는 다시 만날거예요, 어디서 언제일지도 몰라도. 어느 화창한 날 다시 만날거예요.
영화의 엔딩 또한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핵폭탄이 터지고, 버섯구름이 피어나는 엄혹한 상황에서 울려 퍼지는 감미로운 멜로디. “우리는 다시 만날거예요” 라는 노랫말에서 풍기는 빈정거리는듯한 목소리가 인상적이다. 큐브릭은 영화의 말미에서까지 저주스럽게 냉소적인 메시지를 핵폭발 장면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 나간 장군, 미치광이 과학자가 폭탄을 사랑하게 된 대가가 어떤 것이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몇 가지 그럴듯한 단계만 거치면 인류가 한순간에 멸망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부디 현실 세계에서는 리퍼 장군 같은 정신병자가 권력을 쥐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끔찍하고 불운스러운 영화 속 장면들이 '큐브릭' 의 작품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기만 하다.
만약에 영화처럼 실제로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인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날 것인가? 아니, 다시 만날 수는 있을까?
* 사진출처: 알라딘 영화검색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