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군이 이미 교과서를 통해서 알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 역시 입학 시험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 주기 바란다.  면에는 안과 겉이 있다.  예를 들자.  종이는 앞뒤 양면을 갖고 지구는 내부와 외부를 갖는다.  평면인 종이를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오려서 그 양끝을 맞불이면 역시 안과 겉 양면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한 번 꼬아 양끝을 붙이면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즉 한쪽 면만 갖는 곡면이 된다.   이것이 제군이 교과서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이다.  여기서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곡면을 생각해 보자.  

- [뫼비우스의 띠] 중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수록, 조세희 -

   

 

  두 명의 나폴레옹  

 

 

 

 

 

  

    

 

 

1804년 7월 국민 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프랑스의 황제가 된 나폴레옹(1769~1821)은 같은 해 12월 2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했다.  나폴레옹은 이 역사적인 행사를 기록하여 후대에 남기고 싶었는지 자신의 밑에서 전속 화가로 활동하고 있었던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에게 맡겼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할 때 자코뱅 당원 소속으로서 혁명에 가담하였으나 당시 자코뱅당의 지도자인 로베스피에르(1758~1794)가 처형당하여 권력이 몰락당하자 투옥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급직적인 혁명파들이 하나씩 숙청당하는 피바람 속에서도 다비드는 기사회생하였다.  제1통령 시절이었던 나폴레옹에게 종용되어 전속 미술 감독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다비드의 인생은  커다란 반전을 겪게 되었다.   언제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는 자코뱅파의 화가였다가 이제는 프랑스 전 지역을 다스리는 절대왕권의 권력자에게 총애를 받는 '왕의 화가' 가 되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이 황제로서 절대권력을 누렸듯이 다비드 역시 미술계 최대의 권력자가 되어 프랑스 화단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의 대관식>  1807년 

  

나폴레옹은 다시 다비드에게 그의 승리의 행진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1804년 12월의 노트르담 대관식을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은 화려함이 극치에 이른 행사였다.  프랑스의 내로라하는 인물은 모두 이 성당에 모였다.   교황 피우스 7세도 참석했고,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대표를 보냈으며, 장-프랑수아 르쥐외르는 특별히 음악을 작곡했다.  교황은 나폴레옹을 축복하여 고요한 성당 안에서 "황제 만세" 를 외쳤다.   다비드는 이 장면을 <조세핀의 성사 1807>라는 제목으로 1807년 11월에 완성했으며, 이것을 "나의 탁월한 주군에게" 바쳤다.  나폴레옹은 환호작약하여 '예술에 기여한 공로로' 다비드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위를 수여했다.  그는 다비드의 가슴에서 훈장을 꽂아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 당신 덕분에 프랑스에 고상한 취향이 되살아 났소. "  

- 알랭 드 보통 <불안> 중에서 -  

  

그러나 다비드는 이 대관식 장면을 한 장의 스냅 사진을 촬영한 것처럼 즉석에서 바로 그려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그 당시 승리의 도취감이 하늘에 찌를 정도로 위풍당당하였지만 주변 유럽 국가들과 교황은 나폴레옹의 등장에 썩 달갑게 여지기 않았다.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 장면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영웅, 단 한 사람을 위한 성대한 잔치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일부  

   
 

중앙에 특별히 마련된 좌석에 앉아 있는 귀부인이 나폴레옹의 어머니이다. 

그러나 그녀는 실제로는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왕관을 씌우려고 하는 나폴레옹의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당시 로마 교황 피우스 7세(1742~1823)이다.   

 
   

 

프랑스의 '영웅' 이자 '절대권력자' 는 장엄한 대관식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서 다비드에게 특별한 요구를 하게 되는데 실제로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는 자신의 어머니를 중앙에 그려넣으라고 하였고 자신보다 연상인 황후 조세핀을 우아하고 젋은 '영웅' 의 아내로 미화하여 묘사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다비드가 그린 대관식 장면 속에 압권은 나폴레옹의 모습이다.  황제를 상징하는 왕관을 쓴 나폴레옹이 부인 조세핀에게 직접 왕관을 씌워주고 있다.  양손에 왕관을 쥔 나폴레옹의 모습에는 황제로서의 위엄이 묻어나 있다.   

나폴레옹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피우스 7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기존의 대관식 장면을 그린 그림들은 교황이 직접 황제가 될 사람에게 왕권을 수여하는 장면이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다비드의 그림에는 교황은 그저 황제 뒤에 앉아 있을 뿐이다.  

피우스 7세는 프랑스 혁명 이후로 프랑스와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나폴레옹과의 종교협약을 맺음으로써 프랑스에 로마 가톨릭교를 부활시키는 동시에 화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종교협약은 유럽 왕권에 대한 교황의 지위가 한 단계 격하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등장은 곧 왕권이 교황의 지배권으로부터 독립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준 사건이었다.   그림 속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황은 나폴레옹의 원맨쇼를 앉아서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대관식을 참관만 하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대관식이 치뤄진 뒤 2년 뒤에 나폴레옹은 교황의 교회령에 대한 세속적 지배권을 제한하는 정책을 취하여 교회령의 병합을 선언, 교황 피우스 7세를 체포함으로써 오랫동안 유럽 왕권을 군림하였던 교황권의 지위를 굴복시키는데 성공하고 만다.  

 

<프랑스 초대 황제 나폴레옹의 대관식 행렬> 제임스 길레이, 1805년  

  

실세를 잡은 나폴레옹 황제는 자신의 권력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반동적이거나 풍자 신문을 폐간할 것을 명하고 심지어 자신의 외모에 풍자하는 것까지도 허용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왕권을 잡고 있었던 시기에 다비드를 비롯한 화가들은 그를 신격화하는 그림들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힘이 미치지 않는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젋은 영웅을 마음껏 조롱하고 풍자할 수 있었다.   영국의 풍자화가 제임스 길레이(1756~1815)는 다비드가 대관식 장면을 제작하고 있었던 무렵에 마찬가지로 똑같은 주제의 장면을 그렸는데 다비드의 그림과는 다르게 대관식 장면을 희화화하였다.   길레이는 단순히 영웅인마냥 자아도취에 빠진 황제만 비난한 것이 아니라 속으로는 불만에 가득차 있으면서도 나폴레옹의 등장에 환호를 하는 당시 유럽 국가와 교황의 이중적인 태도까지도 조롱하였다.   

 

제임스 길레이는 추종자, 아첨꾼, 죄수를 이끌고 점잔빼며 걸어가는 황제의 모습을 그렸다.  황제는 잔뜩 부풀어 올라 우쭐거리고 있다.  교황 피우스 7세도 등장하지만 다비드의 그림에서와는 달리 길레이의 교황은 가운 밑에 성가대의 소년을 감추고 있는데, 이 소년은 가면을 벗고 악마의 얼굴을 드러낸다.    (중략)   행렬을 나폴레옹이 정복한 프로이센, 스페인, 네덜란드의 대표들이 이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발적으로 그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들 뒤에는 족쇄를 찬 병사들의 행렬이 따라온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백성이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준 황제가 아닌 것이다.    

- 알랭 드 보통 <불안> 중에서 -  

 

길레이의 풍자화가 유럽 곳곳에 유행하기 시작하자 나폴레옹은 자신의 희화화한 그림을 프랑스로 반입하는 자를 재판없이 수감하도록 강력한 지시를 내렸다.   영국 출신의 풍자화가가 그린 단 한 점의 그림 때문에 나폴레옹은 얼마나 심기가 불편했던 것일까?    그는 또 영국을 침공하여 정복하게 된다면 반드시 제임스 길레이를 찾아내겠다고 엄포를 할 정도였다.  

 

 

  거짓말같이 오고 만 해방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 1943년 들어 연합국의 우세가 확실해짐에 따라 연합국측은 전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43년 카이로 회담을 열었으며, 한국에 대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는 신탁 통치가 거론되었으며,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에서는 카이로 선언이 재확인되었다. 1945년 8월 6일 일본의 나가사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월 9일 얄타 협정에 따라 러시아가 대일선전포고를 한데 이어 38선 전역을 점령하였다.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미국이 38선 분할안을 제기하였으며,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다.   

1945년 8월 15일,  미국의 뉴욕 타임즈의 1면 헤드라인에는 '일본 항복, 전쟁 끝!' 이라고 간결하게 알림으로써 연합군의 승리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기사에는 '1943년 12월 카이로 선언에서 "위험과 욕심으로부터 지배당했던" 영토들도 해방될 것이다. 한국의 독립 또한 약속되었다. ' 라고 게재함으로써 한국의 독립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재미교포단체들이 발간하는 항일 민족 기관지 신한민보에는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 중국의 주석 장제스 그리고 소련의 서기장 스탈린이 보낸 한국의 독립에 대한 축전까지 게재되었다.   

  " 한국은 당신들의 승리를 얻었고 한국의 자유가 속히 올 것을 위하여 축하합니다. " 

 

하지만 광복의 기쁨을 먼저 만끽해야할 한반도에서는 외세 언론 속의 반응과는 다르게 분위기가 달랐다.   그리고 그 날의 1면 역시 상반되는 내용이었다.  

조선총독수 소속 기관지인 매일신보경성일보는 일본의 항복에 대한 소식을 전파하기보다는 여전히 천황제를 존속할 것을 알리는 내용들을 게재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공식적으로 한반도에 알리게 된 것은 경성중앙방송국의 라디오 중계를 통해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선언 방송을 통해 뒤늦게 알 수 있었다.  

히로히토는 "항복" 이란 말은 쓰지 않았지만,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 영. 소. 중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 " 는 말이 곧 항복 선언이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중에서 - 

 

엄명하게 말하자면 일본의 항복 선언은 곧 조선의 독립을 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라디오 방송을 청취한 조선인들은 해방의 감격을 길거리에 나와 만끽하였지만 라디오를 소유하지 못했다거나 '항복' 이라는 단어를 표현하지 못한 천황의 항복 선언에 시민들은 여전히 광복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와 같은 친일 언론들은 실제로 벌여진 일제의 몰락 사실을 전 국민들에게  알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2~3일 후에야 해방을 알게 된 지역이 많았다.  (강준만, <한국 근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pp 30)  

원로 여류 시인 홍윤숙의 표현대로 8월 15일의 해방은 '참으로 거짓말같이 그날은 오고 만 것' 이었다.  (강준만, pp 25)   36년 간 일제의 억압에 시달려야했던 조선인들은 갑자기 찾아온 해방에 반신반의하였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찾아온 조선의 해방은 또다른 강대국들의 등장으로 인해 광복의 기쁨은 단 하루, 잠시뿐이었다.   이북 38선 전역을 점령한 소련의 남하를 우려한 미국은 38선 분할을 제기하였고 남한에 미 군정이, 북한에는 소련이 점령하였다.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조선인들로 이루어진 자주적 정부 수립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미국은 조선의 자주성 존재마저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광복을 맞은지 66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의 극우파들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로 이루어진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안과 겉' 구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수록된 첫번째 단편 '뫼비우스의 띠' 에서 수학 교사는 뫼비우스의 띠라는 수학적 개념을 학생들에게 알림으로써 안쪽과 바깥쪽이 구별되지 않은 이 요상한 형체와 같이 우리가 진실이라 여기는 뜻이 그렇지 않을 때가 있음을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흑백 논리,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채 왜곡된 사고와 사회적 시선들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겉으로 구분을 할 수 없듯이 하나의 사건만을 가지고 무조건 옳다,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왜곡되고 고집된 생각을 형성할 수 있는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잘못된 방식이다.  

다양한 이면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물과 현상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하며 올바른 판단력과 비판적 태도를 통해 현상을 바로 인식할 줄 알아야 한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그러나 인간이 '이성' 을 가짐으로써 다양한 학문을 안다고 해서 그 경험만으로도 세상을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볼 수 있을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과 현상 속에서 숨겨진 그 내면의 진실을 왜곡하지 않은채 뚜렷하게 볼 수 있다는 것.   이제는 '아는 것' 이 힘이 아니라 '진실을 왜곡하지 않은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 이야말로 복잡다단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가장 요구되는 진정한 힘인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 에서 교사가 수업을 마무리하는 장면을 끝으로 이 글 역시 마무리하고자 한다.

 

" 끝으로 내부와 외부가 따로 없는 입체는 없는지 생각해 보자. 내부와 외부를 경계지을 수 없는 입체, 즉 뫼비우스의 입체를 상상해 보라.  우주는 무한하고 끝이 없이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을 것 같다.   간단한 뫼비우스의 띠에 많은 진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중략)   차차 알게 되겠지만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 " 

 

  

 

* 관련 동영상  

EBS e지식채널 <두 개의 시선> (다비드와 길레이의 그림) 

                    <그날의 기록> (8.15 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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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9-10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주 유익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지금 뫼비우스의 띠 어딘가에의 바깥, 혹은 안쪽에서 반대편을 못 보고 있겠지요?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그 띠를 걷다보면 지금 반대쪽에 있는 것을 언젠가는 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거겠지요.^^

cyrus님 그간 여러 좋은 글 읽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추석맞아 전합니다. 추석 잘 보내세요.^^

cyrus 2011-09-10 18:19   좋아요 0 | URL
<한국정부론>이라는 수업 첫 시간에 보여준 동영상에 대해서 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봤습니다. 그 수업은 매주 수업내용을 피드백해서 정리해서
교수님 홈페이지에 올려야하거든요. 동영상을 보면서 하나의 현상을
한쪽면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추석 인사 댓글을 읽으면서 맥퍼님의 서재를 들리지 않은게 오히려
맥거핀님께 송구스러운 마음이 드네요, 영화는 제가 관심 있는거만 보는
편이라 맥거핀님 서재에 댓글을 남지지 못한 것도 있었습니다. ^^:;

맥거핀님도 추석 잘 보내세요 ^^

노이에자이트 2011-09-10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차세계대전은 1939년 9월에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한 날을 시작으로 잡습니다.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한 전쟁은 태평양전쟁이라고 하지요.단,통칭 2차세계대전은 태평양전쟁을 포함하여 말합니다.독일이 1945년 5월 항복하지만 일본은 8월에 항복하기 때문에 이 날을 2차대전이 끝났다고 하지요.물론 그날을 태평양 전쟁이 끝났다고도 합니다.

cyrus 2011-09-10 18:21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2차세계대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발하고 진행되었는지 몰랐어요.
그저 영화에서 소개된 유명한 전쟁 이외에는 모르는게 많아요.
댓글이나마 노자님께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자님도 추석 잘 보내세요 ^^

2011-09-10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0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