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그래
교고쿠 나쓰히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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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람은 억지를 쓰는 존재이다. 이치에 맞든 맞지 않든 억지를 쓰다보면 그럴듯해진다.  교활하고 빈틈없이, 사람은 언제나 자기 형편에 맞도록 사실을 왜곡하고 이어 붙여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 교고쿠 나쓰히코 <죽지 그래> pp 135 -  

    

 

  그들은 사과하지 않았다  

고대 성추행 사건이 일어난지 어느덧 3개월이 지났다.  지금도 사건 관련자 고대 의대생 3명에 대한 징계 문제가 사회적으로 논란의 쟁점이 되고 있다.

수많은 시민단체들 그리고 고대 소속 재학생과 졸업생들은 동료 여학생을 성추행하고 나체를 촬영한 파렴치한 의대생 3명을 출교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지만 학교 측은 퇴학 수준의 징계를 내렸다.  고대는 다른 대학과 달리 퇴학처분을 받아도 1학기만 지나면 재입학이 가능하다. 이 사건의 가해자들이 자신들의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 뼈저리게 반성하고 학교로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면 반드시 출교처분을 해야하는 것이 합당한 법적 제재이다. 

의대생들이 일으킨 행위는 교육목표에 따라 인간 존엄성을 박탈하고 사회 정의를 심각하게 훼손한 범죄 행위이므로 가장 엄중한 처분을 내리는 것이 걸맞다. 그런데 자신들에 내린 처분이 가벼워서 그런 것일까?  사건이 발생한지 세 달이 지난 지금도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 일말의 죄책감과 반성할 기미가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출연한 성추행 사건 피해자의 언니의 진술에 의하면 가해자의 부모가 직접 찾아와 피해자 학생에게 피해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지면 가해자인 본인의 자식들도 인생이 끝난거지만 피해자도 끝난 것이라는 협박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피해자는 사건이 일어나고 2~3일 후 가해자들에게 연락을 해 ‘ 너희들이 했던거 기억난다. 술에 취했었지만 확실히 기억이 난다 ’ 라고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 미안하다, 정말 잘못했다’ 라는 반응이 아닌 ‘ 네가 모를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알았냐’ ,  ‘우리는 망했다’ 이런 식의 반응을 보여 애써 연락한 피해자에게 최소한의 사죄조차 하지 않은 것다.    성추행 사건이 사회의 표면 위로 떠올렸을 때 문자 한 통으로 사죄를 표한 태도와는 무척 상반되고 사죄에 대한 가해자들의 진심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 남 탓이오즘 ' 에 사로잡힌 소설 속 인물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고 있는 중요한 사회적 이슈마다 남의 탓만 하는 일은 허다하게 벌어지고 있다. 무상급식, 반값 등록금, 폭우 피해, 물가인상, 노사분규와 비정규직 문제 게다가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파렴치한 범죄 사건 등까지 모든 사회적 이슈 속 당사자들은 서로 남의 탓만 하고 있다.  그야말로  ' 남 탓이오즘 ' 의 사회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다. 

교고쿠 나쓰히코<죽지 그래> 속에 등장하는 6명의 인물 역시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 남 탓이오즘 ' 의 전형적인 인물들이다.  

아사미라는 여자의 죽음과 행적을 알아내기 위해서 와타라이 겐야라는 남자가 그녀와 관련된 주변 인물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  재미있게도 겐야가 만난 인물들은 생전의 아시미와 친분의 관계를 형성했으면서도 정작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진심어린 애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겐야가 첫 번째로 만난 계약직 회사 직원 야마자키에게 아사미는 그저 자신의 회사에 잠깐 일하러 온 계약직 직원, 그저 스쳐 지나가는 외부적인 존재일뿐이다.   

 

아사미는 석달 전에 죽었다.  자살이었는지 타살이었는지, 경철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모른다.   (중략)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보도해주지도 않았고 -  아, 그저 내가 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뭐, 자살이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 같은 책, pp 14 -

 

겐야가 세 번째로 만난 야쿠자 사쿠마는 자신이 사랑했던 아사미의 죽음 소식을 접했을 때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신변이 위험에 처할까봐 당황한 반응을 보인다.  

  

슬펐던가?  아사미가 살해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슬펐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놀랐다고 해야 하나.  아니, 아니....  '위험하다' 가 먼저였지 않을까.   (중략) 

나와 아사미의 관계는 머지않아 밝혀질 것이다.  조사를 받게 된면 귀찮아진다.  내가 아니라 조직이.   

 - 같은 책, pp 127 -

  

네 번째로 만난 아사미의 친엄마의 모습은 죽은 딸의 엄마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남 탓이오즘' 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는 딸의 심정을 한번도 헤아려 본다거나 이해해보지도 못한 채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결핍돤 상태다.   

 

" 이봐, 그 사람들은 전부 아사미의 아빠가 아니라 내 남편이었어.  나하고 결혼한 결과 아사미의 아빠가 된 것뿐이었다고. " 

 겐야는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 그 말은, 아사마의 기분 같은 건 상관없었다는 뜻이야? "    

 그 아이의 기분 따위.... 

 " 몰라, 그런 건. 그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부부 사이 문제 같은 건 제대로 알지도 못했겠지.  그 아이는 내가 결정한 일에는 뭐든 거스르지 않았어.  그거야 당연하지. 내 인생이니까.

 - pp 198 -

   

그녀는 자신의 딸에 대해서 왜곡된 질투심마저 가지고 있다.  아사미는 그저 '아버지' 라는 존재가 그리웠고 친아버지가 아니더라도 새로 맞이 한 계부에게 딸로서 사랑을 듬뿍 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사미의 친엄마는 그런 아사미의 태도를 질투를 느꼈으며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자신의 유일한 핏줄인 아사미 그리고 그녀의 인생을 거쳤던 남자 탓으로 돌리고 있다.  

 

 

 ' 남 탓이오니스트 ' 에게 날리는 겐야의 마지막 확인사살 

소설 속 겐야의 대화 방식은 죽은 아사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겐야의 심리적 상태처럼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아사미의 죽음을 더욱 궁금하게끔 만드는 몰입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언뜻 소크라테스의 산파법이 연상된다.   아사미와 관련이 있는 인물들은 정작 아사미에 대해서는 막연하고 불확실한 진술을 하게 되는데 겐야는 교묘하게 대화에 참여하는 이들의 허술하고 모순적인 내면심리를 잘 파악하여 대화 당사자들 스스로 자신들의 약점을 노출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겐야의 완벽한 대화에 걸려든(?) 인물들에게 '약점' 이란 살아있었을 때나 죽고 난 뒤나 아사마에 향했던 냉담하면서도 방관적인 태도이다.   집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상대방에게 추궁하는 겐야의 질문들은 양 손으로 번갈아 잽(jab)을 날리는 권투 선수처럼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하고 있다. 그런 겐야의 능수능란한 언변에 야마자키와 사쿠마 그리고 아사미의 친엄마는 학력도, 직업도 없는 한 남자 앞에서 쩔쩔 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겐야는 궁색한 자기변명과 쓸데없는 하소연만 늘어놓기만하는 세상에 대한 불만 가득한 이들에게 강력한 어퍼컷을 날림으로써 마지막 확인사살까지 한다.    

 " 죽지 그래. "

  

  

  방귀 뀐 놈이 성낸다

' 잘 되면 내 탓, 그렇지 않으면 남 탓 ' 이라는 현대인의 모습은 인간의 본성인 냥, 예전부터 오래도록 역사처럼 이어졌다. 타인을 비난하면 자기가 이익을 얻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비난의 속성인데, 이는 자기가 남으로부터 비난받을 짓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남을 먼저 비난하여 자기의 문제를 감추려고 하는 심리적 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어느 한 사람의 하나 밖에 없는 인생 또는 목숨과 관련 있는 반인륜적인 사건 같은 경우에는 사건을 일으킨 가해자들에게 ' 남 탓이오니즘 ' 이 극대화되어 나타난다.   이들은 정작 피해자의 심정과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 방귀 뀐 놈이 성낸다 ' 라는 속담이 있듯이 잘못을 저지른 쪽에서 오히려 남에게 성내게 된다.

결국, ' 남 탓이오니즘 ' 은 자신에 대한 행동을 회피하고자 하는 사람의 심리인 셈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허다한데 그때마다 ' 너 때문이야! ' 라고 탓을 한다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궁색하게 만드는 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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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8-20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반가워라. 시루스님, 저 이 책 살까말까 몇 번이나 그랬었어요. 근데 이제 여름도 지나가니까 장르소설은 구입 안하려구요. 대신 리뷰 보니까 좋네요, 읽은 것 같고..ㅎㅎ

세상이 뭐 갈수록 이래요, 방귀 뀐 놈이 성내고, 당한 사람이 더 죄스러워 하고........

cyrus 2011-08-21 17:14   좋아요 0 | URL
사실 장르소설이라고 구분하기에는 애매모호했지만,, 그래도 내용 전개가
인상 깊었어요. 결말에 이를수록 주인공이 마지막에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것도 좋았고요,, 제일 마지막 부분에는 반전도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