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를 향한 번역자의 충고(?) 

 

 

 

마야꼬프스끼의 시는 확실히 차 한 잔 마시듯 읽을 수 있는 시가 아니다. 

그의 시집은 마음이 울적할 때, 혹은 잠 안 오는 밤에 뒤적거려보는 그런 책은 아니다.  

 - <나는 사랑한다> 머리말 [마야꼬프스끼의 시를 옮기며]  석영중, pp 6~7 -

   

책의 서문을 읽어가면서 이 문구를 보자마자 괜히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독자에게 향하는 번역자의 충고처럼 느껴졌다.      

 

 

 

 

 

 

 

   

 

 

마야꼬프스끼라면 국내 독자들에게 생소할 것이다.  구 소련에 활동했던 시인인데 1993년에 열린책들에서 세 권으로 그의 전집이 출간되기도 했었는데 오늘날에는 선집 형태로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  

으레 시라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읽혀지는 고상함을 느낄 수 있는 장르이다.  또는 마음이 울적할 때나 불면증에 시달릴 때 이를 달래주기 위해서 시를 읽기도 한다.  그런데 차 한 잔 마시면서 여유롭게 읽을 시가 아니라니.   마야꼬프스끼가 쓴 시의 내용이 어떻길래 그런 것일까?

  

   

  젊은 시인의 죽음    

 

 

 블라디미르 마야꼬프스끼 (1893~1930)

 

   

 

 

 

 

  

   

 

마야꼬프스끼가 활동했던 시대적 배경을 보게 되면 그 당시 소련이 소비에트 체제 전환으로 물꼬를 트고 있었던 시기다.  그가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하고 있을 때, 1917년에 레닌과 볼셰비키 당이 주도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다.  수많은 러시아의 지신인들이 새로운 변화의 물결 속에 뛰어들었듯이 마야꼬프스끼도 소련에 밀어닥친 사회주의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었다.     

 

 

릴리 브릭과 마야꼬프스끼

 

한창 피 끊는 혈기를 주체할 수 없는 젊은이였던 마야꼬프스끼는 심장 속에 품고 있었던 혁명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무기 대신에 펜으로 표출한다.  실제 모습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듯이 불같고 다혈질적인 성격이다.  당시 소련 문학계를 주름 잡고 있었던 보수적 소비에트 문학가들과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불행한 연애도 마야꼬프스끼를 더욱 더 고립하게 만들었다.  릴리 브릭과 그녀의 남편 오십 브릭과의 삼각관계적 동거는 연애 스캔들 사상 유명한 일이다.   결국, 현실과 사랑의 괴리감을 극복하지 못한 채 마야꼬프스끼는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을 하고 만다.   젊은 시인에게는 실패한 연애 그리고 혁명의 현실이라는 삶의 무게감을 견뎌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한창 사회주의 사상이 꽃을 피우고 있는 소련 초창기 때에는 마야꼬프스끼의 선동시가 많이 읽혀졌을 것이다. 당시 소비에트 체제를 우의적으로 비판했던 조지 오웰의『동물농장』에 보면 시를 쓰는 돼지 미니무스가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미니무스는 동물농장의 독재자 나폴레옹(스탈린을 상징)을 칭송하는 시를 쓰는 캐릭터로 그려지는데 그를 마야꼬프스끼로 상징하고 있는 쪽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민음사, 도정일 '동물농장' 의 해설 편)

그러나 마야꼬프스끼는 문학을 통해서 소비에트 체제를 맹목적으로 찬양했던 것만은 아니다. 

문학의 성숙기에 이르게 될수록 소련의 행보는 본인이 원했던 세상이 아니었다.  레닌 사후, 세월이 지날수록 혁명으로서 순수성의 의미가 상실되어가는 소련 정부의 태도에 시인은 실망했던 것이다.    그는 정부를 비판하는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 때부터 정부와의 관계가 급속도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소련이 무너진 오늘날 마야꼬프스끼에 대한 문학적 평가는 엇갈려진다. 소비에트 시대의 두 시인 말고도 러시아 문학사에 언급이 되는 유명한 시인에는 뿌쉬낀과 네끄라소프, 레르몬또프가 있다. 이 3인방들과 함께 견주어 보면 마야꼬프스끼의 인지도와 문학적 평가에서 제일 뒤쳐진다.  

개인적인 상상이지만 러시아 사람들도 선동적인 정서가 강렬한 마야꼬프스끼의 시를 즐겨 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우리나라 독자들이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한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조직한 일제 강점기 시대의 대표적인 문예운동단체)의 문학을 즐겨 읽지 않듯이 말이다.  러시아 인들이 시를 읽는다면 차라리 차 한 잔 마시면 여유롭게 뿌쉬낀을 읽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야꼬프스끼가 자살한 지 62년이 지난 뒤, 그가 사랑하고 칭송했던 레닌의 거대한 동상이 무너짐과 동시에 자신의 문학적 평가도 이제 한낱 돌덩어리에 불과한 레닌 동상의 파편속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마야꼬프스끼가 꿈꿔왔던 이상적 사회주의 세계는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함께 사라졌지만 활자로만 남아있는 시집은 지금도 생전에 그가 혐오했던 자본주의 시대의 도서관 서가에 자리 잡고 있으니 그의 기구한 인생만큼이나 문학의 운명도 기구하기만 하다.  

     

 

  강렬한 파도와 같았던 그의 삶 그리고 시


마야꼬프스끼 전집 1권에는 초창기 때 쓰여진 장시 6편, 단시 38편, 가족들에게 쓴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단시라고 명한다고해서 단순히 내용이 짧은 시가 아니다. 단시치고는 내용이 조금 길다. 편지는 대체로 가족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그나마 부담 없이(?) 읽을 만하다.  

그러나 마야꼬프스끼의 시가 생소한 독자들에게는 읽기가 무척 불편할 수 있겠다. 이처럼 자신의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하였으며 전투적인 시는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마야꼬프스끼의 시에는 혁명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감정과 소련에 대한 애정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래서 간혹 쇼비니즘적인 경향도 보이게 된다. [우리는 믿지 않는다!]라는 시에는 노골적으로 레닌을 찬양한다. [브룩클린 다리] [브로드웨이] [마천루 해부도]라는 시에서는 당시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미국을 비난하기도 한다. 


1권에서 소개되는 마야꼬프스끼의 초창기 시들은 1922년 발표 기준으로 표현 방식이 분명하게 나누어진다.  1922년 이전에 마야꼬프스끼는 당시에 유행하던 미래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움베르토 보초니 <창기병들의 돌진> 1915년 

 

미래주의의 모토는 과거의 전통을 파괴하고 역동성의 미(美)를 강조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마야의 초창기 시에서는 기존 문학에서 볼 수 없는 난해한 시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형식적인 면에서는 정형화된 행과 열을 사용하고 있음으로써 아직까지는 문학의 전통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1925년에 발표한 [우리는 믿지 않는다!]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해지고 보다 파격적인 형식의 시작(詩作)을 시도하고 있다.     

 

 

                             비처럼 퍼붓는다. 

그리고 파도는  

                             전해상의 중앙 집행 위원회에게   

승리의 순간까지  

                             폭풍의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노라.    

(항해)한다.

이제 승리의 순간이 찾아왔다ㅡ 

                                          물방울 소비에트 전권(全權)이 

(적도)를 에워싼다.

마지막 파도의 소규모 집회가

무언가에 관해
                             고상한 어조로  

                                                           토론을 벌인다. 

이제

                             깨끗이 찢겨진 대양이

                                                           미소를 지었고  

당분간  

                             고요와 평화 속에 빠져들었다.

나는 난관 너머를 바라본다.

                                         동지들이여, 전진하라!  

 

- 블라디미르 마야꼬프스끼 <대서양> -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에 번역된 마야꼬프스끼의 시 전문 내용이다.  노어문학 전공이 아니다보니 실제로 원문에도 이런 형식으로 되어 있는지 확인할 도리가 없지만 우리가 많이 봐온 시의 형식이 아닌 들쭉날쭉한 형태이다.   

하나의 연에는 문장은 최대한 간결하게 표현하였으며 연과 연 사이의 행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전 시에서 볼 수 있었던 애매모호한 상징주의적 표현을 배제하는 대신에 작가의 주관적이면서도 사실적인 감정 진술의 노출이 잦아지고, 영탄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강렬한 시의 내용만큼이나 표현 형식도 강렬하면서도 역동적이다.  시를 통해서 거대한 파도와 같은 마야꼬프스끼의 강인한 성격도 엿볼 수 있다. 비록 그의 시는 뿌쉬낀과 비교하면 문학성은 떨어진다.  

하지만 표현 형식의 시도에 대한 평가는 마땅히 받아야한다. 마야꼬프스끼 본인의 초창기 시와 그가 활동하던 동시대의 소비에트 문학이 사회주의적 구호 나열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과 비교해본다면 1922년 이후에 발표된 마야의 시는 사회주의적 이념을 고무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기존 문학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행간의 파괴법은 정치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갖추도록 하고 있다.

   

 

  강철 언어의 연금술사
 

그의 시구에는 유난히 ‘철’ 과 연관된 단어가 많이 발견된다. 마야꼬프스끼는 강철의 파도와 같은 자신의 시를 통해서 앞으로 펼쳐질 사회주의 사회의 무한한 영화를 노래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시도 ‘힘겹게 시간의 암석을 뚫고 묵직하게, 거칠게, 생생하게 살아남을 것’  이라고 자신감에 가득 찬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역사는 원대한 포부가 담긴 젊은 시인의 기대감을 저버렸으며 그의 시 역시 급변하는 시간의 암석을 뚫지 못했다. 

고대 연금술사들은 구리, 납과 같은 비금속으로 금과 같은 귀금속과 영원히 늙지 않는 영약(靈藥)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했던 방식은 과학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마야꼬프스끼가 꿈꿔왔던 사회주의 세계도 역사상 발전할 수 없는 유토피아였던 것이다. 현실적이면서도 냉정하게 마야의 문학적 평가에 걸맞은 별칭을 붙여준다면 영원히 번영되는 사회주의 사회를 꿈꾸었던 ‘강철 언어의 연금술사’ 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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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1-08-1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를 읽고 '금'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야꼬프스키는 '철'인가 보네요. 관심이 갑니다.

cyrus 2011-08-15 16:2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dreamout님 ^^

마아꼬프스끼의 시가 선동적인 어조에다가 시를 읽을 때마다 강렬한
여운이 있어서 강철 같은 분위기가 났었어요. 저는 프리모 레비의 책은
아직 안 읽어봤는데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

감은빛 2011-08-25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라딘을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전에 종종 끄적이던
블로그 제목이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 였어요.
시루스님 서재에서 마야꼬프스끼를 만나서 아주 반갑네요!
오늘은 집에가서 그의 시를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cyrus 2011-08-25 19:49   좋아요 0 | URL
마야꼬프스끼의 시가 전투적이면서도 읽으면 읽으수록
알 수 없는 힘이 생긴다고 해야될까요..? ^^;;
시도 좋지만 생전에 그가 가족에 보낸 편지글도 좋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