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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티 인문학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속옷 문화사 ㅣ 지식여행자 10
요네하라 마리 지음, 노재명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다카다 상은 왜 벗었는가?
종합격투기 대회 프라이드FC <남제 2006> 오프닝 당시의 모습.
일본 전통 속옷 훈도시를 입은 채 큰 북을 치고 있는 사람이
다카다 노부히코 프라이드 총괄본부장이다.
당시, 이 장면을 TV로 목격한 나는 그의 세리머니,
아니, 브라운관에 비치는 그의 엉덩이가 민망하였다.
큰 북 뒤에 높은 단에 서 있는 5명의 남자는 이 대회 때 참가하는
격투기 선수들이다. 그 중에 비 일본인 선수들도 있는데,
코 앞에 있는 훈도시를 입은 다카다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4년 전이다. 지금은 미국의 UFC의 흥행과 일본 진출에 밀려 사라진, 그 때는 일본 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프라이드 FC의 경기를 자주 보곤 하였다.
최근에 첫 패배를 기록했지만, 그 당시에는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었던 '60억분의 1의 유전자' 에밀리아넨코 효도르,
하이킥의 달인 미르코 크로캅, 주짓수 최강자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 등등... 화끈한 플레이와 스타성을 고루 갖춘 세계 최고의 격투기 선수들이 일본에 모여 한바탕 Fight를 치루고 있는 것이 프라이드 FC였다.
그리고, 이들의 화끈한 싸움만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진행되는 대회 오프닝도 경기장에 모인 관중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주었다. 그런 오프닝의 중심에는 항상 이 남자가 있었으니. . .
다카다 노부히코.
실제 사생활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평소에 TV에 비친 모습이나 세리머니를 보게 되면
약간의 마초 기질이 있을거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 이름은 다카다 노부히코. 예전에 일본 내에서 레슬링 선수 겸 이종격투기 선수로 활동하다가 프라이드 FC 총괄본부장(쉽게 말하면, 대회 전체를 여는데 지휘를 하는 사장)이 된 나름 일본 국민들에게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나이다. 프라이드 FC 단체의 흥행에는 일본 관중들의 구매력에 있다고 판단했던 그는 항상 큰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관중들이 생각치도 못한 거대한 오프닝 행사를 준비하였다. 다카다 본부장이 양복을 입은 채 직접 탭댄스를 추기도 하고, 100명의 오케스트라가 대회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음악을 연주하는 등 항상 볼거리가 많은 퍼포먼스를 제공하였다. 그래서 나뿐만 아니라 일본 관중들이 프라이드 FC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눈과 마음을 사로잡게 만드는 프라이드 FC만의 오락적인 요소가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2006년에 열린 <남제男祭>라는 흥행 이벤트에서 다카다 본부장은 파격적인 오프닝 세리머니를 하게 되었다. 위의 사진처럼 일본의 전통 속옷인 훈도시 한 장만 입은 채, 커다란 북을 치는 반 누드 세리머니를 한 것이었다. 이벤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자들만의 격투 축제' 라는 뜻을 잘 표현해주었으며 덤으로 수 만 명이 모인 관중들에게 자신의 '남자다움' 을 과시하게 되었다. 과거 현역 선수 시절에 다져진 근육들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그에게는 남제 2006 오프닝 행사는 평생 기억이 남을 아주 뜻깊은(?) 세리머니였다.
하지만, 생방송으로 TV 중계로 보고 있던 한국 태생인 나는 민망하기만 하였다. 대형 격투기 단체의 사장이라는 명함을 가진 다카다인데 어떻게 저런 세리머니를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저기 경기장에 모인 관중들 중에서도 여성들이 많았을텐데, 어떻게 저런 반 누드를 감행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의 용기가 가상하면서도 (이제 곧 50이 되는 나이에 불구하고, 탄탄한 근육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부러웠고) 한편으로는 남성 기질을 너무 지나치게 과시하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이런 볼만한 장면을 눈 앞에 본 일본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이 들었을런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감추는 것이 먼저냐?, 부끄러움이 먼저냐?
4년 전의 궁금중은 이번에 출간된 요네하라 마리의 <팬티 인문학>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훈도시는 일본 전통 사회에서는 남자들 사이에서는 '남자다움'을 표현하는 속옷인 것이다. 그래서 다카다가 저런 민망한 속옷만 입었던 것이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팬티'로 대표하는 속옷을 통해서 인류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다. 특히 반짝이는 생각으로 무장하여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마리 여사는 속옷만 입고 있다거나 벌거벗은 상태에서 느끼게 되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 역발상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속옷 한 장만 걸쳐 있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쉽게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벌거벗은 신체의 부위를 가리는 것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인간이 취하는 자연스러우며 정상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리 여사는 인간이 이에 대해 부끄러워서 감추는 것이 아니라, 감추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생긴다고 말한다.
만약에 옷 한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사람과 옷을 입은 사람이 단 둘이 있다고 하자.처음에 벌거벗은 사람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옷을 입은 사람의 눈에는 옆에 벌거벗은 사람에 대해서 민망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벌거벗은 사람이야말로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이 느끼고 있는 부끄러움에 대한 인식은 서로 달라지는 것이다. 벌거벗은 사람은 옷을 입은 상대방이 느낀 감정과 태도가 자신과 다르다는 사실은 이제서야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상태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벌거벗은 부위를 가리고나서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문화적 차이에서 형성되는 수치감
그러나, 모든 인간이 자신과 다른 타인의 모습과 감정 등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자신과 다른 문화적 차이에서 인간은 쉽게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마리 여사는 다양한 문헌들과 유년 시절의 경험을 통해서 수치심 형성의 과정에 대한 색다른 관점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데, 일본 특유의 생활 방식들도 소개하고 있다. 인간이 수치심에 생겨나게 한 근본적 원인은 그 나라의 생활 방식에서 드러나는 문화적 특징과 차이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책 속에 소개된 문화적 사례는 옛 우리나라 생활 모습을 비추어보면 낯설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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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고시마 현의 농촌에서 자랐습니다. 그 무렵 시골에서 속옷이라고 하면 여자들을 속치마, 남자들은 훈도시였습니다. 밭에서 몸을 격렬하게 움직여야 하니 남녀 모두 옷자락을 접어 올려 끈으로 묶었습니다. 남자들은 흥이 나면 훈도시도 거추장스러워 벗어버리곤 했습니다. 그냥 성기까지 전부 드러내고 일에 열중했지요. 이런 광경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집 안에서는 물론이고 길을 걸어가다 보면 언제든지 눈에 들어오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사람도 보여주는 사람도 모두 수치심을 못 느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덧붙이자면 여자들은 아이에게 젖을 먹일 때 전혀 거리낌 없이 사람들 앞에서 유방을 드러냈습니다.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던 광경을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당시 새로운 군대가 들어온다는 말이 있어 마을에서는 몇 번이나 주의사항을 교육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사람들 앞에서 하반신이나 유방을 드러내지 않아, 그런 광경을 보면 기분 나빠할 것이니 주의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중략)
사람들은 결코 부끄럽기 때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외국인에게 실레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엉덩이를 그대로 드러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부끄럽다'는 인식은 훨씬 나중에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 <팬티 인문학> 'M.H.라는 여성이 쓴 편지 내용의 일부' , 요네하라 마리, p 107~108 -(* 본문에 있는 밑줄은 저자가 표시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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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들밥>
조선 시대의 농촌 사회에서는 농촌 공동체의 일원들이 자급자족하며 생활을 하였다. 농촌 일에는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서로 거들어 주면서 품을 지고 갚는 품앗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공동체적 유대감이 강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힘든 밭일을 하는데에도 남자들은 자연스럽게 윗도리를 벗게 되고, 여자들 역시 김홍도의 풍속화 속 아낙네처럼 저고리를 풀어 가슴을 드러냈을 것이다. 벗고 다니는 생활이 일상화된 이들에게는 '부끄러움'의 감정을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팬티 인문학>의 본문 속 일본의 모습처럼 우리나라도 외국 문화의 물결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 물결의 영향으로 19세기 말부터 근대화의 싹이 틔우기 시작하면서 아시아의 변방국가인 조선에도 외국인들이 오게 되었다. 외국인들은 조선이라는 사람들의 복장을 보면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남녀 모두 가리지 않고 길거리 한복판에서 벗고 다니는 조선 사람들의 모습이 서양인들의 눈에는 이채로웠을 것이다. 반면에 벽안의 서양인들을 처음 본 조선 사람들도 그들을 상당히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입고 있는 얕은 한복이 아닌, 서양인들이 입고 있는 양복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서양문화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작은 호기심은 대한제국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서양 문물 수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개화론자들은 서양인들처럼 남성들은 하이 칼라의 양복을, 여성은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을 것을 권장하였다. 대한제국이 서양 열강과 같은 강대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서양인들의 사고 방식과 문화를 습득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예전에 고수하던 전통 문화들은 자연스럽게 배격하게 이르게 된다.
일본 가고시마 현의 마을 사람들이나, 근대의 조선 사람들에게는 외국인들의 문화를 접하면서 강한 문화적 충격을 받는 동시에, 자신들의 문화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특히, 일본, 중국, 유럽 열강들에게 동네북이 된 대한제국에 살고 있는 개화론자들에게는 추락한 조국의 위상을 눈 앞에 목격하면서, 미개한 조선 사회의 문화에 대해서 자괴감에 빠지기 쉬웠다. 서양문화 숭배에 대한 강박관념이 자신들 스스로 문화적 수치감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ごめんなさい (미안합니다) 마리 여사, 당신의 말이 꼭 옳은게 아니에요.
요네하라 마리 여사는 '부끄러움'이 인간이 신체를 감추기 때문에 생긴다고 참신한 주장을 하고 있지만, 워낙에 시대가 빠르게 변화하는 지금 사회의 모습을 비추어 볼 때, 그녀의 주장에 대해서 재고를 해봐야 한다.
우리나라의 패션 유행을 보게 되면, 수치심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신체를 감추기보다는 남들이 볼 수 있게 드러나게 하는 패션이 유행하고 있다. 속옷이 훤히 비치는 시스루 룩에서부터, 여성의 각선미를 강조하게 하는 핫 팬츠까지 이런 복장들은 신체를 감추지 않는 개방적인 패션이다.
그래서, 유행에 민감한 여성들에게는 이런 복장들을 거리낌없이 입게 된다. 이들은 이것도 하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만 않다. 신체 부위의 과한 노출은 상대방에게 수치감을 불러 일으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마리 여사의 말과는 반대로 신체를 감추고 있는 사람들이 감추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 하고 있다. 그리고 속옷과 각선미를 드러나는 옷을 입은 사람들은 이런 주위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일말이라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심지어 의도적으로 야한 복장을 입어 자신의 신체 일부를 노출시켜서 상대방의 시선을 즐기는 '노출녀'라고 부르는 여성들도 있다.
진짜로 부끄러워 해야할 사람은 누구일까?
자신과 다른 문화적 차이에 의해 생기게 된 수치감은 마리 여사의 주장과는 반대로 전개되는 경우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수치감에 대한 잘못된 시선과 인식도 가지게 된다. 핫 팬츠나 시스루 룩이 하나의 패션 양식으로 자리잡은 것도 있지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공장소에서도 지나친 신체 부위 노출에도 사람들은 무조건적으로 아름다움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공장소에서 어머니들의 모유 수유는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젖가슴을 대놓고 아기에게 젖을 주는 모습에 대해 주위의 시선이 곱지가 않아서 그런지, 아기를 키우는 여성들에게는 마음 놓고 모유 수유를 해줄 수 있는 장소가 많지 않아서 불편함을 느끼고, 대부분의 육아 여성들 스스로 공공 장소에서의 모유 수유는 금기된 행동이며 한다는 자체를 부끄럽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가슴 라인이 드러나는 옷을 입은 여성,
아기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한 쪽 가슴을 드러내야 하는 여성.
이 둘 중에서 진짜로 부끄러워 해야할 사람은 누구일까? 모유는 아기들의 성장 발달에 아주 좋은 천연적인 식품이다. 그리고 모유 수유를 하면 어머니 입장에서는 여성들의 불치병인 유방암 등을 예방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모유 수유는 어머니와 아기 사이의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행동이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이, 서로에게 좋은 모유 수유를 우리는 부끄러워 해야될까? 모유 수유를 하고 있는 어머니와 아기의 모습이 더 아름답지 않은가? 김홍도의 풍속화 속 아낙네처럼 어머니들이 편안하게 모유 수유를 할 수 있는 사회가 올 수 있을지 의문이 된다.
이런 수치감에 대한 이중성을 가진 우리 사회를 보면서 마리 여사의 말의 실효성이 떨어져서 걱정이 되기도 한다. 마리 여사의 말처럼 원래 인간은 자신의 노출된 신체 부위를 감추고 나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지극히 정상적인데 말이다. 이와는 반대로 주위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신체 부위를 노출하려는 사람들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거나, 의도치않게 신체 부위를 노출해야 하는 상대방들을 보면서 오히려 수치감을 형성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거대한 사회집단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문화적 수치감의 위력을 실감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