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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책 - 죽기 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은 책들에 대한 기록 ㅣ 지식여행자 2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언숙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어머니의 밥상머리 독서
요즘 우리 어머니는 건강 관련 도서 탐독에 푹 빠져 있다.
거실에서 책상으로 사용해도 무방할 큰 밥상에 책을 올려놓고 읽으신다.
일명 ‘밥상머리 독서’이다. 어머니는 평소 건강에 관심이 많았었다. 그런데
최근에 고혈압 증세가 있다는 병원 진단 결과를 들은 이후부터 부쩍 건강에 좋은 밥상을
차린 식사와 함께 혈압을 낮추는 약을 복용하고 있다. 그리고 처음에는 혈압에 좋은
건강식품에 대한 책 한 권을 사서 보시더니 그 이후로 각종 불치병을 예방부터 건강에
좋은 자연식품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다. 독서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어머니의 독서하고
공부하는 모습이 감회가 새로웠다. 독서하는 여자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말할 때가
바로 이 때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책을 최대한 많이 구입하는데 쓰는
비용이 5만원이나 한다. 어머니는 스스로 책 읽는 나의 모습이 대견스럽다고 말씀
하시면서도 무슨 책을 사는데 5만원이나 쓰냐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특히 몇 달 전에 내가 힘들게 벌어서 모은 돈으로 세계문학전집 100권을 구입했을 때도
처음에는 반대가 있었다. 고작 힘들게 돈 모아서 산 게 책 100권이냐고.
예전에 그랬던 어머니가 몇 주 전에 나에게 무언가 빽빽하게 쓴 공책을 주면서
부탁하였다. 어머니는 신문 광고나 TV에서 눈여겨봤던 건강 관련 책 제목과 저자,
출판사를 적어놓은 것이었다. 그러고는 혹시 이 책들을 알라딘에서 살 수 있느냐고
멋쩍게 물어봤다. 내가 집에서 책을 주문하는 것을 지켜봤던 어머니는 책을 구입하게
되면 하루 만에 집으로 배송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23년을 살면서 어머니의
입에서 책을 구입하고 싶다고 나에게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어머니가 사고 싶어 했던 책은 총 3권, 가격은 3만 원 이상 정도였다. 내가 책을 사는데
3만 원 이상이라도 썼다고 핀잔주었던 생각에 무안했던 모양이었을까? 어머니는
나에게 이왕 책 구입한 김에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구입해도 된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책 한 권 더 살 수 있는 기회는 놓쳤지만,
어머니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을 위해서 독서와 공부하려는 열정적인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책 한 권 못 샀던 것에 대래서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나는 알라딘
계정에 모아 둔 쿠폰까지 사용하면서 어머니의 작은 소원을 들어주었다.
청춘의 독서 vs 불혹의 독서
우리 어머니의 고혈압 증세는 그리 심한 편은 아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혹시나
앞으로 닥칠지 모르는 병에 대비하기 위해 건강 관련 도서를 읽었다.
나는 밥상에 앉아 책에 줄을 그어 가면서 읽는 어머니의 모습이 뿌듯하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였다. 예전보다 어머니의 몸 상태가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큼 우리 어머니도 늙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젊음의 혈기왕성함은 사라지고 노화가 찾아오면 몸도 변화가
오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적 이치다.
그리고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가끔 저녁에 거실에 TV를 끄고 어머니와 내가
독서를 한 적이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어머니는 건강 책을 읽었다. 하지만 내가
읽고 있었던 책은 소설이었다. 그런 독서 풍경이 대조적이었다. 이제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있는 중년은 지금이라도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밥상머리 열독을 하는데,
이제 막 꽃다운 인생을 누리고 있는 청년은 단지 일시적인 감흥을 느끼기 위해서
소파에 누워서 소설책을 보고 있다니. 왠지 어머니의 독서 모습을 보게 되면 곧
중년이 된 나의 독서 모습을 보는 거 같았다.
만약에 내가 나이가 들면 정신적 영양분이 되어주는 문학 책이나 인문학 책을
읽었던 ‘청춘의 독서’가 유지될 수 있을까? 중년이 된 내가 어머니처럼
몸의 적신호가 온 것을 알게 되었거나 아니면 불치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게 된다면 평소에 읽어왔던 책들이 쉽사리 눈에 들어올 것인가?
치열했던 그녀의 마지막 3개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요네하라 마리의 심정이 이해할 거 같다. 노화의 자연적인 현상인
시력 저하 때문에 예전과 같이 책을 읽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글 속에 표출하였다.
무엇보다도 암이 그녀의 몸에 퍼져갈수록 평소에 읽었던 문학도서보다는 암 치료에
관련된 책을 읽었다는 경험담은 남의 일 같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독서에
관한 체험과 서평들을 모은 <대단한 책>에서 암 투병 중에 자신이 직접 암 치료 관련
책들을 읽고, 책 속에 소개된 각종 치료법을 경험했던 글이 세 편이나 있다. 더구나
세 편 중에서 맨 처음 쓴 글의 시작에는 암 투병을 겪어야 했던 그녀의 심정이
드러나 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항암제 치료를 받은 직후 1주일은 참기 어려운 구토와
구역질에 시달리며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중략) 이 체력으로는
암이 파괴되기 전에 나 자신이 괴멸해 버릴 것만 같다. 무엇보다도 그 고통을
다시 겪어야 한다는 것이 싫다. 그건 공포다.
- 요네하라 마리 <대단한 책> p 315 -
요네하라 마리뿐만 아니라 지금도 암 투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환자들도
자신의 몸이 낫는다면야 기꺼이 다양한 치료 방법을 받아본다. 하지만 항암제 투여만큼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종종 항암제 치료 대신에 자연식 밥상으로 암을 치료하는
사람들이 건강 교양 프로그램에 출연하곤 한다. 그들은 자연식으로 식사 방식을 개선한
이후부터 예전보다 몸이 좋아진 거 같다고 말하고 있지만, 지금으로 오기까지에는
그들도 병이 준 신체적 고통을 느꼈을 것이고, 자신에게 맞는 치료 방법을 찾기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세 편의 암 투병 체험기에서도 그녀의 치열했던 시행착오의 경험들이 나온다.
그녀는 책에서 발견한 새로운 치료법을 발견하면 망설임 없이 그 치료법을 시술하는
관련 병원에 찾아가기도 한다. 그만큼, 자신의 병을 낫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였다.
그리고 그 치료법이 허위였다거나 자신이 원했던 치료법이 아닌 것을 알게 되면
실망하기도 한다. 그만큼 자신의 몸 안에서 퍼져 가고 있는 암의 고통에서 벗어나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그녀는 죽기 전 3개월 전부터 집중적으로
암 치료와 관련된 책을 읽었던 것이다.
나는 책과 결혼했다
암으로 언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는 앞날을 알 수 없는 공포,
몸속에서 암 세포가 점점 커져감에 따라 늘어나는 육체적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독서와 글쓰기만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독서를 하면서 느꼈던
삶의 감상들과 다양한 분야의 책의 서평들을 남겼다.
여자는 이성의 사랑을 먹게 되면 여자다운 여자가 완성되는 것이다.
조각가 갈라테이아의 사랑에 대한 염원이 있었기에 일개 아름다운 조각품이었던
피그말리온이 아름다운 여성으로 재탄생하듯이.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 라고 말을 남기면서 평생 영국의 발전을 위해 여자로서의
삶을 버린 엘리자베스 1세처럼 요네하라 마리도 평생 독서를 하다가 독신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라에 대한 마음이 엘리자베스라는 국모(國母)를 완성하였듯이
책과 결혼한 그녀는 '유쾌한 지식여행자' 요네하라 마리라는 존재를 완성시켰다.
그래서 ‘유쾌한 지식여행자’라는 별칭답게 자신을 책 속의 세상으로 가둬두지 않았으며
폐쇄적이거나 그렇게 우울하지도 않다. 오히려 그녀는 통역가로서 다양한 나라의
문화들을 경험하고 그 경험 속에서 간혹 여자로서 느끼게 되는 사랑의 감정도 느껴본다.
그리고 그녀는 책 속 세상에 갇혀버린 외톨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애완동물들과
함께 살았다. 그녀의 글들을 읽어보면 독서와 자신이 기르고 있는 애완동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있다. 비록 그녀는 독신이지만 그녀의 독서일기를 읽어보면
한편으로는 남편과 결혼한 아내의 일기를 보는 거 같다.
부인이 결혼 생활을 하면서 남편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일기장에 기록하듯이
요네하라 마리는 좋은 책뿐만 아니라 나쁜 책을 읽었던 내용도 기록한다.
요네하라 마리는 세계 문화부터 발명까지 다양한 분야에 관한 책들을 남겼다.
이처럼 여성으로서 다양한 지식을 섭렵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과거에도 요네하라 마리처럼 지혜롭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역사적 여성들이 있었다.
여성의 학문 활동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남성중심적인 고대 그리스 사회에 의해 희생된
최초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에서부터 <폭풍의 언덕>이라는 단 한 편의 명작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에밀리 브론테,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여성이며 여성 화가였으나
사랑의 실패 때문에 말년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쓸쓸히 최후를 맞은 나혜석.
신들은 이들의 남다른 재능을 시기하였다. 그리고 재능의 꽃봉오리를 피우지
못한 채 짧은 삶을 살아야 했다. 그래서 그녀의 이른 죽음도 너무 아쉽게만 느껴진다.
남녀 간의 사랑이 결실을 맺으면 아기라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그녀는 이제 다시 볼 수 없지만 독서에 대한 애정으로 낳은 그녀의 분신인 책들이 있기에
우리는 책 속에서나마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독서를 통해 삶의 의지를 얻다
살아가면서 느끼거나 알게 된 자유로운 생각과 지혜들, 그리고 암으로 마감하게 된
짧은 인생.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 작년에 돌아가신 故 장영희 교수님이 생각난다.
리뷰 중간 중간에 역사적 여성들이 많이 언급되는 마당에 이번에는 장 교수님까지
나오게 될 줄이야. 하늘에서 보고 있을 요네하리 마리 여사가 내 리뷰에 대해서 괜히
질투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죄송해요. 요네하리 마리 여사. 오늘만큼은 너그러이
이해해주세요. 리뷰는 특성상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의 자유로운 감상들을 적는 것이니까요.
공교롭게도 요네하리 마리도 56세의 나이로 난소암 투병 중에 세상을 떠난 것처럼
장 교수님도 암 투병 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우연하게도 두 명 다 향년 56세,
같은 5월에 세상을 떠났으며 장 교수님도 요네하리 마리처럼 평생 독신으로 살다 가셨다.
교수님과 그녀를 비교해서는 안 되지만 이 두 사람 간의 극명한 차이점이 있다.
장 교수님은 소아마비로 인해서 몸이 불편한데다가 척수암, 유방암, 간암이라는
최악의 암 3종 세트의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장 교수님이 요네하리 마리보다 원래부터
몸이 불편했고 심한 병에 걸렸으니 요네하리 마리의 고통은 새 발의 피라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앞으로 다가올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절망에 빠지지 않고 극복하려는 삶의 의지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런 삶에 대한 의지는 독서가 있었다. 장 교수님의 에세이를 읽어보면 요네하리
마리처럼 자신의 병들어버린 몸에 대해서 한탄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교수님의
에세이는 절망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녀의 문장은 샘물처럼 밝고 아름답다.
교수님은 절망의 진흙투성이에서 기쁨이라는 진주를 독서에서 찾았으며
그런 정신적인 활동들은 에세이로 남겼다. 그래서 지금도 교수님의 글은 많이
애독되고 있다.
요네하라 마리도 죽기 전까지 책을 놓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암 치료가 절실하고
현실적인 문제였지만 평소에 했던 독서 습관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열정은
자신의 인생이 담겨져 있는 독서 일기과 서평을 모은 <대단한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
책 제목대로 그녀의 독서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대단한 책’이었다.
세상에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책을 읽겠다
그녀가 쓴 <대단한 책>을 만난 것이 참으로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삶을 통해서 내가 이전에 가졌던 불혹의 독서는 한 순간의 기우(杞憂)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요네하라 마리는 독서의 즐거움으로 제대로 만끽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나이가 들어서라도 지금의 독서 습관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해야겠다.
나의 청춘의 삶은 이제 막 인생 마라톤 구역 중에서 초반에 있다. 하지만 간혹
마라톤 중에서도 장애물을 만난다거나 뜻밖의 돌발사고가 발생한다.
이처럼 우리 삶에도 예기치 못했던 죽음이 찾아오면 삶의 목표점을 찾지 못한 채
인생 마라톤이 끝나게 된다. 그래서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게 되면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고 즐겁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된다.
세상에 종말이 오더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이 있듯이
지구가 멸망하든지 아니면 내가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코앞에 두더라도
나는 한 권의 책을 놓지 않을 것이다. 죽기 전에 후회하지 않는 청춘의 독서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