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은 시간을 죽이는(Killing Time) 오락물이다. 교양 독서를 선호하는 독자들은 추리소설을 읽으면 시간을 낭비(wasting time)한다고 생각한다.
추리소설은 SF와 더불어 독서 모임에 자주 초대받지 못한다. 박학다식한 다독가들의 머릿속에 추리소설이 단 한 권도 꽂혀 있지 않다. 다독가들은 추리소설이 독서 모임 필독서로 선정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마저 추리소설을 외면한다. 그들은 추리소설을 순문학과 반대되는 ‘비문학’으로 취급한다. 어정쩡한 추리소설은 ‘장르문학’이라는 특별 보호구역에 정착한다.
추리소설 마니아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거의 없다. 추리소설 마니아가 독서 모임에 가면 추리소설의 매력을 몰라보는 독자들을 만난다. 그들과 대화가 통하면 친구를 만난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 친구들은 추리소설과 친하지 않다. 추리소설 마니아는 외롭다. 자신의 독서 취향을 발산하지 못한다.
나는 추리소설 마니아가 아니지만, 추리소설을 별개의 문학으로 보는 관점에 반대한다. 추리소설이 항상 ‘장르문학’의 범위 안에서만 거론되는 것도 못마땅하다. 추리소설을 즐겨 읽지 않더라도 추리소설이 왜 (‘장르’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고) 문학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세 권의 책은 ‘문학적인 추리소설’을 옹호한다. 이 책들은 추리소설의 풍성한 매력을 어떻게 알릴지 늘 고민하는 마니아들에게 조력자가 되어 준다.
* [개정판] 줄리언 시먼스, 김명남 옮김 《블러디 머더: 추리 소설에서 범죄 소설로의 역사》 (우연한지식, 2026년)
* [구판, 절판] 줄리언 시먼스, 김명남 옮김 《블러디 머더: 추리 소설에서 범죄 소설로의 역사》 (을유문화사, 2017년)
영국의 추리소설가 줄리언 시먼스(Julian Symons)는 10살에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한 추리소설 중독자다. 그는 추리소설도 ‘어엿한 문학’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강조하기 위해 《블러디 머더》(Bloody Murder)를 썼다. 시먼스는 자신의 취향이 첨가된 추리소설의 역사를 정리한다. 그는 역사를 돌아보면서 추리소설이 애초에 독자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쓴 오락물이었다고 인정한다. 오락성이 짙은 추리소설의 줄거리는 단조롭다. 똑똑한 탐정이 퍼즐과 같은 사건을 풀어나가는 형식이다. 추리소설 중독자들은 퍼즐이 풀리는 이야기를 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낀다. 시먼스는 인기가 많은 추리소설들이 선정 문학(sensational literature)의 일부였으며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없는 추리소설을 가리켜 ‘재미난 쓰레기’라고 표현했다. 그는 추리소설의 작품성과 완성도를 따지는 비평을 중시했고, 예술 작품에 가까운 추리소설을 알리려고 했다.
* 이브 뢰테르, 김경현 옮김 《추리 소설》 (문학과지성사, 2000년)
프랑스 교육학과 교수 이브 뢰테르(Yves Reuter)의 《추리소설》은 분량이 얇은 ‘가벼운 학술서’다. 이 책도 추리 소설의 기원과 약사(略史)를 소개하는데, 가장 중요한 내용은 문학과 추리 소설의 폭넓은 상호 관계를 다룬 6장에 있다. 추리소설은 사회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변화의 과정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다양한 서사와 등장인물들을 선보이는 추리소설은 ‘살아 움직이는 소설’이다. 다양성과 실험성을 추구하는 추리소설은 ‘문학 대 부차 문학’이라는 경직된 경계에 질문을 던진다.
* [절판] 에르네스트 만델, 이동연 옮김 《즐거운 살인: 범죄 소설의 사회사》 (이후, 2001년)
정치적 성향과 정파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편협한 독서를 한다. 자신과 반대되는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 저자를 비난하고, 그 저자가 쓴 책을 깎아내린다. 특정 이념을 지지하는 독선적인 독서는 위험하다.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취향에 정치적 성향과 정파 이념은 절대로 개입할 수 없다. 정치적 성향과 계층에 상관없이 모든 독자가 추리 소설을 즐긴다.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추리소설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스탈린과 대립한 트로츠키(Leon Trotsky)를 지지한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은 추리소설을 오락물로 취급하는 관점에 반대하는 추리 소설 마니아다. 그는 추리 소설을 분석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다. 만델의 관심사는 추리소설에 흔적처럼 남은 사회 제도의 변화 궤적이다. 1985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즐거운 살인》(Delightful Murder)의 부제는 ‘범죄 소설의 사회사(Social History of the Crime Story)’다. 만델의 사회사는 ‘자본주의의 역사가 얽힌 추리소설의 역사’를 의미한다.
자본주의의 역사가 반영된 추리소설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한계와 모순을 증언한다. 만델은 추리소설을 분석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범죄가 어떻게 조성되는지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자답게 자본주의 사회는 범죄 사회라고 결론을 내린다.
* 서머싯 몸, 이민아 옮김 《어셴든, 영국 정보부 요원》 (열린책들, 2020년)
* [절판] 서머싯 몸, 신상웅 옮김 《어센덴》 (동서문화사, 2003년)
추리소설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문학과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문학적’이라고 규정한 작품을 쓴 작가들은 추리소설을 쓴 적이 있다. 이런 유형의 작가가 생각보다 많다. 그러나 순문학 중심으로 쓰인 문학사는 추리소설을 썼거나 추리소설의 매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작가의 이력에 주목하지 않는다. 짧게나마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이 첩보 소설을 쓴 사실을 아는 독자가 많지 않다. 몸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1914년에 입대를 신청했다. 그러나 나이가 많고(당시 그의 나이는 마흔이었다), 키가 작아서 입대 불가 판정을 받았다. 몸은 독일어에 능숙해서 영국 비밀 정보부(MI6) 요원으로 일한다. 종전 후에 스파이로 활동한 경험을 토대로 연작 단편 소설집 《어셴든, 영국 정보부 요원》(약칭: 어셴든, Ashenden: Or the British Agent)을 발표한다.
원래 이 소설집은 총 31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몸과 친분이 있었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초고를 먼저 읽었다. 처칠은 국가 기밀 정보가 언급된 이야기가 너무 많다고 지적했고, 몸은 처칠의 조언을 받아들여 문제가 되는 열네 편의 이야기를 삭제했다. 《어셴든》은 출간 당시 독자와 비평가들의 주목을 많이 받지 못했다. 시먼스를 포함한 추리 소설가들은 이 소설의 진가를 알아봤고, 오늘날 《어셴든》은 첩보 소설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 [절판] 존 르 카레, 최용준 옮김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 (열린책들, 2007년)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2026년 8월의 세계 문학, 추천 독자: ‘읽는 인간’ 천성은]
[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개정판 583번째 책]
* 존 르 카레, 김석희 옮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열린책들, 2009년)
* 존 르 카레, 이종인 옮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열린책들, 2005년)
[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개정판 726번째 책]
* [품절] 존 르 카레, 조영학 옮김 《스마일리의 사람들》 (열린책들, 2013년)
추리소설은 ‘잡종의 문학’이다. 추리소설을 탐정 소설, 범죄 소설, 첩보 소설, 스릴러 소설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추리소설의 8할은 탐정 소설과 범죄 소설이다. 시먼스는 첩보 소설을 추리소설의 범주에 포함하지만, 탐정 소설과 범죄 소설과 계통이 다르다고 선을 긋는다. 《블러디 머더》 16장은 첩보 소설의 계보를 다룬「스파이 소설의 짧은 역사」다.
시먼스는 첩보 소설의 형식에 두 가지 전통이 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전통은 권위를 지지하고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두 번째 전통은 권위를 비판하고 급진적이다. 존 르 카레(John Le Carre)의 첩보 소설은 두 번째 전통에 속한다. 르 카레의 첫 번째 소설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는 MI6 조직원 조지 스마일리(George Smiley)가 처음으로 등장한 작품이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약칭: 스파이)는 데뷔작이 완전히 잊힐 정도로 유명해진 르 카레의 대표작이다. 이 두 소설은 관료주의를 비판한다. 르 카레가 묘사한 MI6 요원들은 생각보다 영민하지도 않으며 초인적인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스파이》의 주인공인 비밀 요원 앨릭 리머스(Alec Leamas)는 MI6의 무자비한 권위에 이용당하다가 결국 희생되는 소모품과 같은 존재다. 르 카레는 《스파이》의 성공에 힘입어 스마일리가 재등장하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스마일리의 사람들》을 발표했다. 시먼스는 두 작품에서 보여준 르 카레의 필력이 전작들에 비해 떨어졌다고 지적한다.

문학적이지 않은 추리소설도 재미있다. 추리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면 이야깃거리가 많이 나온다. 추리소설과 친해지고 싶지 않은 독자들은 추리소설을 펼치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은 추리소설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추리소설 얘기가 나오면 재미가 없고, 유익하지 않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등 온갖 이유를 둘러댄다. 추리소설의 매력을 온전히 느끼려면 독자인 우리가 직접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