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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ㅣ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3.5점 ★★★☆ B+
대구 독서 모임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6월의 세계 문학
소크라테스(Socrates)는 지혜를 사랑한(philosophy) 말쟁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온 ‘어떤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주1] 그는 자신을 훈계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신중하게 생각했고, 행동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Plato)은 이 신적인 존재를 ‘다이모니온(daimonion)’이라고 불렀다. 다이모니온은 ‘철학 하는 수호신’이다.
토머스 드 퀸시(Thomas De Quincey)는 아편을 사랑한 글쟁이다. 치통과 위장병은 궁핍한 생활로 허약해진 드 퀸시를 괴롭혔다. 한동안 잠잠했던 병은 불쑥 튀어나와 드 퀸시의 몸과 마음을 들이쑤셨다. 아픔을 참지 못한 드 퀸시는 아편을 자주 마셨다. 드 퀸시가 살았던 19세기 영국 사회는 지금과는 다르게 아편에 관대했다. 아편은 약국에 가면 구할 수 있는 진통제였다. 하지만 아편은 ‘야누스(Janus)의 얼굴’을 가진 마약이다. 통증이 조용해지면 소란스러운 금단 증상이 생긴다. 드 퀸시는 불면에 시달렸고, 눈앞에 환영이 펼쳐졌다. 이렇듯 정신이 어지럽거나 알 수 없는 불안이 덮치면 아편을 찾았다. 드 퀸시는 아편에 절인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세상에 알리는 글을 썼다. 그 글이 바로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약칭 ‘고백’)이다.
《고백》은 드 퀸시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글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괴롭힌 글이기도 하다. 드 퀸시와 알고 지낸 시인 새뮤얼 콜리지(Samuel Coleridge)도 아편 중독자였는데, 그는 아편을 미화한 《고백》을 비난했다. 예전부터 아편 남용의 문제점을 주장한 의사들도 《고백》의 비난 행렬을 멈추지 않았다. 19세기 영국 사회는 변하고 있었다. 《고백》이 발표된 이후부터 아편을 관대하게 바라보던 여론이 줄어들었고, 대중의 아편 남용이 사회를 좀먹는 문제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도덕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 지식인들은 《고백》이 아편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오히려 아편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드 퀸시는 고상한 비평가들의 반응에 맞서서 변론했다. 그는 아편 중독 문제의 원인을 무조건 《고백》 탓이라고 몰아세우는 집단 심리를 비판했다.
드 퀸시는 아편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고 고백한다. 그가 생각하는 행복한 삶은 ‘고통과 불행에 초연한 삶’이다. 고통이 아예 없는 삶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아편은 일시적으로 고통을 가라앉히게 해준다. 아편의 약효가 사라지면 고통이 다시 생긴다. 드 퀸시는 가난한 부랑자로 살아온 시절이 무척 힘들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매춘부 앤(Anne)과 함께했던 가난한 시절을 그리워한다. 앤은 드 퀸시에게 선심을 베풀고, 지쳐서 거리 한가운데서 죽을 뻔한 드 퀸시를 살려주었다. 드 퀸시는 아편 중독에 관해 고백하기에 앞서 앤이 어떤 인물인지 소개한다. 앤은 드 퀸시의 은인이자, 드 퀸시에게 고통과 불행을 견디는 법을 알려준 수호신이었다.
‘아편쟁이’와 ‘생계형 글쟁이’는 지금까지도 드 퀸시를 졸졸 따라다니는 명함이다. 이 명함을 치우면 ‘철학쟁이’ 드 퀸시를 만날 수 있다. 드 퀸시는 철학을 혼자 공부하면서 자신만의 철학 저서를 쓰고 싶어 했다. 드 퀸시는 《고백》에서 종종 자신을 철학자인 것처럼 언급한다. 그는 성별, 신분, 학벌 등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과 어울리는 ‘소크라테스 풍’ 대화를 좋아한다고 했다(『예비 고백』, 47쪽).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아무에게나 다가가서 먼저 질문을 던지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의 삶, 행복을 느끼고 싶어서 아편을 마시는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는 품성. 《고백》에서 드러난 드 퀸시의 삶의 자세는 플라톤이 ‘미친 소크라테스’라고 평가한[주2] 거리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를 떠올리게 한다.
드 퀸시는 자신이 좋아하는 계절은 봄이 아닌 겨울이라고 했다(『아편의 고통으로 들어가는 말』, 124쪽~125쪽). 역시 고통을 견딜 줄 아는 사람답다. 남들은 따사롭고 편안한 봄을 좋아하지만, 그는 폭설과 한파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살려고 한다. 고대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고난과 불행을 차분히 견디면서 사는 삶은 결국 우리 정신을 강인하게 만들어준다고 했다.[주3] 고대 그리스 · 로마 고전을 즐겨 읽은 드 퀸시는 《고백》에 세네카를 인용하지 않았지만, 그는 세네카처럼 살았다.
니체(Nietzsche)는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욱더 강하게 만든다”라고 했다.[주4] 아편은 드 퀸시의 몸을 갉아 먹으면서 죽였다. 하지만 ‘철학을 사랑하는 정신’은 죽이지 못했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철학을 마음이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 약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가? 드 퀸시는 생각보다 오래 살았다(74세에 눈을 감았다). 드 퀸시를 강하게 만든 것은 아편과 철학이다.

[주1]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31d, 79~80쪽(강철웅 옮김, 아카넷, 2020년). ‘다이모니온’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루이-앙드레 도리옹의 《소크라테스》(김유석 옮김, 소요서가, 2023년)을 참조할 것.
[주2]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 6권 <견유학파>, 518쪽(김주일 · 김인곤 · 김재홍 · 이정호 옮김, 나남, 2021년).
[주3] 세네카, <섭리에 관하여> 4장, 22~23쪽(김남우 · 이선주 · 임성진 옮김, 《세네카의 대화: 인생에 관하여》, 까치, 2016년).
[주4]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14~15쪽(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