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를 타고 내려온 시월에 시를 읽고 싶어졌어요. 어떤 시집을 읽을 것인지 서재에 채워진 책들을 살펴봅니다. 시집에 살고 있던 시인들이 종이를 흔들면서 저를 부르네요.
가르시아 로르카
네루다
디킨슨
랭보
말라르메
보들레르
셰익스피어
아폴리네르
자크 프레베르
첼란
키츠
타고르
페트라르카
하이네
읽고 싶은 시집은 너무 많은데, 알고 싶은 책도 너무 많습니다. 책 욕심이 많은 제 머리는 너무 작습니다. 책 읽는 시간은 너무 빨라요.
그런데 유독 한 권의 시집은 특이해요. 어째서 시집에서 한 사람이 아닌 무려 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요? 알고 보니 이 시집에 세 명의 시인이 같이 살고 있어요. 리카르두 레이스, 알베르투 카에이루, 알바루 드 캄푸스.
세 명의 시인은 태어난 날, 성격, 관심사, 작문 스타일까지 모든 게 다 달라요. 하지만 놀랍게도 이 세 사람 전부 한 사람이에요(!). 시집의 주인은 ‘하나이면서 여럿인’ 사람이에요. 리카르두 레이스, 알베르투 카에이루, 알바루 드 캄푸스는 한 사람이 만든 이명(異名), 즉 다른 이름이에요. 이 시인은 이명보다 본명이 더 유명해요.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10월의 시인은 ‘1+n개의 이명’으로 글을 쓴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입니다. 페소아가 살면서 만든 이명이 70여 개나 된다고 해요.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명은 앞서 언급한 세 사람입니다. 페소아가 생전에 발표한 책은 단 한 권의 시집이었어요.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시인의 유품인 트렁크 속에 3만 장이 넘는 원고가 발견되었어요. 트렁크에 영원히 갇힐 뻔한 페소아의 글들은 지금도 분류 작업이 진행되고 있어요. 원고를 분류하고 검토하는 과정에서 페소아의 새로운 이명이 발견될 수 있어요. 페소아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작가예요.
페소아 그리고 이명으로 활동한 수많은 ‘페소아들’이 생전에 쓴 시가 엄청 많습니다. 그래서 국내에 출간된 시집은 ‘시 선집’입니다.
* 페르난두 페소아, 김한민 옮김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페르난두 페소아 시가집》 (문학과지성사, 2018년)
페소아 본인 이름으로 쓴 총 81편의 시를 모은 시 선집입니다.
* 페르난두 페소아, 김한민 옮김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민음사, 2018년)
페소아, 리카르두 레이스, 알베르투 카에이루가 쓴 시가 같이 수록된 시 선집입니다.
* 페르난두 페소아, 김한민 옮김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민음사, 2018년)
알바루 드 캄푸스의 시 선집입니다.
재미있게도 세 권의 시집은 2018년 10월에 태어났어요.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과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는 10월 5일에,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는 10월 10일에 태어났습니다. 포르투갈어로 된 페소아와 페소아들의 글에 우리말을 입힌 번역자는 김한민입니다.
* 김한민 《비수기의 전문가들》 (워크룸프레스, 2016년)
페소아의 시와 산문을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리는 작가예요. 김한민 작가의 그림책 《비수기의 전문가들》은 독서 모임 <우주지감-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2018년 8월의 책이었어요. 당시에 독서 모임이 오전과 오후(저녁)로 편성되어 진행되었는데, 제가 오전 모임과 오후 모임에 출석했었네요. 페소아 전문 번역자로 활동한 작가답게 《비수기의 전문가들》에 페소아가 언급됩니다. 오랜만에 이 책을 펼쳐봐야겠어요.
「페소아 + 페소아들 + ∞」는 지난 달 읽기 모임 「당신의 에르노」의 진행 방식과 비슷합니다. 제가 소개한 세 권의 시집 중에 한 권만 읽으면 됩니다. 페소아의 무한한 글쓰기를 알고 싶으면 이명으로 쓴 페소아의 시들도 같이 읽어보셔도 됩니다.
여러분이 고른 시집에 살고 있는 페소아와 페소아들은 어떤 사람인가요? 그들을 만나면서 느낀 점들을 자유롭게 이야기해 주세요. 희미하면서도 정확하지 않은 페소아와 페소아들의 무한한 생각을 마음껏 독해를 해보세요.
사물들이 온 세상 앎의
파편들이라면,
나는 나의, 부정확하고
다양한 조각들이어라.
(페소아, 「경계 있는 영혼은」 중에서, 1930년 8월 24일,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81쪽)
발제는 없습니다. 발제를 안 만들어도 됩니다. 그 대신에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낭송합니다. 입으로 시를 먹으면서 맛보지 않는 시 읽기 모임은 시시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