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생략)
멸종과 잘 어울리는 시가 과연 있을까? 이형기 시인의 <낙화(落花)>는 멸종의 정의와 맞아떨어진다. 화사한 꽃은 전성기를 지나면 시들시들하다가 땅에 눕는다. 살아있는 모든 것도 영원할 수 없다. 시인은 영원히 머물 수 없을 바에야 이 세상을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노래한다.
인간은 멸종과 종말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동물이다. 사이비 종교는 멸종에 대한 대중의 공포와 불안을 악용해 종말을 상당히 과장해서 주장한다. 사이비 종교가 말하는 종말론은 ‘거짓으로 만들어진 절망’이다. 때로는 과학자들의 견해를 멋대로 인용해서 종말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멸종이라는 단어는 종종 ‘멸망’과 ‘종말’의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다. 살아있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면, 그것은 끝이다. 살아남지 못한 존재는 패자처럼 취급받는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멸종은 단순히 끝남을 뜻하지 않는다. 어떤 생물 종이 멸망해서 사라지면, 새로운 생물 종이 태어난다. 멸종은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이다.
지구는 다섯 번의 대멸종을 겪었다. 지구에 사는 생물 종 절반 이상이 절멸되었다. 대멸종을 일으키는 원인은 다양하다. 거대한 운석이 지구와 충돌하면서 생태계가 한순간에 박살이 났다. 화산이 여기저기 연쇄적으로 터지면서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와 유독 가스가 뿜어나왔다. 지구에 이산화탄소가 너무 많으면 온실 효과가 일어난다. 대기를 덮은 이산화탄소가 태양 빛을 차단해서 광합성이 일어나지 않는다. 광합성을 하지 못한 식물이 사라지면, 그 식물을 먹고 자라는 생물 종도 사라진다.
대멸종이 진행되면서 지구는 더없이 흉한 몰골이 된다. 그러나 핼쑥한 지구에 새로운 생물 종이 나타나 쑥쑥 자란다. 생태계가 재편되면서 지구는 조금씩 회복되고, 다시 푸르른 기운이 감돈다. 인간도 대멸종 이후에 운 좋게 나타난 생물 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대멸종이 가져다준 축복을 제대로 받으면서 태어난 인간은 ‘여섯 번째 대멸종’을 일으킬 수 있는 주범이 되었다.
<과학책방 담다> 세 번째 북큐레이션 주제는 ‘지구가 들려주는 멸종전(傳, 이야기)’이다. 네가 고른 네 권의 책은 멸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부정적인 편견을 씻겨준다.
* 이정모 《찬란한 멸종: 거꾸로 읽는 유쾌한 지구의 역사》 (다산북스, 2024년)
* 마이클 J. 벤턴, 김미선 옮김 《대멸종의 지구사: 생명은 어떻게 살아남고 적응하고 진화했는가》 (뿌리와이파리, 2024년)
《찬란한 멸종》과 《대멸종의 지구사》는 같은 달에 출간된 책이다. 《찬란한 멸종》은 현재 과학 분야 도서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찬란한 멸종’이라는 역설적인 책 제목은 멸종의 긍정적인 의미를 부각한다. 대멸종은 모든 생물 종을 절멸시키는 핵폭탄이면서 새로운 생물 종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 책은 독특하게도 다섯 번의 대멸종이 기록된 지구의 역사를 거꾸로 보여준다. ‘털보 과학자’ 이정모는 인간이 멸종한 2150년을 상상한다. 여기서부터 지구의 역사가 시작된다. ‘거꾸로 읽는 지구사’는 지구가 막 생기기 시작한 46억 년에 마무리된다. 《찬란한 멸종》이 지구의 46억 년 역사에서 생태계 판도를 바꾼 사건들 위주로 소개하는 책이라면, 《대멸종의 지구사》는 다섯 번의 대멸종을 세부적으로 설명한 책이다. 《대멸종의 지구사》 또한 대멸종의 창조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 팀 그레고리, 이충호 옮김 《운석: 돌이 간직한 우주의 비밀》 (열린책들, 2024년)
* 아메데오 발비, 장윤주 옮김 《당신은 화성으로 떠날 수 없다: 생명체, 우주여행, 행성 식민지를 둘러싼 과학의 유감》 (북인어박스, 2024년)
대멸종을 이야기할 때 항상 운석은 지구를 위협하는 적으로 묘사된다. 그렇지만 《운석: 돌이 간직한 우주의 비밀》은 운석 덕분에 지구가 지금처럼 튼튼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운석은 억울하다. 운석은 중력에 이끌려 우주를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어디로 이동할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지구가 내미는 중력에 우연히 잡힌 운석은 지구 쪽으로 향한다. 지금도 천문학자들은 지구에 접근할 가능성이 높은 거대 운석을 주시하고 있다. 꾸준히 모은 관측 자료를 토대로 운석과 지구의 충돌이 일어날 법한 연도를 계산하지만, 항상 정확한 건 아니다.
지구과학자들은 운석을 좋아한다. 그들은 운석을 찾으러 다니는데,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운석 부스러기조차 소중하게 여긴다. 아주 오래된 운석은 지구의 옛 모습을 알 수 있는 단서다. 지구과학자들은 운석을 분석해서 과거 지구가 어떤 물질로 되어 있는지 조사한다. 운석에는 생물 종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유기물이 들어 있다. 지구와 부딪힌 운석이 부서지면서 유기물이 지구 땅으로 쏟아진다. 지구상 모든 생물 종은 운석이 남긴 유기물을 먹으면서 자랐다.
* 스티븐 호킹, 배지은 옮김 《호킹의 빅 퀘스천에 대한 간결한 대답》 (까치, 2019년)
지구 멸망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얼른 ‘제2의 지구’가 발견되길 바란다.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은 인간이 화성이나 기타 행성을 식민지로 삼아서 정착하지 못하면 우리가 초래한 여섯 번째 멸종을 피하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찬란한 멸종》에 화성에서 살고 있는 미래의 인간을 묘사한 내용이 나온다. 과연 인간은 우주를 개척할 수 있을까?
《당신은 화성으로 떠날 수 없다》는 재력가들도 관심 있어 하는 우주 개척 사업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 책은 우주를 정복하는 날이 머지않다면서 장밋빛 전망만 줄기차게 강조하는 재력가와 과학자들을 비판한다. 저자는 우주가 인간이 살기에 너무 척박한 공간이라고 주장한다. 지구를 떠나려면 중력에 적응해야 하며 우주 방사선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우리가 잘 살려면 우주에 눈길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뿐인 지구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