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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의 역사 - 개역판
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20년 4월
평점 :
평점
2.5점 ★★☆ B-
구판 서평
[과학은 길고 인생은 짧다]
2014년 4월 21일 작성
평점: 3점(★★★)
https://blog.aladin.co.kr/haesung/6984611
서울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
열두 번째 선정 도서
모임 날짜: 2024년 11월 9일 토요일
기하학을 공부하던 왕은 문제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문제를 풀지 못한 왕은 손에 쥔 펜을 내려놓는다. 기하학에 패배한 왕은 유클리드(Euclid)에게 투정 섞인 질문을 한다. “내가 지금까지 수많은 적을 만나서 싸워봤지만, 기하학만큼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적은 처음이오. 나는 이 펜을 칼처럼 휘두르면서 기하학을 완벽히 제압하고 싶소. 선생, 기하학을 쉽게 배우는 방법이 없소?” 유클리드는 성미가 급한 왕을 다독인다. “폐하, 기하학을 공부하면 서두르지 마십시오. 기하학에 폐하를 위한 길은 절대로 없습니다.”
실제로 유클리드가 그런 말을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유클리드가 왕에게 충언하는 일화는 누군가가 지은 것일 수 있다. 그래도 ‘기하학에 왕도(王道)가 없다’라는 격언은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생각날 때마다 새겨들어야 한다. 기하학 대신에 다른 학문을 바꾸면서 쓸 수 있다. 과학을 쉽게 공부하는 방법, 즉 순조롭게 지나갈 수 있는 길은 없다. 과학책이나 교과서를 보면서 과학을 공부하는 일은 쉽지 않다.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용어가 아주 많다. 어떤 용어는 외워야 한다. 문장으로 묘사된 과학 이론이나 자연 현상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이해하려고 시도하면 생각이 꼬여버린다. 그래서 읽기 쉬운 과학책을 고르는 것도 어렵다. 아니다, 어쩌면 쉬운 과학책은 현실에 나올 수 없는 책일 수도 있다. 그래도 과학을 알기 위해선 책을 읽어야 한다. 모르는 내용을 만나면 다른 책을 찾아서 알아보거나 과학에 박식한 사람을 만나서 질문해야 한다.
여러 군데를 하루 만에 거쳐야 하는 여행은 상당히 힘들다. 과학 공부도 마찬가지다. 한 권만 읽으면서 여러 분야로 나누어진 과학을 한꺼번에 공부하는 일은 힘들다. 과학 공부는 장기간 여행이다.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멈출 수 없는 여행이다. 빌 브라이슨(Bill Bryson)은 종착지가 없는 과학 길을 여행한 작가다. 그는 3년 동안 여러 갈래로 쭉쭉 뻗은 과학의 길을 혼자서 묵묵히 걸어갔다. 그에게 길을 지나는 방법을 알려준 지도가 책이다. 빌은 도중에 막힌 길을 만나면 다른 방향으로 우회해서 전문가를 만나러 갔다. 그는 과학을 공부하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 빌의 과학 지도는 과학의 성과가 너무 어렵지 않게 나와 있으며 과학 비전공자도 공감할 수 있는 책이다. 그 책은 바로 《거의 모든 것의 역사》다.
빌의 과학 지도는 겸손하다. 그의 지도에 그려진 과학은 완전무결한 학문이 아니다. 과학자들도 그릇된 결론이 옳다고 착각한다. 결론의 문제점을 확인한 동료 과학자들은 가설을 다시 세우고, 정확한 결론이 나올 때까지 새로운 실험을 진행한다. 아인슈타인(Einstein)은 우주가 변화 없이 고정된 상태로 유지된다고 믿었다. 그는 점점 팽창하는 우주를 주장하는 허블(Edwin Hubble)과 조르주 르메트르(Georges Lemaître)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정적인 우주를 이론으로 설명하기 위해 ‘우주상수’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하지만 허블과 르메르트의 우주론을 뒷받침하는 관측 자료들이 나오자 아인슈타인은 우주상수를 주장한 일을 본인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로 여겼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 우주상수는 다시 주목받았다. 우주상수를 이용해 우주를 가속 팽창하게 만드는 수수께끼 물질인 암흑 에너지(dark energy, 진공 에너지, 제5원)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과학자들은 자신이 발견한 진리가 영원하다고 믿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다른 과학자들의 목소리를 거부하지 않는다. 이미 검증된 이론과 이에 상반되는 가설 중 어느 것이 타당한지 실험을 되풀이한다. 우주가 점점 커지듯이 과학책도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커진다. 새롭게 발견된 지식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자연현상을 설명하기에 부족한 오래된 지식은 신선한 지식을 만나는 순간 빛을 잃는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2003년에 태어난 책이다. 2020년에 책은 ‘두 번째 팽창’을 겪으면서 개역판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과학책은 더 커져야 한다. 번역자와 편집자는 요즘 과학자들이 언급하지 않는 오래된 지식이 있는지 다시 확인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새로 발견된 과학의 성과를 독자에게 알려야 한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 2장에 명왕성의 특징을 설명하는 내용이 있다(38~39쪽). 이 책이 처음 나온 2003년의 명왕성은 ‘태양계 행성’이었다. 저자는 명왕성은 행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천문학자들도 있다고 했다. 16장에도 명왕성이 다시 언급되는데, 저자는 ‘행성 자체가 매우 작은 명왕성(283쪽)’이라고 썼다. 2006년 8월 24일 명왕성은 태양계 행성 지위를 박탈당하면서 ‘왜행성’이 되었다. 왜행성은 행성도, 소행성도 아닌 행성과 소행성의 중간급에 해당하는 천체이다.
* 40쪽, 역주
뉴호라이즌스 호는 2015년 7월에 명왕성에 도착하여 다양한 관측 작업을 수행했고, 2019년 1월에는 카이퍼벨트로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번역자는 NASA가 쏘아 올린 명왕성 탐사선 뉴호라이즌스(New Horizons)가 2019년 1월에 카이퍼벨트(Kuiper Belt, 수많은 소행성이 모여 있는 영역)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했다(40쪽, 역주). 책 속에 박제된 뉴호라이즌스의 시간은 2020년에 멈춰져 있다. 지금도 뉴호라이즌스는 우주를 방랑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탐사선들이 활동한 이후부터 뉴호라이즌스의 위상은 예전만큼 못 하다.
2023년 NASA는 뉴호라이즌스 프로젝트 관련 연구비를 축소하는 동시에 뉴호라이즌스가 태양물리학 연구를 위한 탐사선으로 이용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뉴호라이즌스는 2019년에 카이퍼 벨트에 있는 아르고트(Arrokoth)라는 천체를 관측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NASA는 뉴호라이즌스가 카이퍼 벨트 전체를 탐사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했으며 탐사선의 남은 수명을 생각하면 카이퍼 벨트 탐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뉴호라이즌스 프로젝트팀 소속 학자들은 NASA의 탐사 계획 수정에 반발했다. 보이저 탐사선들이 태양물리학 연구 탐사를 이미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양물리학 연구자들은 뉴호라이즌스 프로젝트 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뉴호라이즌스는 태양물리학 연구와 카이퍼 벨트 탐사를 병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허블 우주 망원경(42쪽)은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으나, 자신이 맡은 임무를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James Webb Space Telescope)에 물려주었다. 제임스 웹은 2021년 12월 25일에 발사된 차세대 우주 망원경이다. 허블 우주 망원경의 관측 범위에서 벗어난, 아주 먼 천체를 관측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구아노돈은 티라노사우루스만큼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공룡은 아니지만, 이 공룡 화석이 발견된 사건이 기점이 되어 고생물학이 본격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한다. 이구아노돈은 오랫동안 고생물학자와 화석 발굴자들을 괴롭혔다. 화석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이구아노돈이 두 발로 걸어 다녔는지, 아니면 네 발로 걸어 다녔는지 논쟁을 벌였다.
* 107쪽
이구아노돈의 엄지발가락은 코에 스파이크처럼 붙어 있고, 네 개의 튼튼한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은 당당하기는 하지만 어쩐지 너무 크게 자라버린 개처럼 보이기도 한다(실제로 이구아노돈은 네 다리로 서지 않는 양족 동물이다).
1878년 이구아노돈 화석을 발굴한 영국의 고생물학자 기드온 맨텔(Gideon Mantell)은 이구아노돈의 엄지발가락 발톱을 뿔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복원한 이구아노돈은 코에 뿔이 달려 있고, 네 발로 다닌 거대한 도마뱀 형태다. 후속 연구를 거쳐 현재 수정된 이구아노돈은 걸을 땐 사족보행을 하고, 두 다리로 서서 뛸 수 있는 공룡으로 묘사된다.[주1]
저자는 디메트로돈이라는 고생물을 ‘단궁형(單弓型)의 파충류’라고 소개했다(385쪽). 고생물학 분류 방식에 따르면 디메트로돈은 공룡이 아닌 ‘단궁류’다. 과거 고생물학자들은 단궁류 고생물의 생김새가 파충류와 닮았다는 이유로 단궁형 파충류 또는 파충류형 단궁류(mammal-like reptiles)로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단궁류 고생물과 파충류를 구분 지어서 바라보기 때문에 단궁류는 파충류가 아니다.[주2]
마리아나해구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바다다. 2003년의 저자는 마리아나해구 깊이까지 들어갈 수 있는 잠수정이 없다고 썼다(314쪽). 2012년에 미국의 영화감독 제임스 캐머런(James Cameron)은 1인 잠수정 딥시 챌린저호(Deepsea Challenger)에 탑승하여 마리아나해구의 가장 깊은 구역인 챌린저 해연을 탐사했다. 2019년에 미국의 퇴역 해군 장교 빅터 베스코보(Victor Vescovo)가 10.927㎞까지 내려가면서 역사상 가장 깊은 심해 잠수 기록을 세웠다.[주3]
407쪽에 해파리와 메두사(Medusa)가 함께 언급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메두사는 해파리다. 저자와 역자는 해파리와 메두사를 서로 다른 종(種)으로 착각했다. 해파리가 성장하는 과정은 종류에 따라 다양하고 복잡해서 별도의 명칭이 있다. 유성생식만 하는 해파리 유생은 가늘고 긴 타원체로 되어 있는 형태로, 플라눌라(planula)라고 한다. 어린 해파리는 플랑크톤에 가까운 형태가 되는데, 유아기에 해당하는 개체의 명칭은 에피라(ephyra)다. 유성생식과 무성생식을 할 수 있는 대부분 해파리 유생은 바위에 달라붙어서 서식하는 폴립(polyp) 형이다. 폴립형 해파리는 에피라를 거쳐서 성체인 메두사가 된다.
저자도 사람인지라 실수할 때가 있다. 다음 인용문은 사실과 다른 내용이다. 저자가 잘못 쓴 것인지, 번역자가 오역한 것인지 확인이 어렵다.
* 532~533쪽
1910년대에는 끊임없이 사냥을 했던 탓에, 잡혀서 살던 새 몇 마리가 남았을 뿐이었다. 잉카라는 이름의 마지막 새는 1918년에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죽었다(그로부터 4년 후에는 같은 동물원에서 마지막 나그네 비둘기가 죽었다).
‘마샤(Martha)’라는 이름이 붙여진 마지막 나그네비둘기(여행비둘기)는 1914년 9월 1일에 죽었다.[주4] 따라서 ‘4년 후에 마지막 나그네 비둘기가 죽었다’라는 내용은 오류다. ‘4년 전에’라고 쓰는 게 맞다.
번역자는 엘크(Elk)와 말코손바닥사슴(Moose)를 ‘큰 사슴’으로 번역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엘크를 ‘고라니’로 번역한 것은 오역이다.
* 100쪽
사려 깊었던 설리번은 고라니인지 수사슴의 것인지를 알 수 없는 뿔을 함께 보내주었다.
[원문]
Sullivan thoughtfully included a rack of antlers from an elk or stag with the suggestion that these be attached instead.
KT 경계(226쪽, 저자 주), 남조류(335쪽), 정신 분열증(466쪽)은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용어다. 새로 바뀐 용어는 ‘K-Pg 경계’, ‘남세균’, ‘조현병’이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죽을 때까지 살았던 실험실 겸 저택의 이름은 ‘다운 하우스(Down House)’다. 436쪽의 ‘타운 하우스’는 오자다.
[주1] 참고문헌
* 마루야마 다카시, 서수지 옮김, 이융남 감수 《모든 공룡에게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다: 지금도 살아 있는 공룡의 경이로운 생명의 노래》 (레몬한스푼, 2022년), 170~171쪽.
* 갈로아 《만화로 배우는 공룡의 생태》 (한빛비즈, 2019년), 215쪽
* 박진영 《박진영의 공룡 열전: 여섯 마리 스타공룡과 노니는 유쾌한 공룡 입문》 (뿌리와이파리, 2015년), 4장 「이구아나 이빨, 이구아노돈」, 189~190쪽.
[주2] 참고문헌
* 갈로아, 263쪽.
* 패트리샤 반스 스바니 · 토머스 E. 스바니, 이아린 옮김 《한 권으로 끝내는 공룡》 (지브레인, 2013년), 51쪽.
[주3] Wikipedia, Mariana Trench 「Descents」
[주4] Wikipedia, Passenger pigeon 「Last survivors」, Martha(passenger pig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