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국제 오페라 축제가 올해로 20회를 맞이한다. 개막작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살로메』(Salome)다. 원작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쓴 동명 희곡이다.
* 오스카 와일드, 오브리 비어즐리 그림, 임성균 옮김 《살로메》 (지만지드라마, 2023년)
* 오스카 와일드, 정영목 옮김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 (민음사, 2009년)
오페라 공연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공연 장소인 대구오페라하우스를 처음 가본 터라 예매표를 어디서 받는지 몰랐다. 살짝 마음이 움츠러든 채 건물로 들어서는 순간, 어깨 너머로 익숙한 향기가 났다. 어? 이 향기는? 누구지? 뒤돌아보니 <일글책> 토요일 고전 읽기 모임의 프론트우먼(Frontwoman: 밴드나 그룹의 이미지를 좌우하는 핵심 인물) 향기님이었다. 연보라색 옷을 입은 향기님은 남편과 같이 오페라 공연을 보러 왔다. 향기님의 친절한 안내 덕분에 표를 구할 수 있었다.
공연 시작하기 전에 무대 뒤에 있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악기를 조율하고 있었다. 공연장 안에 서로 다른 악기들이 내는 소리가 뒤섞인 채 울려 퍼졌다. 예매하면서 지정한 자리를 금방 찾았다. 자리 뒤에 낯선 이름이 적힌 명찰이 있었다. 엥? 여기 내 자린데 내 이름은 없고 왜 다른 사람이 있지? 내가 자리를 잘못 찾았나? 다시 살펴보니 분명 내 자리가 맞다. 당황한 나는 안내자에게 자리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안내자가 알려준 자리는 분명 내가 찾은 그 자리가 맞았다. “자리 뒤에 이름표가 있는데, 이거 뭐예요?” 내 질문에 안내자는 대구오페라하우스에 기부한 사람들 이름이라고 답변했다. 물어보길 잘했다. 오페라 공연 감상 초보자는 오늘도 하나 배웠다.
원작의 시간적 배경과 장소는 고대 이스라엘의 헤롯(Herod) 왕의 궁전이다. 오페라의 시간적 배경은 휴대전화가 카메라가 있는 현시대다. 무대 장치는 반투명 유리로 둘러싸인 원형 형태로 되어 있다. 거대한 원형 무대는 헤롯 왕의 사치스러운 삶을 암시하는 연회장, 헤롯 왕과 새 아내 헤로디아스(Herodias, 원래 헤롯의 제수였다)의 왕좌, 세례자 요한(Johannes)이 갇힌 지하 감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 원형 무대 장치가 빙글빙글 천천히 돌아가면서 다음 이야기 속 장소를 보여준다.
지하 감옥을 지키는 병사 두 명의 복장은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과 흡사하다. 눈을 가린 그들은 살로메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경비대장 나라보트(Narraboth)의 눈은 무방비 상태다. 그는 살로메의 매력에 빠져 계속 그녀를 쳐다본다. 헤로디아스의 시종은 나라보트에게 살로메를 너무 보지 말라면서 여러 차례 경고한다. 반면 살로메의 눈은 요한의 목소리가 나오는 지하 감옥으로 향해 있다. 살로메는 병사들에게 요한을 풀어달라고 명령한다. 요한의 실제 모습을 본 살로메는 본격적으로 그를 유혹한다. 하지만 요한의 눈은 오로지 주님에게 향해 있다. 의붓아버지 헤롯은 살로메를 음침하게 바라보면서 다가온다. 늙은 욕망덩어리 왕의 요구에 지친 살로메는 왕 앞에 ‘일곱 베일의 춤’을 출 테니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요구한다. 춤을 다 추고 나서야 살로메는 왕에게 소원을 말한다. “요한의 머리를 주세요!”
* 오광수 · 박서보 감수 《모로》 (재원, 2004년)
[책 소개] 귀스타브 모로의 작품들을 유일하게 소개한 화집 형태의 책이다. 책 앞표지의 작품 제목은 『출현』이다. 살로메가 요한의 잘린 머리를 얻는 순간을 묘사한 그림이다.
원작 살로메는 남자들을 정복하려는 요부로 묘사되어 있다. ‘일곱 베일의 춤’은 살로메의 요염한 자태를 상상하게 만드는 에로틱한 춤이다. 화가들도 살로메의 성적 매력에 끌렸다. 특히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는 살로메를 주제로 한 그림을 여러 점 그렸다. 그가 묘사한 살로메는 알몸이 비치는 투명한 동양풍 옷을 입고 있다. 이 이미지는 요부로서의 살로메를 충실히 구현했다.
* 미레이유 도탱-오르시니 외, 박아르마 옮김 《살로메》 (이룸, 2005년)
하지만 오페라 살로메는 요염함과 거리가 멀다. 그녀는 흰옷을 입고 있다. 흰색은 순결을 상징하는 색이다. 실제로 오페라를 작곡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원작 살로메가 춤을 추면서 나체가 되는 묘사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슈트라우스가 쓴 오페라 공연 지침서에 보면 살로메는 ‘순결한 소녀인 동양의 공주’로 설정되어 있다. [주]
오페라 살로메는 의붓아버지와 함께 춤을 춘다. 여기서 살로메는 춤을 추는 자신과 왕의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는다. 이때 거대한 반투명 유리는 스크린이 된다. 스크린 화면은 휴대폰에 담긴 헤롯 왕과 살로메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헤롯 왕을 껴안기도 하고, 성교를 암시하는 행위를 한다. 하지만 살로메는 절대로 옷을 벗지 않는다. 춤을 추고 난 후 그녀는 양손에 머리를 쥐면서 좌절한다. 살로메는 요한의 목을 가지기 위해서 요부인 척 행동하고 마치 헤롯을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듯이 춤춘다. 옷을 벗지 않은 살로메의 춤은 왕의 음탕한 요구를 순순히 따르지 않겠다는 저항의 몸짓이다.
살로메는 요한의 머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타들어 가면서까지 태양 빛으로 직진하는 나방과 같다. 살로메는 기어이 자신의 입술을 ‘쓰디쓴 피 맛’이 나는 요한의 붉은 입술에 갖다 댄다. 하지만 잘린 요한의 머리는 태양처럼 빛나지 않는다. 그래서 살로메는 씁쓸하다. 태양 같은 거룩한 요한을 가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태양처럼 빛나던 요한의 생명력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곧 다가올 죽음을 예감한 살로메는 요한의 머리에 여러 번 입맞춤한다. 그런 다음에 차가워진 살로메의 팔을 껴안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소녀는 진심으로 요한을 사랑했다.
공연을 본 관객 대다수는 여전히 광기 어린 집착을 보인 살로메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요한의 머리를 탐낸 살로메의 사랑은 퀴어(gueer: 기묘한, 괴상한)하다. 남들이 멸시하고, 헤롯이 괴물 같다고 해도 살로메는 자신마저 파멸시키는 사랑을 끝까지 고집했다. 원작자 오스카 와일드는 퀴어한 동성애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멸시받다가 쓸쓸하게 죽었다. 요한의 머리 앞에서 절절하게 고백하는 살로메의 노래 속에 오스카 와일드의 서러운 이야기가 들렸다.
관객을 위해 우리말로 번역된 오페라 대사가 자막으로 나왔는데, 여기서 ‘옥에 티’가 있었다. 헤롯 왕이 최상급 포도주를 ‘로마 시저 황제가 주신’ 것이라면서 말하는 대사가 있다. ‘시저’는 로마의 정치가 카이사르(Caesar)에서 유래된 단어로, ‘황제’를 뜻한다. 원작에서는 ‘시저’라고 적혀 있다. 아마도 대사 자막을 만든 번역자가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저 황제’라고 썼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 황제’라고 써도 된다. 원작에 언급된 시저는 카이사르가 아니라 티베리우스(Tiberius)다.
[주] 《살로메》(이룸, 2005년)는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회화, 음악)으로 묘사된 살로메를 입체적으로 분석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오페라 감상문을 쓰기 위해 이 책에서 참고한 글은 『오스카 와일드와 슈트라우스, 혹은 춤추는 몸』이다. 이 글에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공연 지침서 일부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