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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2 ㅣ 사계절 만화가 열전 21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 / 사계절 / 2023년 7월
평점 :
평점
3.5점 ★★★☆ B+
《익명의 독서중독자들 2》에 새로운 독서중독자가 등장한다. 별명은 ‘다크섹시’다. 직업은 사서다. 2권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다크섹시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 집안에서 혼자 책을 좋아했다. 독서에 재미를 못 붙인 집에 책이 늘어날 까닭이 없으니 별수 없이 같은 책을 반복해 읽었다.
(8쪽)
이 문장을 보면서 살짝궁 눈가가 촉촉해질 뻔했다면 당신은 독서중독자다. 《익명의 독서중독자들 2》 시작 전에 독서중독자의 조건이 명시되어 있다. 그중 하나가 ‘부모가 강요하지 않아도 책 읽기를 좋아한 아이’다.
책을 읽지 않는 부모라면 자녀에게 책 읽기를 강요하지 않을 수 있다. 책 대신에 자녀에게 유익하면서 재미있는 놀이를 가르쳐줄 것이다. 하지만 책 읽지 않는 부모도 책 읽기의 중요성을 안다. 그러므로 자녀에게 책 읽기를 강요할 수 있다. 나는 ‘책을 읽지 않는 부모가 강요해서 책 읽기를 좋아한 아이’였다.
책을 좋아하지 않는 어머니는 내가 똑똑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책을 잔뜩 구매했다. 어머니는 내가 밖에 돌아다니면 껄렁껄렁한 아이들과 어울릴까 봐 잔뜩 걱정했다. 오락실에 가지도 못하게 했다. 혼자서 밖에 나갈 일이 없던 나에게 장난감이 먼저 다가왔다. 그 장난감은 바로 ‘책’이었다.
아버지는 배고픈 청춘 시절에 먹고 살기 위해 온갖 일을 했다. 그중 한 일이 책 장사였다. 노상에 가판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책들을 올려놓고 파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그 일을 얼마 동안 했는지 모르겠다. 경상도 출신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다. 아마도 책을 좋아하지 않은 아버지는 책 파는 일이 썩 즐겁지 않으셨나 보다.
그래도 팔다 남은 책 몇 권은 버리지 않았다. 그 책들은 지금도 우리 집 창고 어딘가 먼지 이불 속에서 자고 있다. 몇 년 전 창고로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얼마든지 펼쳐 볼 수 있었다. 내가 자주 봤던 책은 문고본으로 나온 《명탐정 셔얼록 호움즈》 전집과 세로쓰기로 된 《세계 단편 문학 전집》이다. ‘셔얼록 호움즈’는 ‘셜록 홈스’의 옛 표기다. 말이 전집이었지 셜록 홈스 시리즈에 속한 모든 단편이 수록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편집 상태가 상당히 조악했다. 그렇지만 틈만 나면 읽었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세계 단편 문학 전집》은 나를 ‘세계문학’이라는 거대한 세계에 진입하게 해준 결정적 역할을 한 책이다. 아, 갑자기 이 오래된 친구들이 보고 싶다. 당장 창고에 가서 얼른 깨워주고 싶군.
《익명의 독서중독자들 2》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독서중독자들을 위한 ‘거울’이다. 하지만 거울이라고 해서 독서중독자들의 공통점만 보여줄 수 없다. 분명 동족과 다른 독특한 성격과 독서 취향을 가진 독서중독자도 있다. 독서 모임을 참여해보면 알 수 있다. 독서중독자들은 책을 좋아하는 성격만 같을 뿐이지 읽은 책에 관한 생각이나 책을 대하는 태도 등에 있어 확연한 차이가 있다.
전작에 등장한 축구광 독서중독자인 ‘사자’는 독서중독자들은 가짜 뉴스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유는 독서중독자들은 책 읽느라 가짜 뉴스 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127~128쪽). 나는 사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책 속에 독서중독자들도 무심코 믿어버리기 쉬운 가짜 정보가 있다. 사자가 생각하는 책은 여기저기 가짜로 널려 있는 소셜미디어 플랫폼과 반대되는 ‘가짜 정보가 없는 청정 지식의 보고’다. 하지만 현실 속의 책은 그렇지 않다.
책의 유익함을 지나치게 긍정하고, 책을 쓴 저자의 견해를 의심 없이 옹호하는 것은 ‘우리 개는 절대로 사람 안 물어요’라고 주장하는 견주의 생각과 비슷하다. 반려견의 성격과 행동에 무관심한 견주는 본인이 생각하기에 반려견이 자기 말을 잘 알아들을 정도로 똑똑해서 타인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리하고 순둥순둥한 반려견도 어떤 내 · 외적 요인에 의해서 타인, 심지어 견주를 공격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견주가 많다.
논리적 추론 능력이 뛰어난 독서중독자도 책 속의 가짜 정보와 저자가 사실을 왜곡한 거짓 정보를 알아내지 못한다. 우리 독서중독자는 사람인지라 편견에 빠지기 쉽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싶어 한다. 자신이 책에서 봤던 내용을 반박하는 견해를 접하면 낯설어서 최대한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가짜 정보로 채운 책의 손아귀에 벗어나지 못하는 독서중독자는 가짜 정보를 제대로 간파한 독서중독자를 무시하거나 공격한다. 책의 강점을 너무 믿는 그들은 떳떳하다. ‘내가 읽은 책은 정말 좋은 책이에요.’ 모든 사람을 좋아하는 착한 개가 절대로 없듯이 모든 독서중독자에게 유익한 좋은 책은 없다.
친애하는 익명의 독서중독자 친구들이여, 조심하자.
믿는 책에 독서중독자 머리 찍힐라.
<알아 둬도 쓸 덴 없는 cyrus의 주석>
* 77쪽
《남방 우편기》는 생텍쥐페리(Saint-Exupéry)의 첫 소설이 아니다. 1926년에 발표된 단편 <비행사>(L’Aviateur)가 생텍쥐페리의 첫 소설이다. 《남방 우편기》는 1929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 119~120쪽
‘광인’이라는 별명의 독서중독자는 전직 축구 국가대표 감독이다. 그는 단테(Dante)의 《신곡》을 좋아하는데, ‘광인’과 같이 일하는 ‘잔디 코치’는 T.S. 엘리엇(T.S. Eliot)의 장시 《황무지》에 푹 빠져 있다. 《익명의 독서중독자들 2》 저자가 의도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신곡》과 《황무지》는 깊은 연관성이 있다.
엘리엇은 자신의 시 《황무지》 초고를 검토해준 선배 시인 에즈라 파운드를 위해 헌사를 남겼다.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For Ezra Pound
il miglior fabbro.
(황동규 옮김, 《황무지》, 민음사)
‘il miglior fabbro’는 단테의 《신곡》 연옥 편 26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황무지》와 엘리엇의 또 다른 대표작인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 속에 《신곡》 지옥 편을 인용한 시구가 나온다. 시를 좋아하는 독서중독자들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 시, 특히 《황무지》 같은 텍스트가 언급되면 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