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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속의 영원 - 저항하고 꿈꾸고 연결하는 발명품, 책의 모험
이레네 바예호 지음, 이경민 옮김 / 반비 / 2023년 3월
평점 :
평점
5점 ★★★★★ A+
이 생명 이제 저물어요. 언제까지 그대를 생각해요.
노을 진 구름과 언덕으로 나를 데려가 줘요.
나의 별들도 가을로 사라져. 그대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내가 눈감고 바람이 되면 그대의 별들도 띄울게.
- 이문세 5집 수록곡 <시를 위한 詩>(1988년) 중에서 -
책은 물건이 아니다. 책은 생명 그 자체다. 최초의 책은 미생물들의 보금자리인 흙으로 빚어져서 만들어졌다. 흙을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미생물들은 책의 일부가 되었다. 책은 이 세상의 모든 지식과 이야기를 활짝 피우게 하는 토양이다. 인류는 기름진 책을 펜으로 경작(culture)했고, 책 위에서 자란 교양(culture)을 먹으면서 자라왔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갈대로 책을 만들었다. 우리는 그 갈대를 ‘파피루스(papyrus)’라고 부른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집트 파라오의 딸은 파피루스 밭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건져낸다. 공주는 그 아기를 아들로 삼아 ‘모세(Moses)’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녀는 모세의 목숨만 건지지 않았다. 갓난아기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기까지 만들어지게 될 한 편의 이야기까지도 건져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하지만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려면 우선 그 이름을 빛나게 해주는 이야기가 남아 있어야 한다. 북간도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청년 윤동주는 가을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을 헤면서 여러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 그리고 그가 사랑한 시인들의 이름까지. 동주가 언급한 소중한 사람들은 너무나도 멀리 있다. 그렇지만 이네들의 이야기는 동주의 가슴 가까이에 있다. 불행하게도 동주는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일찍 눈 감았고 바람이 되었다. 그가 원고지에 띄운 평범한 사람들의 이름과 이야기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되었다.
《갈대 속의 영원》은 책을 애지중지해 온 사람들의 열정과 노력을 기리는 책이다. 과거에 만들어진 책들은 아주 연약했고 수명이 짧은 편이었다. 자유로운 독서를 허용하지 않는 권력자에 의해 파손되거나 망각의 시간에 흠뻑 젖어버린 책들은 지구상에 남아 있지 않다. 완전히 사라져버린 책들은 제목만 전해질 뿐이다. 책은 죽어서 제목만 남긴다. 다행히 운이 좋으면 내용 일부만 살아남는다. 책을 사랑한 사람들은 단순히 책만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독자로 살지 않았다. 책을 보존하는 보호자를 자처했다. 그들은 책이 사라지면 그 속에 있는 지식과 이야기도 같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집트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3세(Ptolemaeos III)는 책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세상에 있는 모든 책을 가지고 싶어 했다. 왕은 자신이 모은 책들을 보관할 수 있는 거대한 건물을 세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왕의 개인 서재는 도서관이 되었다. 하지만 튼튼하게 도서관을 지었어도 연약한 책들을 완벽하게 보호하지 못한다. 도서관은 전쟁의 소용돌이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책을 사랑하지 않은 권력자는 도서관을 파괴하거나 폐허가 된 도서관을 재건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허점을 적나라하게 공개한 책을 두려워한다. 용감한 독자는 책을 학살하는 권력자의 횡포에 맞서 싸운다. 책을 경작할 때 사용된 펜은 권력에 저항하는 무기가 된다.
알렉산드로스(Alexandros)는 트로이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Achilles)가 나오는 호메로스(Homer)의 《일리아스》를 가장 좋아했다. 이 한 권의 책에 푹 빠져버린 왕은 아킬레우스처럼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길 원했다. 그의 야망은 한 권의 위대한 책이 되는 것이었다. 책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류를 영원히 기억되고 완벽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해준다. 책 덕분에 세상을 살다가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덤으로 들어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모든 이야기가 다 좋을 순 없다. 책은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해로운 이야기를 걸러내지 못한다. 부당한 권위를 두 눈 똑바로 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키는 책은 영원히 덮을 수 없다. 오히려 최악의 세상 한가운데에 펼쳐져 힘차게 펄럭거린다. 반면에 진실을 짓밟고 자유를 억압하는 자들의 이야기는 책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종이책이 아니다. 못된 권력자와 불한당 앞에서 딸랑거리는 요란한 종(bell/servant)이다.
우리의 몸과 인생은 한 권의 책이다. 이제 우리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 수 있으며 한 편의 글로 기록한다. 내 삶을 기록해야 기억할 수 있다. 그러려면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 《갈대 속의 영원》은 책을 사랑한 사람들을 잊지 않은 책들, 만인의 사랑을 받는 책이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책(冊)이다.
※ cyrus의 주석
* 25쪽
세상을 지배하려는 순간이 도래할 즈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커다란 선물로 클레오파트라를 현혹하고자 했다. 그는 금이나 보석이나 향연에는 클레오파트라가 눈 깜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것들이야 매일 헤프게 썼으니 말이다. 한번은 술 취한 새벽, 도발적인 표정을 지으며 엄청난 크기의 진주를 식초에 녹여 마셔버린 적도 있었다.[주1] 그래서 그는 클레오파트라가 지루한 표정으로 무시하지 않을 만한 선물을 선택했다. 도서관에 비치할 20만 권의 책을 그녀의 발아래 가져다 놓은 것이다.
[주1]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진주 귀걸이를 식초에 녹여 마셨다는 일화는 과장된 전설이다. 식초에 든 진주는 녹긴 하지만, 순식간에 녹지 않는다. 진주가 녹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전설이 사실이라면 클레오파트라는 완전히 녹지 않은 진주를 삼켜야 한다. (참고: KISTI의 과학향기 칼럼, 『클레오파트라, 진주 숨은 비밀?』, 2005년 7월 8일 작성)
* 415쪽
고대의 두루마리가 교체되면서 우리는 시, 연대기, 모험, 허구, 사상의 보물을 영원히 잃어버렸다. 수 세기 동안 부주의와 망각은 검열이나 광기로 인한 파괴보다 훨씬 많은 책을 파괴해갔다. 그러나 우리는 말의 유산을 구하기 위한 큰 노력을 알고 있다.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없는) 도서관은 소장한 자료를 꼼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획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책 하나하[주2]를 모두 복사하는 참을성 있는 작업에 착수했다.
[주2] ‘하나하나’의 오자. 책 한 권을 꼼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문장 하나하나 읽는 참을성이 있어야 오자 한 개 정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