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는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화법인 변론술을 가르친 소피스트(Sophist)였다. 그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Man is the measure of all things)”라는 말을 남겼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인간 개개인이 세상 모든 진리의 기준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O. 윌슨(Edward Osborne Wilson)은 자신의 책 《창의성의 기원》(The Origins of Creativity, 2017)에서 프로타고라스의 명언을 넘어선 새로운 선언을 제시한다. “만물이 인간 이해의 척도다(All things must be measured in order to understand man―원문의 ‘man’은 인류를 뜻하는 단어지만 대부분 사람은 ‘남성’을 가장 많이 떠오른다. ‘human’이라고 썼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 느껴지는 문장이다).”
* 에드워드 O. 윌슨 《창의성의 기원: 인간을 인간이게 한 것》 (사이언스북스, 2020)
윌슨은 창의성이 인간의 가장 독특한 형질이라고 본다. 창의성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인간의 본능이 창의성을 발현시킨다. 하지만 윌슨은 창의성의 범위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고 우려한다. 그는 창의성을 좁게 만든 주범으로 만물이 나타나게끔 유도한 궁극 원인(ultimate cause)에 관심 없는 인문학을 지목한다. 윌슨의 견해에 따르면 인문학자들은 만물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철학자들이 유독 좋아하는(?) 질문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자는 궁극 원인에 해당하는 질문을 흘깃 보거나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과학자는 만물의 정의와 기원을 모두 탐구하는 사람이다.
* 에드워드 O. 윌슨 《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북스, 2011)
만물의 기원을 모르는 인문학자가 자신을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하면서 진리의 기준을 뻔뻔하게 내세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좁은 시야에 안주하는 인문학이 사람들로부터 존중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윌슨은 ‘만물이 인간 이해의 척도’라는 명제를 비판하고, 인간이 오랫동안 달고 다녔던 ‘만물의 영장’이라는 과장된 훈장을 떼어낸다. 만물의 기원을 알아야 인간의 기원도 알 수 있다. 이 목표를 달성하게 만드는 학문이 바로 과학이다. 진화론으로 설명 가능한 인간의 기원을 이해하면 인간이 지구상에서 가장 우월한 존재라는 믿음의 단점이 눈에 보인다. 인간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윌슨의 관점은 이미 그의 대표작 《사회생물학》(Sociobiology: The New Synthesis, 1975)에서 비롯된 반(反)인간중심주의다. 《사회생물학》 다음으로 나온 《인간 본성에 대하여》(On Human Nature, 1979)에서 윌슨은 ‘고상한 체하는 자아도취적 인간중심주의보다 더 지능적인 악은 없다(42쪽)’고 말하면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 에드워드 O.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사이언스북스, 2005)
‘과학자’ 윌슨은 궁지에 몰린 인문학에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그는 과학과 인문학이 ‘통합’, 즉 하나가 되면 새로운 계몽 운동이 일어나 인문학(철학)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은 사실적 지식을 중요하게 여기고, 인문학은 그런 지식이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역할을 한다.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은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준다. 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을 바라는 윌슨의 생각 역시 낯설지 않다. 윌슨은 《통섭》(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1998)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포함해 인간의 지식은 본질적으로 통일성을 지향한다고 주장했다. 《통섭》 또한 《사회생물학》 못지않게 인문학 계열에 속한 학자와 사회학자들의 비판을 받은 책이지만, 글의 분량을 조절하기 위해 《통섭》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생략하겠다.
이 글에서 내가 가장 주목하고 싶은 책은 《창의성의 기원》이고, 이 글의 주요 내용은 《창의성의 기원》에 대한 비판적 독해이다. 윌슨이 주장한 내용 중에 의심해야 할 것이 있다.
* 81, 82~83쪽
우리는 시각과 청각에 의지해 길을 찾는 소수의 곤충을 비롯한 무척추동물 및 조류와 더불어서 지구에서는 드문, 주로 시청각에 의지하는 극소수의 동물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 시각은 오로지 광자에만 반응한다.
그렇다면 청각은? 청각은 우리 의사소통에 필수적이지만, 동물 세계의 청각 능력에 비하면 우리는 귀가 먼 것에 가깝다.
냄새는 어떨까? 다른 생물들에 비하면 인간은 후각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연 환경이든 가꾼 환경이든 간에, 모든 환경에는 같은 종의 구성원들이 의사소통할 때 쓰는 화학 물질은 페로몬(pheromone)과 잠재적인 포식자나 먹이나 공생자를 검출할 때 쓰는 알로몬(allomone)이 난무한다. 모든 생태계는 상상할 수도 없이 복잡하고 정교한 ‘후각 경관(odorscape)’이다. (후각과 미각 환경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이라는 말을 쓴다. 인류는 화학 물질 감지에 해당하는 어휘를 거의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무척추동물과 미생물까지 포함하면, 생태계 하나에는 수천 종에서 수십만 종이 살고 있다. 우리는 냄새를 통해서 하나로 결합된 자연 세계에 산다.
내가 밑줄을 친 문장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What about smell? Human by comparison with the rest of life are virtually anosmic.
‘anosmic’는 ‘후각이 없는’ 또는 ‘후각 상실’을 뜻하는 단어다. 과연 인간의 후각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권위 있는 노학자의 말만 믿고, 우리의 후각 감각을 무시하는 독자가 없길 바란다. 냄새는 측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후각에 관한 과학적 연구 진행이 더딘 편이다.
* A. S. 바위치 《냄새: 코가 뇌에게 전하는 말》 (세로, 2020)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1년에 후각 수용체가 발견되면서 과학자들은 후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후각 수용체가 발견되기 전까지 후각은 과학자와 철학자들 모두에게 외면받은 감각이었다. 인간의 후각 수용체는 천여 개에 달하지만, 후각 수용체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수는 고작 3백여 개에 불과하다. 후각 수용체는 냄새를 감지하게 되면 뇌에 전기 신호를 전달한다. 이 신호는 후각을 자극한다. 뇌는 여러 가지 냄새 패턴을 기억하고 있어서 각각의 냄새를 감별할 수 있다. 후각의 복잡한 경로와 기원을 밝히기 위한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다. A. S. 바위치(A. S. Barwich)의 《냄새》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냄새와 후각의 실체를 알려준다. 이 책을 보면 ‘인간의 후각이 없다(인간의 후각이 오감 중에 가장 뒤떨어져 있다)’는 오해를 풀 수 있다.
《창의성의 기원》에서 윌슨은 인문학의 단점을 ‘극단적인 인간중심주의’라고 말한다(77~78쪽). 인문학은 ‘제한된 감각 경험이라는 공기 방울 안에(exist within a bubble of sensory experience)’ 갇혀 있어서 인간의 궁극 원인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 김초엽, 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평점
4.5점 ★★★★☆ A
윌슨을 인문학을 비판하면서 과학이 인문학의 한계를 보완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책에 과학의 단점을 언급하지 않으며 그것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과학의 단점은 ‘극단적인 비장애인중심주의’다.
《사이보그가 되다》의 공동 저자로 만난 소설가 김초엽과 변호사 김원영은 장애를 ‘치료’하고 ‘교정’하려는 과학기술 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과학을 신뢰하는 인간(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를 포함한다)은 장애를 쉽게 치료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장애는 비장애인의 ‘온전한 몸’, ‘건강한 몸’에 미치지 못한 신체적 약점이다. 그래서 과학기술이 나날이 향상될수록 장애인은 과학기술을 사용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수혜자로 남게 된다. 그리고 장애는 정상성을 가지기 위해(비장애인이 되기 위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된다. 극단적 비장애인중심주의를 인지하지 못한 과학은 ‘정상성’이라는 좁은 공기 방울 안에 갇혀 있다. 이런 과학에 대한 믿음이 지나치면 과학만능주의로 빠질 우려가 있다.
* 닐 디그래스 타이슨 《나의 대답은 오직 과학입니다: 천체물리학자의 우주, 종교, 철학, 삶에 대한 101개의 대답들》 (반니, 2020)
평점
4점 ★★★★ A-
현재의 과학은 다른 학문의 한계를 보완해주는 구원자 역할이 될만 한 수준이 아니다. “과학자들도 모두 인간이고, 인간으로서의 약점과 편견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나의 대답은 오직 과학입니다》 135쪽) 과학도는 천체물리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Neil deGrasse Tyson)이 한 말을 꼭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줄 아는 성숙한 과학도가 되려면 인문학뿐만 아니라 장애학도 공부해야 한다. 그러니 과학(자), 너나 잘하세요.
※ Mini 미주알고주알
* 《창의성의 기원》 62쪽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02)
[주] 아일랜드 출신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사망연도는 1992년이다.
* 《창의성의 기원》 184쪽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데 주바란(Francisco de Zurbarán, 1598~1664년)
[주]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스페인어 알파벳 ‘Z’의 발음은 ‘S’ 발음과 비슷하다.
* 《사이보그가 되다》 241쪽 (2쇄)
과학학자 하대청
[주] 과학자 하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