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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음식, 죽은 음식 - 호모 사피엔스는 무엇을 먹도록 설계된 동물인가
더글라스 그라함 지음, 김진영 외 옮김 / 사이몬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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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점 ★★ C
나는 비건(Vegan)은 아니지만, 채소와 과일을 자주 먹는다. 고기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먹는다. 불에 구운 고기(삼겹살 구이)보다 끓는 물에 푹 삶은 고기(수육)를 더 좋아한다. 건강을 위해 채소와 과일을 먹는 사람이라면 《산 음식, 죽은 음식》에 눈길이 가게 된다. 원제는 ‘80/10/10 Diet’이다. 이 책의 저자는 과일을 많이 먹는 식단을 통해 질병을 예방하면서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이 ‘과일을 먹는 영장류(frugivore)’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진화해왔다면서―다윈(Darwin)의 진화론과 충돌하는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에 가까운 입장이다. 후술하겠지만, 지적 설계론은 과학으로 보긴 어렵다―과일을 주식으로 삼되, 부수적으로 채소를 먹는 식단을 권한다. 다만 저자는 다른 음식을 일절 먹지 않고, 오로지 과일만 먹는 극단적인 식단을 권장하지 않는다.
과일과 채소가 몸에 좋은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당뇨를 앓는 사람이나 만성 신부전증 같은 신장질환자는 과일이나 채소 섭취도 조심스럽다. 과일 자체 당분이 높아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좋지 않다는 지적이 있지만, 당뇨 예방을 위해 과일과 채소를 꾸준히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저자는 과일 섭취의 해악을 강조한 견해를 반박하면서 과일은 당뇨의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과일은 당뇨병 환자의 인슐린 저항성을 개선하며 혈압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 국내 당뇨병 가이드라인에도 당뇨병 환자에게 과일, 곡류, 채소 등을 통해 당분을 섭취하라고 권하는 내용이 있다. 다만 당분이 낮은 과일(사과, 딸기 등) 위주로 섭취해야 한다.
이 책에서 언급된 ‘산 음식’이 과일과 채소, 가열되거나 조리되지 않은 음식이라면, ‘죽은 음식’은 조리된 음식과 가공 음식이다. 음식을 불로 익혀 먹으면, 몸에 꼭 필요한 영양소가 제거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독성물질을 발생시킨다. 토마토 속에 들어있는 항산화 성분인 리코펜(Lycopene)은 열에 강해서 가열해도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 그러나 리코펜이 몸에 좋다는 이유만으로 토마토를 가열해서 먹으면 리코펜 이외의 다른 영양소들은 파괴된다. 저자는 한두 가지의 영양소를 중점적으로 섭취하기 위한 조리 방식과 식단을 경계한다.
저자가 권장한 ‘80/10/10’은 한 사람의 식단에서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이 차지하는 최적의 비율(칼로리 백분율)에 맞춘 식습관이다. 즉, ‘80/10/10’은 탄수화물 80%, 단백질 10%, 지방 10%를 의미한다. 80%의 탄수화물은 과일을 통째로 먹어서 섭취해야 한다. 단백질과 지방을 10% 이상 섭취하면 건강에 해롭다.
나는 저자가 알려준 식단을 실천해보지 않았지만, 과일과 채소 섭취의 중요성을 강조한 저자의 견해에 공감한다. 하지만 과일이 건강에 좋다는 견해를 유리하게 전달하려고 제시한 저자의 근거에 문제가 있다. 저자가 제시한 근거 중 일부는 과학적이지 않다.
이 책의 부제는 ‘호모 사피엔스는 무엇을 먹도록 설계된 동물인가’이다. 저자는 과일을 먹지 않고, 조리된 음식 위주로 먹는 현대 인류의 식습관을 “신(자연)의 설계와도 배치될뿐더러,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론적 설계와도 동떨어져 있다(18쪽)”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 책에 심심찮게 ‘설계’라는 단어를 썼다.
신(자연)이 당신에게 허락한 신선한 과일을 먹는 것이 가장 좋다. (52쪽)
우리 인간은 태초부터 부여받은 설계도면과 수백만 년 진화해온 기본적인 소화생리를 바꾸지 않았다. (133쪽)
‘설계’에 대한 저자의 관점은 ‘지적 설계’와 유사한데, ‘과일을 먹는 영장류’는 신적인 존재나 자연(범신론: 모든 자연은 곧 신이며 신은 곧 모든 자연이라고 보는 관점)이 설계한 결과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정말로 ‘과일을 먹는 영장류’가 신이라는 지적 설계자가 만들었다면 과일을 먹으면 안 되는 사람이 왜 있는 것일까. 그런데 저자는 과일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과일 섭취의 해악을 강조한 정보(또는 거짓 뉴스)에 세뇌되었다고 비판한다.
인간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동일지역, 동종인종의 경우 ‘나는 과일이 맞지 않는다’거나 ‘나는 태생적으로 채소를 싫어한다’라는 말은 습관의 결과이자 세뇌된 편견일 뿐이라는 말이다. (132쪽)
저자는 과일 섭취가 인간에게 이상적인 식단이라고 말한다. 그는 더 나아가 ‘동일 지역’에 사는 ‘동일 인종’은 과일 섭취를 좋아하며 과일을 많이 먹어서 건강에 좋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한국인이라면 과일을 무조건 좋아할까?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은 동일 인종인가? 한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는 너무나 다양하다. 저자가 표현한 ‘동일 인종’은 한 사람의 의미를 대단히 협소하게 만드는 단어이며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저자는 일부만 보고(과일을 섭취하고 나서 건강이 좋아졌다고 믿는 저자와 과일 위주의 식단을 지지하는 영양학 전문가들의 견해, 과일 위주의 식단을 실천하는 일반인들의 긍정적인 반응) 전체를 판단하는(“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과일 섭취를 선호했으며 과일을 많이 먹을수록 건강해진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했다.
과일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과일 위주의 식단을 실천할 수 없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이 사람들은 ‘과일은 건강에 해롭다’라는 잘못된 믿음에 세뇌된 사람이라고 봐야 할까?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을 규정하면 절대로 안 된다. 의학적으로 확인된 알레르기 유발 과일은 생각보다 많다. 사과, 딸기, 망고, 멜론, 바나나, 살구, 오렌지, 자두, 참외, 체리, 키위 등이 있다. 특히 망고, 멜론, 바나나는 열대지방에서 나는 과일이다. 그런데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는 열대과일을 먹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주장한다(174~177쪽).
저자는 이 책에 ‘잘못된 정보’를 한 번이 아닌, 두 번이나 언급했다. 그는 ‘혀 미각 지도’가 과학적인 사실인 것처럼 말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본성적으로 단 것을 좋아한다. 따라서 달콤한 과일을 좋아한다. 당신은 중고등학생 시절 생물시간에, 혀의 가장 앞자리에 단맛을 감지하는 미뢰가 있다는 사실을 배웠을 것이다. 이것은 진화론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포인트다. 우리 인간은 문화와 환경에 의해 형성된 각각의 음식문화와 관계없이 달콤한 생과일에 끌린다. (41쪽)
고지방 식단은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노화를 촉진한다. 우리 인간은 지방의 맛을 느낄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혀의 맛 지도’를 생물시간에 공부한 적이 있는 사람은 모두 알 수 있다. (226쪽)
단맛은 혀의 앞쪽, 쓴맛은 혀의 뒷부분, 신맛은 혀의 옆 부분, 짠맛은 혀 가운데에서 느낀다고 알려져 있다. 과거에 만들어진 교과서에 미각을 표시한 ‘맛 지도’를 설명한 내용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맛 지도’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죽은 지식’이다. 실제로 혀의 어느 부분이든 모든 맛을 느낄 수 있다. 다만 혀의 여러 부분마다 맛을 느끼는 세포의 개수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민감하게 느껴지는 맛이 있다. 《산 음식, 죽은 음식》은 여러모로 검증하면서 읽어야 할 책이다. 특히 식단을 선택할 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식단을 권장한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을 살펴보고, 과학적으로 입증된 식단인지 검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