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 - 뾰족하게 독해하기 위하여
우치다 다쓰루 지음, 박동섭 옮김 / 유유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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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점    ★★☆    B-

 

 

 

 

이 글을 보려는 분들에게 한 가지 여쭤보고 싶다. 지금까지 살면서 만화책을 봤어만화책을 읽었어중에 가장 많이 들어본 말 또는 해본 말은 무엇이었는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대뜸 질문해서 죄송하다.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책을 읽는 것책을 보는 것은 동일한 행위다. 우리는 두 눈()으로 시각적 텍스트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데, 이러한 과정은 책을 읽는 행위책을 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분명 어떤 사람은 만화책을 읽다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만화책을 읽다라는 표현을 쓴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런 사람이 있을 텐데 내가 못 봤거나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만화책을 보다라는 표현을 더 많이 들어본 것 같다.

 

만화의 정의는 다양하다. 그러므로 만화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순하게 만화를 정의하자면 한 편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연속적인 그림과 글의 조합이라 할 수 있다(권경민, 만화학개론참조). 우리는 그림을 눈으로 본다.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들, 즉 회화 속에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림을 읽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그런 말을 잘 쓰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림에 문자 한 개도 없는데 어째서 그것을 읽을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따지는 걸 좋아하는 나로선 그림을 읽는행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을 반박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설치미술가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는 사진과 문자 텍스트를 결합한 작품을 선보이는데, 그녀의 작품 속에 문구가 항상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바라 크루거의 미술 작품을 보고 있다고 표현해야 하나, 아니면 읽었다고 표현해야 하나? 그림 속에 있는 문자는 관람객들이 그림을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열쇠가 된다. 그러므로 그림을 읽다라는 표현이 잘못됐다고 볼 수 없다. 각설하고 만화책에 그림이 글보다 제일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화책을 읽다라는 말이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뭐든지 읽으면 재미있다는 우치다 다쓰루(內田樹)라면 만화책을 읽다라는 표현을 어색하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우치다 선생은 책뿐만 아니라 만화책도 읽는다. 그는 만화책의 대사, 전시회의 그림, 광고에 적힌 문구 등을 읽는 것도 독서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치다 선생이 주장하는 독서의 의미를 단순히 눈으로 훑어보는 행위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우치다 선생이 말한 독서의 정의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책이든 만화책이든 분야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뭐든지 온몸으로 읽으면서 강렬한 신체적 쾌감을 느꼈다면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다. ‘강렬한 신체적 쾌감은 독서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면서 얻는 정신적 만족감 또는 우월감이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다’, ‘책에 있는 내용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라고 반응하는 감정들이 생겼다면 신체적 쾌감을 느낀 것이다.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은 뭐라고 분류하기 어려운 책이다. 우치다 선생은 오랫동안 책, 독서 행위, 무예(武藝), 일본의 현실 등 다양한 주제의 잡문을 자신의 블로그에 공개했다. 책 제목만 보고 다독가의 책 읽는 방법론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 것. 이 책은 제목만 교양 에세이집인 블로그 글 모음집이다. 그래도 잡문이라고 해서 가볍게 봐선 안 된다. 이 책에 수록된 두 편의 글, <현실 각성><배우는 힘>은 지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자만에 빠지거나 배움을 게을리 하는 독자들을 일깨우는 뾰족한 바늘과 같은 글이다. 나머지 글은 일본 저자의 책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아마도 국내 독자들에게는 낯설고 생소할 것이다. 책을 보다가 흥미 없는 글이 나오면 과감히 건너뛰시라.

 

귀찮더라도 어떤 책을 읽을 땐 뾰족하게 독해(본 책의 부제)해야 한다. 저자도 완벽할 수 없는 사람이다. 저자가 책을 쓰다 보면 상식에 벗어난 주장을 할 수 있고, 잘못된 정보를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도 있다. 본 책에 수록된 <토크빌 선생과 잡담>뾰족하게 독해’해야 할 내용이 있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글이다.

 

일단 먼저 <토크빌 선생과 잡담>에 대한 칭찬부터 하자면, 글의 전개 방식이 신선하고 재미있다. 우치다 선생은 이 글에서 자신이 미국을 분석한 책(제목은 저잣거리의 미국론’)을 쓰게 된 목적을 밝힌다. 그는 비전문가가 이해할 수 있는 미국론을 쓰기 위해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미국의 민주주의를 참고했다. 우치다 선생은 토크빌이 무덤에서 살아 돌아온다는 가정을 해서 그를 독자로 상정한 미국론을 썼다고 한다. 글 중반부에 우치다 선생과 토크빌의 가상 대화(우치다는 토크빌과의 잡담을 망상이라고 표현했다)가 나온다. 두 사람은 국익을 위해 지배 야욕을 드러낸 미국의 추악한 역사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다음에 나올 문장은 두 사람의 가상 대화의 일부다.

 

 

 결국 일본열도를 원자폭탄(이라는 굉장한 병기를 미국인이 발명했지요) 두 방으로 초토화하고 그 후에 한반도를 불바다로 만들고 인도차이나반도를 불바다로‥…. (249)

 

 

인용문의 발언자는 우치다 선생이다. 토크빌은 20세기에 미국이 한 일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치다 선생은 19458월에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두 번이나 투하한 일과 미국이 참전한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설명해준다.

 

그런데 미국인이 원자폭탄을 발명했다는 우치다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우치다 선생이 현대 문명을 잘 모르는 토크빌을 위해서 쉽게 설명했다고 해도,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하면 곤란하다. 어차피 토크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서 우치다 선생의 설명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망상이나 다름없는 가상 대화를 지켜보고 있을 독자들을 생각하면, 우치다 선생의 발언은 문제가 있다.

 

원자폭탄이 미국에서 개발되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정부는 비밀리에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을 진행하여 핵무기를 개발했다.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연구 시설 중에는 영국, 캐나나 대학들이 포함되었으며 전 세계 과학자들이 미국이 주도한 극비 무기 개발 계획에 합류했다. 맨해튼 계획에 합류한 학자 중에 덴마크 출신의 닐스 보어(Niels Bohr)가 있었다. 역시 맨해튼 계획에 합류한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이탈리아 출신)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 헝가리 출신)은 미국으로 귀화한 학자들이다.

 

우치다는 본 책 서문(13)복잡한 문제를 복잡한 채로 다루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역사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역사적인 사건을 입체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편파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원자폭탄의 개발 역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미국인이 원자폭탄을 만들었다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원자폭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정치적 및 외교적 이해관계와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의 속사정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원자폭탄 만들기2(마이클 로즈, 사이언스북스, 2003)을 참조하시라.

 

 

그 다음 문장(251)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우치다: 그러고 보면 맥아더 원수도 필리핀에서 철수할 때에 “I Shall return”이라고 했으니까요.

 

토크빌: “잠깐만 그 사람은 누구야?”

 

우치다: 전쟁 전에는 필리핀의 임금 같은 존재였고 일본이 전쟁에서 진 후에 최고사령관으로 온 사람입니다.

 

토크빌: ‥… 식민지 총독 같은 사람이구먼.”

 

우치다: 그렇지요.

 

 

1940년대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워 동아시아 국가들의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했다. 토크빌의 고국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제국주의 열강으로 부상하면서 아프리카 대륙과 인도차이나반도의 동부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다. 토크빌은 제국주의를 옹호한 인물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하면 맥아더(Douglas MacArthur)를 식민지 총독과 같은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두 사람의 말에 맞장구치고 싶지 않다. 19세기 미국의 식민 정책과 대외적으로 패권적인 지배를 행사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실상은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누가 누굴 보고 미국을 욕하고 있는가.

 

우치다가 의도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맥아더를 식민지 총독과 같은 사람으로 보는 그의 입장은 일본의 과거사를 은근슬쩍 회피하고 부정하는 뉘앙스를 드러낸다(물론 내가 지적한 문제의 내용만 가지고 그를 극우라고 판단할 수 없다). 일본의 극우는 미국의 침략 행위를 비판하는 동시에 일본을 식민지와 동일한 선상에 있는 전쟁 피해국의 위치에 놓으면서 과거사를 왜곡한다. 그렇게 되면 전범국가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며 이에 대한 국제적 지탄을 면피할 수 있다.

 

우치다 선생은 <독자와 책 구입자>라는 글에서 (자신을 향한) 비판이 옳다면 나는 반론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라고 밝혔다(377쪽 참조). 우치다 선생은 자신의 글을 뾰족하게 독해한 내 의견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일본어를 쓸 줄 모르며, 우치다 선생은 한국어를 모른다.

 

 

    

 

 

 

Mini 미주알 고주알

 

 

* <비인정한 세 남자> 124

 

  아무리 시적이라 해도 땅 위를 뛰어다니고 돈 계산을 잊어버릴 틈이 없다. 셸리가 종달새 소리를 듣고 탄식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 나스메 소세키(夏目漱石)풀베개머리말에 있는 문장이다. 셸리(Percy Bysshe Shelley)는 영국의 시인이며 종달새에게 또는 종달새에 부쳐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시 To a Skylark를 썼다.

 

 

 

 

* <에크리튀르> 467

 

  미셸 푸코는 2천 명의 독자를 상정해서 언어와 사물[]을 썼음을 확실히 밝혔다.

 

 

[] 언어와 사물의 국내 번역본 제목은 말과 사물(민음사, 2012)이다. 본 책 484쪽에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을 출판할 때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독자를 프랑스 국내에서 최대 2천 명으로 보았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언어와 사물말과 사물은 같은 책이다. 말과 사물의 원서명은 ‘Les mots et les choses’이다. ‘mot’는 말, 단어를 뜻하는 프랑스어다. 언어를 뜻하는 프랑스어는 ‘langue(랑그). 랑그는 파롤(Parole)과 함께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언어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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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0-12-04 0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치다란 사람이 맥아더 장군을 식민지 총독으로 말한것은 과거사를 회피하기 위한 발언일수도 있지만-물론 이것이 맞겠지요-제가 알기로는 실제 맥아더 장군의 부친이 과거 필리핀 임 미국 식민지 시절에 주둔한 사령관인지 총독인지로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것 같습니다.

cyrus 2020-12-04 10:58   좋아요 0 | URL
우치다가 맥아더를 “전쟁 전에는 필리핀의 임금 같은 존재”였다고 언급했는데 이 문장만 보고 몇몇 독자는 맥아더가 필리핀 육군 원수였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밀리터리 덕후가 아닌 독자들은 맥아더가 한 일을 모르고 지나쳤을 거예요. 제가 가상 대화의 전개에 초점을 맞춰서 읽다보니 맥아더에 대해서 알아보지 못했어요. 맥아더의 아버지가 필리핀의 군정 총독이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

페크pek0501 2020-12-04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도 이 저자의 책을 두 권 가지고 있어요. 생각난 김에 찾아봐야겠네요.

앞으로 cyrus 님의 왕성한 서재 활동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