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 어느 페미니스트의 질병 관통기
조한진희(반다) 지음 / 동녘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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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몸이 정상적으로 돌아왔구나. 많이 건강해져서 다행이다”

 

 

작년에 통풍을 겪고 난 후에 지인이 건넨 인사였다. 한동안 연락이 뜸해진 사이에 건강해진 내 모습을 보고 축하한 마음에 하는 인사였지만, 나는 그 말이 듣기 거북했다. 지인은 간헐적으로 통증에 시달리는 내 모습이 ‘비정상적’으로 느꼈던가 보다. 물론 몸이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거나 변하는 상태는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몸의 비정상적 상태를 질병이나 증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몸이 그런 상태라고 해서 아픈 사람 자체를 비정상인으로 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정상적인 몸’을 가졌고, ‘정상적인 사람’일까? 또 어떤 몸/사람이 ‘비정상적’인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어떻게 생기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일단 비정상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결핍’이고, 또 하나는 ‘과잉’이다. 의사들은 이를 모두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진단한다. 과거에 장애인은 ‘뭔가 결핍되고 온전치 못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은 호르몬과 행동의 과잉 상태로 인한 장애가 현대의 정신 의학에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학교에서 아이가 지나치게 활발하면 대개 부모들은 자식이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ADHD)’가 있는지 의심한다. 대부분 사람은 아픈 사람과 장애인을 불쌍하게 여긴다. 이 불쌍한 사람과 함께 사는 가족의 삶에 ‘불행한’, ‘딱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불치병이나 장애가 있는 가족 구성원이 있는 가정은 ‘비정상 가족’으로 낙인찍힌다. 이렇다 보니 아픈 사람과 장애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늘 미안해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주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반다’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조한진희도 암 진단을 받은 이후로 ‘아픈 사람’으로서의 자괴감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느끼면서 살아왔다. 그녀는 몇 년 동안 자신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병상 일지’ 비슷한 글을 썼다. 드디어 그녀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아파서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어서 아팠던 것이라고. 그녀는 자신을 부정적 존재로 만드는 세상 앞에서 쿨하게 한 마디 던진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오로지 건강한 몸을 선호하며 이를 ‘정상적인 몸’의 표준으로 본다. 이런 사회 속에 대중 매체는 ‘건강한 몸’을 가진 사람들의 언어를 주목하고, 열심히 그것을 실어 나른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람들은 “저처럼 운동하면 살을 뺄 수 있어요”라고 말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장애인은 “여러분(장애인)도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면서 확신한다. 그들은 질병과 장애를 극복하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준다. 그들이 말하는 ‘좋은 일’이란 아프거나 결핍된 ‘비정상인 몸’을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건강해진 ‘정상적인 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건강한 사람 또는 건강한 장애인을 선호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건강을 유지하면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정상적인 사람’ 서사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이렇게 되면 아픈 사람과 장애인을 설명할 언어는 사라지게 되고, 그들의 삶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게 된다. ‘정상적인 사람’ 서사에 부합되지 않은, 아픈 사람과 장애인은 ‘불행한 비정상적인 존재’로 남는다.

 

건강하게 사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건강을 강요하는’ 건강 중심 사회 앞에서 아픈 사람과 장애인의 말과 경험은 언제나 침묵 당할 수밖에 없다. 아픈 사람들은 질병을 부정적으로 보는 주변의 시선에 계속 상처받으며 사는 게 싫어서 장기적인 치료가 동반되는 입원 생활을 선택한다. 그러나 병이 호전되지 않으면 더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 무력감을 느낀다. 이런 무력감은 그들을 작아지게 만들고, 또 한 번 아프게 만든다. 위축된 그들은 이 아픔의 원인을 오로지 ‘개인 탓’이라고 여긴다.

 

개인의 잘못된 식습관이나 생활환경으로 인해 몸이 나빠질 수 있고, 질병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건강하지 못한 삶을 무조건 ‘개인의 문제’로만 규정할 수 없다. 질병을 우리 삶을 망가뜨리는 위험 요소로 인식하고, 아픈 사람을 인생의 패배자로 단정하는 건강 중심 사회는 ‘질병의 개인화’를 고착시킨다. 저자는 ‘질병의 개인화’가 아픈 사람에게 건강관리를 소홀히 한 문제의 책임을 묻는다고 지적한다. 건강 중심 사회 속에 사는 아픈 사람은 ‘내가 잘못 살아서’ 아픈 거라는 생각에 자기혐오에 빠지기 쉽다.

 

저자는 ‘잘 아플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생 아프면서 살아가자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플 수 있고,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죽을 수 있다. 이러한 운명을 너무 비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질병과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즉 질병과 장애를 우리 삶의 일부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아파도, 몸이 좀 불편해도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

 

‘건강한 삶’이라는 말에 너무 믿지 말자. 건강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배경에는 대중이 불안한 심리 상태에 빠지도록 만드는 교묘한 술수가 숨어 있다. 건강하지 못한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심각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병원에 자주 들락날락하고, 약을 과다 복용한다. 인간적인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불안마저 병으로 진단하게 하고, 살면서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되는 몸의 통증이나 내면의 아픔을 죄다 치료 대상으로 몰아넣으면 일상을 더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내 몸과 정신이 ‘과연 정상일까“라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하면, 그것이 내 감정을 지배하는 어두운 구름이 되지 않도록 말끔히 걷어내자.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누구도 내 몸과 정신을 정상인지 아닌지 함부로 구분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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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7-12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 중심 사회, 라는 말을 처음 생각해 봅니다. 돈에 지나치게 큰 가치를 두고 남에게 ˝부자 되세요.˝하고 말하는 것처럼, 건강한 삶만이 좋은 것인 양 ˝건강하세요.˝라고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건강은 (생활 습관이라는 변수도 중요하겠지만) 타고난다고 봐요. 유전자의 힘이 세다는 것이죠. 누군가는 폐가 약하고 누군가는 간이 약하고 누군가는 우울증에 잘 걸리고... 이런 경향이 있다는 거죠. 그러니 병에 걸렸다고 해서 사람 자체를 탓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cyrus 2019-07-12 15:28   좋아요 0 | URL
유전이 건강에 영향을 준 건 사실이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를 근거로 아픈 사람뿐만 아니라 아픈 사람과 함께 사는 가족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말을 합니다. 예를 들어 아기가 몸이 약한 상태로 태어나면, 사람들은 아기가 건강하지 못한 원인을 부모의 건강 상태에서 찾습니다. 이러면 부모는 죄책감을 느끼게 되죠. 아픈 사람들은 결혼과 육아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왜냐하면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이 자식에게 유전되지 않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2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한 삶의 기준을 수치화하고 이를 수치화하여 기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여기에 무조건 맞추기를 강요하는 것이 과연 건강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cyrus 2019-07-15 16:44   좋아요 1 | URL
건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많이 사용되는 수치가 몸무게입니다. 몸무게 수를 줄여서 날씬해진 몸은 건강미 넘치는 몸으로 주목받죠. 겉모습만으로 건강한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워요. 건강해 보이던 사람이 속병을 미처 발견하지 못해서 단명하는 경우가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