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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바디 : 레고인간이 온다 - 한국과학창의재단 2019년 우수과학도서 선정작 ㅣ 포스트휴먼 총서 2
몸문화연구소 지음 / 필로소픽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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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이보그(cyborg)다.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사이보그’라는 단어의 의미를 곱씹어 보면 수긍이 될 것이다. 사이보그는 인공 두뇌학을 뜻하는 ‘cybernetic’과 생명체를 뜻하는 ‘organism’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1950년대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과학자들이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들은 극한 환경에서 버틸 수 있는 인공 장기를 연구했다. 따라서 사이보그는 한마디로 말하면 인공 생명체이다. 모든 신체를 기계로 대체한 생명체를 ‘인조인간’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안드로이드(Android)가 인조인간에 가장 근접한 개념이다. 사이보그는 신체나 장기의 일부만 기계와 결합한 인간을 뜻한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심각한 근시라서 안경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불편할 정도다. 내게 안경은 ‘인공 안구’이다. 나는 평생 ‘인공 안구’를 쓰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사이보그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신체에 인공 장기나 기계를 장착하는 기술은 상상 속에 나올 법한 미래 기술이 아니다. 미래학자들은 생명공학의 발달과 인공 장기 연구 개발이 인간과 기계의 급속한 융합을 불러올 것으로 예측한다. 인간 속에 기계가 들어오는 것을 ‘기계의 역습’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기술에 감탄하면서 무병장수를 향한 기대를 한껏 부풀어 오르고 있다.
인간 속에 기계가 들어오고 기계가 인간과 유사한 방향으로 진화되고 있는 지금,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해체되고 있다. 현재 인간은 ‘트랜스휴먼(transhuman)’ 혹은 ‘포스트휴먼(posthuman)’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트랜스휴먼은 과학 기술을 이용해 정신적, 육체적 성질과 능력이 개선된 인간이다. 트랜스휴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즉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과학과 신생기술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약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유전자 조작, 줄기세포 연구, 인공지능 같은 부문이 트랜스휴먼의 연구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트랜스휴먼도 인간 이외의 존재를 타자화하는 인간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것을 보완한 포스트휴먼과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이 주목받고 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선 인간의 욕망을 꺾기 힘들어 보인다. 결국 첨단 과학 기술은 인간이 자신의 몸을 디자인하고 설계하는 시대를 열어젖힐 것이다. 트랜스휴먼을 넘어선 새로운 인간, 즉 포스트휴먼의 탄생은 멀지 않다. 이런저런 논란이 있지만 포스트휴먼 시대가 새 질서를 창조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최근 포스트휴먼 시대에 대한 논의에 인문학자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방관하다간 자칫 인간이 소외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서다. 또 삶과 죽음,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미래에 새로운 존재론, 가치관, 윤리관 정립을 위해 인문학이 나서야 한다는 자각 때문이기도 하다. ‘몸문화연구소’가 기획한 《포스트바디》는 포스트휴먼 시대에 구현될 몸에 대해서 현실적인 질문을 제시한다. 몸문화연구소는 2007년에 설립된 연구 단체로, 과학 기술 및 문화의 변화 속도에 대응하는 ‘몸 담론’을 만드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그리스 델포이 신전 기둥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무지하고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이제 포스트휴먼에 대한 열풍을 보면서 새롭게 질문해야 한다. ‘내 몸을 알라.’ 왜 내 몸을 알아야 하는가? 사실 우리 몸도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튼튼하고, 균형 잡힌 ‘이상적인 몸’을 갈망한다.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은 완벽한 인간을 꿈꾼다. 그렇다면 과연 미래에 모든 이들은 완벽한 몸을 가질 수 있을까? 포스트휴먼의 몸으로 살아가는 게 진정 우리가 원하는 삶인가? 《포스트바디》는 포스트휴먼 시대에 대한 비관적인 두려움 대신 지금 포스트휴머니즘이 우리 삶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지, 포스트휴먼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이면서 성찰할 수 있을지를 논의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다시 몸, 삶, 인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몸, 삶, 인간상은 무엇인가? 이 단순한 질문에 답변하지 못하거나 우리 스스로 질문 자체를 회피한다면 포스트휴먼 시대가 요구하는 과학 기술과 ‘이상적인 삶(또는 몸)’에 종속되는 삶에 살게 된다. 뛰어난 지능과 신체 능력, 외모 향상 등을 통해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와 과학 기술이 만나면 인간의 몸과 삶의 다양성이 사라진다. 모든 사람이 ‘완벽한 몸’인 포스트바디로 살아간다면, ‘진짜 나’, ‘진짜 삶’이라는 게 있을까? 이렇게 살면 정말 행복할까? ‘내가 원하는 몸,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포스트휴먼 시대로 들어서는 우리가 스스로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이 숙제를 무시한 채 과학 기술의 혜택을 누리면서 살아간다면, 포스트바디는 축복의 몸이 아니라 저주의 몸이 될 수 있다. 내 몸인데 내 몸이 아닌, 뭐라고 정의하기 힘든 몸으로 말이다.
※ Trivia
* 13쪽에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를 잘못 적은 ‘로버트 프루스트’가 있다. 예전에 프로스트를 ‘프루스트’로 적은 책을 본 적이 있다. 두 개 성(姓)의 철자가 다르다. 프랑스의 소설가 프루스트의 철자는 ‘Proust’이다.
* 148쪽
우리가 애니메이션 <건담> 시리나, 영화 <퍼시픽림>에서 보아왔듯이, 인간과 로봇, 인간과 무기를 한 몸처럼 연결해서 전투 능력을 극대화하는 시대가 열릴 수도 있다.
→ ‘시리즈나’로 고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