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소외가 가속되는 현대사회에서 예술가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자본주의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중국 출신으로 프랑스에 망명한 작가 가오싱젠(高行健)에 주어진 질문이다. 소설가, 극작가, 미술가로 다방면에 걸쳐 활동해온 가오싱젠은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 중 ‘하방(下放: 반체제 지식인을 농촌이나 공장으로 보내 강제 노동을 시키는 조치)’을 겪었으며, 1989년 톈안먼 사태를 정면 비판해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중국어권 작가로는 처음으로 2000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돌베개, 2013)

 

 

 

《창작에 대하여》(돌베개)는 가오싱젠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전후에 한 강연, 대담 등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는 문학에 대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간섭과 함께 자본주의 질서를 견제하면서 인간 본성으로의 회귀와 작가 내면의 독립적 사고를 중시하는 문학론을 펼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작가는 정치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를 거리를 두어야 하며, 자신의 내면을 관조할 수 있어야 자기만의 고유한 목소리(문학)가 나온다. 정치와 경제를 탈피하는 작가 개인의 목소리는 사회적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냉철한 관점으로 자아(작가)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가오싱젠은 늘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을 비판하면서 예술이 본래 모습을 잃었다고 말한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예술은 권력자들의 정치 논리에 조종당해 전통을 부정하고, 기존의 틀을 파괴했다. 가오싱젠이 생각하는 예술가는 이전 세계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혁명가’가 아니다. 그는 세계를 다른 눈으로 보고 새로운 방법으로 담아내는 창작 방식을 예술가의 소임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람들이 느끼지만,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을 새로운 언어체계로 표현하는 것이 예술가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을 관조하는 자세’가 선행돼야 한다. 그는 『예술가의 미학』 강연에서 다른 철학자들의 미학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심미 체험을 바탕으로 예술 창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미학을 제시한다. 전자의 미학은 철학자들이 선호한다. 그들은 예술 작품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해석한다. 후자의 미학은 예술가를 위한 ‘창작미학’이다. 예술가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예술가의 창작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주관적인 미감(美感)이다.

 

예술 작품은 창작자의 고유한 미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공산품과 마찬가지로 상품으로서 경제적 가치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예술 작품을 둘러싼 두 가지 상반된 가치는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돼 왔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례가 예술가와 평론가의 관계이다. 가오싱젠은 예술가가 외부 압력(예술 작품을 보는 평론가들의 반응과 평가)을 이겨내면서 본인이 표현하고 싶은 걸 보여준다면 예술로서의 가치를 지켜낼 수 있다고 말한다. 적어도 예술가는 창작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예술가는 그 어떤 규범에도 휘둘리지 않고 홀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술가라면 자신의 창작세계에서만큼은 충분한 자유를 누리고 용기와 신념을 발휘해야 합니다. 정치나 윤리의 교조를 벗어던지고 유행과 습속의 구속도 떨쳐내야 합니다.

  ‘주의’나 방법은 어디까지나 평론가들의 일일 뿐입니다. 예술가가 이런 시비논쟁에 뛰어드는 것은 너무나 쓸데없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창작의 정서를 파괴하는 함정입니다. 예술가는 이런 논쟁에 뛰어드는 순간, 자신의 예술을 들고 논쟁터로 나가 싸우게 되고 맙니다. 창작에 그보다 끔찍한 재난이 또 있을까요? 예술가가 자신의 창작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은 처음부터 시비쟁론에 뛰어들지 않는 것입니다. 시끄러운 논쟁은 미디어나 예술시장에서 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예술가는 자기 자신의 길을 가면 됩니다.

 

(『예술가의 미학』, 139쪽)

 

 

예술가와 평론가는 오래된 공생 관계를 지니고 있다. 평론가들은 미술 담론 등 미술계에서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미술 발전에 이바지를 하고 있다. 평론가들의 활동은 우수한 예술 작품과 이를 창작하는 예술가들의 발전과 함께 올바른 평가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상에 거하던 예술이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 편입되면서 평론가들의 권위는 날로 높아지고 있으며 ‘예술의 상품화’를 부추기는 데 일조한다. 평론가의 권위에 예술 작품의 상품성이 주가 되어 개입하면 작품의 가치에 큰 영향을 미친다. 예술가의 이력보다 평론가들의 작품 설명이 컬렉터의 마음을 움직인다.

 

 

 

 

 

 

 

 

 

 

 

 

 

 

 

 

 

 

* 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열린책들, 2002)

 

 

 

창작자가 자신의 작품에 시비 거는 평론가들과의 논쟁에 휘말린다면 창작의 길을 걷기가 힘들어진다.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uskind)의 짤막한 소설 『깊이에의 강요』는 예술에 대한 일방적이고 주관적인 평론가들의 평가에 안고 있는 위험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어느 촉망받는 화가가 평론가에게 ‘당신의 작품에는 깊이가 없다’라는 말을 듣는다. 화가는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멍하니 앉아 한 가지 생각에만 골몰했다. “왜 내 그림에는 깊이가 없을까?” 그녀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었다. 대신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미술서적을 들여다보고, 화랑과 박물관 등을 돌아다니며 깊이를 얻고자 노력했다. 그녀는 그 깊이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고, 결국 좌절해서 자살하고 만다. 그러나 평론가는 화가의 죽음을 전해 듣고 삶을 ‘깊이 있게’ 파헤치던 그녀의 재능을 아까워한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창작미학과 동떨어진 평론가들의 평가와 마주쳐야 하고, 그것 때문에 혼자 고민해야 하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가오싱젠의 『예술가의 미학』과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를 겹쳐서 읽으면,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예술과 아름다움의 가치에 대해 절대적 기준을 만들어 내는 해석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세상에 예술가와 아름다움의 종류는 정말 많다. 예술가도 이런 예술가, 저런 예술가가 있는 거고, 예술을 감상하는 우리는 그들이 지향하는 창작미학을 선택해서 볼 수 있다. 예술가에게 ‘창작의 자유’가 있다면, 감상자인 우리는 마음에 드는 ‘예술을 즐길 자유’가 있다. 적어도 그러한 자유를 즐기려면 예술과 아름다움을 어떠한 틀에 가두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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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3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3 1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3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9-01-03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오싱젠은 무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인데
기묘하게도 국내에 나와 있는 책들이 별로
없네요... 그것 참 -

cyrus 2019-01-03 19:58   좋아요 0 | URL
현재 살아남은 가오싱젠의 책은 《버스 정류장》과 《창작에 대하여》뿐이네요. 《버스 정류장》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되지 않았으면 절판되었을 거예요. ^^;;

2019-01-03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1-04 16:56   좋아요 1 | URL
예술가들의 도전 정신은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평론가들은 권위의 이점을 알게 된 순간, 전문가로서의 위치에 안주하게 되고 새로운 것을 이해하지 못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