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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8년 10월
평점 :
지금 당장은 아닐지언정 언제라도 죽음은 찾아올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말을 했든 못했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내 침묵은 나를 지켜 준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침묵도 당신을 지켜 주지 않을 것입니다.
- 오드리 로드, 『침묵을 언어와 행동으로 바꾼다는 것』 중에서[주] -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전자로 문화와 사회적 현상을 해석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는 ‘밈(Meme)’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 언어나 문화와 같은 부문도 유전자처럼 진화한다고 설명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문화 유전자가 생물학적 유전자 진화 속도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는 것이다. 밈은 ‘모방’이라는 형태로 복제하기 때문에 유전자에 비해 정확한 복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각자마다 다른 변형을 가지게 된다. 힘을 얻은 밈은 복제되면서 널리 퍼지고 세대를 초월해 영향을 미친다.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Harvey Weinstein)의 성폭력 스캔들이 알려진 후 미국에서는 트위터를 중심으로 ‘미투(#MeToo)’ 운동이 확산하였다. 유명 배우들과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나도(Me too)’ 성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음을 말하면서 와인스타인의 행태뿐 아니라 사회에 만연한 젠더 불평등과 폭력을 고발했다. 미투 운동은 미국 밖으로도 번져나갔다.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이 캠페인은 여성들의 일상 속에 들어와 있는 성범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남성들 사이에 성폭력 사실을 자백하는 ‘내가 그랬다(#IDidThat)’ 캠페인과 남성들의 의식 변화를 촉구하는 ‘어떻게 바꿀 것인가(HowIWillChange)’ 캠페인이 등장했다. 한 사람의 용기 있는 행동이 여러 사람의 동참과 반성을 이끌어내고 사회 분위기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은 ‘올바른 밈’이다.
한편 반대의 예도 있다. ‘잘못된 밈’이다.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연예인들의 친척이 자신의 돈을 빌린 뒤 갚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글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언론들은 미투 운동과 ‘빚’을 합성해 ‘빚투 운동’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심지어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해시태그 ‘#빚too’도 등장했다. 채무로 인해 피해자들이 겪었던 고통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연예인 가족의 채무 불이행을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는 빚을 갚지 않은 연예인 가족들, 즉 가해자의 목록을 늘리고 있을 뿐이다. 언론의 지나친 보도는 ‘폭로전’으로 번진다. 미투 운동은 가해자 처벌을 원하는 ‘폭로전’이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미투’라는 단어만 가져와서 막연하게 사용하는 것은 미투 운동의 진정한 취지를 왜곡하는 일이다. 미투 운동은 여성들이 겪은 부당한 차별과 억압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미투 운동은 단순히 소리치고 분노하는 여성들 무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들은 ‘침묵을 거부하고 말하기 시작한 피해 여성들’이 아니라 침묵을 거부하고 외치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녀들의 언어와 목소리는 ‘침묵’을 먹고 커져버린 불합리한 관행에 맞서는 강력한 ‘무기’이다.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자신의 책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서문에서 멕시코 반란군 부사령관 마르코스(Marcos)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의 말은 우리들의 무기입니다.’ 그녀는 이 말을 인용하면서 침묵의 성채에 향해 던지는 ‘언어’의 힘에 주목한다. 무언가를 정확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는 건 그것의 숨겨진 부정적인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다. 부정적인 진실에 의해 형성된 ‘비정상적인 상식’을 폐기하거나 바꾸려면 새로운 이름으로 명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성폭력’은 1970년대에 만들어진 단어이다. 대중적으로 쓰인 건 1990년대 들어서다. 그때도 여전히 여성은 침묵, 금기, 왜곡에 포위됐다. 비정상적인 현상은 존재했지만 ‘무기로서의 언어’가 부재했던 여성들의 목소리는 제한되거나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솔닛은 ‘언어의 위기’를 우려한다. 특정 세력은 자신들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그럴듯한 언어’를 내세운다. 이러한 언어들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 그리고 갈등과 혼란을 만들어 낸다.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의 ‘역차별’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면서 ‘양성평등’을 강조하기 위해 ‘젠더 이퀄리즘(Gender Equalism)’이라는 말을 소환한다. 이 말은 페미니즘을 비난하고 대체하는 근거로 사용됐다. 심지어 진보주의자들도 이퀄리즘을 옹호했다. 그런데 이퀄리즘은 학계에 존재하는 말이 아니다.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인터넷 누리꾼들이 만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이퀄리즘을 ‘서구에서 페미니즘을 대체한 개념’인 것처럼 사용했다. 자신이 만든 말에 학문적 권위를 스스로 부여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보편적 언어’가 되는 건 아니다.
우리는 ‘가짜 정보’가 너무나 손쉽게 만들어지고, 그것이 ‘사실’로 간주하여 공유되는 ‘언어의 위기’를 겪고 있다. 언어를 정확하고 조심스럽게 쓰지 않으면 ‘빚투’와 같은 ‘끔직한 혼종’이 나온다. 모든 것을 정확한 말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세상뿐만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무기보다 더 막강한 말의 힘이다. 우리가 ‘정확한 이름’을 부르기 위해 부당한 현실에 대항해야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침묵하는 다수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오드리 로드(Audre Lorde)가 말했듯이 침묵은 나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
[주] 《시스터 아웃사이더》, 후마니타스, 47~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