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4월 23일)《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교양인, 2018, 약칭 ‘피가페’) 1, 2, 5장을 함께 읽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린 날이라서 그런지 모임에 참석한 사람이 적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총 일곱 명이 참석했습니다.

 

우리 모임에 특별한 손님 한 분 오셨어요. 영남일보 소속 기자님인데, 대구에 있는 페미니즘 모임을 취재하러 왔습니다. 페미니즘 모임에 오래 활동한 레드스타킹 멤버들이 기자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잘 하셔서 저는 인터뷰하는 과정을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실은 제가 말을 잘 하는 편이 아니에요. 저는  내심 조용히 묻어가길 바랐는데 기자님이 저에게도 질문했어요. 어떤 계기로 페미니즘을 공부하게 됐는지 물어봤어요. 저는 가부장제, 남성 연대(Homosocial)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됐고,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을 접하게 돼서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답변했습니다.

 

오늘 영남일보 기사가 나왔어요. 이 기사에 레드스타킹과 경북대학교의 대학생 페미니스트 모임인 KFC(Kyungbuk University Feminist Club)가 함께 소개됐어요. 대구에 음지에서 활동 중인 페미니즘 모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모임들이 더욱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 [“위드유” 페미니즘 ‘열공’ 모임 늘고 있다]

영남일보, 2018년 4월 26일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80426.010210749320001

 

 

 

원래 저녁 7시 30분부터 독서 토론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인터뷰 시간이 늘어난 관계로 8시 조금 넘은 뒤에야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 [레드스타킹의 선택] 권김현영 엮음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교양인, 2018)

 

 

 

이 책은 우리나라 페미니스트가 더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독자에게는 읽기 어려운 책일 수 있습니다. 진○님은 이 책을 두 번 읽고서야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특히 권김현영 님이 쓴 1장(『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은 꼼꼼히 읽어볼 필요가 있어요. 멤버들은 1장에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 몇몇 내용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효○ 님은 “피해자 중심주의에 벗어나라”는 권김현영 님의 입장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여성들은 성범죄가 일어나면 피해자 여성의 입장을 이해해주고, 무조건 피해자의 편을 들어줬습니다. 피해자를 적극 지지해주는 것만이 페미니스트의 역할이고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정치적 운동의 목적으로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권김현영 님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철저히 구분하면서 성폭력 문제에 접근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혜○ 님은 권김현영 님이 쓴 ‘들어가는 글’ 9쪽의 문장을 보자마자 슬펐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 문장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언제까지 페미니즘 정치학은 피해 경험의 공통성에서 의식 고양의 ‘땔감’을 구하고, 분노하고 폭로하는 정치를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늘 같은 곳을 맴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수많은 문제적 개인들을 지목하면서 가해의 목록을 늘리고 피해 증거를 수집하며 억압받는 경험의 공통성에 천착하는 것은, 결국 여성을 피해라는 현실에 정박시키는 것은 아닐까.

 

 

‘의식 고양(consciousness raising)’이란 1960년대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주체성을 찾기 위해 현실적인 문제점(가부장제 사회, 남성중심주의 문화)을 비판하고 그것에 대항하여 극복하려는 의식을 고취하는 운동 방식을 의미합니다.

 

 

 

 

 

 

 

 

 

 

 

 

 

 

 

 

 

 

* 앨리스 에콜스 《나쁜 여자 전성시대》(이매진, 2017)

 

 

 

의식 고양 운동을 전개한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낙태 경험, 성폭력 경험 등을 공유하고 나누는 모임을 결성하거나 관련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녀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이론에 갇히지 않고 현실에 맞서 싸웁니다. 하지만 70년대 전후 이후부터 급진 페미니스트의 입지는 좁아지고, 페미니즘 내 노선 분열이 장기화하면서 여성해방 운동은 ‘의식 고양’만 외치는 수준으로 그치고 맙니다. 급진 페미니스트 특유의 행동주의가 사라지면서 급진 페미니즘이 표방한 정치성(“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은 희미해지고 말았습니다. ‘급진 페미니즘의 전성기와 쇠퇴기’를 잘 보여준 《나쁜 여자 전성시대(이매진, 2017)는 의식 고양 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지 못한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는 책입니다.

 

다시 권김현영 님의 글로 돌아갑시다. 권김현영 님은 피해자의 경험 및 입장에 동일시하고, 피해 사실 폭로에 급급한 페미니즘 정치학이 피해 여성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혜○ 님은 피해 여성만 확인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마는 페미니즘 정치학의 한계가 안타깝게 느껴져서 서글펐다고 했습니다. 지난번에 있었던 ‘경북대 미투’ 기자회견에 참석한 은○ 님은 성폭력 피해자를 만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피해자를 연대하는 방식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이죠. 은○ 님의 의견과 비슷한 내용이 권김현영 님의 글에 나옵니다.

 

 

피해 사실 공론화에 동참한 지지자들 역시 어려움을 겪는다. 용기의 대가가 신상 위협으로 이어지는 사회에서 피해자는 자신을 지지하고 연대했던 이를 가장 미워하기도 한다. 자신의 피해를 앞세워 대의를 확인하려던 건 아니냐며 피해자가 연대자를 비난하는 경우는 자주 목격하고 경험한 일이다. (26쪽)

 

 

저도 그랬습니다. 실제로 미투 운동을 계기로 성폭력 경험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를 만나 봤는데요, 피해자 마음속에 남아있는 정신적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피해자를 지지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분이 담담하게 자신의 아픈 경험을 말했을 때 저는 어떠한 ‘조언’을 하지 않고, 경청만 했습니다. 저는 친족 성폭력 피해자인 일본 여성이 쓴 수기 《소생하는 영혼》 (현민시스템, 1996)에 있는 구절을 잊지 않았습니다.

 

 

 

 

 

 

 

 

 

 

 

 

 

 

 

 

 

* [품절] 호즈미 준《소생하는 영혼》(현민시스템, 1996)

 

  사람에게 ‘조언’은 필요 없다. 사람은 본래 자기 안에 회복에 필요한 모든 것, 답도, 힘도, 지니고 있다.

  정말 고통스러웠을 때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울게 놔두었던 사람이 있었다. 설교, 조언, 위로, 일체 없이, 울음이 그칠 때까지 울게 놔두었던, 넉넉한 가슴의 소유자가 있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닦아준 사람이.

  사람에게 재출발할 용기를 주는 것은 이런 부드러움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나는 그 부드러움이 생각날 때마다 용기와 격려를 다시 얻게 된다.

 

(252쪽)

 

 

 

성폭력에 관한 편견이 강한 사람일수록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낮아지고, 가해자와의 합의를 원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들은 입을 열지 못합니다.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는 사회적 편견(“성폭력의 원인은 피해자의 몸가짐과 복장에 있다”)에 저절로 학습되어 착각하게 됩니다. “내가 잘못한 걸까?” 효○ 님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불명예와 사회적 편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고를 꺼리는 피해자의 상황을 ‘학습된 착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토론 시간이 부족해서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다룬 2장과 정희진 님이 쓴 5장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를 하지 못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정희진 님의 글을 이어서 함께 읽기로 기약했습니다. ‘꽃페미’ 두 번째 강연(나영)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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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6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26 17:02   좋아요 0 | URL
독서모임을 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생기고 있네요. 이럴수록 더욱 겸손해야죠.. ^^;;

페크pek0501 2018-04-30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습된 착각이 많습니다. 영화 드라마 광고 등에서도 그걸 보면서 우리 머릿속에 입력되는 것들이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학습되어 버리는 거죠.
제가 읽은 책에도 그런 게 나옵니다. <재밌다고들 하지만~~>에.

cyrus 2018-05-01 11:53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 엄청난 흥행 기록을 세운 <건축학 개론>에 여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남성의 시선, 또는 여성을 불편하게 만드는 장면이 많아요. 그런데 이런 문제 있는 장면을 그냥 지나치거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그랬어요. 영화를 호평하는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휩쓸리면 영화의 사소한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