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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은 강간이다
조디 래피얼 지음, 최다인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11월
평점 :
올해 초, 프랑스의 배우 카트린 드뇌브와 미술평론가 카트린 미예 등 100명은 전 세계에 확산된 ‘미투 운동’을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르 몽드」에 발표했다. 이들은 성폭행은 범죄지만, ‘남성이 여성을 유혹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투 운동이 남성들을 유혹할 수 있는 여성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공개서한은 비판에 직면했고, 카트린 드뇌브는 엄청난 비난 여론을 견디지 못하고 5일 만에 사과했다. 그녀는 사과문을 통해 자신도 ‘페미니스트’이며 1971년 낙태 처벌 반대 운동에 동참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지극히 주관적인 편견, 잘못된 생각에 근거한 엉뚱한 주장은 오히려 성폭행 피해자에게 악영향을 준다. 놀랍게도 성적 자유를 옹호하는 일부 페미니스트는 성폭행의 심각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성폭행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에게 당하는 경우(면식 강간)가 많다. 성폭행 피해 여성은 남성이나 성에 대해 공포증을 느끼면서 불안이나 우울증세, 죄의식, 자살 충동, 결혼생활에 대한 불안, 생활 부적응 등 심각한 후유증을 앓는다. 성폭행 피해 여성의 후유증이 이처럼 심각한데도 성폭행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심하다.
* 많게는 전체 강간 신고의 50%가 의도적 허위 신고라고 단언한다. [1]
* 강간 피해 여성은 멍청하고 헤프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아서 강간당한 것이다. [2]
* 면식 강간은 문제가 아니라 성적 자유에 따르는 허용 가능한 위험이다. [3]
성폭력은 가해자가 저지른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취급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범죄이다. 성폭행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괴로운 피해자에게 책망하는 것은 피해자뿐만 아니라 피해자 가족들에게까지 정신적 상처를 준다.
여성 성범죄 전담 변호사인 조디 래피얼은 《강간은 강간이다》(글항아리, 2016)라는 책에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고통을 주는 사회적 편견들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강간 부정론자들은 강간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통계를 의심한다. 저자는 2∼8%에 불과한 허위 신고를 근거로 강간 통계의 신뢰성에 꼬투리 잡는 강간 부정론자의 주장이 강간의 위험성을 축소한다고 비판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성적 해방을 페미니즘 운동의 우선순위로 두는 페미니스트(성 해방론자)도 강간 부정론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성 해방론자들의 논리에 따르면 남성을 유혹하는 여성은 주체적인 존재이다. 남성을 유혹하는 과정에서 여성이 강간을 당하면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 책임을 묻어야 한다. 성 해방론자들은 강간을 단순하게 ‘나쁜 섹스’로 치부한다. 이들의 주장은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에 부합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그러나 성폭력 앞에 침묵을 강요받거나 숨죽여야 했던 ‘피해 여성의 목소리’를 지우는 데 일조하는 역효과가 생긴다.
저자가 인터뷰한 다섯 명의 피해자 모두 추악한 진실을 말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강간 사건을 다루는 법정에서조차 강간을 당한 피해 여성에게 오히려 성적으로 능동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냐, 옷을 야하게 입고 있지 않았냐, 위험한 곳에 일부러 혼자 있지 않았느냐 등을 따지며 강간 가해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판을 끌고 가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강간 가해자 편을 드는 사회적 편견과 가해자의 형량을 낮추려는 협잡꾼들 속에 피해 여성은 어느새 가해자로 몰린다. 이러한 ‘2차 가해’를 받는 피해 여성은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렵다.
잘못한 사람은 가해자인데 피해자가 왜 협잡과 편견으로 수치심을 느끼고 고통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가. 《강간은 강간이다》는 성폭행에 대한 편견이 어떻게 확대 재생산되고, 그것이 피해자를 어떻게 괴롭히는지를 보여준다. 《강간은 강간이다》는 성폭행 피해 여성의 행실에 책임을 전가하고, 그녀들의 힘 있는 목소리를 조롱하는 우리 사회를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책이다. 이 ‘거울 같은 책’을 무시하고, 책의 내용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설득해봤자 소용없다. 그들은 날 ‘페미나치 부역자’, ‘여자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남자를 배신한 놈’이라고 험악한 말을 하면서 조롱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약점이 부끄러워서 거울을 보지 않는다. 오로지 상대방를 대할 때 상대방의 약점만 보고 조롱한다. 성폭행의 심각성을 축소하는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사회적 편견과 질시와 힘의 논리로 약자를 굴복시키는 미개한 사회이다.
[1] 조디 래피얼 《강간은 강간이다》, 12쪽
[2] 같은 책, 65쪽
[3] 같은 책, 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