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꿈을 꿨다. 아주 슬픈 꿈이었다. 그러니까 꿈에, 나는 한 남자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상대의 대답이 없는 사랑이었다. 그래서 매일매일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엄마가 그 남자를 찾아갔다. 나는 왜 나의 문제에 엄마가 관여하냐며 그 남자를 찾아가지 말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더이상 너의 힘든 모습을 볼 수 없다며 그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엄마는 그를 만나고 돌아왔다. 그는 서른 여덟살의 남자였다.(왜 서른 여덟인걸까..음..) 그리고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 남자한테 너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너는 괜찮은 여자지만, 너를 좋아하지는 않는다더라." 

나는 엄마로부터 그 말을 듣고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슬퍼했다. 미치도록 슬퍼하다가 눈을 뜨니 여전히 새벽이었다.  

 

내가 이토록 슬픈 꿈을 꾼 건, 절반쯤은, 그러니까 한 오십프로쯤은, 바로 어제 읽은 책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제 읽은 책은 어제였다. 

 

 

 

 

 

 

 

어제에는 몇번 씩이나 '어제'로 시작하는 문장들이 등장한다. 

 

어제도 바람이 불었다. (p.9) 

어제, 내 우편함에서 통지서를 하나 발견했다. (p.49) 

어제,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p.114) 

어제, 병원을 나온 나는 공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p.125)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사람을 슬프게 만들기 위해 작정한 작가인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슬퍼하는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절망하고 좌절하는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우울해지는 지를 잘 아는 그런 작가. 『어제』는 아주 많은 부분에서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과 겹친다. 사생아로 태어난 남자, 동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남자, 망명, 가난,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바꿔야 하는 이름, 매일매일 글을 쓰는 남자. '아고타 크리스토프'에게 가난과 망명과 슬픔과 절망과 이루지 못한 사랑과 글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남자는 여자를 기다린다. 자신의 사랑은 그녀뿐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녀(린)를 내내 기다리면서 다른 여자(욜란드)와 토요일을 보낸다. 

-그런데 왜 그녀를 계속 만나지요? 

-다른 여자가 없기 때문이지요. 다른 여자로 바꾸고 싶지도 않고요. 너무 바꾸다보니 이제 지쳤습니다. 욜란드면 어떻고 다른 여자면 어떻습니까? 다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일주일에 한번씩 그녀의 집에 갑니다. 그녀는 요리를 하고 나는 포도주를 가져갑니다. 우리 사이에 사랑 같은 건 없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당신 입장이야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녀의 감정에는 관심 없습니다. 아무튼 린이 나타날 때까지는 그녀를 계속 만날 겁니다. 

-아직도 린이 올 것을 기대합니까? 

-물론입니다. 저는 그녀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항상 제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녀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저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린이고, 나의 아내이고, 내 사랑이고, 내 인생입니다. (pp.18-19) 

  

남자는,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던 린을 만나게 된다. 그녀를 매일 만나게 되고 그녀와 사랑을 속삭이게 된다. 

나는 이제 린을 보지 않고는 하루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공장에서의 하루는 즐거움이고, 아침에 눈뜸은 행복이며, 버스로 하는 출근길은 세계일주이며, 프랭시팔 광장은 우주의 중심지였다. (pp. 94-95) 

  

이런 『어제』에서 가장 슬픈 부분은 형부를 사랑했던 여자가 자살하는 장면이 아니고, 고국에 있는 아내에게 어떻게든 생활비를 보내보지만 그런 아내가 다른 남자와 함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남자의 좌절하는 장면이 아니고,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며 여자를 유산시키는 남편이 등장하는 장면도 아니고, 

바로 남자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그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린의 떠남을 받아들이는 것.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남자는 이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와서 이제 이곳에서 정착하는구나, 저들은 참 보통의 일상을 사는구나, 하고 보여지게 될 그런 일상.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는 일상. 그 평범한 일상이 가장 이 책을 슬프게 만든다.

  

카롤린이 떠나고 이 년이 지난 뒤, 내 딸 린이 태어났다. 일 년 뒤, 내 아들 토비아스도 태어났다. 

우리는 아침마다 아이들을 탁아소에 맡겼다가 저녁이면 데려온다. 

내 아내 욜란드는 아주 모범적인 엄마다. 

나는 여전히 시계공장에서 일한다. 

첫번째 마을에서는 버스를 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나는 이제 더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 (p.140) 

 

 

어제처럼 비오는 밤에 읽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소설이다.  

어제처럼 비 오는 밤에는 차라리 이런 소설보다 소주 한잔이 나았을텐데. 

 

어제, 나의 꿈속에 나온 남자는 내가 아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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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0-08-29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광진의 '편지'가 떠올랐어요. 노래의 첫 시작이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하고 싶은 말 하려 했던 말 이대로 다 남겨두고서
혹시나 기대도 포기하려 하오'
비 오는 날의 꿈이기에 더 슬퍼요.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셔요, 다락방님!

다락방 2010-08-30 09:30   좋아요 0 | URL
아, 마노아님! 저 그 노래 한동안 미치게 좋아했는데요.

예전에 일일드라마에 그 노래가 삽입이 되어서 처음 알게됐거든요. 드라마 제목은 생각 안나는데, 김정은과 정웅인이 사랑하는 사이었거든요. 그런데 김정은의 어머니와 정웅인의 아버지가 결혼을 하는거에요. 그래서 결국 그 둘은 헤어지게 되거든요. 그때 배경음악이 바로 이 노래더라구요. 가사가 아주 또렷이 들리는거에요.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하는데 정말 와- 뭐 이런 노래가 다있지 싶었어요.

고마워요, 마노아님. 따뜻한 커피를 두잔이나 마셨어요. :)

람혼 2010-08-29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첫째 권 <비밀 노트>를 선물 받아 읽었던 때가 떠오릅니다.
그 책은 정말이지 제게 '커다란 공책(Le Grand Cahier)'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충격'이었죠.
읽은 지가 벌써 6년 전인데도, 여전히 그 독서의 순간을 생각하면 살짝 소름이 돋아 그때의 충격을 곱씹게 됩니다.
지극히 건조한 서술 속, 마치 무의미를 가장한 채 행간에 숨어 있던 그 많은 의미들이,
여전히 지금도 어둠 속에서, 숲 속에서, 길 위에서, 그렇게 '도사리고'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언젠가는 그런 글을 하나 쓰고 싶습니다, 비가 억수처럼 내리는 어느 밤에요.

다락방 2010-08-30 09:31   좋아요 0 | URL
그녀에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아픔이 있었길래 그런 소설을 써냈을까 생각하면서 저 역시 소름 돋았던 기억이 있어요. 아, 이 작가를 대체 어쩌면 좋지, 싶었었죠. 그녀에게 전쟁과 망명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글은 모두 하나로 연결된 것 같았어요. 그것들이 괴롭게 했고, 그것들이 그녀를 살게 했던 것도 같아요. [어제]의 슬픔도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의 슬픔과 별반 다르지 않은걸 보면 말입니다.

그런 글을 쓰게 된다면, 쓰고 나서도 지치지 않을까요? 지치고 다칠것 같아요, 람혼님.

Alicia 2010-08-29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번째,두번째 글을 읽었을 때는 정말 대단한 작가구나 감탄하며 읽었는데 마지막 장을 덮을땐 감탄이 나오지 않았어요. 바닥의 깊이를 모르는 절망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죠.. 그 깊이가 어느정도 될까 더듬더듬 짚어봤지만 헤아리고 싶지가 않았어요.그만큼 깊었지요.
가끔 책 표지속 사진의 그녀 모습이 떠올라요.
그녀가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토록 지독하고 견딜 수 없는 게 생이라면, 살아야 할 이유는 뭘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그 이율 찾기 위해 글을 쓴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
어쨌든 굉장한 소설이지만 저는 그녀의 소설을 다시 읽고 싶지는 않아요. ^^

다락방 2010-08-30 09:38   좋아요 0 | URL
그녀의 소설을 검색해보면 [아무튼]이 있던데, 아마 이것도 다른 작품들과 비슷한 슬픔을 주지 않을까 싶어요. 저 역시 그래서 이 책은 읽지 말아야겠다고 조용히 결심했어요.
Alicia님, 그러니까, 그녀의 다른 작품을 더 읽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우리는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로 충분히 슬펐고 충분히 좌절했으니까요. 충분히 아픔을 읽었잖아요. 그러니까 그녀의 다른 소설을 또 읽을 필요는 없어요. 정말로요.

곽수철 2010-08-29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느 날 나는 남자친구가 있는 한 여자와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물론 처음엔 남자친구가 있는 줄 몰랐지요. 사귀는 사람이 '실은' 있다며 여자가 내게 고백한 건 정확하진 않지만 세 번째 만남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우린 술을 마시고 있었겠지요, 왜냐하면 지금도 그렇지만 누굴 만나면 나는 무조건 술인 거거든요) 아무튼 여자의 얘기를 전해듣는 동안 약간의 충격을 받게 된 나는 짐짓 태연한 척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지요. 너의 그 남자에게 모든 사태의 전말을 정확히 설명하고 정중하게 사과하는 것만이 너의 그를 향한 마지막 도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어쩌면 훗날 '이년'이 어떤 새로운 남자를 획득하기 위해 나를 무척 차갑게 홀대할 수도 있겠구나 같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지요. 그저 유아적 성취감과 비슷한 어떤 감각에 완연히 사로잡혀 있었던 거예요, 지금 생각해 보면, 바보처럼. 아무튼 저녁을 먹으러 나가야 하므로, 지금부턴 그러이러하던 어느 날의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네요. 그러던 어느 날 이 여자가 언젠가 한 번쯤 보았던 것 같은 표정을 심각하게 지으며 내게 고백을 시작합니다. 네, 남자가 생긴 거지요. 이때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게 된 와중에도 이 여자가 나를 만나기 전 사귀었던 예전의 그 남자를 만나 최후의 통첩처럼 건넸다던 일련의 말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돼요. '나 그 남자 만나 얘기 다 했어. 그렇구나.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진 않나봐. 너무 궁금해. 얘기해줄까. 그래. 오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정말 그렇게 말했어? 정말 그렇게 말했어.' 그러니까, 당시엔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지금 뭐랄까, 그때의 이 여자가 새로 생겼다는 남자와 나 몰래 만나 나에 대한 어떤 말들을 분명히 주고받았을 텐데 그렇다면 그 주된 내용은 뭐였을까 궁금하네요. 몇 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래서 지금 나는 다시금 생각해보고 있어요. 그 둘이 뭐라고 이야기를 주고받았을까를. 나 오늘 그 남자 만났어요. 그랬군요. 만나서 뭐랬는진 궁금하지 않나봐요. 아니, 궁금해요. 오빠는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지만, 그 사람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야.
그런데 써놓고 보니 실제로 위와 같은 말을 그 여자로부터 건네들었던 느낌이 생생하네요? 모르겠어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 것인진.

그나저나 우연히 들어오게 된 님의 서재에서 별 유치찬란한 이야기를 너절하게 늘어놓게 되었네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다락방 2010-08-30 09:42   좋아요 0 | URL
음, 결국은 그렇게 되는것일까요? 결국은 다른 사람을 버리고 내게로 왔던 사람은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가기도 쉬운걸까요? 저 역시 그런말을 많이 들어왔고, 또 그런일을 주변에서 보아오기도 했지만, 모두 그런걸까요?
말씀하신 '유아적 성취감과 비슷한 감각에 완연히 사로잡혀 있었다'라고 하신게 이해되요. 그랬겠죠. 나는 이 사람이 전에 만나던 사람보다 더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느낌과, 결국 그 사람은 나를 선택했어, 라는 선택받은 사람의 기분이 그 당시에는 있었겠죠.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을때, 그리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고 싶을때, 이성적으로 생각할 많은 부분들을 놓치게 되죠. 그건 누구나 그래요.

너절한 이야기는 누구나 가지고 있겠죠.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사는 삶도 별반 다르지 않거든요. 저 역시 너절한 이야기 몇개쯤은 가지고 있구요. 다만, 우리는, 이 너절한 이야기를 더는 늘리지 않아도 좋을거에요. 지금 가진것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도 좋을거에요.

yamoo 2010-08-29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고타크리스토프의 책이군요~ 아직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사놓고 읽지 못하고 있는데, 요것도 구해서 함 읽어봐야 겠어요...이 작가의 명성이 하도 대단해서 저도 좀 봐야 할 것 같아서욤~^^

멋진 리뷰 잘봤습니당~~

다락방 2010-08-30 09:43   좋아요 0 | URL
yamoo님, 일단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부터 읽으세요. 이 책은 그 뒤에 읽으셔도 되고,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읽으셨다면, 이 책을 굳이 읽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에 더 많이, 더 깊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으니까요.

차좋아 2010-08-29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그 세 가지가 뭐지? 하고 궁금해 졌어요. 하지만 기억이 안나네요. 책 장을 덮으며 하.. 하고 깊은 숨을 내 밷었던 비밀노트도 줄거리는 생각이 나는데 뭤 때문에 그리 한숨을 내 쉬었는지도 모르겠고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다른 작품을 읽으셨군요. 어제... 오늘, 하제(내일의 순우리말이래요)
어제 오늘 하제가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다가 올 하제 어느 날에 <어제>를 읽어 보아야겠습니다.

다락방 2010-08-30 09:45   좋아요 0 | URL
차좋아님, [어제] 읽고 싶으시면 제가 읽던 책, 보내드릴까요?

저는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때 제가 얼마나 슬퍼하고 충격을 받았었는지가 여전히 기억나네요. 정말 대단히 슬픈 책이었어요. 정말요.

차좋아 2010-08-30 12:32   좋아요 0 | URL
네 보내주세요ㅋㅋ 다락방님의 흔적이 있나요? 밑줄이요 ㅎㅎ 있으면 좋겠다~

2010-08-30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1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0-08-31 12:55   좋아요 0 | URL
보내드릴게요.

그리고, 차좋아님이라니까요. ㅎㅎㅎㅎㅎ

차좋아 2010-09-03 12:0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책 잘 받았습니다 잘 읽겠습니다. 재밌을거 같아요 많이 우울할까 살짝 걱정이 되지만 말이에요
지금 읽고 있어요. 읽고 또 이야기해요^^

다락방 2010-09-03 12:14   좋아요 0 | URL
네네. 슬픈 책이지만 즐겁게 읽으세요. (말이 이상한가..)

pjy 2010-08-29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슬퍼하는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절망하고 좌절하는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우울해지는 지를 미리 읽고 알려주는 다락방님, 전 이 책은 패쓰할래요~

다락방 2010-08-30 09:47   좋아요 0 | URL
pjy님, 저는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은 한번쯤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지만, 그렇지만 pjy님이 해피엔딩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나버렸어요. pjy님의 서재였었는지, 누군가의 글에 대한 댓글에서였는지...

네, [어제]는 패쓰하세요. 해피엔딩이 아니니까요.

2010-08-29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0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꼬 2010-08-29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결에 빗소리를 들었어요. 다락님, 덥고 습한데도 비 때문에 쌀쌀하기까지 한(응?) 이 날씨, 잘 견뎌요. 어떻게든 마음은 뽀송하게 있다가 만나자고요.

무스탕 2010-08-29 22:23   좋아요 0 | URL
두 달만에 다락방님 서재에서 뵌 네꼬님♡
가을장마가 주는 선물인듯 반가운 네꼬님♡

다락방 2010-08-30 12:45   좋아요 0 | URL
네꼬님. 네꼬님의 마음은 지금 뽀송한가요? 그래요?
그렇다면 나도 뽀송해지도록 노력해볼게요. 얼굴이 뽀송하지 않으니 마음이라도 뽀송해야지요. 알겠어요, 그렇게 하도록 해볼게요.


무스탕님/ 그러게나요. 네꼬님은 어쩜 이리 뜨문뜨문 오신단 말입니까. 그쵸?

moonnight 2010-08-29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꿈속에 등장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더라구요. 평소에 아무 생각없다가도 말이죠. 뭐, 요즘은 더이상 꿈속에 나올 사람도 없지만 말입니다. ;;;;; 다락방님 꿈 속 그 남정네가 누구일까 궁금하네요. ^^

다락방 2010-08-30 12:45   좋아요 0 | URL
으하하하하하하하

저는 요즘에 세븐이 너무 좋아서 박한별이 싫어지고 있는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어요. 토요일에 텔레비젼에서 세븐 보는데 와, 너무 예쁜거에요! 우하하하하하하하

마녀고양이 2010-08-30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슬펐겠어요. 난 그런 꿈을 꾸고나면, 한동안 멍하니 정신줄 놓게되요.
그리고 현실을 살아가기가 왜그리 팍팍하던지.

그래서...... 가능한 사랑하는 꿈은 꾸고 싶지 않아여!

다락방 2010-08-30 15:03   좋아요 0 | URL
저는 대체적으로 음탕한 꿈을 꾸기를 원하는데 꿈이라는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라서 말이지요.
오늘밤에는 음탕한 꿈을 꾸겠어요. 불끈!

stillyours 2010-08-30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이 여자는 너무 슬퍼서 눈물 한 방울 못 흘리게 만드는 것 같아요.
<어제>도 <존재의->도 그렇고 가슴만 퉁퉁 치고 말았어요. 아 슬퍼 슬퍼.

다락방 2010-08-30 15:43   좋아요 0 | URL
맞아요, moon님. 너무나 적절한 표현이에요. 너무 슬퍼서 눈물 한 방울 못흘리게 만들죠. 그리고 뭔가 가슴을 턱, 하고 막히게 만들어요.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었을까요? 이 글을 쓸때의 그녀는 얼마나 아팠을까요? 하아-

따라쟁이 2010-08-31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서 처음으로 읽는 다락방님의 페이퍼가 이렇게 슬플 줄 알았다면 휴가중에 제가 사진이라도 한장 보내드렸을 거에요. 아마 코끼리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혼자 온갖 이쁜척을 하는 모습을 봤다면 빵하고 터트리셨을텐데..

다락방 2010-08-31 13:05   좋아요 0 | URL
단편 소설 하나 나오겠어요. [코끼리와 웨딩드레스] 라는 제목으로 말이지요. 아주 상큼하고 발랄하며 다정한 소설이 될 것 같아요. 쓰는건....따라쟁이님 몫이에요. 지금 [유혹하는 글쓰기]도 읽고 있으니까, 그 쯤은 문제 없겠죠? ( '')

안그래도 오늘쯤 문자 함 넣어볼까 싶었는데 와줬네요. 반가워라.
:)

2010-08-31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1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10-09-02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만큼 이 책도 좋았어요.
읽은지 오래되서 내용이 가물가물해요. 좋았다고 하면서 책 내용이 가물가물하다니.
수많은 어제들 덕분인 거 같아요.


다락방 2010-09-02 10:09   좋아요 0 | URL
이 책도 물론 좋았지만, 이제 내성이 생겼달까요?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읽었더니 그때처럼 충격적이라거나 그때처럼 막 슬프진 않았어요. 견딜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어제,
저는 오리고기와 소주를 마셨습니다.
 
삼사라 (SAMSARA)
파라마운트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음.. 야한줄 알고 봤는데..음... 종려시는 눈이 예쁘고 입술이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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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8-29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VD로 보신 영화가 3편이나 되는데 하나같이 다 별 재미를 못보셨네요.^^

다락방 2010-08-29 21:01   좋아요 0 | URL
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제는 하나쯤 아주 좋은 영화를 보고 싶어요. 조용하고 잔잔하고 가슴에 깊게 남는 묵직한 영화로요.
일요일이 가고 있네요. 이제 얼마 안남았어요.

푸른바다 2010-08-30 09:14   좋아요 0 | URL
음, 이제 월요일이네요.^^ 조용하고 잔잔하고 가슴에 깊게 남는 묵직한 영화가 어떤게 있을까요?

다락방 2010-08-30 09:2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개봉 영화나 살펴봐야겠어요.

moonnight 2010-08-29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번째 모르는 영화 -_-;;;;;
영화 많이 보셨네요. 예전에 비디오 대여점 있던 시절에는 많이 빌려봤었는데 요즘은 극장에서 외에는 영화를 잘 안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사놓고 안 본 디비디도 무지 많다는 ;;;;

다락방 2010-08-30 09:28   좋아요 0 | URL
저도 사놓고 안 본 디비디가 엄청나게 많아서 그것 좀 어떻게 해볼라고 막 몰아서 봤네요. 금요일에 두 편, 일요일에 한 편.
책뿐만이 아니라 디비디도 밀려요. 어휴..
 
오! 마이 보스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젠스 알비누스 외 출연 / 대경DVD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관심끌고 싶어하는 남자들의 어리석은 모습에 웃음이 피식. 남자들이란.. 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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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오페르 2010-08-29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남자들은 참 어리석습니다.ㅠㅠ 불쌍하죠? ^^;

다락방 2010-08-30 09:25   좋아요 0 | URL
안불쌍해요, 안불쌍하다구요!! 남자들은 빵꾸똥꾸에요!

moonnight 2010-08-29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 또 모르는 영화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이런 영화도 찍었군요. 궁금궁금. ;;

다락방 2010-08-30 09:26   좋아요 0 | URL
문나잇님, 이 영화 DVD 보내줄까요? 말만 해요!
:)

비로그인 2010-08-29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의 내용은 모르지만..) 남자들은 참 단순하고 투박해요.. 글쵸? ^^ 버스나 허겁지겁 타대고 말이죠.

다락방 2010-08-30 09:2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남자들은 죄다 바보들이에요. ㅎㅎ
 
프레리 홈 컴패니언 (1disc) - 할인행사
로버트 알트만 감독, 메릴 스트립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사랑스런 캐릭터들 각자의 사연이 드러나는 따뜻한 영화. 탐정캐릭터는 특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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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0-08-29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모르는 영화예요. 궁금

다락방 2010-08-30 09:25   좋아요 0 | URL
엄청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더군요. 메릴 스트립은 역시 노래를 잘 불러요! 이 영화에서는 린제이 로한의 노래도 들을 수 있답니다. 흐흣
 

오늘은 그와 데이트가 있는 날이었다. 사실 말이 좋아 데이트지 우리는 그저 '둘이' 만나는 것 뿐이었다. 또, 사실, 말이 좋아 '둘이 만나는 것' 이지 정확하게는 내가 속한 모임에서 오늘따라 아무도 나오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다. 그를 빼고는. 그리고 나를 빼고는. 뭐 특별할 주제랄 것도 없고 공통적인 취미도 없는 그저 맛있는거나 함께 먹자는 모임이었을 뿐인데 그 많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빠지기 시작했고 몇명 남지 않았을 때 조차 제대로 그 인원들이 다 모인적도 없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이번 모임에는 그와 나, 둘 뿐이었다. 그러면 이번 달 모임은 취소할까요, 하고 묻는 내게 그는 그냥 만나죠, 둘이서, 라고 했던거였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래요, 라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뛸 듯이 기뻤다. 단 둘이 만난다는 건 내가 그토록 바라왔던 일이고 그러나 용기를 내지 못해 한번도 말을 꺼내보지 못했던 일이다.  

낮에 볼까요, 하는 그에게 아니요 저녁에 봐요, 라고 나는 대답했다. 낮에 만나면 분주할 것 같았다. 나는 충분히 공을 들여 샤워를 하고 싶었고, 충분히 공을 들여 화장을 하고 싶었고, 충분히 공을 들여 옷을 입고 싶었고, 여유롭게 도착하고 싶었고, 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그가 유독 내게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유독 나에게 더 많이 시선을 던진다고 생각했다. 가끔 그는 모임이 있지 않을 때도 내게 전화했다. 우리는 모임에 관련된 사람들 얘기며 또 일상적인 얘기들을 했지만, 그러니까 그는 뭔가 내게 은밀한 얘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가 우리 관계를 은밀하게 만들고 싶은건 아닐까, 라고 종종 생각해왔던 터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일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보려고 하는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만약 그가 우리 은밀해져요, 라고 말한다면 기꺼이 네, 라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약속시간이 됐다. 나는 우리가 만나서 무얼 할지 모르겠다.  평소에 모임에서는 맛집을 찾아다니는 형태였는데 사람이 줄고 나서는 사실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해서 갔던 맛집중 그날 상황에 따라 가고 싶은 곳을 가곤 했다. 친구를 따라 그 모임에 참석했긴 했지만 사실 나는 맛집을 찾아다니는 게 질색팔색이었다. 왜 줄까지 서가며 그것들을 먹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걸까 싶었던거다. 두번째 참석하고 나서, 그날 따라 유독 기다리는게 신물이 나서, 이런 모임은 하지 않겠다고 나는 그만 두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를 봤다. 그 뒤로는 그가 거기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모임에 나갔다.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면서 그리고 음식점 밖에서 먹기 위해 기다리면서, 이 모든 '내가 하고 싶지 않은 행위들' 은 모두 그를 보는 것 하나로 상쇄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가 아니면 그를 보지 못하니까. 그런데 그와 단 둘이 만나는거다. 그가 어떤 새로운 맛집을 찾아가자고 한들 나는 좋다고 할 것이고 갔던곳에 가자고 해도 좋다고 할 것이지만, 부디 그가 나에게 은밀해지자는 말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내 기대였다. 

날씨가 화창한 토요일이었다. 나는 일어나서 눈꼽을 떼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았다. 둔한 몸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조금쯤 유연해진 상태로 나가고 싶었다. 한시간쯤 자전거를 타고 들어와서는 샤워를 했다. 향이 좋은 바디클렌저였다. 그리고 피부를 진정시켜준다는 아주 비싼 석고팩을 얼굴에 발랐다. 십오분쯤 지나 다시 세수를 했다. 피부가 하얗게 된 것 같았다. 슬며시 웃음이 났다. 그리고는 화장을 시작했다. 톡톡톡, 나는 아주 경쾌하게 화장품들을 얼굴에 펴바른뒤에 두드리기 시작했다. 골고루 스며들어라, 골고루. 핑크빛 볼터치를 볼에 톡톡 두드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화장을 마치고 나는 옷을 갈아 입었다.  

오늘은 속옷을 셋트로 입을거야. 

나는 결심했다.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며칠전 우리가 둘이 만난다는게 결정되자마자 백화점에 가서 셋트 가격이 10만원에 다다르는 팬티와 브라셋트를 구입해두었다. 새것인게 너무 티나면 안되니까 한번 빨아 입어야지, 싶어 빨아두기까지 했다. 자꾸만 콧노래가 나왔다. 위 아래가 셋트인 팬티와 브라를 입고 거울을 봤다. 잠깐 한숨이 나왔다. 셋트인 속옷을 입었다고 해서 빛나는 몸매가 될 순 없었다. 셋트인 속옷을 입었다고 해서 예뻐보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괜찮다. 나는 만약 내가 속옷을 그에게 보이게 되는 기회가 온다면, 그러니까 오늘 밤 혹시라도 그와 내가 옷을 벗고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이렇게 말할 참이었다. 

나 위 아래 셋트로 처음 입어봐요.  

 

그를 만났다. 나는 여유롭게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다가 활짝 웃으며 걸어오는 그를 보았다. 쿵쿵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의 손을 잡고 내 심장위에 손을 대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거, 당신 때문에 그래요, 라고. 그러나 나는 그저 마주 웃어줄 뿐이었다. 어디 갈래요? 뭐할까요? 하고 묻는 그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맛집 찾아 다니지 말고 갔던 맛집에 가지도 말아요. 사실 나, 맛집 찾아다니는 거 싫고 줄 서서 기다리다가 먹는 거 싫어해요. 

그는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그럼 우리 근처에 가서 맥주나 한잔 할까요, 라고 하면서 그러면 그동안 그렇게 싫은데 왜 이 모임에 있었느냐고 했다. 아 어쩌지 말을 할까 말까. 당신이 있어서요, 라고 할까 말까.  

당신이 있어서요. 

해버렸다. 결국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도요. 나도 음식점 앞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 거 싫어해요.  

아 또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런데 나도요, 는 뭐지? 음식점 앞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게 싫다는 거에 대한 나도요, 인가? 아니면 당신이 있어서요 에 대한 나도요, 인가? 물어볼까? 나는 내가 듣고 싶어하지 않는 대답을 듣게 될까 두려워 묻지 못한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러 가까운 호프집에 들어갔고 즐겁게 대화를 했다. 나는 대화를 하는 동안 눈을 마주치는 그가 좋았고, 내 말을 듣고 있을 때 움직이지 않는 그의 입술이 좋았으며, 웃을 때 드러나는 못생긴 이빨이 좋았다. 병맥주의 물기를 냅킨으로 닦아내는 손짓도 유혹적이었고 화장실을 간다고 일어서서 나갈 때 보이는 그의 등도 좋았다. 머리통은 왜 저렇게 예쁘지? 애기때 짱구베개 베고 잔건가? 

웃고 이야기하며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러나 그는 은밀해지자는 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초조하다. 나 오늘 속옷 셋트로 입었는데. 밤이 자꾸 깊어간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어떤 다른말도 하지 않는다. 버스정류장까지 함께 걸었다. 그는 내 셋트 속옷을 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셋트 속옷이 다 뭐람. 그는 내 머리털 하나도 건드리지 않는다. 그는 내 손도 쳐다보지 않는다. 그는 그냥, 그냥, 모임이어서 나온 것 뿐인가. 버스정류장까지는 좀 멀었다. 우리는 십분 정도를 함께 걸었다. 그러나 그동안 그는 내 옆에 바싹 서지도 않았고 나는 그에게 팔짱 한번 껴보질 못했다. 아, 이대로 집으로 가는건가. 또 언제 볼지 모르는데. 단 둘이 만나는 기회는 앞으로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나를 그저 모임의 여자회원쯤으로 보는걸까. 버스정류장에 나란히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즐거웠다고 그는 작별 인사를 한다. 아 제기랄. 말 해볼까? 나 오늘 속옷을 셋트로 입었어요, 보고 싶지 않아요? 라고 말 해볼까? 자꾸만 손톱을 깨물고 싶다. 도저히 말이 되어 입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  

그의 집으로 가는 버스가 먼저 도착한다. 타고 가세요, 라고 말했다. 그는 나를 보내고 가겠다고 한다. 아뇨 됐어요 타고 가세요, 라고 나는 다시 말한다. 그러자 그는 그럼, 이라고 말하고 버스를 탄다. 나는 그를 태운 버스가 출발하는 것을 바라본다. 영화처럼 드라마처럼 갑자기 버스가 멈추어 서고 그는 내려서 내게로 뛰어 오지 않을까? 뛰어 와서는 당신의 속옷을 보고 싶어요, 라고 말해주지 않을까?  

그러나 버스는 자꾸만 멀어지고 멀어지고 멀어지더니 끝끝내 보이지도 않는다. 

한참후에 내 버스가 온다. 탔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자꾸만 눈물이 난다. 속옷과 내가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다. 나는 집을 몇정거장 남겨두고 중간에 버스에서 내린다. 그리고 집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내린다길래 우산을 챙겨왔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어 펼쳐들었다. 그러나 우산을 들고 있을 힘도 없다. 내가 비를 맞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 나는 우산을 접어 손에 들고 간다. 비오는 늦은 밤에 거리에는 사람이 없다. 나는 이때다 싶어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얼굴에서 마구 흐르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거세어졌고 나는 이때다 싶어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블라우스와 스커트는 젖어 버려 몸에 찰싹 달라붙는다. 나의 비싼 셋트 속옷도 흠뻑 젖어버린다. 울면서 비를 맞았더니 지친다. 집이 얼마 남지 않았다.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고 싶지만 이렇게 젖어버린 사람을 태워줄 리 없겠지. 나는 그저 마지막 힘까지 끌어모아 집에 도착한다.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벗고 속옷만 남긴채 욕실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본다. 오늘 낮에 비춰보았을 때는 그토록 신이 났었는데, 같은 차림으로 밤에 비춰보았을 때는 한없이 슬프기만 하다. 속옷을 벗어서 빤다. 빨면서 내내 서운한 마음이 사라지질 않는다.  

내가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으나 보여주지 못했던 건,  

셋트로 된 속옷을 입은 내가 아니라, 셋트로 된 속옷을 입고 나가고 싶었던 내 마음이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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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선택 2011-01-26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찮게 들어왔다가 단편들 읽으면서 온 몸으로 웃다가 지금, 배고파요.ㅋㅋ
정말 사랑스럽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글들이네요~
락방님의 다음 단편도 넘넘 기다려져요~~

다락방 2011-01-27 09:27   좋아요 0 | URL
오와, 반갑습니다, 나의선택님. ㅎㅎ
다음 단편은 언제 쓸지 기약없지만, 계획도 없지만, 사실 소설 쓰기는 나와 거리가 먼 일이었구나, 싶어지고 있지만, 나의선택님의 격려에 힘입어 다시 한번 구상해 보도록 해야겠어요. 헤헷.

2011-05-04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남자는 선수로군요.
선수는 뭐든 처음이란 말을 그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인지 확정형의 말투입니다만.

다락방 2011-05-04 11:56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말하지 않는게 나았군요.

나비종 2014-01-10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리 묘사가 치밀하시군요. 마지막 결론이 참 깔끔합니다^^
속편으로, '보여준 것- 남자편'은 어떠신지요? ㅎㅎ

다락방 2014-01-14 09:38   좋아요 0 | URL
에로틱한 단편이 되겠네요. ㅎㅎㅎ

책읽어주는 여자 2014-12-10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슴설레며 읽었어요... 일상을 적으신건가? 하다가 읽어내려갔더니 단편 소설인가보네요..
오랜만에 가슴설렌 글을 읽었어요~^^

다락방 2016-08-25 07:53   좋아요 0 | URL
으하하하. 가슴 설레게 해드렸다니 제가 다 기쁩니다. 그런데... 무려 2년이나.. 후에 제가 댓글을 다네요. 이제야 봤어요. ㅠㅠ

2016-08-24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6-08-25 07:52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책도 읽어주시고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생각하신 것처럼 책 많이 읽으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좋은 책, 재미있는 책 많이 많이 읽으세요! 같은 책을 읽게 된다면 분명 할 수 있는 대화도 많아질 겁니다. 히힛 :)

태주랑은수랑 2016-08-29 22: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답글 주시다니 ㅠㅠ 애타게 기다리던 가을!! 올해는 유독 더웠던 것 같아요... 하루 사이에 달라진 기온에 당황스럽기도 해요.. 이렇게 더울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고 , 갑자기 가을이 올 줄도 몰랐는데..
변덕스런 병신년의 날씨..ㅎㅎ
감기 조심하세요..다락방님!! 여름옷으로 다니시면 감기 걸리기 좋을 날씨예요 ㅠㅠ
여름엔 하늘을 올려다 보지 않고 , 뜨거워서 가리기 급급했는데 가을이 되니 길을 걷다가도 문득 올려다 보는 하늘.. ㅎㅎㅎ 소제목 책으로 엮은 인연에서 쓰신 소설 표현 하나하나에 감탄했어요
저는 아직 일부만 본 건데 다락방님의 블로그에 더 많은 책과 쓰신 글들을 볼 생각에 행복해요ㅎㅎㅎ

저 정말 글 못 쓰죠? ..순서를 어떻게 해야될 지 모르겠어요..ㅎㅎㅎ
답글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ㅠㅠ !! 안녕히 주무세요

clavis 2020-10-05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님 네이버 블로그 링크 타고 와서 보게 됐는데 너무 재밌어요
고맙습니다

다락방 2020-10-06 13:48   좋아요 0 | URL
히히히히 귀염뽀짝한 글인 것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10-06 1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10년 ˝나 위 아래 셋트로 처음 입어봐요.˝

2020년 ˝나 위 아래로 남성 드로즈랑 난닝구 세트로 처음 입어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0년 사이에 우리의 여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10-06 13:49   좋아요 1 | URL
10년 사이에 우리의 여주에게 정말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앞으로 10년 후도 무척 기대되지 않습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10-07 20:50   좋아요 1 | URL
이 분, 이 분! 이 분 조심하세요! 세상에~~~~~ 다락방님을 속속들이 알고 계시네요. 까악!!!
우리 10년 뒤에 이 뒤에 댓글 같이 달아요. 다들 어디 가지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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