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꿈을 꿨다. 아주 슬픈 꿈이었다. 그러니까 꿈에, 나는 한 남자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상대의 대답이 없는 사랑이었다. 그래서 매일매일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엄마가 그 남자를 찾아갔다. 나는 왜 나의 문제에 엄마가 관여하냐며 그 남자를 찾아가지 말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더이상 너의 힘든 모습을 볼 수 없다며 그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엄마는 그를 만나고 돌아왔다. 그는 서른 여덟살의 남자였다.(왜 서른 여덟인걸까..음..) 그리고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 남자한테 너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너는 괜찮은 여자지만, 너를 좋아하지는 않는다더라."
나는 엄마로부터 그 말을 듣고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슬퍼했다. 미치도록 슬퍼하다가 눈을 뜨니 여전히 새벽이었다.
내가 이토록 슬픈 꿈을 꾼 건, 절반쯤은, 그러니까 한 오십프로쯤은, 바로 어제 읽은 책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제 읽은 책은 어제였다.
어제에는 몇번 씩이나 '어제'로 시작하는 문장들이 등장한다.
어제도 바람이 불었다. (p.9)
어제, 내 우편함에서 통지서를 하나 발견했다. (p.49)
어제,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p.114)
어제, 병원을 나온 나는 공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p.125)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사람을 슬프게 만들기 위해 작정한 작가인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슬퍼하는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절망하고 좌절하는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우울해지는 지를 잘 아는 그런 작가. 『어제』는 아주 많은 부분에서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과 겹친다. 사생아로 태어난 남자, 동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남자, 망명, 가난,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바꿔야 하는 이름, 매일매일 글을 쓰는 남자. '아고타 크리스토프'에게 가난과 망명과 슬픔과 절망과 이루지 못한 사랑과 글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남자는 여자를 기다린다. 자신의 사랑은 그녀뿐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녀(린)를 내내 기다리면서 다른 여자(욜란드)와 토요일을 보낸다.
-그런데 왜 그녀를 계속 만나지요?
-다른 여자가 없기 때문이지요. 다른 여자로 바꾸고 싶지도 않고요. 너무 바꾸다보니 이제 지쳤습니다. 욜란드면 어떻고 다른 여자면 어떻습니까? 다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일주일에 한번씩 그녀의 집에 갑니다. 그녀는 요리를 하고 나는 포도주를 가져갑니다. 우리 사이에 사랑 같은 건 없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당신 입장이야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녀의 감정에는 관심 없습니다. 아무튼 린이 나타날 때까지는 그녀를 계속 만날 겁니다.
-아직도 린이 올 것을 기대합니까?
-물론입니다. 저는 그녀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항상 제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녀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저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린이고, 나의 아내이고, 내 사랑이고, 내 인생입니다. (pp.18-19)
남자는,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던 린을 만나게 된다. 그녀를 매일 만나게 되고 그녀와 사랑을 속삭이게 된다.
나는 이제 린을 보지 않고는 하루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공장에서의 하루는 즐거움이고, 아침에 눈뜸은 행복이며, 버스로 하는 출근길은 세계일주이며, 프랭시팔 광장은 우주의 중심지였다. (pp. 94-95)
이런 『어제』에서 가장 슬픈 부분은 형부를 사랑했던 여자가 자살하는 장면이 아니고, 고국에 있는 아내에게 어떻게든 생활비를 보내보지만 그런 아내가 다른 남자와 함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남자의 좌절하는 장면이 아니고,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며 여자를 유산시키는 남편이 등장하는 장면도 아니고,
바로 남자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그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린의 떠남을 받아들이는 것.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남자는 이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와서 이제 이곳에서 정착하는구나, 저들은 참 보통의 일상을 사는구나, 하고 보여지게 될 그런 일상.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는 일상. 그 평범한 일상이 가장 이 책을 슬프게 만든다.
카롤린이 떠나고 이 년이 지난 뒤, 내 딸 린이 태어났다. 일 년 뒤, 내 아들 토비아스도 태어났다.
우리는 아침마다 아이들을 탁아소에 맡겼다가 저녁이면 데려온다.
내 아내 욜란드는 아주 모범적인 엄마다.
나는 여전히 시계공장에서 일한다.
첫번째 마을에서는 버스를 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나는 이제 더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 (p.140)
어제처럼 비오는 밤에 읽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소설이다.
어제처럼 비 오는 밤에는 차라리 이런 소설보다 소주 한잔이 나았을텐데.
어제, 나의 꿈속에 나온 남자는 내가 아는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