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와 데이트가 있는 날이었다. 사실 말이 좋아 데이트지 우리는 그저 '둘이' 만나는 것 뿐이었다. 또, 사실, 말이 좋아 '둘이 만나는 것' 이지 정확하게는 내가 속한 모임에서 오늘따라 아무도 나오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다. 그를 빼고는. 그리고 나를 빼고는. 뭐 특별할 주제랄 것도 없고 공통적인 취미도 없는 그저 맛있는거나 함께 먹자는 모임이었을 뿐인데 그 많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빠지기 시작했고 몇명 남지 않았을 때 조차 제대로 그 인원들이 다 모인적도 없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이번 모임에는 그와 나, 둘 뿐이었다. 그러면 이번 달 모임은 취소할까요, 하고 묻는 내게 그는 그냥 만나죠, 둘이서, 라고 했던거였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래요, 라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뛸 듯이 기뻤다. 단 둘이 만난다는 건 내가 그토록 바라왔던 일이고 그러나 용기를 내지 못해 한번도 말을 꺼내보지 못했던 일이다.  

낮에 볼까요, 하는 그에게 아니요 저녁에 봐요, 라고 나는 대답했다. 낮에 만나면 분주할 것 같았다. 나는 충분히 공을 들여 샤워를 하고 싶었고, 충분히 공을 들여 화장을 하고 싶었고, 충분히 공을 들여 옷을 입고 싶었고, 여유롭게 도착하고 싶었고, 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그가 유독 내게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유독 나에게 더 많이 시선을 던진다고 생각했다. 가끔 그는 모임이 있지 않을 때도 내게 전화했다. 우리는 모임에 관련된 사람들 얘기며 또 일상적인 얘기들을 했지만, 그러니까 그는 뭔가 내게 은밀한 얘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가 우리 관계를 은밀하게 만들고 싶은건 아닐까, 라고 종종 생각해왔던 터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일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보려고 하는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만약 그가 우리 은밀해져요, 라고 말한다면 기꺼이 네, 라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약속시간이 됐다. 나는 우리가 만나서 무얼 할지 모르겠다.  평소에 모임에서는 맛집을 찾아다니는 형태였는데 사람이 줄고 나서는 사실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해서 갔던 맛집중 그날 상황에 따라 가고 싶은 곳을 가곤 했다. 친구를 따라 그 모임에 참석했긴 했지만 사실 나는 맛집을 찾아다니는 게 질색팔색이었다. 왜 줄까지 서가며 그것들을 먹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걸까 싶었던거다. 두번째 참석하고 나서, 그날 따라 유독 기다리는게 신물이 나서, 이런 모임은 하지 않겠다고 나는 그만 두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를 봤다. 그 뒤로는 그가 거기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모임에 나갔다.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면서 그리고 음식점 밖에서 먹기 위해 기다리면서, 이 모든 '내가 하고 싶지 않은 행위들' 은 모두 그를 보는 것 하나로 상쇄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가 아니면 그를 보지 못하니까. 그런데 그와 단 둘이 만나는거다. 그가 어떤 새로운 맛집을 찾아가자고 한들 나는 좋다고 할 것이고 갔던곳에 가자고 해도 좋다고 할 것이지만, 부디 그가 나에게 은밀해지자는 말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내 기대였다. 

날씨가 화창한 토요일이었다. 나는 일어나서 눈꼽을 떼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았다. 둔한 몸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조금쯤 유연해진 상태로 나가고 싶었다. 한시간쯤 자전거를 타고 들어와서는 샤워를 했다. 향이 좋은 바디클렌저였다. 그리고 피부를 진정시켜준다는 아주 비싼 석고팩을 얼굴에 발랐다. 십오분쯤 지나 다시 세수를 했다. 피부가 하얗게 된 것 같았다. 슬며시 웃음이 났다. 그리고는 화장을 시작했다. 톡톡톡, 나는 아주 경쾌하게 화장품들을 얼굴에 펴바른뒤에 두드리기 시작했다. 골고루 스며들어라, 골고루. 핑크빛 볼터치를 볼에 톡톡 두드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화장을 마치고 나는 옷을 갈아 입었다.  

오늘은 속옷을 셋트로 입을거야. 

나는 결심했다.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며칠전 우리가 둘이 만난다는게 결정되자마자 백화점에 가서 셋트 가격이 10만원에 다다르는 팬티와 브라셋트를 구입해두었다. 새것인게 너무 티나면 안되니까 한번 빨아 입어야지, 싶어 빨아두기까지 했다. 자꾸만 콧노래가 나왔다. 위 아래가 셋트인 팬티와 브라를 입고 거울을 봤다. 잠깐 한숨이 나왔다. 셋트인 속옷을 입었다고 해서 빛나는 몸매가 될 순 없었다. 셋트인 속옷을 입었다고 해서 예뻐보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괜찮다. 나는 만약 내가 속옷을 그에게 보이게 되는 기회가 온다면, 그러니까 오늘 밤 혹시라도 그와 내가 옷을 벗고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이렇게 말할 참이었다. 

나 위 아래 셋트로 처음 입어봐요.  

 

그를 만났다. 나는 여유롭게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다가 활짝 웃으며 걸어오는 그를 보았다. 쿵쿵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의 손을 잡고 내 심장위에 손을 대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거, 당신 때문에 그래요, 라고. 그러나 나는 그저 마주 웃어줄 뿐이었다. 어디 갈래요? 뭐할까요? 하고 묻는 그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맛집 찾아 다니지 말고 갔던 맛집에 가지도 말아요. 사실 나, 맛집 찾아다니는 거 싫고 줄 서서 기다리다가 먹는 거 싫어해요. 

그는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그럼 우리 근처에 가서 맥주나 한잔 할까요, 라고 하면서 그러면 그동안 그렇게 싫은데 왜 이 모임에 있었느냐고 했다. 아 어쩌지 말을 할까 말까. 당신이 있어서요, 라고 할까 말까.  

당신이 있어서요. 

해버렸다. 결국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도요. 나도 음식점 앞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 거 싫어해요.  

아 또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런데 나도요, 는 뭐지? 음식점 앞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게 싫다는 거에 대한 나도요, 인가? 아니면 당신이 있어서요 에 대한 나도요, 인가? 물어볼까? 나는 내가 듣고 싶어하지 않는 대답을 듣게 될까 두려워 묻지 못한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러 가까운 호프집에 들어갔고 즐겁게 대화를 했다. 나는 대화를 하는 동안 눈을 마주치는 그가 좋았고, 내 말을 듣고 있을 때 움직이지 않는 그의 입술이 좋았으며, 웃을 때 드러나는 못생긴 이빨이 좋았다. 병맥주의 물기를 냅킨으로 닦아내는 손짓도 유혹적이었고 화장실을 간다고 일어서서 나갈 때 보이는 그의 등도 좋았다. 머리통은 왜 저렇게 예쁘지? 애기때 짱구베개 베고 잔건가? 

웃고 이야기하며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러나 그는 은밀해지자는 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초조하다. 나 오늘 속옷 셋트로 입었는데. 밤이 자꾸 깊어간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어떤 다른말도 하지 않는다. 버스정류장까지 함께 걸었다. 그는 내 셋트 속옷을 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셋트 속옷이 다 뭐람. 그는 내 머리털 하나도 건드리지 않는다. 그는 내 손도 쳐다보지 않는다. 그는 그냥, 그냥, 모임이어서 나온 것 뿐인가. 버스정류장까지는 좀 멀었다. 우리는 십분 정도를 함께 걸었다. 그러나 그동안 그는 내 옆에 바싹 서지도 않았고 나는 그에게 팔짱 한번 껴보질 못했다. 아, 이대로 집으로 가는건가. 또 언제 볼지 모르는데. 단 둘이 만나는 기회는 앞으로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나를 그저 모임의 여자회원쯤으로 보는걸까. 버스정류장에 나란히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즐거웠다고 그는 작별 인사를 한다. 아 제기랄. 말 해볼까? 나 오늘 속옷을 셋트로 입었어요, 보고 싶지 않아요? 라고 말 해볼까? 자꾸만 손톱을 깨물고 싶다. 도저히 말이 되어 입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  

그의 집으로 가는 버스가 먼저 도착한다. 타고 가세요, 라고 말했다. 그는 나를 보내고 가겠다고 한다. 아뇨 됐어요 타고 가세요, 라고 나는 다시 말한다. 그러자 그는 그럼, 이라고 말하고 버스를 탄다. 나는 그를 태운 버스가 출발하는 것을 바라본다. 영화처럼 드라마처럼 갑자기 버스가 멈추어 서고 그는 내려서 내게로 뛰어 오지 않을까? 뛰어 와서는 당신의 속옷을 보고 싶어요, 라고 말해주지 않을까?  

그러나 버스는 자꾸만 멀어지고 멀어지고 멀어지더니 끝끝내 보이지도 않는다. 

한참후에 내 버스가 온다. 탔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자꾸만 눈물이 난다. 속옷과 내가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다. 나는 집을 몇정거장 남겨두고 중간에 버스에서 내린다. 그리고 집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내린다길래 우산을 챙겨왔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어 펼쳐들었다. 그러나 우산을 들고 있을 힘도 없다. 내가 비를 맞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 나는 우산을 접어 손에 들고 간다. 비오는 늦은 밤에 거리에는 사람이 없다. 나는 이때다 싶어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얼굴에서 마구 흐르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거세어졌고 나는 이때다 싶어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블라우스와 스커트는 젖어 버려 몸에 찰싹 달라붙는다. 나의 비싼 셋트 속옷도 흠뻑 젖어버린다. 울면서 비를 맞았더니 지친다. 집이 얼마 남지 않았다.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고 싶지만 이렇게 젖어버린 사람을 태워줄 리 없겠지. 나는 그저 마지막 힘까지 끌어모아 집에 도착한다.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벗고 속옷만 남긴채 욕실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본다. 오늘 낮에 비춰보았을 때는 그토록 신이 났었는데, 같은 차림으로 밤에 비춰보았을 때는 한없이 슬프기만 하다. 속옷을 벗어서 빤다. 빨면서 내내 서운한 마음이 사라지질 않는다.  

내가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으나 보여주지 못했던 건,  

셋트로 된 속옷을 입은 내가 아니라, 셋트로 된 속옷을 입고 나가고 싶었던 내 마음이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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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선택 2011-01-26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찮게 들어왔다가 단편들 읽으면서 온 몸으로 웃다가 지금, 배고파요.ㅋㅋ
정말 사랑스럽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글들이네요~
락방님의 다음 단편도 넘넘 기다려져요~~

다락방 2011-01-27 09:27   좋아요 0 | URL
오와, 반갑습니다, 나의선택님. ㅎㅎ
다음 단편은 언제 쓸지 기약없지만, 계획도 없지만, 사실 소설 쓰기는 나와 거리가 먼 일이었구나, 싶어지고 있지만, 나의선택님의 격려에 힘입어 다시 한번 구상해 보도록 해야겠어요. 헤헷.

2011-05-04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남자는 선수로군요.
선수는 뭐든 처음이란 말을 그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인지 확정형의 말투입니다만.

다락방 2011-05-04 11:56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말하지 않는게 나았군요.

나비종 2014-01-10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리 묘사가 치밀하시군요. 마지막 결론이 참 깔끔합니다^^
속편으로, '보여준 것- 남자편'은 어떠신지요? ㅎㅎ

다락방 2014-01-14 09:38   좋아요 0 | URL
에로틱한 단편이 되겠네요. ㅎㅎㅎ

책읽어주는 여자 2014-12-10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슴설레며 읽었어요... 일상을 적으신건가? 하다가 읽어내려갔더니 단편 소설인가보네요..
오랜만에 가슴설렌 글을 읽었어요~^^

다락방 2016-08-25 07:53   좋아요 0 | URL
으하하하. 가슴 설레게 해드렸다니 제가 다 기쁩니다. 그런데... 무려 2년이나.. 후에 제가 댓글을 다네요. 이제야 봤어요. ㅠㅠ

2016-08-24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6-08-25 07:52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책도 읽어주시고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생각하신 것처럼 책 많이 읽으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좋은 책, 재미있는 책 많이 많이 읽으세요! 같은 책을 읽게 된다면 분명 할 수 있는 대화도 많아질 겁니다. 히힛 :)

태주랑은수랑 2016-08-29 22: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답글 주시다니 ㅠㅠ 애타게 기다리던 가을!! 올해는 유독 더웠던 것 같아요... 하루 사이에 달라진 기온에 당황스럽기도 해요.. 이렇게 더울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고 , 갑자기 가을이 올 줄도 몰랐는데..
변덕스런 병신년의 날씨..ㅎㅎ
감기 조심하세요..다락방님!! 여름옷으로 다니시면 감기 걸리기 좋을 날씨예요 ㅠㅠ
여름엔 하늘을 올려다 보지 않고 , 뜨거워서 가리기 급급했는데 가을이 되니 길을 걷다가도 문득 올려다 보는 하늘.. ㅎㅎㅎ 소제목 책으로 엮은 인연에서 쓰신 소설 표현 하나하나에 감탄했어요
저는 아직 일부만 본 건데 다락방님의 블로그에 더 많은 책과 쓰신 글들을 볼 생각에 행복해요ㅎㅎㅎ

저 정말 글 못 쓰죠? ..순서를 어떻게 해야될 지 모르겠어요..ㅎㅎㅎ
답글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ㅠㅠ !! 안녕히 주무세요

clavis 2020-10-05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님 네이버 블로그 링크 타고 와서 보게 됐는데 너무 재밌어요
고맙습니다

다락방 2020-10-06 13:48   좋아요 0 | URL
히히히히 귀염뽀짝한 글인 것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10-06 1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10년 ˝나 위 아래 셋트로 처음 입어봐요.˝

2020년 ˝나 위 아래로 남성 드로즈랑 난닝구 세트로 처음 입어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0년 사이에 우리의 여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10-06 13:49   좋아요 1 | URL
10년 사이에 우리의 여주에게 정말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앞으로 10년 후도 무척 기대되지 않습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10-07 20:50   좋아요 1 | URL
이 분, 이 분! 이 분 조심하세요! 세상에~~~~~ 다락방님을 속속들이 알고 계시네요. 까악!!!
우리 10년 뒤에 이 뒤에 댓글 같이 달아요. 다들 어디 가지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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