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 처음 서재를 만들고부터 내 퍼스나콘은 쭉 '안젤리나 졸리'였다. 오랜 서재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오프라인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그 때마다 사람들은 왜 안젤리나 졸리를 좋아하냐, 왜 안젤리나 졸리를 퍼스나콘으로 쓰느냐 물었었고, 그 때마다 나는 답했었다. '그 사람은 혼자로도 충분히 강한 사람이라서' 라고.


내가 보는 안젤리나 졸리는 그랬다. 자기 혼자서도 당당하고 빛나고 강하고 센 여자였다. 남자 따위 없어도 살 수 없는 그런 여자로 아주 오래전부터 내게 인식되어져 있었다. 나중에 브래드피트랑 결혼하긴 했지만, 브래드 피트가 그녀에게 있어도 좋았고 없어도 좋았다. 그러니까 브래드 피트의 명성이라든가 하는 것에 기대가는 것이 아닌, 안젤리나 졸리 스스로의 명성, 스스로의 힘. 나는 그녀가 가진 그것이 좋았다. 어쩌면 나는 그런 여자가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러니 그녀는 나의 롤모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고, 내가 추구하는 바를 실천하는 바로 그런 사람이라 봐도 좋았을 것이다.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 대해 멋있다고 생각하고 롤모델로 삼게 되는 것은, 또한 부러워하는 것은, 내가 되고자 하는 바를 혹은 내가 원하는 바를 그 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거나 실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못하고 있는데 저 사람은 하네, 내가 못하고 있는데 저 사람은 기꺼이 해냈어! 거기에서 오는 짜릿함.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 저렇게 멋지게 살아갈거야, 같은 걸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우리는 롤모델을 만드는 게 아닌가. 나에겐 딱히 롤모델이랄 사람은 없었지만, 굳이 들라고 하면 안젤리나 졸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혼자서도 자신의 일을 해내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 그 과정에서 연애나 결혼은 있을 수도 있고 또 없을 수도 있는,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자기 자신인 사람. 많은 부분을 내가 오해하고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게 내가 보는 안젤리나 졸리의 모습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남자들이 만드는 영웅, 남자들이 부러워하는 다른 남자의 모습에 대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한심한게 다 뭐야, 정말이지 부끄러웠고 다 죽어버리라고 하고 싶었다. 세상 부러워할 게 없어서 강간범이나 연쇄살인범을 부러워하다니, 그런 사람들을 찬양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우리가 부러워한다는 것, 열망하고 감탄하고 영웅시한다는 것은, 내 안에 '그렇게 되고 싶은 나'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를 잠재적 범죄자로 몰지 말라며 광광대는 사람이 그들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그들은 연쇄살인범을, 강간범을 영웅시하는가, 왜 그들을 미화하는가, 왜 그들을 부러워하고 왜 그들에게 감탄하는가.


이 책의 9장은 <강간 영웅 신화> 다.



강간 과 영웅이 같이 쓰일 수 있다니, 이것부터가 부조리하지 않은가!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이 창조한 전설적 첩보원 제임스 본드는 소련의 방첩 기관 스메르시SMERSH와 싸워서 이길 때마다 여자를 얻어낸다. 상대에게 새로이 성적 흥미를 품으면서 본드는 이런 생각을 한다. "……그들이 얼마나 오래 함께했든 그녀 안에는 그가 한 번도 침범할 수 없었던 은밀한 방 하나가 항상 있었다. ……지금 그는 그녀가 깊숙이 흥분에 들끓어 쾌락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그녀의 내부 한가운데 자리 잡은 저 은밀함 때문에 그녀의 몸을 정복하는 일은 매번 강간처럼 톡 쏘는 맛이 났다." (p.446-447)



그러니까, 이거야? 톡 쏘는 맛? 톡 쏘는 맛이 강간의 맛이야? 그래서 강간하는거야?

어떻게 강강처럼 톡 쏘는 맛이 났다고, 그래서 여자의 몸을 정복한다는 걸 글로 자랑스레 써제길 수 있을까? 인용된 문장은 <카지노 로얄>의 것인데, 와, 나는 저걸 모르고 영화를 잘도 봤구나. 맙소사...



하지만 작가들은 보통 과장하기 마련이라고 알려져 있다. 작가들이 과연 전쟁이든 여성이든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전쟁이 뭔지 진짜로 알았던 남자, 13세기 몽골 대정복을 이끌었던 칭지즈칸은 그의 지위에 걸맞게 진지한 어조로 자신의 성스러운 임무를 설명했다. "남자의 인생에서 최고의 업적은" 자신이 설파한 바를 실제로 실천한 남자가 말했다. "적을 무찔러 내 앞에 끌어낸 후,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는 것이다. 그들을 사랑했던 이들이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그의 무릎 사이에 있던 말을 빼앗고, 그의 여자 중 가장 탐나는 이를 품에 넣는 것이다." 이만큼 영웅적 강간을 뚜렷하게 정의한 언급은 없을 것이다. 여성은 적이 소유했던 말과 다를 것 없는 전사의 전리품이라는 단언. 남자다움, 성취, 정복과 강간의 직접적인 연결 관계를 이보다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표현한 예는 없는지라 칭기즈칸에게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할 지경이다. (p.447, Andreas Capellanus, The Art of Courtly Love)



나는 작가들이 강간을, 여성의 몸을 드러내고 미화하는 것에 정말이지 구역질이 난다. 읽어보지 않았지만 김훈도 자신의 글에서 갓난 여아의 기저귀를 갈아주며 '저 안은 따뜻할 것이다' 따위의 문구를 썼다는데, 도대체 어느 아빠가 딸아이의 성기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할 것이며, 그런 생각을 하는 아빠라면, 그게 아빠인가.. 나는 그게 너무 끔찍한거다. 내 남편이 내 딸의 기저귀를 갈아주며 그딴 생각을 한다는 걸 안다면, 나는 그안에 잠재된 그 무엇이 너무 무서워서 당장 갈라서자 할것이다. 아니면 딸아이 데리고 그로부터 도망을 치던지 말이다. 어째서 남자들은 갓난아이에게도 성적대상화를 시키는가. 성적대상화 자체가 잘못된 것인데, 왜 물불 못가리고 다 그런식으로 덤벼대는 것인가. 너무 머저리같고 너무 한심하고 너무 찌질하다. 






다수가 자진해서 거주하고 있는 이성애 세계 내에서 남성들은 오직 피해자가 여성이고 가해자가 남성인 경우에만 성폭력을 이데올로기의 수준으로 승격시킨다. 하드코어 포르노그래피는 그 파괴적인 원리를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표정이다. 오랜 판매 경험을 토대로 조성된 전통에 따라 이성애 취향에 맞춰 제작된 평범한 포르노그래피는 커다란 금기를 하나 갖고 있는데, 바로 남자가 남자에게 '그것을 하는' 장면이다. 내가 주장하는 바를 증명하기 위해 굳이 극단적인 예를 살펴볼 필요는 없다. 평범한 책과 영화, 노래에서도 여성을 짓밟는 폭력을 묘사하고 폭력을 저지르는 남성을 찬미하는 작품들의 인기가 얼마나 공고한지, 그런 주제에만 한 권 분량을 통째로 할애한 책도 있다. 문화가 유포하는 이런 메시지를 어떤 식으로 수용할 것인지는 성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p.452-453)





게다가 연쇄살인범을 대하는 그들의 자세라니!



잭 더 리퍼는 실제보다 엄청나게 부풀려진 모습으로 남성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1888년 가을 런던 이스트엔드에서 다섯 명의 창녀의 뒤를 밟아 신체를 훼손하고 살해한 신원불명 남자의 이야기가 어떻게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매력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정확히 살필 필요가 있다. 나는 <레이트 레이트 쇼Late Late Show>에서 리퍼가 등장하는 영화를 몇 편 접했는데, 영화를 보고 내가 느낀 감정은 공포뿐이었다. 여성인 나로서는 곧 닥쳐올 죽음을 알지 못한 채 자욱한 거리를 걷는 여성 피해자에게 동일시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마 여성이라면 누구나 나처럼 반응할 것이다. 그러나 남성은 그렇지 않았다. 놀랍게도 남자들은 잭 더 리퍼를 언급하며 '영웅'이라는 단어를 적용했다. 노엘 애넌Noel Annan처럼 흠잡을 데 없는 비평가(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학장으로, 교육자이기도 하다)조차도, 《뉴욕 리뷰 오브 북스New York Review of Books》에 글을 쓰면서 잭 더 리퍼를 "빅토리아 시대의 공포 영웅"이라고 불렀다. (p.453)



한번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San Francisco Chronicle》의 찰스 매케이브Charles McCabe가 칼럼 한 편을 통째로 할애해 리퍼를 주제로 다뤘다. 그는 리퍼를 최고 중의 최고라고 부르면서 "내 어린 시절의 위대한 영웅, 술 취한 창녀에게 인간 도살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혼자 다 해낸 숙련된 전문가"라고 썼다. 매케이브가 열광하며 떠든 소리-그는 리퍼를 영국의 '국보'에 견주었다-는 리퍼 숭배 현상에 대해 약간의 통찰을 제공해준다. 그는 이렇게 썼다. "리퍼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가 대체로 섹스와 엮여 있으면서 동기 없이 이루어지는 살인이라는 새로운 살인 유파를 창설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말도 안되는 헛소리이다. 여성을 토막살해하는 일은 결코 동기 없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 매케이브는 칼럼에 이렇게도 썼다. "리퍼는 ……역사상 중요한 살인자들 중 유일하게 이름을 모르는 자이다." 이 역시 바보 같은 소리지만, 리퍼에 대한 열광의 기원을 알려준다. 잭 더 리퍼가 중요한 살인자이자 신화적인 존재가 된 이유는 바로 그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았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교묘히 들키지 않고 일을 저질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p.453-454)




리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아웃사이더The Outsider》(0956)의 작가이자 도발적인 저서《현대 살인백과 A Casebook of Murder》(1969)에서 여자들을 학살하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표현한 바 있는 흥미로운 영국 작가 콜린 윌슨Colin Wilson을 빠뜨리고 넘어갈 수 없다. 윌슨은 리퍼가 분명 재능 있고 우월한 상위 5퍼센트에 속할 것이라고 전제하고는 그 "행위를 통한 프로파간다"에 깊이 사로잡혔다. (p.455)



리퍼가 설사 재능있고 상위 5퍼센트에 속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그게 그를, 여자를 연쇄 살인한 그를 영웅시할 이유가 된단 말인가? 우리는 얼마나 많이, 얼마나 오랫동안, 범죄자의 재능으로 범죄를 감춰왔는가? 나는 텔레비젼에 여전히 그 얼굴을 자랑스레 들고 다니는 숱한 남자 연예인들을 보는 것이 괴롭다. 그들이 했던 말과 행동들, 그리고 범죄가 있는데 당당하게 광고를 찍고 영화를 찍고 개그를 하는 것을 보노라면 역겹기 짝이 없다. 이게 바로 강간문화다. 강간을 저질러도 이렇게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바로 이것.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 그 사람이 그런 행실을 했어도 연기는 잘하잖아, 그 사람이 그런 범죄를 저질렀어도 재밋잖아... 그래서? 그래서 뭐? 그 범죄자들을 말고는 연기나 노래를 할만한 사람이 세상에 없단 말인가? 그 사람처럼 노래하고 그 사람만큼 연기하고, 그 사람만큼 웃긴 사람이 세상에 없단 말인가? 설사 세상에 그 사람보다 더 재미있고 더 연기 잘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우리가 그의 연기나 노래로, 코미디로 그의 범죄를 용서해주는 것은 이 사회에 어떤 사인을 보내고 있는가?


리퍼를 왜 영웅화 하는가? 리퍼가 영웅이라면, 멋있다면,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들의 심리에는 어떤 것들이 깔려있는가. 그게 너무 소름끼치는 거다. 왜 그가 멋있어? 응, 내가 하지 못한 걸 했으니까. 뭘 하고 싶은데? 응 그가 이미 했던 것. 여자를 강간하고 죽이는 것, 연쇄적으로.



연쇄살인범, 강간범을 영웅시한 것은 한두명만이 한 일이 아니라, 남자들 전체가 한 일이었다. 세상이 그렇게 했다.



믹 재거와 롤링스톤스가 그들의 가장 장대한 공연용 곡 중 하나인 <한밤의 소요자Midnight Rambler>로 보스턴 교살자를 기념하고 있다. 이 곡을 연주할 때 믹 재거의 트레이드마크인 스카프는 교살 도구가 된다.

한 잡지 기자는 <한 밤의 소요자> 연주에 청중이 보인 광적인 반응을 이렇게 묘사했다. "키스 리처드가 길고 위험할 정도로 관능적인 기타 전주로 장악하는 동안, 믹은 천천히 밝은 금빛 띠를 푼다. 첫 줄에 '보스턴 교살자에 대해 들어본 적 있겠지'라고 뜨면서, 갑자기 조명이 어두어지고 어두운 붉은 색의 투광 조명 앞에 믹 재거의 실루엣만 남는다. 그는 무대 위에서 살금살금 움직이며 날씬한 엉덩이를 지닌 다성적 존재로 부활한 잭 더 리퍼가 된다. 그는 금빛 띠를 채찍처럼 움켜잡고 내려친다. …… '나도, 나도,' 그들이 소리친다. '나도 때려줘요, 믹." (p.456)




하드록의 전성기에 믹 재거와 롤링스톤스만 유별나게 폭력적 섹슈얼리티를 과시한 것은 아니다. 도어스의 짐 모리슨과 지미 헨드릭스는 둘 다 이미 죽었지만, 이들이 거둔 폭발적인 성공은 자가 발정적인 강한 한 방을 위해 무대 위에서 여성을 학대하는 흉내를 내며 쌓아올린 것이었다. 이 시기에 어빙 슐만Irving Shulman이 쓴 브루클린 갱의 삶에 대한 1940년대 후반의 동명 소설에서 이름을 딴 '앰보이 듀크스The Amboy Dukes'라는 밴드가 등장했는데, 슐만 소설에서 절정이 되는 장면은 듀크스 무리에게 '몸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 이웃 소녀를 강간하는 장면이다. (우리가 익히 발견해왔듯, 낭만적인 마법 뒤의 적나라한 시상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하지만 롤링스톤스는 그중에서도 압권으로, 그들이 캘리포니아 직옥의 천사들과 잠시 연합한 결과 벌어진 비극은 폭력을 찬미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극명히 보여준다. (p.458)




덜컥, 숨이 막힌다. 여성을 강간하고 살해한 범죄자를 영웅시해 노래를 만들고, 공연장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내다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이 책의 10장으로 가면 여성이 강간을 원한다는 강간 판타지에 대해 나온다. '수전 브라운 밀러'는 우리 여성들이 그렇게 아프게 되는걸, 죽는 걸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강간 판타지를 가진 여자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물을 수 있다. 그 여성이 가진 강간 판타지는, 그렇다면, 진정 그 여성의 판타지인가? 작가와 비평가 가수들이 모두 한 데 모여서 세상에 강간에 대해 노래하고 찬양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그런 강간문화가 존재하지 않았어도 여성에게 과연 강간 판타지가 생겨났을 것인가.




여성이 강간당하기를 원한다고? 우리가 굴욕과 멸시, 신체의 온전성을 침해하는 폭력을 갈망한다고? 우리가 남의 손아귀에 붙잡혀 끌려가 강간당하고 피폐해지기를 원하는 심리적 욕구를 갖고 있다고? 페미니스트가 이런 터무니없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야 하는가?

슬프게도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이다. 우리는 그런 문제를 다루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중문화가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중문화 속에서 숨쉬며, 그것을 흡수하는 것은 물론 거기에 기여하기까지 한다. 사실 조사를 하다보면 위에 언급한 문화적 메시지들이 자주 서로 충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때는 모든 여성이 강간을 원한다고 하다가, 또 어떤 때는 애초에 강간 같은 것은 없으며 여성들이 강간당했다고 소리치는 이유란 성관계 후에 앙심이 생겨 복수하려 드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잘못은 언제나 여성에게 있다. (p.486-487)




내가 누누이 말해왔지만, 어떤 걸 욕으로 하느냐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여자를 욕으로 쓰는 사람, 동성애자를 욕으로 쓰는 사람. 그것이 욕을 내뱉는 그 사람을 말해준다. 그리고 또 하나. 누구를 영웅시 하느냐로도 역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연쇄살인범을, 강간범을 영웅시하며 따르는 사람, 그 사람을 부러워하는 사람에게, 대체 '그렇게 되고 싶다'는 것 말고 다른 어떤 게 더 있단 말인가. 자신 안에 많은 여자를 강간하고 싶은 마음, 정복하고 싶은 마음,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 자기 대신 그걸 해준 사람을 보고 영웅시하는 게 아닌가. 나는 아직 못했는데, 저 사람은 했네, 위대해!




사람은 모두 다르고 각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 또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도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건, '다 떠나서' 그 사람은 그래도 재미있잖아, 천재적이잖아, 하며 범죄자를 옹호하는 사람에게는 나는 '그럴 수 있지'라고 할 수가 없다. 왜 가장 중요한 걸 제쳐두고 '그래도 능력있잖아'가 따라오는가. 나는 싫다. 그만큼 능력있는 사람들은 세상에 많다. 범죄자의 재능을 가져오며 범죄를 숨겨주는 사람들, 범죄를 뒤로 미뤄두는 사람들을 마음에서 떠나보낼 수밖에 없어. 그 범죄가 여성혐오에 관한 것이라면 더 그렇다. 일전에 '이사카 고타로'가 자신의 책 《골든 슬럼버》에서 주인공 아버지의 입을 빌어 '강간에는 명분이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살인이라면 복수라는 명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강간에 대해서라면 어떤 명분도 있을 수 없다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간혹 복수라는 이름으로 강간하는 남자들이 나오는 건, 그 복수가 그 여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 여자를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남자를 향한 것이다. 그 복수가 진정한 복수인가, 결국 그들이 해를 입히고 다치게 한 건 누구인가.




현재 이 책의 10장을 읽고 있고, 그렇게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12장은 <여성이 반격한다> 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벌써부터 이 부분을 읽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다.


결국, 여자들은 말하고 살아남는다. 말하고, 살아남기 위해 반격한다. 그게 11월, 12월 그리고 1월을 지내는동안 페미니즘 책을 같이 읽으며 내가 느낀 바다. 여자들은 반격한다. 반격하고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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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30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그래서 안젤리나졸리를!! 다락방님 이야기 들으니 그녀가 진짜 멋져보이네요.
그나저나 강간이 톡쏘는 맛이라니ㅡ 여남 인식차이 끝판왕 표현이네요 진짜.. 노어이..

다락방 2019-01-30 13:09   좋아요 1 | URL
강간에 대한 이야기를 읽노라니 여남의 인식차이도 그렇지만 뭐랄까, 한 쪽 성은 유독 더 멍청하고 한심한 것 같아요. 무엇이 잘못인지 계속 인지하지 못하고 살면 결국 다른 한쪽 성에 비하여 뒤쳐지게 되겠죠.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안젤리나 졸리는, 그녀가 그러라고 한 게 아니라 그냥 저 스스로 그녀로부터 그런 느낌을 받아서 제가 좋아라 하고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블랙겟타 2019-01-30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저는 스타트도 늦었고 막판 스퍼트도 늦다보니 지금 저도 10장 읽는 중인데(지금 쓴 시점에 다락방님은 거의 다읽은 듯..;;) 얼른 다 읽고 오늘밤이나 내일 부터 글도 쓰려고 하는데 내일!이 마지막날이었네요. 얼른 읽어야겠네요!!

아 그리고 다락방님께서 안젤리나 졸리를 얘기하시니 작년 말에 난민 문제로 한국에 와서 법무부 장관도 만나고 정우성배우랑도 만나고 했던 일이 생각나네요. (갑자기?)

- 2019-01-30 21:04   좋아요 1 | URL
여기 29일에 본격 읽은 제가 있사옵니다!! (ㅋㅋㅋㅋㅋㅋ) 누가 쫓아오진 않지만 너무 급히 읽다 체하시지 말기_!!

다락방 2019-01-30 21:09   좋아요 2 | URL
저 다 읽었습니다! 퇴근 길 지하철 안에서 서서 가면서도 들고 읽었어요. 고된 퇴근길 이었습니다. 자, 끝까지 힘내세요, 여러분! 그리고 좋은 글 기다리겠습니다!!!

블랙겟타 2019-01-30 21:13   좋아요 0 | URL
그그럼 쟝쟝님 믿고.. 조금 마음의 짐을 조금 내려놔도 괘괜찮겠죠? 하하..

역시...다락방님. 퇴근 길의 상황속에서도 완독을.저도 마무리를 하러.

- 2019-01-30 21:11   좋아요 1 | URL
아 다락방 이언니 멋지시다. 롤모델 없었는데 롤모델 삶고 싶다🥺

- 2019-01-30 21:17   좋아요 1 | URL
전 겟타님 믿고 ㅋㅋㅋ 천천히 완독할께요 🥰

다락방 2019-01-30 21:38   좋아요 1 | URL
무릇 여자란 한 번 칼을 뽑았으면 무우라도 베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한다면 한다! 완독을 위해서라면 퇴근길도 마다않는 강한 정신!! ㅋㅋㅋㅋㅋ
 

지난 1월에 예고한대로, 2월 도서는 두 권, '실비아 페데리치'의 셋트로 하겠습니다. 《혁명의 영점》,《캘리번과 마녀》두 권입니다.


















아직 1월 도서 완독 인증을 해주신 분이 한 분도 안계신데요, 제가 가장 먼저 하고 싶지만 저도 이제 막 절반을 넘긴 상태. 1월이라고 하면 고작 이틀 남았을 뿐인데, 제가 그 안에 완독할 수 있을지 ... 그래도 완독을 목표로 열심히 달리고 있습니다. 1월 남은 동안은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에 몽땅 투자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오늘 출근길에도 들고 왔어요. 무거워..그렇지만 지하철 안에 앉아서 졸았어.. ㅠㅠ



자, 1월 도서 부지런히 달리시고요, 2월 도서도 준비해두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겐 설 연휴가 있잖아요? 설 연휴에 가볍게 두 권중 한 권쯤은 끝내도 되지 않겠습니까? 네?


참여하실 분들 댓글 달아주시고요, 말머리에 책 제목 다시고 2월 내내 페이퍼나 리뷰 밑줄긋기 등 부지런히 써주시면 됩니다.


3월에는 《가부장제의 창조》나 《성의 변증법》이 어떨까 합니다.



자,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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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29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월 가부장제의 창조 한표!
다락방님 표현대로 욕심이 똥꾸멍까지 차가지곸ㅋㅋㅋㅋ 우리의 의지는 100페이지 읽은 주제에 3월에 배팅하고 있다...

다락방 2019-01-30 07:46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쟝쟝님. 1월 도서도 다 읽지 못했는데 벌써 3월 도서까지 생각하고 있는 우리란 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그런데 좋습니다. 욕심이 똥구멍까지 찬 것 말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는 잘 진행되고 계십니까? 저는 500페이지를 넘겼다는 소식 알려드립니다. 오늘 페이퍼 하나 쓸 예정입니다. 후훗.

- 2019-01-30 11:29   좋아요 0 | URL
저두 가지고 나올까 하다가 가방이 무거워져서 ㅋㅋ 이번달안엔 글렀지만 몇일동안 요 책만 달릴거예요 ㅋㅋ 페이퍼 기다릴게요 ㅎㅎㅎㅎ ~~~~

다락방 2019-01-30 11:44   좋아요 0 | URL
저는 오늘,내일 내로 꼭!! 다 읽도록 할거에요. 2월 시작하자마자 캘리번과 마녀 시작하는 게 현재의 목표입니다. 빠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 2019-01-30 11:46   좋아요 0 | URL
ㅠㅠㅠㅠㅠㅠㅠㅠ 멋지다... 그녀....

syo 2019-01-30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때가 되었는가.... 벌써.....

다락방 2019-01-30 10:33   좋아요 1 | URL
쇼님이 등장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후훗.

syo 2019-01-30 10:36   좋아요 0 | URL
잘할 수 있을까.....😣

다락방 2019-01-30 10:50   좋아요 0 | URL
물론이죠!!!!!!!!!!!!!!!!!!!!!!!!!!!!!!!!!!!!!

- 2019-01-30 11:30   좋아요 0 | URL
와 다음달은 쇼님도 등판 하시는 구나 🙌🏻🙌🏻🙌🏻

다락방 2019-01-30 11:43   좋아요 0 | URL
네, 그러합니다. 우리 쇼님과 많은 이야기 나눠봅시다. 후훗.

유부만두 2019-01-30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캘리번과 마녀, 저도 읽고 싶어요.
저에겐 읽을, 읽어야 할, 읽으려고 산 책들이 많지만.... 하나 더 더하고 그건 꼭 읽으면 아름답지 않겠습니꺄??!!!

다락방 2019-01-30 11:43   좋아요 0 | URL
그러합니다. 격하게 환영합니다, 유부만두님! 우리 2월에 뜨겁게 읽어보아요. 뜨겁게 같이 읽고 뜨겁게 이야기 나눕시다. 으앗, 유부만두님 함께한다 하시니 너무 흥분됩니다!! >.<

- 2019-01-30 11:47   좋아요 0 | URL
유부만두님 함께 해요!! (라고 말하고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남은 페이지를 생각한다.. )

다락방 2019-01-30 13:09   좋아요 0 | URL
저도 빨리 완독하고 싶어요, 쟝쟝님. 빨리 완독하고 새 책 시작하고 싶다~~~~~~~~~~~~~~~~~~

블랙겟타 2019-01-30 2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월의 책읽기를 해보니 이제 어떤 속도로 읽어야하는지 알겠네요!(하루 밖에 안남은 오늘 그걸 이제 아냐. 으이구. ㅜㅜ)
그러는 의미로 2월도 합니다! 제대로요.. ^^;;;
그럼 책을 얼른 구매를 하러....

- 2019-01-30 21:14   좋아요 1 | URL
역시 구매는 완독보다 빠르다!!! (저 혁명의 영점 1월에 사놓은 사람..🤗)

다락방 2019-01-30 21:25   좋아요 1 | URL
우와와 너무 좋군요. 2월에도 함께하는 겁니까? 2월에도 블랙겟타님의 글 기다리겠습니다. 같이 읽으니 자주 보네요! 후훗 :)

막시무스 2019-01-30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전혀 무지한 분야이지만 어떤건지 궁금해서 동참 및 도전해 보겠습니다!ㅎ
캘리번과 마녀가 왠지 끌려서 느낌으로 구매 완료했어요!ㅎ

- 2019-01-30 21:14   좋아요 1 | URL
함께 읽어요 !!!!!! 환영합니다 막시무스님!!

다락방 2019-01-30 21:24   좋아요 1 | URL
오오 구매까지 완료하시다니, 빠르시군요! 함께하게 되어 좋습니다. 환영합니다!! >.<

- 2019-01-30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댓글달다보니)여기가 바로 페미책 네트워크 마케팅의 본진인가요??ㅋㅋㅋㅋ 여기저기 구매인증...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1-30 21:26   좋아요 0 | URL
잔치에만 사람 많은 게 좋은 게 아니군요. 페미책 같이 읽기도 사람 많으니까 좋네요!!

막시무스 2019-01-30 21: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함께 뭔가 읽는건 처음이지만 재밌을건 같아요!ㅎ 파이팅!

다락방 2019-01-30 21:27   좋아요 1 | URL
막시무스님, 2월에 같이 읽고 또 글도 써주세요. 분명 좋은 경험이 될겁니다. 덕분에 저도 세 권이나 완독했어요. 혼자였다면 완독하지 못했을 책들을요! 훗

단발머리 2019-02-01 0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가 페미책 네트워크 마케팅의 본진 맞나요? 두리번두리번..........................
저도 2월에 같이 합니다. 잠깐 놀다 알라딘 들어왔더니 이런 좋은 소식이 있네요.
새로운 분들 계셔서 너무 기대됩니다. 잘 부탁드려요^^

다락방 2019-02-01 07:51   좋아요 1 | URL
잘 오셨습니다, 바로 여기가 그곳입니다.(응?)
2월에도 역시 같이 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단발머리님.
단발머리님 께서 부지런히 읽고 써주시는 덕분에 진짜 많은 힘이 되고 있어요.

그러고보니 11월, 12월, 1월에 걸쳐 두꺼운 책을 다 완독했더라고요. 같이읽기가 아니었다면 못했을 거예요. 새삼 감사드려요, 단발머리님.
우리 2019년에도 지치지 말고 공부하도록 해요.

화이팅!!
 
















이 책에 대한 정희진 선생님의 북토크에 다녀왔다. 친구가 두 자리를 신청한 덕분에 운좋게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 나는 오랜만에 정희진 선생님 만나는 것도 너무 좋았지만,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는 것도 너무 좋았다! 요즘 내가 꽂힌 앙버터를 사서는 룰루랄라 친구를 만나러 갔다. 친구에게 앙버터를 내밀며, 요즘 내가 꽂힌 거야, 라고 했더니 친구는 내게 와인을 내밀었어. 오, 친구여... 거룩한 친구.... 복받으실 거에요. 몹시 좋아하는 내게 친구는 '너는 뭘 좋아하는지 확실해서 선물 고를 때 편하다'고 했다. 아아, 친구여... 본인은 술도 안마시면서 언제나 나에게 와인 사주는 친구, 거룩한 친구.... 세상의 축. 복. ♡



아무튼 그렇게 선생님을 오랜만에 뵙고 선생님의 책 읽은 감상 혹은 책으로부터 뻗어나온 생각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데, 와, 역시 ... 내가 생각한 걸 그대로 말씀해주셨다. 그러니까 내가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를 읽으면서 너무 어려웠고, 너무 어려워서, '내가 아는 게 많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수차례 했던 터다. 내가 아는 게 많았다면 이 책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텐데, 더 잘 이해하고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었을텐데, 나는 지금 이 책을 따라갈 수가 없다, 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그간 읽어온 리베카 솔닛의 책은 어렵지 않았는데, 이 책은 어려웠어. 정희진 쌤은 이 책이 좀 어렵긴 하지만 그간 번역된 솔닛의 책 중 가장 이야기거리가 많고 좋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본인은 철학적 계보를 공부하는 사람인데, 솔닛은 이미 철학적 계보를 파악한 사람이란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까 모든 것들을 이미 알고, 이해하고, 파악한 지식인, 지성인 이라는 것.

아아, 맞아, 내가 '부족해서 어렵다'라고 생각한 걸 쌤은 이미 많은 지식을 보유하사, 이 책에서 '철학적 계보를 파악한 작가'까지 읽어내신 거다. 아아, 공부여... 아아 지식이여, 지성이여...



그러면서 선생님은 요즘 사람들 팩트 체크라며 팩트 말하길 좋아하고, 그거 많이 알면 지식인인줄 아는데, 지식은 그런 게 아니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지식인이란, 내가 무엇을 아는지 그리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는 것. 아아.. 감사합니다, 선생님. 요약하자면, 똑똑한 척 하는게, 똑똑한 줄 아는게 지식인은 아니라는 것.



쌤의 강연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쌤이야말로 의식의 흐름대로 말씀을 하시는 분이다. 거기에서 숱한 철학자나 학자의 이름이 언급되고 또 본인의 생각이 합쳐지는데, 들을 때마다 나는 사고가 확장되는 걸 느껴. 와, 언제, 어떻게 저 많은 걸 다 공부하시는걸까, 도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공부하시냐고 질문이라도 하고 싶었다. 아마 내가 여태 봐 온 한국인들 중 가장 공부를 열심히 많이 하고 또 많이 아시는 분이 아닐까 싶다. 일전에 들었던 강연에서 본인에게 필요한 건 다 책으로부터 배운다는 말씀을 하셨었는데, 덕분에 나도 더 열심히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했고.



선생님은 솔닛의 이 책 한권에 환경, 여성, 식민 자본주의가 다 들어있다고 말씀하셨다. 길을 잃는 것은 언어를 찾는 것이며, 자신을 찾는 것이라 하셨고. 이 책을 필사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 하셨다. 나도 필사라는 걸 한 번 해볼까, 잠깐 고민했다.


되게 인상적인건, '역사적 시간의 공간화' 였다. 역사적 시간이란 즉 문명의 시간을 뜻하는데, 문명이 더 발전한 것으로 덜 발전한 곳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식민지화에 대해 얘기하신 거다. 와, 이거 들을 때 진짜 소름이었어. 이러면서 여러가지 문장을 예로 들어 설명해주셨는데, 일본이 근대적이라며 한국을 침략하고, 지방은 서울에 비해 낙후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들. 그리고 최근에는 여성들의 권리가 조선시대보다 나아졌지, 하는 것들까지. 

나는 내가 베트남에 갔을 때 그리고 다녀오고 나서도 몇 번 '우리나라 70년대 같아' 라고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갑자기 그 말의 폭력성이 나를 휘감았달까. 무지는 이렇게나 무섭다. 모르면 폭력적이 되기가 쉬워. 나는 폭력이 싫다고 부르짖고 다니지만, 폭력성을 띤 말들을 얼마나 자주 내뱉고 다니는걸까.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나의 폭력적인 면들을 맞닥뜨리게 될까.


(문명화) 앞선 나라들은 그렇지 않은 나라들을 지배할 수 있다, 는 생각이 역사적 시간의 공간화 임을 말씀하신 거다. 그리고,


여성의 몸의 공간화. 그것이 즉 성폭력이라고.



이런 얘기들을 하면서 수많은 책과 학자들의 이름을 언급하셨는데, 내가 못들어본 책이며 학자들이어서 아아, 세상은 얼마나 넓고 내가 읽지 못한 책은 얼마나 많은가... 했다.



마지막에는 지식의 양극화에 대해 말씀하셨다. 앞으로 지식의 양극화가 더 심해질텐데, 가장 똑똑한 사람은 '좌파 페미니스트'일 확률이 가장 크다고 하셨다, 그게 너무 인상적이어서 메모해 두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이미 그것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으므로.


그리고 이 책을 읽은 결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간을 낭비하면서 길을 잃어라, 그러면서 언어를 찾고 자신을 찾아라, 그것이 인생이다.'



나는 내가 읽던 솔닛의 책을 덮고, 처음부터 다시 읽기로 했다.



선생님의 그 방대한 지식에 놀라고, 그것을 내보임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사고가 뻗어나가게 도와주는 게 너무 감사해서, 아아, 너무 좋은 시간이다, 이 감사를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 뭔가 성의 표시를 하고 싶다, 뭐 드릴 게 없을까, 가방 안에 뭐 없나? 를 계속 생각하다가, 아!! 내 지갑에 스타벅스 카드가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다른 데 쓰려고 사두었던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 다시 사면 되니까 그런 건 일도 아냐. 마침 선생님은 커피를 아주 좋아한다 하셨다. 나는 강연이 끝난 후에 후다닥 가서, 오늘 강연 정말 좋았다며 커피 사서 드시라고 카드를 드렸다.



물론 선생님의 강연 내용에 모두 백프로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중간중간 고개를 갸웃한 것도 있었고,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걸 왜 그렇게 생각하실까' 하는 부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완전 공부의욕 뿜뿜하는 시간이었달까. 강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친구랑 강연 후기를 나누었다.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았는지, 그리고 듣고 나니 어떤 기분인지를. 아아, 좋은 시간이었다.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게는 한계가 있을 터. 내가 아무리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책을 읽어도 나는 정희진 쌤처럼 될 순 없을것 같다. 아아, 내가 내 인생의 남은 시간을 전부 공부에 쏟아부어도 나는 정희진 쌤처럼 될 순 없다. 그러나, '어차피 안될 거 뭐하러 해' 하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지식인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멈추지 말아야겠다. 오래전 강연에서 선생님은 공부하지 않으면 퇴보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적어도 퇴보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열심히 책을 읽고 열심히 공부해야지. 선생님은 책 많이 읽으라고 하셨다. 책을 굉장히 극찬하셨어. 네, 열심히 책을 읽겠습니다! 어제도 책 한 박스가 도착했어요!! 꺅 >.<



그리고 오늘 아침. 이 책을 들고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좋은 후기 한 번 들었다고 갑자기 이 책이 쉬워지지도 않았고 그럴 리도 없었지만, 처음보다는 좀 나아졌다. 그리고 이런 부분에는, 처음부터 내가 포스트잇을 붙여두기도 했다.




샐리가 그 다음 들려준 이야기는 길 잃은 열한 살 남자아이를 찾아낸 일이었다. 귀가 안 들리는 데다가 퇴행성 질환으로 시력마저 잃어가는 아이였고 결국에는 그 병으로 짧은 삶을 마감했다고 했다. 아이는 캠프에 참가하고 있었고, 캠프 교사들을 따라 친구들과 함께 산으로 와서 숨바꼭질을 시작했는데, 그만 지나치게 꼭꼭 잘 숨은 모양이었다. 인솔자들은 해가 졌는데도 아이를 찾지 못했고, 아이도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한밤중에 수색구조팀이 불려나왔다. 샐리는 질척질척한 지대를 수색하기 시작하면서 내심 두려웠다. 영하에 가깝게 추운 그런 밤에는 시체밖에 못 찾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수색팀은 샅샅이 흩어져서 일대를 뒤덮었고, 태양이 지평선으로 막 떠오를 무렵, 샐리는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소리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아이였다. 아이가 오들오들 떨면서 호루라기를 불고 있었다. 샐리는 아이를 끌어안았고, 얼른 제 옷을 거의 다 벗어서 아이에게 입혔다. 아이는 모든 것을 배운 대로 제대로 했다. 호루라기 소리가 시끄러운 물소리 너무로 들릴 만큼 크지 않았던 탓에 캠프 인솔자들이 놓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이는 해 질 녘까지 계속 호루라기를 불었고, 해 진 뒤에는 쓰러진 두 나무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고, 이윽고 다시 해가 나자 다시 호루라기를 불었다. 아이는 발견된 것이 기뻐서 환한 얼굴이었고 샐리는 찾은 것이 기뻐서 눈물범벅이었다. (P.23-24)




이 부분을 읽다가 나도 눈물이 핑돌았다. 아이를 찾아서 다행이라고, 아이가 호루라기를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아이가 가지고 있는 호루라기를 불어줘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 다행이야.

앞으로 계속 어렵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열심히 꼼꼼하게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 너무 좋다. 철학적 계보를 공부하는 사람과, 철학적 계보를 파악한 사람.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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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1-25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시간이었겠어요.
정희진쌤 강연은 항상 좋은 것 같아요. 글도 좋고, 강연도 좋고. 정희진쌤은 그냥 사랑이죠^^
다락방님이 정리해주신 것 읽어보았더니 마치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아요. 어쩜 신기하게 정희진쌤 음성 지원도 되구요.
다락방님은 메모 안 하셔도 되겠어요. 이렇게 세세히 정확하게 기억을 잘 하는 사람이라니... 새삼 놀랍습니다.
강의 후기 넘 감사해요!!!

참, 앙버터 친구는 좋겠네요. 다락방님도 만나고 앙버터 빵도 마구마구 먹고^^

다락방 2019-01-25 11:33   좋아요 0 | URL
아, 저는 호미 바바는 메모하지 않았지만 ‘역사적 시간의 공간화‘ 를 메모해 두었어요. 저한테는 그게 너무 인상적이었거든요. 이렇게 인상적인 중요 키워드를 메모해두었더니, 그것을 설명할 때 들었던 예시들은 기억이 나더라고요. 역사적 시간의 공간화... 어떻게 이런 강연이 있을까요, 단발머리님. 하나 더 배우고 더 깨닫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너무 좋아요!

설마 제가 기억만으로 이걸 다 풀어냈겠습니까. 제가 메모를 잘 하지도 않고 많이 하지도 않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듣다가 ‘잊어버리지말자‘ 하는 건 기록을 해요. 그렇지만, 호미 바바는 아직도 모르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들은 기억도 없고 적어두지도 않았네요. 저 뭐했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와인 마실 생각하느라 못들었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19-01-25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퇴근 후에 가려니 강연 장소가 너무 멀어서;;; 신청을 포기했던 강좌인데, 이렇게 다락방 님 통해서 ‘정희진 쌤 강연 축약.txt‘ 읽으니 좋네요.

<길 잃기 안내서>는 제목만 보면 쉬울 거 같아서 일단 사놓기만 했는데 어려운 책이군요; 책 속에서 길을 잃더라도 곧 읽어봐야겠습니다.

다락방 2019-01-25 11:53   좋아요 1 | URL
저도 퇴근후에 간다는 게 좀 부담스럽긴 하더라고요. 그렇지만 정희진 쌤 강연이라 기어코!! 갔습니다. ㅎㅎ 갔더니 후회가 없었고요. 오길 잘했다, 는 생각이 여러차례 들었어요.

저는 다시 읽어도 어렵더라고요. 이제 고작 앞부분 조금이기는 하지만, 이 책이라면 여러차례 읽어야 비로소 이해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책 읽으시면 후기 남겨주세요, 잠자냥님!!

syo 2019-01-25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감동적인 호루라기 아이 대목 기억나요!!!
왜냐면 거기까지 읽고 덮어둔 채 보름이 지났거든요.......(- _-)

다락방 2019-01-25 13:06   좋아요 1 | URL
아니, 쇼님이 저 책을 읽다가 덮어두었다니, 놀라운데요?!
쇼님은 철학 책도 열심히 읽는 분이시니까 다시 한 번 도전해보세요. 놀라운 세계가 펼쳐질거에요. 제가 보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목나무 2019-01-25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도 강의도 궁금했는데 다락방님 덕분에 저도 뭔가 의욕이 뿜뿜생겨납니다!
정말이지 정희진샘은 치열하게 공부하시는 것 같아요.
치열하게는 아니어도 열심히 공부하고싶다는 다짐 덕분에 이렇게 하게됩니다. ^^

다락방 2019-01-25 13:07   좋아요 1 | URL
네, 제가 아는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가장 공부 잘하는 분이신 것 같아요. 공부의 방법을 묻고 싶더라고요. 그 많은 것들을 어떻게 채우셨는지 말예요. 그만큼 공부한 사람들은 더 있을테지만, 그걸 어떻게 다른 것들과 엮어가는지는 또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정희진 쌤은 그 모두를 진짜 넓게 활용하시는 분 같아요!

의욕 뿜뿜하게 해드렸다니 다행이에요.
설해목 님, 우리 열심히 공부합시다. 공부를 멈추지 말자구요!

moonnight 2019-01-28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부분을 읽다가 그만 저도 눈물이ㅠㅠ 아이가 호루라기를 갖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ㅠㅠ 이 책은 보관함에 담아두고 아직 안 샀는데 읽어야겠군요.저도 열심히 공부하며 살겠습니다. 감사해요.^^

다락방 2019-01-28 08:57   좋아요 0 | URL
아이가 호루라기를 갖고 있었고 또 그것을 불 생각을 했다는 게 너무 좋더라고요. 누군가 발견해주기까지 불렀다는 게 너무 찡했어요. 결국 발견하게 되어서 너무 좋았고요.

네, 문나잇님. 우리 열심히 공부하며 살도록 해요. 함께 공부하는 사람이 됩시다!

붕붕툐툐 2019-01-25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시간이었겠어요~ 무엇보다 공부 의욕이 뿜뿜이었다니 말이에요~ 그리고 저도 앙바터 너무나 좋아해요~ 맛집 공유해주세용!ㅎㅎ

다락방 2019-01-28 08:58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사정상 어쩔 수 없이 저희 회사 빌딩 1층의 앙버터를 먹는데요, 여긴 앙버터 맛집은 아니에요 ㅋㅋㅋ 앙버터, 그 버터 가득을 제가 좋아해서 먹는거지, 앙버터 맛집은 아닙니다. 여기에 굳이 앙버터 드시러 오시지 않아도 돼요. 다른 데, 더 좋은 데 가서 드세요. 앙버터 때문에 온다면 돈 아깝고 시간 아까운 ㅋㅋㅋ 그렇지만 저는 버터를 러브하므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연 2019-01-26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희진샘 강연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찾아서 가봐야겠군요. 왜 제 눈엔 이 강연이 안 띄었던 걸까요.
... 물론 알았어도 못 갔을 것 같지만... 회사... 미오...;;;;;; 다락방님 글 보니 생생해서 좋아요~

다락방 2019-01-28 08:59   좋아요 0 | URL
비연님. 정희진 쌤 강연은 정말 추천해요! 너무 좋아서 듣다 보면 ‘아, 이 사람도 들었으면 좋겠다, 저 사람도 들었으면 좋겠다‘ 하고 다른 사람 생각도 하게 되더라고요. 이 분만큼 사고를 확장시켜주는 분도 없는 것 같아요. 기회가 된다면 꼭! 놓치지 마시고 들어보세요!!
 

그 날은 그를 두번째로 만나는 날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게 그 전 해의 8월이었고, 그 다음 만남이 그 해의 2월이었으니, 거의 반년만에 보는 셈이었다. 약속은 갑작스레 잡혔고, 그는 우리 집 근처 지하쳘 역으로 오기로 했다. 일요일이었고, 나는 이제는 팔아버린 피아노를 그 때는 뚱땅뚱땅 치고 있다가, 그가 온다는 생각에 설레어, 아아, 어쩜 좋지, 무엇을 줄까, 하다가, 내가 막 읽기를 마쳤던 책을 한 권 준비했다. 그리고는 나를 만나러 열심히 오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혹시 가방을 가지고 오나요?"


그는 그렇다며, 혹여 자기 얼굴이 기억 안나 가방으로 알아보려 하느냐고 물었다. 으앗, 귀신이다. 내게는 사실 그런 의도도 있었으므로. 얼굴을 잘 기억하지도 외우지도 못하는 나는, 그의 이미지는 기억났으나 얼굴을 알아볼 자신이 없었다. 으앗, 어떻게 알아보지, 괜찮아, 그가 나를 알아볼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나도 같이 만나 반갑게 인사해야 할텐데,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그러나 차마 그에게 '당신의 얼굴을 기억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할 수가 없어, '가방을 가지고 오냐' 물었던 건데, 그는 내 의도를 금세 알아챈 것이다. 나는 조금 민망해서, 아니, 책을 한 권 주려고 하는데 가방이 있어야 넣어가니까...라고 답했더랬다. 그 역시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나는 그에게 줄 책을 준비 했었으니까.



나는 역 앞에 가 그를 기다렸고, 그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를 보자마자 알아보았다. 그리고 내가 준비해온 책을 내밀었다. 그는 나를 만나러 오는 지하철 안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노라 했다. 우리는 까페로 가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그에게 읽고 있던 책을 좀 달라고 해서는 어디에 밑줄을 그었나 휘리릭 넘겨보기도 했다.




책을 읽었다.

















여탐정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한 저택을 방문하고 그 저택의 정원에 대해 묘사하고 그리고 오두막을 살펴보는 장면에서 나는 어렴풋하게 '이건 읽은 적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아아... 그러고보니 이 책, 이미 구판이 있는 책의 개정판이라는 말도 얼핏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얼른 작가 이름을 검색한다. 그리고 이 책의 구판이 무언지 알아냈다. 아! 이미 내가 읽은 책! 그 해, 그러니까 2008년 2월, 우리 집 근처로 온 그에게 내가 주었던, 바로 그 책이었다.


















아, 이게 이 책이었구나!

만약 누가 내게 《여탐정은 환영받지 못한다》를 읽었냐고 물어보면 나는 읽었다 답했을 것이되, 줄거리를 물어보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을 것이다. 다만, 그 인상이 조금 남아 있었다. 위에 쓴 것처럼 한 저택에 찾아가고 그 정원을 묘사하고 오두막에 가는, 그 어떤 공간에 대한 부분. 나는 공간 묘사 읽기 딱 싫어하고, 공간에 대한 걸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어느 집에 찾아갔었고, 거길 묘사했었다는 것이 희미하게 기억났던 것이다. 오! 책은 읽으면 어떻게든 남아있는 것인가?



그러나 읽으면서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새로워 놀랐다. 내가 이렇게나 기억을 못했다니! 대사들이 다 새롭고 새롭다. 게다가 사건도, 범인도 새로워. 이게 이런 책이었는가....



그는 그 때 이 책을 읽었을까? 읽었다면 내용을 얼마만큼 기억하고 있을까?



이 개정판이 저 구판과 같은 책인지 몰라고 읽은 덕분에 2008년으로 훌쩍 날아갔다 왔다. 오, 신이시여. 추억이란 이렇게 갑자기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거란 말입니까. 그 때 나는 남색 코트를 입고 있었지, 우리는 버섯샤브샤브를 먹으러 갔지, 그리고 우리는....




기어코 추억으로 나를 밀어넣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서문 덕분에 이 책을 '다시'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용감하고 영리한 젊은 여주인공이 삶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다들 해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일에서 기필코 성공을 거두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p.8)



2008년에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이 책으로부터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설사 받았다한들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코델리아는 언제나, 항상 가방에 페이퍼백 한 권씩을 가지고 다니는 젊은이다. 멋지다. 좋다. 나 역시 그러하다. 그렇지만 내가 가지고 다니는 책은 가볍지가 않아서 언제나 가방 무게를 힘겹게 느껴야 해..인생 뭘까. 독서인의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기차에서 할 일이 있어요. 혹시 읽을거리라도 있나요?"

"괜찮아요. 저도 여행 중에 얘기 나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토머스 하디의 《트럼펫 주자》도 갖고 있고요. 가방에 늘 페이퍼백 한 권은 넣고 다니거든요." (p.42)



오늘 나의 가방에는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가 들어있다. 출근길에 읽기 시작했는데 좀 어렵다. 음..




"남동생이 마음에 들어요?"

"아니, 별로요. 휴고는 나에게 꽤 무례하게 굴었어요."

"그럴 뜻은 없었을 거예요."

"그게 더 나빠요. 무례란 언제나 의도적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둔감하다는 뜻이니까요."

"휴고는 이사벨과 함께 있으면 별로 유쾌해지지 않아요. 이사벨이 휴고를 그렇게 만들죠." (p.138-139)



나는 이 부분의 대화가 좋았다. 무례하다고 말을 할 수 있고, 또 그 무례를 인지하지 못한 채로 저질렀다면 둔감해서 더 나쁘고 말하는거. 작가는 코델리아라는 22세 여탐정의 입을 빌어 자신이 해야 할 말들을 해내고 있다.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용감하고 영리한 젊은 여주인공' 임에는 틀림없다. 가는 곳마다 탐정은 여자에게 어울리는 직업이 아니란 말을 듣고 있지만, 그러나 코델리아는 자신의 신념을 꿋꿋이 밀고 나가 사건을 추적해낸다. 그러나 세상 삶이 그러한 것처럼, 이 책에도 긍정적인 캐릭터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남자가 유쾌해지지 않는 데는 여자의 영향이 있다고 말하고, 또 그 남자 역시 나중에 '그녀는 패션에만 관심있다'고 하며 그 여자가 자기가 기대한 지적인 여자가 아니었음을 토로하는 대화가 나오니까. 물론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존재하지만, 젊고 영리한 탐정을 그려내면서 동시에 그렇지 않은 반대 여성도 그려낸 것은 작가가 자신의 객관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젊고 영리한 탐정을 강조하다보니, 그 젊음을 부러워하는 나이든 여자도 나오고.



그러나, 나는 이사벨이 휴고에게 주었던 영향처럼, 그러니까 함께 있으면 별로 유쾌해지지 않는 영향을 서로에게 미치는 관계란 있다는 것을 안다. 휴고는 심지어 이사벨을 좋아하는데도 그랬다. 좋아하고 호감이 있고 잘해보고 싶은 관계인데, 그런 사람인데, 같이 있으면 유쾌해지지 않고 무례해지다니. 그런 관계는 '좋아한다'는 이유로 유지하는 게 나은걸까?

좋아하는데 왜 유쾌해지지 않고, 좋아하는데 왜 무례헤질까. 좋아하는데 나를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면, 그 관계는 나에게 나쁜 관계일텐데. 그렇다면 나는 과감히 내쳐야 하지 않을까. 좋아해서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 대화가 즐겁고 늘 웃게 되고, 또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관계, 그런 이상적인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같은 마음으로 좋아해야 가능해지는 것 같다.



이사벨은 휴고가 이사벨을 좋아하는 방식으로, 혹은 그런 결로 좋아했던 게 아닌 것 같다. 휴고는 이사벨로부터 자신이 주었던 만큼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사랑을 주고 또 받는 크기가 어느 정도 비슷하다면, 그러니까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고 만족할 수 있다면, 그 관계는 서로의 좋은 면을 부각시켜줄 것이고 더 의욕이 생기게 할 것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나는 같이 있음으로 인해서 불쾌해지고, 무례해지고, 건강을 해치고, 기분이 나빠진다면, 그 '좋아한다'는 감정을 다시 들여다보길 바란다. 다시 들여다보고, 자신이 정말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 사람을 좋아하는 그 '감정'에 기대지 말고, 그 사람을 좋아하는 '내'가 지금 행복한지 어떤지가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좋아한다는 감정이 불행으로 이어져서는 안되는 거니까. 좋아하는데 내가 불행해진다면, 그 좋아한다는 감정으로부터 나는 빠져나와야 하는 것이다. 나는 내 삶을 살아야 해...




코델리아와 같이 일하던 동료도 이 세상에 없고, 코델리아가 사건을 수사하는 이 모든 과정에서 코델리아는 혼자다. 그녀가 이야기를 나눌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도 그렇고 기쁠 때도 그렇겠지.



사건을 맡은 후 처음으로 코델리아는 자기 혼자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지 스스로 능력을 의심했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자신감을 북돋워 줄 사람이 있다면! (p.180)



하아- 얼마나 외로웠을까. 코델리아의 외로움이 나에게 와 닿는다. 그런데도 코델리아, 씩씩하게 앞을 보고 나아간다!



코델리아는 철저히 혼자였는데, 그 사실을 떠올리자 어차피 늘 혼자였으므로 본질적으로 달라질 게 없다 싶었다. 그러자 어이없게도 다시 마음이 편안해지고 희망이 되돌아왔다. (p.181)



그래, 우리는 모두 다 혼자다.. 모든 사랑은 잠재적으로 다 비탄의 이야기라고, 줄리언 반스도 말했잖아. 우린 결국 혼자야. 인생 독고다이지....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지만 뭔가 속상한 문장.. 너무나 마땅히 그러해야 하지만 어쩐지 빡치는....



"한 여자에게 잘하는 남자는 다른 여자한테도 잘하는 법이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내가 옳았어요. " (p.197)




이 책 덕분에 2008년에 다녀왔다. 그러나 언제나 추억에만 들어가 자리잡고 있을 수는 없어. 현실을 살아야 한다. 이제부터 남은 1월은 아주 무겁지만,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를 들고 다니며 열심히 읽어야겠다. 우리의 목표가 그러했으니, 당연히 1월 안에 다 읽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으앗. 그렇지만 겁나 무겁겠지... 괜찮아, 덕지덕지 붙이려고 포스티잇도 주문해 놓았다.

2월 도서도 다 주문해둔 상태라 내게로 오고 있다. 으하하핫. 계획적인 나..



그런데 코델리아도 시리즈 있나? 찾아봐야지. 책 끝날 무렵에 손님이 찾아오던데, 그 손님의 문제를 또 해결해주나 싶어 궁금하네.



그럼 여러분 안녕.




조지와 칼을 만나기 전 그녀는 외롭고 미숙했다. 둘을 만난 후에는 외롭고 조금 덜 미숙해졌다. 연애는 아빠나 집주인 여자들을 대할 때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자신감을 주지도 않았고, 불편할 정도로 심장을 뛰게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칼에게는 다정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와 사랑을 나누는 일이 지나치게 쾌감을 주거나 그가 그녀에게 너무도 중요한 사람이 되기 전에 그가 로마로 떠나버린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렇게나 이상한 체육 과목이 언젠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섹스는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과대평가라고 당시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생각과 행동 사이의 괴리는 그토록 완벽했다. (p.140)

"나는 쉰셋이 되어서야 남편과 결혼을 했는데 마치 우리가 어린 시절 연인이라도 되는 양 아직도 남편이 그리워요. 사람들은 그 나이에 남자를 떠맡다니 바보가 따로 없다고들 했지만, 나는 그이의 부인을 30년 동안이나 알고 지냈었죠. 우리는 같은 학교에 다녔고 난 그 남자를 알고 있었어요. 한 여자에게 잘하는 남자는 다른 여자한테도 잘하는 법이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내가 옳았어요."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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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3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23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황태감자국 & 파운드케익>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은 영향을 받는다. 좋은 영향이란것은 그러나 강제적으로 줄 수 있거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인으로서는 '선한 마음'혹은 '선한 의지'라고 해도, 상대가 요구한 적 없는데 하는 말들은 대부분 잔소리에 불과하다. 조언을 바라는 요구가 없었다면 함부로 조언하지 말 것. 이날까지 인생을 살면서 내가 깨달은 것이다. 남의 삶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것, 그것이 아무리 자기가 보기에 부족해 보여도.


정말 좋은 영향은 다른 사람의 삶, 그 자체로부터 가능해진다.



몇 주 전 주말 친구네 집에서 주말을 고스란히 보내는데, 토요일 오후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친구는 우리에게 줄 음식들을 요리하면서 음악을 크게 틀어두었다. 집 전체를 채우는 좋은 목소리의 노래와 그 분위기, 그리고 친구가 요리하는 뒷모습은 내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그 순간, 그 친구의 모습은 내게 어떤 요리의 이상형 같은 것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어제, 나는 그 친구를 생각하며, 요리란 무릇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앞치마를 둘러 메고 친구가 그 때 틀어 두었던 음악을 재생시켰다. 집에 혼자였고, 친구가 요리할 때 들었던 음악이 나오고 있었고, 나는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이 요리를 잘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확신 같은 것.


그렇게 선택한 요리는, 마침 그 친구가 알려준 '황태감자국'.



친구 역시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된 레서피라는데, 방법이 너무 간단한 거다.


1. 황태를 들기름에 들들 볶는다.

2. 큼지막하게 썬 감자를 넣고 물을 부어 팔팔 끓인다.

3. 아주 충분히 끓여준 다음 간은 소금이나 간장으로 하고, 다진마늘을 넣는다.

4. 입맛에 맞게 후추, 매운 고추, 파 등을 첨가한다.


이게 끝인데, 나는 '좀 많은가?' 할 정도로 들기름을 많이 넣었고, 소금으로 간을 했고, 후추와 매운 고추, 파를 넣었다. 아주 푹 끓여내서인지 와- 감자가 포슬포슬 익었는데, 진짜 맛있는 거다! 게다가 매운 고추 덕에 칼칼하게 매운 맛도 느껴져셔 진짜 맛있어. 아아, 여기가 바로 천국이며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최상의 순간이다.





너무 맛있어서 국을 두 그릇이나 퍼서 먹으면서 친구가 내게 준 좋은 영향에 대해 새삼 생각했다. 친구는 내게 '요리를 하라'고 말한 적이 없고, '요리할 때 음악을 들어라'고 한 적도 없다. 그러나 내가 그 친구의 좋은 모습을 보고 그대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아, 이게 바로 좋은 영향이라는 거구나. 좋은 사람은, 그저 자신이 사는 모습 만으로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거였어. 친구가 새삼 고마운 일요일 오후였다. 이게 바로 좋은 사람, 좋은 영향이야.




그러나 본격적인 요리는 이제부터다. 나는 생애 처음 베이킹에 도전하기로 했다. 레서피를 보니 딱히 어려워 보이지도 않았을 뿐더러, 재료를 구하기도 어렵지 않은 거다. 이미 집에 있는 거나 마트에 가서 그냥 살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이었어. 그렇게 나는 , 와우, 파운드케익을 굽기로 했다.


굳이 왜 파운드 케익이냐, 나는 스콘도 좋아하는데!


스콘은 사서 먹어도 맛있고 내게는 이미 궁극의 스콘이 있다. 스콘을 처음 먹은 게 스타벅스 여서 였는지, 스타벅스에서 따뜻한 스콘을 사서 버터 쳐발쳐발하고 딸기쨈을 발라서 목이 꽉꽉 막히는데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면 진짜 최고, 아름다운 순간이며 행복한 순간인거다. 그러나!


파운드케익은 궁극의 것을 찾지 못했다.


며칠전에 파리바게트에서 파운드케익을 사 먹었는데, 맛은 있지만 너무, 너무 단거다. 너무 달아서 짜증이 나. 아아, 그렇다면, 내가 만들어 먹어야겠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이 세상에 없다면 내가 써야하는 것처럼, 내가 먹고 싶은 게 없다면 내가 만들어 먹어야 한다! 그렇게 나는 일요일 오후를 파운드케익 만들기에 투자하기로 한다. 재료를 준비했다.





와인은... 파운드 케익 만들 때 안들어가고요, 마트 간 김에 그냥... ( ")



밀가루 박력분, 베이킹 파우더, 버터, 견과류, 계란, 물(혹은 우유) 를 준비해두고, 레서피를 찾아 레서피에서 시키는 대로 버터를 뽀샥뽀샥 부숴내고 밀가루를 체에 받혀 곱게 넣고... 하는데, 버터 부드럽게 부숴내기가 세상 어려워서 이미 나는 탈진할 상태. 아아, 이것은 망삘인가... 엄마는 내게 대체 그걸 왜 하려는 거냐며, 그냥 사 먹으라고 하셨어...그리고 힘겹게 준비하는 나를 보고 내내 웃으셨다. 보다 못해 도와주기도 하셨는데, 그것은 아마도 내가 요리하는 게 너무 서툴러 보여 답답해서...밀가루를 넣었는데 반죽이 너무 묽은 거다. 내가 레서피에서 본 건 좀 찰져야 했는데.. 엄마가 밀가루를 더 넣으라 했고 나는 '이게 시키는대로 넣은건데' 했지만, 엄마는 무조건 더 넣으라고 했고, 밀가루 더 넣었고.... 어느 레서피를 찾아봐도 바닐라향을 넣으라는데, 내가 또 세상 싫어해, 바닐라 향을.. 그래서 안넣었다. 설탕은 레서피가 시키는 것의 절반 정도(혹은 그보다 약간 많이)만 넣었다. 내가 이걸 만드는 목적이 무언가! 달아터진 파운드케익 먹기 싫어서가 아닌가! 아무튼 힘겹게 반죽을 마치고 오븐에 넣었는데, 아무리 타이머를 돌리고 온도를 높여도, 팬 돌아가는 소리만 날 뿐 오븐이 뜨거워질 않는다. 예열, 예열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예열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



나는 답답해서 베이킹에 도가 튼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친구는 나의 가스 오븐에 대한 얘기를 듣더니 자신이 아는 최대한의 설명을 해주었지만, 보면서 하는 게 아니라 결국 '인터넷에서 일단 오븐 사용방법을 찾아봐라' 고 하는거다. 으음.



그렇다. 나는 이 오븐을 처음 사용해본다. 우리 집 가스레인지 밑에 붙박이로 들어가 있는 오븐. 애초에 기본 옵션 오븐. 우리는 살면서 한 번도 이 오븐을 써 본 적이 없어... 그렇지만 설명서라니. 타이머 버튼에 온도 버튼 딸랑 두 개 있는데, 대체 무슨 설명서가 필요해? 타이머로 시간 설정하고 온도 로 온도 맞추면 되는 거잖아?


그러나 친구가 말한 대로 일단 설명서를 보기로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설명서를 읽고서야 비로소, 가스 밸브를 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 신이시여.





내가...계속 무슨 짓을 한거지? 그러니까 우리는 가스오븐레인지 라서, 가스 밸브를 열어야 오븐이 비로소 작동하는 것이었던 것이었다. 오, 신이시여... 그것도 모르고 한 시간 이상을 예열에 ... 하아- 이래서 설명서를 봐야하는 구나. 자만하지 말고 기초부터 탄탄히 해야 하는 거였어. 내가 오만했다. 내가 자만했어. 내가 오만한 이유로 타이머 버튼으로 시간 맞추고 온도 버튼으로 온도 설정하면 되지, 해버렸어. 아, 세상 똥멍청이. 욕심이 똥구멍까지 차서 눈 앞의 것을 보지를 못해.


엄마는 '너가 가스 밸브는 일단 열었다고 생각했지, 아무리 그래도 안써본 나도 밸브 여는 건 아는데 너가 모를 거라곤 몰랐지..' 하셨고, 나는 그렇게 가스 밸브를 열고 다시 예열을 시작한다. 설마 더 알아야할 게 있나 싶어 설명서를 다시 보니, 맙소사, 점화도 그냥 온도 설정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어. 원하는 온도에 돌려놓고 다시 한 번 다다다다닥 눌러줘야만 비로소 불이 붙는다고...


오, 갓.

여러분, 기초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해야해요. 저처럼 오만해서는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orz


그렇게 나는 생애 처음 베이킹을 힘겹게, 아주 힘겹게 시작한다. 아아, 나의 파운드 케익은 어디로 갈것인가..완성되기는 할것인가...

내 로망은 빵이 구워지는 동안 빵 향기가 가득한 방 안에서 조용히 여유롭게 책을 읽는 것이었는데, 와, 이 생애 첫 베이킹에서 나는 그 여유를 1도 찾을 수 없고, 오븐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빵이 부풀어 오르는지 계속 지켜본다. 엄마는 웃으면서 그만 쳐다보라고 하는데도 나는 '되고 있어, 되고 있어' 이러면서 그 앞에서 비켜날 줄을 몰랐지... 아아, 세상 귀엽고 해맑은 나여...



"엄마, 이거 맛 없으면 어떡하지?"

"야, 맛있지. 계란과 밀가루, 버터가 들어갔는데 그냥 맛있지."

"엄마, 망쳐버리면 어떡하지?"

"망치면 버리면 되지. 공부라고 생각해. 이번 걸 공부 삼으면 되잖아."



그리고, 아아, 완성된 파운드 케익은 이렇다.





굳이 두 개를 구워낸 건 남동생 하나 주기 위해서인데, 일단 비쥬얼로는 내 썽에 안찬다. 나는 저 가운데가 더 옆으로 확 터지기를 바랐건만, 내가 칼질을 잘못한건지, 아니면 반죽이 너무 됐던건지, 아니면 온도가 너무 높았던건지, 뭐가 잘못된건지 모르겠지만 비쥬얼은 만족스럽지가 않다. 그리고 잘라봤다.






견과류 모듬을 반죽에 넣고 구운 거라 이렇게 자르면 단면이 아름다워졌어. 아아, 견과류 듬뿍 넣은 나, 좋은 나...

게다가 맛있었다! 엄마 말대로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조합이긴 했지만, 그래도 맛있어! 꺅 >.<

그렇지만 겉 부분들은 좀 딱딱하고 탄 맛이 났다. 어쩌면 내가 조리 시간을 좀 줄여야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오븐 작동 삽질 때문에 반죽을 상온에 너무 오래 방치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엄마는 힘들게 했으니 이제 안하고 사먹겠네, 라고 하셨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제 어떻게 하는 줄 알았으니 더 잘해봐야지. 후훗."


아아, 세상 멋진 나...






생애 첫 베이킹이 나쁘지 않게 끝났으므로, 저녁에는 삼겹살에 와인으로 축배를 들었다.





(칠봉아, 누나는 이제 빵을 굽는 사람이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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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1-21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태감자국과 파운드케익.... 이 뜨거운 맛의 향언이라니!! 저는 칼칼한 ‘황태감자국‘에 한 표를 하고 싶습니다.
차가운 겨울밤, 황태감자국 한 숟갈~~ 키햐~~~

다락방 2019-01-21 11:22   좋아요 1 | URL
황태감자국은 진짜 맛있어요! 따로 육수를 낼 필요가 없는, 그냥 그 자체로 육수가 되고 국이 되는 너무나 훌륭한 아이템인 것입니다! 아, 다진마늘도 넣어주셔야 해요. 그거 덧붙여야겠다. 그리고 충분히, 충분히 끓이세요! 진짜 맛있어요 진짜!

읽자나 2019-01-21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태감자국 저도 해먹어봐야겠네요^^

다락방 2019-01-21 11:23   좋아요 0 | URL
읽자나 님. 간편하게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거에 비해서 맛이 뛰어납니다. 강력하게 추천드려요!

읽자나 2019-01-21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오늘 저녁 메뉴로 결정했어요~~^^

다락방 2019-01-21 11:56   좋아요 0 | URL
읽자나 님, 다진 마늘 빠뜨리지 마세요!! 꼭 넣으세요!!

무식쟁이 2019-01-21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황태감자국을 널리 전파하시는 좋은 다락방님의 좋은 영향

다락방 2019-01-21 12:0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게 또 그렇게 되는건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나 2019-01-21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앞치마하고 라디오 켜고 요리하는데 자주 다음과 같은 효과음이 곁들여집니다.
앗 또 깼다
어 왜 탔지?
꺄악 어느것 부터 치워야 해~~
요리 겁나 힘들어서 기운 빠짐

다락방 2019-01-21 14:05   좋아요 1 | URL
아 저는 쌓여가는 설거지 보면서 딥빡이 오곤 한답니다. 아름다운 음악, 흥겨운 기분, 음식의 좋은 냄새~ 이러다가 설거지 보고 뽝- 내가 이짓을 왜 하고 있나... 하아-

아무튼 우리 열심히 해서 맛있는 거 많이많이 해먹고 삽시다. 사먹는 게 제일 간단한 거 같지만... ㅠㅠ

책읽는나무 2019-01-21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황태감자국 한 표요^^
추운 날 밥과 함께 국물 한 숟가락 후루룩~~하면 정말 살살 녹겠어요!!
파운드케잌을 만드셨군요??@.@
저는 애들 성화에 오후 늦게 벼르고 벼르던 브라우니를 만들어 먹었어요.
믹스로 만들었거든요~~그래서인지 제과점보다 더 달디달아 애들이랑 저랑 한 조각 먹고 끽!!!했네요ㅜㅜ
브라우니를 담은 통이 파운드 케잌용이어서 파운드 케잌 만들면 맛있겠다!!생각했는데 다락방님의 파운드 케잌이 짜잔~~~^^
담번엔 파운드 케잌을 도전해봐야겠어요.

다락방 2019-01-22 13:23   좋아요 0 | URL
황태감자국 너무 맛있어요! 별다른 걸 넣지 않았는데도 북엇국 맛이 아주 제대로에요. 포슬포슬한 감자는 어떻구요!

파운드케익은 이번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음에 어떤 걸 어떻게 추가해야 하는지 혹은 수정해야 하는지 전혀 감도 안잡혀요. 불을 좀 약하게 할까 시간을 좀 줄일까 밀가루를 더 넣을까.. 기타 등등.‘
책나무님, 다음에 파운드 케잌 하시게 되면 인증해주세요! 꺅 >.<

clavis 2019-01-21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님의이 파운드 케잌 사진을 보여주시기까지 잘 만드셨을까?하고 마음을 졸이며 글을 읽었습니다. 어쩐지 손에 땀이 나듯 흥미진진했고 주의를 몰입시키는 힘이 대단했습니다. 역시 타고난 글쟁이♥ 마음 졸이며 봤는데 대성공이네요♡♡축하드려요 먹고싶어랏

다락방 2019-01-22 13:2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클래비스님. 꺅 >.<
저도 제가 성공할 줄 몰랐는데 성공해서 너무 기뻐요. 물론 비쥬얼은 만족하지 못하지만...그래도 맛있었어요! 어떤 점들을 어떻게 보완해야할까 요즘 그 생각에 몰두하고 있어요. 헤헷.

언젠가 우리가 연이 닿는다면 제가 만든 빵을 들고 클래비스님을 만나러 갈 수 있겠지요. 후훗. 갓 구워낸 빵은 얼마나 맛있을까요?! 자, 현재를 열심히 살아봅시다!

2019-02-06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02-07 11:18   좋아요 1 | URL
으아아앗 감사합니다, 클래비스님.
제가 2월에 영화를 볼지는 모르겠지만, 보게 되면 클래비시님이 주신 쿠폰으로 재미나게 보도록 할게요.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