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대한 정희진 선생님의 북토크에 다녀왔다. 친구가 두 자리를 신청한 덕분에 운좋게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 나는 오랜만에 정희진 선생님 만나는 것도 너무 좋았지만,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는 것도 너무 좋았다! 요즘 내가 꽂힌 앙버터를 사서는 룰루랄라 친구를 만나러 갔다. 친구에게 앙버터를 내밀며, 요즘 내가 꽂힌 거야, 라고 했더니 친구는 내게 와인을 내밀었어. 오, 친구여... 거룩한 친구.... 복받으실 거에요. 몹시 좋아하는 내게 친구는 '너는 뭘 좋아하는지 확실해서 선물 고를 때 편하다'고 했다. 아아, 친구여... 본인은 술도 안마시면서 언제나 나에게 와인 사주는 친구, 거룩한 친구.... 세상의 축. 복. ♡
아무튼 그렇게 선생님을 오랜만에 뵙고 선생님의 책 읽은 감상 혹은 책으로부터 뻗어나온 생각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데, 와, 역시 ... 내가 생각한 걸 그대로 말씀해주셨다. 그러니까 내가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를 읽으면서 너무 어려웠고, 너무 어려워서, '내가 아는 게 많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수차례 했던 터다. 내가 아는 게 많았다면 이 책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텐데, 더 잘 이해하고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었을텐데, 나는 지금 이 책을 따라갈 수가 없다, 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그간 읽어온 리베카 솔닛의 책은 어렵지 않았는데, 이 책은 어려웠어. 정희진 쌤은 이 책이 좀 어렵긴 하지만 그간 번역된 솔닛의 책 중 가장 이야기거리가 많고 좋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본인은 철학적 계보를 공부하는 사람인데, 솔닛은 이미 철학적 계보를 파악한 사람이란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까 모든 것들을 이미 알고, 이해하고, 파악한 지식인, 지성인 이라는 것.
아아, 맞아, 내가 '부족해서 어렵다'라고 생각한 걸 쌤은 이미 많은 지식을 보유하사, 이 책에서 '철학적 계보를 파악한 작가'까지 읽어내신 거다. 아아, 공부여... 아아 지식이여, 지성이여...
그러면서 선생님은 요즘 사람들 팩트 체크라며 팩트 말하길 좋아하고, 그거 많이 알면 지식인인줄 아는데, 지식은 그런 게 아니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지식인이란, 내가 무엇을 아는지 그리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는 것. 아아.. 감사합니다, 선생님. 요약하자면, 똑똑한 척 하는게, 똑똑한 줄 아는게 지식인은 아니라는 것.
쌤의 강연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쌤이야말로 의식의 흐름대로 말씀을 하시는 분이다. 거기에서 숱한 철학자나 학자의 이름이 언급되고 또 본인의 생각이 합쳐지는데, 들을 때마다 나는 사고가 확장되는 걸 느껴. 와, 언제, 어떻게 저 많은 걸 다 공부하시는걸까, 도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공부하시냐고 질문이라도 하고 싶었다. 아마 내가 여태 봐 온 한국인들 중 가장 공부를 열심히 많이 하고 또 많이 아시는 분이 아닐까 싶다. 일전에 들었던 강연에서 본인에게 필요한 건 다 책으로부터 배운다는 말씀을 하셨었는데, 덕분에 나도 더 열심히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했고.
선생님은 솔닛의 이 책 한권에 환경, 여성, 식민 자본주의가 다 들어있다고 말씀하셨다. 길을 잃는 것은 언어를 찾는 것이며, 자신을 찾는 것이라 하셨고. 이 책을 필사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 하셨다. 나도 필사라는 걸 한 번 해볼까, 잠깐 고민했다.
되게 인상적인건, '역사적 시간의 공간화' 였다. 역사적 시간이란 즉 문명의 시간을 뜻하는데, 문명이 더 발전한 것으로 덜 발전한 곳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식민지화에 대해 얘기하신 거다. 와, 이거 들을 때 진짜 소름이었어. 이러면서 여러가지 문장을 예로 들어 설명해주셨는데, 일본이 근대적이라며 한국을 침략하고, 지방은 서울에 비해 낙후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들. 그리고 최근에는 여성들의 권리가 조선시대보다 나아졌지, 하는 것들까지.
나는 내가 베트남에 갔을 때 그리고 다녀오고 나서도 몇 번 '우리나라 70년대 같아' 라고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갑자기 그 말의 폭력성이 나를 휘감았달까. 무지는 이렇게나 무섭다. 모르면 폭력적이 되기가 쉬워. 나는 폭력이 싫다고 부르짖고 다니지만, 폭력성을 띤 말들을 얼마나 자주 내뱉고 다니는걸까.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나의 폭력적인 면들을 맞닥뜨리게 될까.
(문명화) 앞선 나라들은 그렇지 않은 나라들을 지배할 수 있다, 는 생각이 역사적 시간의 공간화 임을 말씀하신 거다. 그리고,
여성의 몸의 공간화. 그것이 즉 성폭력이라고.
이런 얘기들을 하면서 수많은 책과 학자들의 이름을 언급하셨는데, 내가 못들어본 책이며 학자들이어서 아아, 세상은 얼마나 넓고 내가 읽지 못한 책은 얼마나 많은가... 했다.
마지막에는 지식의 양극화에 대해 말씀하셨다. 앞으로 지식의 양극화가 더 심해질텐데, 가장 똑똑한 사람은 '좌파 페미니스트'일 확률이 가장 크다고 하셨다, 그게 너무 인상적이어서 메모해 두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이미 그것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으므로.
그리고 이 책을 읽은 결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간을 낭비하면서 길을 잃어라, 그러면서 언어를 찾고 자신을 찾아라, 그것이 인생이다.'
나는 내가 읽던 솔닛의 책을 덮고, 처음부터 다시 읽기로 했다.
선생님의 그 방대한 지식에 놀라고, 그것을 내보임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사고가 뻗어나가게 도와주는 게 너무 감사해서, 아아, 너무 좋은 시간이다, 이 감사를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 뭔가 성의 표시를 하고 싶다, 뭐 드릴 게 없을까, 가방 안에 뭐 없나? 를 계속 생각하다가, 아!! 내 지갑에 스타벅스 카드가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다른 데 쓰려고 사두었던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 다시 사면 되니까 그런 건 일도 아냐. 마침 선생님은 커피를 아주 좋아한다 하셨다. 나는 강연이 끝난 후에 후다닥 가서, 오늘 강연 정말 좋았다며 커피 사서 드시라고 카드를 드렸다.
물론 선생님의 강연 내용에 모두 백프로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중간중간 고개를 갸웃한 것도 있었고,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걸 왜 그렇게 생각하실까' 하는 부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완전 공부의욕 뿜뿜하는 시간이었달까. 강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친구랑 강연 후기를 나누었다.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았는지, 그리고 듣고 나니 어떤 기분인지를. 아아, 좋은 시간이었다.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게는 한계가 있을 터. 내가 아무리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책을 읽어도 나는 정희진 쌤처럼 될 순 없을것 같다. 아아, 내가 내 인생의 남은 시간을 전부 공부에 쏟아부어도 나는 정희진 쌤처럼 될 순 없다. 그러나, '어차피 안될 거 뭐하러 해' 하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지식인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멈추지 말아야겠다. 오래전 강연에서 선생님은 공부하지 않으면 퇴보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적어도 퇴보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열심히 책을 읽고 열심히 공부해야지. 선생님은 책 많이 읽으라고 하셨다. 책을 굉장히 극찬하셨어. 네, 열심히 책을 읽겠습니다! 어제도 책 한 박스가 도착했어요!! 꺅 >.<
그리고 오늘 아침. 이 책을 들고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좋은 후기 한 번 들었다고 갑자기 이 책이 쉬워지지도 않았고 그럴 리도 없었지만, 처음보다는 좀 나아졌다. 그리고 이런 부분에는, 처음부터 내가 포스트잇을 붙여두기도 했다.
샐리가 그 다음 들려준 이야기는 길 잃은 열한 살 남자아이를 찾아낸 일이었다. 귀가 안 들리는 데다가 퇴행성 질환으로 시력마저 잃어가는 아이였고 결국에는 그 병으로 짧은 삶을 마감했다고 했다. 아이는 캠프에 참가하고 있었고, 캠프 교사들을 따라 친구들과 함께 산으로 와서 숨바꼭질을 시작했는데, 그만 지나치게 꼭꼭 잘 숨은 모양이었다. 인솔자들은 해가 졌는데도 아이를 찾지 못했고, 아이도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한밤중에 수색구조팀이 불려나왔다. 샐리는 질척질척한 지대를 수색하기 시작하면서 내심 두려웠다. 영하에 가깝게 추운 그런 밤에는 시체밖에 못 찾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수색팀은 샅샅이 흩어져서 일대를 뒤덮었고, 태양이 지평선으로 막 떠오를 무렵, 샐리는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소리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아이였다. 아이가 오들오들 떨면서 호루라기를 불고 있었다. 샐리는 아이를 끌어안았고, 얼른 제 옷을 거의 다 벗어서 아이에게 입혔다. 아이는 모든 것을 배운 대로 제대로 했다. 호루라기 소리가 시끄러운 물소리 너무로 들릴 만큼 크지 않았던 탓에 캠프 인솔자들이 놓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이는 해 질 녘까지 계속 호루라기를 불었고, 해 진 뒤에는 쓰러진 두 나무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고, 이윽고 다시 해가 나자 다시 호루라기를 불었다. 아이는 발견된 것이 기뻐서 환한 얼굴이었고 샐리는 찾은 것이 기뻐서 눈물범벅이었다. (P.23-24)
이 부분을 읽다가 나도 눈물이 핑돌았다. 아이를 찾아서 다행이라고, 아이가 호루라기를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아이가 가지고 있는 호루라기를 불어줘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 다행이야.
앞으로 계속 어렵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열심히 꼼꼼하게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 너무 좋다. 철학적 계보를 공부하는 사람과, 철학적 계보를 파악한 사람. 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