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그를 두번째로 만나는 날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게 그 전 해의 8월이었고, 그 다음 만남이 그 해의 2월이었으니, 거의 반년만에 보는 셈이었다. 약속은 갑작스레 잡혔고, 그는 우리 집 근처 지하쳘 역으로 오기로 했다. 일요일이었고, 나는 이제는 팔아버린 피아노를 그 때는 뚱땅뚱땅 치고 있다가, 그가 온다는 생각에 설레어, 아아, 어쩜 좋지, 무엇을 줄까, 하다가, 내가 막 읽기를 마쳤던 책을 한 권 준비했다. 그리고는 나를 만나러 열심히 오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혹시 가방을 가지고 오나요?"


그는 그렇다며, 혹여 자기 얼굴이 기억 안나 가방으로 알아보려 하느냐고 물었다. 으앗, 귀신이다. 내게는 사실 그런 의도도 있었으므로. 얼굴을 잘 기억하지도 외우지도 못하는 나는, 그의 이미지는 기억났으나 얼굴을 알아볼 자신이 없었다. 으앗, 어떻게 알아보지, 괜찮아, 그가 나를 알아볼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나도 같이 만나 반갑게 인사해야 할텐데,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그러나 차마 그에게 '당신의 얼굴을 기억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할 수가 없어, '가방을 가지고 오냐' 물었던 건데, 그는 내 의도를 금세 알아챈 것이다. 나는 조금 민망해서, 아니, 책을 한 권 주려고 하는데 가방이 있어야 넣어가니까...라고 답했더랬다. 그 역시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나는 그에게 줄 책을 준비 했었으니까.



나는 역 앞에 가 그를 기다렸고, 그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를 보자마자 알아보았다. 그리고 내가 준비해온 책을 내밀었다. 그는 나를 만나러 오는 지하철 안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노라 했다. 우리는 까페로 가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그에게 읽고 있던 책을 좀 달라고 해서는 어디에 밑줄을 그었나 휘리릭 넘겨보기도 했다.




책을 읽었다.

















여탐정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한 저택을 방문하고 그 저택의 정원에 대해 묘사하고 그리고 오두막을 살펴보는 장면에서 나는 어렴풋하게 '이건 읽은 적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아아... 그러고보니 이 책, 이미 구판이 있는 책의 개정판이라는 말도 얼핏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얼른 작가 이름을 검색한다. 그리고 이 책의 구판이 무언지 알아냈다. 아! 이미 내가 읽은 책! 그 해, 그러니까 2008년 2월, 우리 집 근처로 온 그에게 내가 주었던, 바로 그 책이었다.


















아, 이게 이 책이었구나!

만약 누가 내게 《여탐정은 환영받지 못한다》를 읽었냐고 물어보면 나는 읽었다 답했을 것이되, 줄거리를 물어보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을 것이다. 다만, 그 인상이 조금 남아 있었다. 위에 쓴 것처럼 한 저택에 찾아가고 그 정원을 묘사하고 오두막에 가는, 그 어떤 공간에 대한 부분. 나는 공간 묘사 읽기 딱 싫어하고, 공간에 대한 걸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어느 집에 찾아갔었고, 거길 묘사했었다는 것이 희미하게 기억났던 것이다. 오! 책은 읽으면 어떻게든 남아있는 것인가?



그러나 읽으면서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새로워 놀랐다. 내가 이렇게나 기억을 못했다니! 대사들이 다 새롭고 새롭다. 게다가 사건도, 범인도 새로워. 이게 이런 책이었는가....



그는 그 때 이 책을 읽었을까? 읽었다면 내용을 얼마만큼 기억하고 있을까?



이 개정판이 저 구판과 같은 책인지 몰라고 읽은 덕분에 2008년으로 훌쩍 날아갔다 왔다. 오, 신이시여. 추억이란 이렇게 갑자기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거란 말입니까. 그 때 나는 남색 코트를 입고 있었지, 우리는 버섯샤브샤브를 먹으러 갔지, 그리고 우리는....




기어코 추억으로 나를 밀어넣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서문 덕분에 이 책을 '다시'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용감하고 영리한 젊은 여주인공이 삶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다들 해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일에서 기필코 성공을 거두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p.8)



2008년에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이 책으로부터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설사 받았다한들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코델리아는 언제나, 항상 가방에 페이퍼백 한 권씩을 가지고 다니는 젊은이다. 멋지다. 좋다. 나 역시 그러하다. 그렇지만 내가 가지고 다니는 책은 가볍지가 않아서 언제나 가방 무게를 힘겹게 느껴야 해..인생 뭘까. 독서인의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기차에서 할 일이 있어요. 혹시 읽을거리라도 있나요?"

"괜찮아요. 저도 여행 중에 얘기 나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토머스 하디의 《트럼펫 주자》도 갖고 있고요. 가방에 늘 페이퍼백 한 권은 넣고 다니거든요." (p.42)



오늘 나의 가방에는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가 들어있다. 출근길에 읽기 시작했는데 좀 어렵다. 음..




"남동생이 마음에 들어요?"

"아니, 별로요. 휴고는 나에게 꽤 무례하게 굴었어요."

"그럴 뜻은 없었을 거예요."

"그게 더 나빠요. 무례란 언제나 의도적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둔감하다는 뜻이니까요."

"휴고는 이사벨과 함께 있으면 별로 유쾌해지지 않아요. 이사벨이 휴고를 그렇게 만들죠." (p.138-139)



나는 이 부분의 대화가 좋았다. 무례하다고 말을 할 수 있고, 또 그 무례를 인지하지 못한 채로 저질렀다면 둔감해서 더 나쁘고 말하는거. 작가는 코델리아라는 22세 여탐정의 입을 빌어 자신이 해야 할 말들을 해내고 있다.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용감하고 영리한 젊은 여주인공' 임에는 틀림없다. 가는 곳마다 탐정은 여자에게 어울리는 직업이 아니란 말을 듣고 있지만, 그러나 코델리아는 자신의 신념을 꿋꿋이 밀고 나가 사건을 추적해낸다. 그러나 세상 삶이 그러한 것처럼, 이 책에도 긍정적인 캐릭터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남자가 유쾌해지지 않는 데는 여자의 영향이 있다고 말하고, 또 그 남자 역시 나중에 '그녀는 패션에만 관심있다'고 하며 그 여자가 자기가 기대한 지적인 여자가 아니었음을 토로하는 대화가 나오니까. 물론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존재하지만, 젊고 영리한 탐정을 그려내면서 동시에 그렇지 않은 반대 여성도 그려낸 것은 작가가 자신의 객관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젊고 영리한 탐정을 강조하다보니, 그 젊음을 부러워하는 나이든 여자도 나오고.



그러나, 나는 이사벨이 휴고에게 주었던 영향처럼, 그러니까 함께 있으면 별로 유쾌해지지 않는 영향을 서로에게 미치는 관계란 있다는 것을 안다. 휴고는 심지어 이사벨을 좋아하는데도 그랬다. 좋아하고 호감이 있고 잘해보고 싶은 관계인데, 그런 사람인데, 같이 있으면 유쾌해지지 않고 무례해지다니. 그런 관계는 '좋아한다'는 이유로 유지하는 게 나은걸까?

좋아하는데 왜 유쾌해지지 않고, 좋아하는데 왜 무례헤질까. 좋아하는데 나를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면, 그 관계는 나에게 나쁜 관계일텐데. 그렇다면 나는 과감히 내쳐야 하지 않을까. 좋아해서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 대화가 즐겁고 늘 웃게 되고, 또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관계, 그런 이상적인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같은 마음으로 좋아해야 가능해지는 것 같다.



이사벨은 휴고가 이사벨을 좋아하는 방식으로, 혹은 그런 결로 좋아했던 게 아닌 것 같다. 휴고는 이사벨로부터 자신이 주었던 만큼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사랑을 주고 또 받는 크기가 어느 정도 비슷하다면, 그러니까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고 만족할 수 있다면, 그 관계는 서로의 좋은 면을 부각시켜줄 것이고 더 의욕이 생기게 할 것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나는 같이 있음으로 인해서 불쾌해지고, 무례해지고, 건강을 해치고, 기분이 나빠진다면, 그 '좋아한다'는 감정을 다시 들여다보길 바란다. 다시 들여다보고, 자신이 정말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 사람을 좋아하는 그 '감정'에 기대지 말고, 그 사람을 좋아하는 '내'가 지금 행복한지 어떤지가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좋아한다는 감정이 불행으로 이어져서는 안되는 거니까. 좋아하는데 내가 불행해진다면, 그 좋아한다는 감정으로부터 나는 빠져나와야 하는 것이다. 나는 내 삶을 살아야 해...




코델리아와 같이 일하던 동료도 이 세상에 없고, 코델리아가 사건을 수사하는 이 모든 과정에서 코델리아는 혼자다. 그녀가 이야기를 나눌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도 그렇고 기쁠 때도 그렇겠지.



사건을 맡은 후 처음으로 코델리아는 자기 혼자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지 스스로 능력을 의심했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자신감을 북돋워 줄 사람이 있다면! (p.180)



하아- 얼마나 외로웠을까. 코델리아의 외로움이 나에게 와 닿는다. 그런데도 코델리아, 씩씩하게 앞을 보고 나아간다!



코델리아는 철저히 혼자였는데, 그 사실을 떠올리자 어차피 늘 혼자였으므로 본질적으로 달라질 게 없다 싶었다. 그러자 어이없게도 다시 마음이 편안해지고 희망이 되돌아왔다. (p.181)



그래, 우리는 모두 다 혼자다.. 모든 사랑은 잠재적으로 다 비탄의 이야기라고, 줄리언 반스도 말했잖아. 우린 결국 혼자야. 인생 독고다이지....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지만 뭔가 속상한 문장.. 너무나 마땅히 그러해야 하지만 어쩐지 빡치는....



"한 여자에게 잘하는 남자는 다른 여자한테도 잘하는 법이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내가 옳았어요. " (p.197)




이 책 덕분에 2008년에 다녀왔다. 그러나 언제나 추억에만 들어가 자리잡고 있을 수는 없어. 현실을 살아야 한다. 이제부터 남은 1월은 아주 무겁지만,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를 들고 다니며 열심히 읽어야겠다. 우리의 목표가 그러했으니, 당연히 1월 안에 다 읽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으앗. 그렇지만 겁나 무겁겠지... 괜찮아, 덕지덕지 붙이려고 포스티잇도 주문해 놓았다.

2월 도서도 다 주문해둔 상태라 내게로 오고 있다. 으하하핫. 계획적인 나..



그런데 코델리아도 시리즈 있나? 찾아봐야지. 책 끝날 무렵에 손님이 찾아오던데, 그 손님의 문제를 또 해결해주나 싶어 궁금하네.



그럼 여러분 안녕.




조지와 칼을 만나기 전 그녀는 외롭고 미숙했다. 둘을 만난 후에는 외롭고 조금 덜 미숙해졌다. 연애는 아빠나 집주인 여자들을 대할 때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자신감을 주지도 않았고, 불편할 정도로 심장을 뛰게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칼에게는 다정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와 사랑을 나누는 일이 지나치게 쾌감을 주거나 그가 그녀에게 너무도 중요한 사람이 되기 전에 그가 로마로 떠나버린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렇게나 이상한 체육 과목이 언젠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섹스는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과대평가라고 당시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생각과 행동 사이의 괴리는 그토록 완벽했다. (p.140)

"나는 쉰셋이 되어서야 남편과 결혼을 했는데 마치 우리가 어린 시절 연인이라도 되는 양 아직도 남편이 그리워요. 사람들은 그 나이에 남자를 떠맡다니 바보가 따로 없다고들 했지만, 나는 그이의 부인을 30년 동안이나 알고 지냈었죠. 우리는 같은 학교에 다녔고 난 그 남자를 알고 있었어요. 한 여자에게 잘하는 남자는 다른 여자한테도 잘하는 법이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내가 옳았어요."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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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3 11: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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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3 11: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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