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음악 평론가들에게 "징후를 가져 오시길"
미지를 향해 가는 이성적 타건 - Pierre-Laurent Aimard
슈만, 내면의 풍경
미셸 슈나이더 지음, 김남주 옮김 / 그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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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여러 언어로 누구나 참여해 만들어가는 위키 백과 인간의 은유로 자주 느낀다.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탐구해 기록하고 누군가 그것을 보완 수정한다. 이곳 알라딘에 있으면서 나는 같은 느낌을 자주 받는다. 누군가(작가) 썼고 우리(독자)는 그것을 읽고 또 글을 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작가일 수도 독자일 수도)가 또 다른 글(작품일 수도 리뷰일 수도)을 쓴다. 삶과 기록의 향연.

 

《슈만, 내면의 풍경》을 다시 읽으며 '나와 누군가(의 고통과 고뇌)를 다시 만나 읽는' 기분이었고 이렇게 옮긴다.

 

 

고뇌가 그것을 느끼는 어떤 사람, 자신 안에서 그것을 불러일으키거나 고갈시키는 누군가를 상정한다면, 육체적 고통은 우리 안에 있는 익명의 존재를 건드린다. “나는 고뇌한다고 말하는 프랑스어 문장에는 육체적 고통 곧 '둘레르(doueleur)'의 동사형을 쓸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고뇌는 내게 와 닿는다. 나는 그 고뇌를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뇌는 나의 대상이거나, 내가 고뇌의 소유이다. 고뇌는 주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고뇌는 주체를 만들고, 주체에게 미래를 주고, 주체의 주요 기질을 구축한다. 우리가 때때로 자신의 삶보다 자신의 고뇌에 더 집착하는 것은, 오직 고뇌만이 삶을 충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고뇌한다는 표현은 수동성의 능동적 형태를 표상한다. 객체가 주체가 되는 것이다. 주어와 술어가 서로 자리를 바꾼다.

하지만 비주체적인 육체적 고통은 뭔가를 해체시킨다. 고통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탈인격적인 국면에 직면해야 한다. 고통에는 소유격을 붙이기가 어렵다. 그 정도로 고통은 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일반적인 우리와 관련한다. 고통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는 것이다. 고통 속에서는 특정한 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정신병자에게 고뇌라는 말을, 신경증 환자에게 고통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휠덜린이 그의 시 <사랑스러운 푸른빛으로>에서 그랬듯이, 신경증 환자는 특정한고통, 혹은 불특정한고통에 대해 말하게 된다. 이런저런 고통을 내가 갖는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라고 할 수 없는 나와, 내가 더 이상 속하지 않는 세상 사이에 고통이 있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고통을 하나의 고뇌로 보자면, 그것은 자신을 존재하게 할 대상을 찾지 못한 고뇌다. 그것은 그 어떤 도 고려하거나 생각할 수 없는 아픔, 이름 없고 얼굴 없는 아픔, 인격 없는 아픔이다.

 

 

그것은 시대의 테마이기도 하다. 슈베르트 일기의 한 구절을 보자. “아무도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도 타인의 즐거움을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타자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지만, 그저 엇갈릴 뿐.” 루트비히 티크는 이렇게 썼다. “즐거움은 고통의 보다 강렬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아우구스트 폰 플라텐은 이렇게 썼다. “아름다움은 제일 먼저 사라지는 어떤 것이다. 충실히 남아 있는 것은 고뇌뿐

하지만 슈만의 고통은 이런 감상적인 염세 Weltschmerz'와는 다르다. 이 감정은 슈만 자신이 고통을 말하는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오이제비우스가 플로레스탄에게 맞서는 것처럼 그 감정은 즐거움에 맞선다. “그들 둘 다를 내 안에 두자. 마치 즐거움과 고뇌처럼이라고 슈만은 쓴다. 이 대조에서 고통은 아래쪽의 안정된 층에 있고, 즐거움과 고뇌는 둘다 그 위층에 아슬아슬하게 위치해 있어 고꾸라질 위험이 있다. “그동안 나는 결코 고통을 알지 못했다. 이제 그것이 왔다. 나는 고통을 제압할 수 없다. 고통은 나를 무수히 넘어뜨린다.”

독일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음악은 모든 고통을 침묵시키는 것이었지만 슈만의 경우는 다르다. 음악은 고통을 잡아두지도, 위로해주지도 않는다. 음악은 고통의 극단이다. “이 마지막 시간, 나는 더는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 마치 칼로 내 신경을 자르는 것 같다.”

게다가 낭만주의자들 자신에게 음악이 언어와 완전히 다른 것인 양 말하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라, 음악이여, 나를 너와 함께 데려가 다오. 단어를 찾아내는 이 고통스러운 노력으로부터 나를 구해다오.” 라고 빌헬름 바켄로더는 외쳤다. 여기서 우리는 고뇌와 고통을 구분하는 중요한 지점을 만난다. 곧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고뇌는 의미를 갖지만 고통에는 의미가 없다. 고통이 물리적인 것 이상이거나 추상적인 데 반해, 고뇌는 도덕적이거나 심리적인 문제다.

   (*Agalma 첨언 : 빌헬름 바켄로더의 저 외침은 신해철 <불멸에 대하여> 가사에도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병든 슈만은 온순하게 의사의 지시를 따랐는데, 아픔을 잠재울 수 있는 처방만은 거부했다. 그는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고 싶어 했는데, 그 원인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고뇌는 쾌락의 정반대로서 나타나, 쾌락과 번갈아들고 때로는 뒤섞인다. 하지만 고통은 불쾌나 쾌락 너머에 있다. 고뇌 속에는 쾌락이 감추어져 있지만 고통은 그렇지 않다. 고통 속에는 허무가 있을 뿐이다. 프로이트가 우울에 대해 말할 때, 그가 사용하는 단어는 슈메르츠(Schmerz, 아픔)’가 아니라 틀림없이 라이트(Leid, 상심)’이다. 고뇌 속에는 말할 수 있는 즐거움이 남아 있다. 적어도 고뇌에 대해 말할 수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은 말하고 싶은 욕망, 충동까지를 앗아가 버린다.

프로이트의 용어를 다시 빌려오자면, 슈만의 음악은 쾌락의 원리 너머에 있다.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또한 언어의 원리 너머에 있는데, 아마도 이 둘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고통은 다른 범주, 이를테면 반복, 죽음의 충동, 비참의 범주에 속한다.

이 음악은 종종 힘겹고,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음악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알고 싶지 않은 것을 건드린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광기, 우리 자신의 죽음을. 슈만을 연주할 때 우리는 쇼팽이나 브람스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거의 기쁨을 느낄 수 없다. 마치 그런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될까 봐, 그로부터 나올 수 없을까 봐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왜 하필이면 이런 음악인가? 이런 음악은 상처 입은 살갗, 일상의 균열, 완만한 고통의 점령, 돌연 민낯을 드러낸 삶이나 다름없다.

 

 

존재의 고통, 그것은 그저 존재의 고통이다. 슈만은 자신의 존재가 뿌리까지 찢겨버렸다고 생각했다. 존재를 박탈당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고뇌를 가질 수 있지만, 고통에는 그저 점령당할 뿐이다. 그것은 결핍이나 근친의 죽음 같은 상실로 인해 생기는 고뇌와는 달리, 그저 하나의 구멍이다. 검은색이 고뇌의 빛깔이라면, 고통의 빛깔은 흰색, 그 위에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절대 흰색이다. 고뇌 속에서 가능한 작업이나 노력이 있다면 그것은 애도이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 가능한 작업 같은 건 아예 없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 깊은 곳에 갇혀 있는, 더는 접근할 수 없는 어떤 고통을 갖고 있다. 때때로 무엇인가가 그 문을 연다. 하나의 시선, 하나의 기억, 하나의 음악이. 하지만 그 고통은 더는 아무 의미도 담지 않는 말처럼, 혹은 침묵을 이야기하는 음악처럼 비어 있다. 어느 날 슈만은 그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내 고통의 이름을 묻는다면, 나로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건 그저 고통 자체인 것 같아. 더 적절하게 지칭할 수가 없어.” 묘사를 불허하는 무한하고 순수한 고통. 자신의 모든 음악 속에서 결코 말하지는않지만, 노래하고 조바꿈하고 때로는 혀짤배기로 표현하는 고통(음악에서 말해질 수 있는 것은 고뇌다. 쇼팽이나 슈베르트의 음악이 그런 것처럼).

 

 

 슈만의 시간은 거칠고 제대로 구조화되지 않음, 아이의 시간이다. 고도로 건축적인 베토벤의 시간과 대조적이다. 그것은 방향성을 지닌 화살이나 가능성을 품은 전망이 아니라 오고 감이 얽히고설킨 그물망이다. 긴 몽상의 강을 급히 내려가기 위해서만 연주를 멈추는 어린아이, 언제라도 잠에 빠져들 수 있는 어린아이는 가장 빨리 달리 수밖에 없고, 자신이 금방 한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뒤이어 올 것에 대한 것도 신경쓰지 않는다. 실제로 어린아이들은 느린 악장을 연주하거나, 경쾌한 가운데 속도를 늦추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하여 음악적 시간은 기분을 귀로 들을 수 있는 표현으로 전환한다(슈만의 리타르단도(점점 느리게)’, ‘아첼레란도(광적으로)’, ‘칼란도(차분하게)’와 더불어). 그 리듬, 불안의 발작처럼 미친 듯이 두드려대는 것은 먹먹하게 상승하는 죽음의 충동에 저항하기 위함이다. 연주자로서 슈만은 박자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문제를 갖고 있었다. 1852, 뒤셀도르프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일하면서 악보대 앞에서 그는 종종 의기소침의 상태로 빠져들었다가는 연주자들에 맞서 화를 냈다. 그러고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대로 작품을 지휘했으며, 악장의 템포를 늦추었다.

 

 

 평이하기 짝이 없는 이행을 보여주는 후기의 저작들을 제외하면,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벗어나는 수수께끼 같은 코다(종결부), 갑작스러운 화음의 중단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으로 불안이 종식되지만, 음악 역시 끝나고 만다! ‘후모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작들 속에서 기지 넘치는 화려한 악구가 양분되는 것처럼(유머는 갈등, 긴장의 소산이다). 사태의 핵심, 고통의 핵에 지나치게 가까이 있지 않기 위해, 신랄한 기미가 나타나고 소극성이 무기력함에 대한 냉소가 여기저기 등장한다. 연주는 긴장을 풀어주지 않는다. 슈만의 유머는 그 자신을 고발한다. “보라, 나는 비판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 하지만 당신들 역시 나처럼 존재의 모순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하는 식이다.

 

 

고통을 화음으로 표현하자면, 활주라기보다는 고정, 거의 차이가 없는 음들의 집합이다. 고통이 몸속 여기저기에 이해할 수 없는 과정으로 쏠리듯이, 이런 음들이 중간 단계 없이 다른 조성이 불쑥 등장할 때까지 뭉쳐 있다. 이 화음은 틈새라기보다는 균열에 가까운 것으로, 귀에 거슬리는 이런 음정에 특유의 덧없는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 위치다. 그런 균열이 강한 박자 위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는 것이다(예를 들어 환상소곡집 op.121석양). 고통, 다시 말해서 펼쳐지지도 전개되지도 않는 이 뾰족한 끝은 마치 지나가듯 건드려진 미세한 차이 속에서만 알아챌 수 있을 뿐이다.

 

 

 

Robert Schumann, Fantasiestücke op. 12 (1837) - I. Des Abends(석양)

 

 

고통은 종종 유성음과 연결된다. 고통은 일종의 울림, 반사, 잔향의 성격을 띤다, 우리는 고통을 둔중하다고, 날카롭다고, 찌르는 듯하다고 표현하지 않는가? 고통은 울리고 반향하고 두드리고 외치는 것, 혹은 침묵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실체를 끌어내지 않는가?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는 책을 읽거나 그림을 보면서는 그런 고통의 핵에 이를 수 없다.

고통, 그것은 말의 내용이라기보다는 그 말을 하는 목소리다. 단어 아래의 어조, 지각하기 어려운 유성음이다. 하나의 소리, 귀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어떤 화음은 아니고 그 소리나 화음으로부터 남는 것, 어디에도 없는 듯이 느껴지는 어떤 것이다. 유령처럼 고통은 우리가 잊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돌아온다.

 


 

  부재로 이루어진, 포착할 수 없는 그 실재 속에서 후모어’(Humor, 유머와 기분)는 대상이나 주체 그 자체의 실재와 부재로 하는 게임, 혹은 나아가 무엇보다도 언어로 하는 게임이다. 음악은 언어의 한계다. 단어 없는 사상이다. 그리고 소리의 나라를 택한 슈만(오랫동안 작가가 되고 싶어 했던)의 결정 속에는 그것, 곧 언어를 배제한 사상이 있는 것 같다. 말의 바람에 날려가는 지푸라기, 언어의 객체가 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기분이 정신 속에서 생물학적인, 호르몬상의 육체의 무게를 끊임없이 환기한다 해도, 이런 언어와 음악의 갈마듦으로 인해 멀어진 언어의 자리가 정신 속에서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기분에, 그 분위기에, 그 변주에, 그 무질서에 집중되는 관심은 감정적인 것일 뿐, 언어 밖의 것에 대한 매혹은 아니다. 그 관심은 오히려 각 개인의 언어에 대한 관계를 밝히려는 데 있다. 감정적이든 명백히 비감정적이든 간에 언어 안에 머무는 방식, 언어를 떠나고 언어를 증오하고 언어를 잃어버리는 방식에 대한 각자의 관계 말이다.


 

 

 우리는 슈만에게서 전개에 대한 공포, 틈새에 대한 열정, 분리에 대한 광기를 발견한다. 그런데 그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친단 말인가? 슈만은 자신을 부동不動과 근본으로 몰아가려는 강물 속에서 싸워야 했는데, 프로이트 이후 그것은 죽음의 충동이라고 명명된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두 가지, 곧 언어와 환각을 통해서이다. 언어가 그 다의성(‘후모어를 가지고의 경우가 그렇다)과 더불어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 때인 1836~1839년에 위대한 피아노 작품들이 나온다. 그리고 언어가 자신의 수수께끼의 몫, 삶의 기회, 그의 움직임을 되찾을 때에는, 손가락과 건반의 말없는 감금에서 빠져나오는, 고백의 작품인 가곡의 행복한 시기가 온다. 하지만 언어가 멈추고 나면. 응고되고 나면 무엇이 오는가?

수수께끼에 대한 취향이 점차 사라지면서 마지막 시기의 작품에서 깊이가 없어졌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모든 것이 다 드러났고, 드러난 내용이 더는 잠재적인 의미를 갖지 않은 것 같다. 더는 의문이 없고, 그저 대답만이 있는 것 같다. 소통이나 변장을 그리 즐기지 않는 음과 글자들이 이제 분리된다.

 

 

 

Grigory Sokolov - Schumann 《Geistervariationen(유령변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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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2-04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작 ^^..

AgalmA 2016-12-05 00:53   좋아요 2 | URL
땡~ 북플로 보셔서 잘 안 보이셨으리라 생각하는데 인용이 너무 많아서 당선작은 안됩니다. 제가 파악하기로 알라딘 당선작은 정리를 잘한 글도 받지만, 글쓴이의 사유가 많이 드러나 개성적인 관점을 보여주는 글이 더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알라딘 당선작은 다른 서점에 비해 그 점에서 더 뛰어난 듯^^ 대중성보다 작품성에 더 신경을 쓴다고 할까. 그래서 제가 알라딘 당선작을 신뢰하는 것도 있죠.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이렇게 썼나. 제가 쓰고 싶은 대로 쓰고 싶으니까요ㅎㅎ~

clavis 2016-12-04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축하드려요^^

AgalmA 2016-12-05 00:35   좋아요 1 | URL
오해요^^ yureka01님이 잘 읽으셨다는 뜻에서 하신 말씀~

책읽는나무 2016-12-05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리 축하하고픈 멋진글인데요?^^
슈만!!!
그의 음악을 들을때 그의 고통과 고뇌를 생각할 듯요^^

AgalmA 2016-12-06 03:25   좋아요 1 | URL
이 글에 왜 김치국도 없이 축하 인사가^^;;;
슈만의 불협화음에 대해서 이 책이 참 잘 접근해 주었어요. 글을 따라가며 음악 찾아듣는 안내서 역할도 잘해 주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