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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ㅣ 쏜살 문고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16년 11월
평점 :
무라카미 하루키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피츠제럴드를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작가로 꼽았다고 하는데, 하루키가 피츠제럴드에게서 가져온 정수(精髓)는 ‘청춘과 상실’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읽어왔던 피츠제럴드 작품을 관통하는 줄기였다.
피츠제럴드는 아내 젤다와 함께 광기에 가까운 사교계 향락 속에서 살았다. 그런 생활이 창작의 거름이 되어주기도 했지만 불안정한 재정 상황과 알코올 중독에까지 이끌어 그는 마흔넷의 젊은 나이에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그 삶의 면면이 작품 곳곳에 녹아 있다. 그가 더 살았다면 이 책에 실린 「다시 찾아온 바빌론」 같은 진한 성찰을 담은 작품이 많이 나왔을 거라 생각한다.
(이쯤에서 음악 큐~)
Acoustic Alchemy - Silent Partner
「다시 찾아온 바빌론」은 대공황이 오기 전 세계 곳곳에서 흥청망청 살았던 미국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찰리 웨일스는 대공황으로 재산과 가정을 잃고 재기를 하려 안간힘이다.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었지만 가정을 다시 꾸리기는 쉽지 않다. 아내는 이미 사망했고 술과 생활을 철저히 관리하며 처형에게 맡겨둔 딸을 데려와 가정을 꾸리려 하지만, 함께 유흥을 즐겼던 예전 인연들은 그의 다른 모습을 용인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의 훼방으로 찰리는 딸을 데려오기 어려워진다. 이 줄거리는 피츠제럴드 실제 삶의 변형으로 볼 수도 있다. 아내 젤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외동딸을 양육하며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던 상황 말이다.
이 단편의 마지막 문단은 청춘의 상실에서 어른의 상실 시기로 넘어가는 걸 잘 보여준다.
언젠가 그는 또다시 이 도시에 돌아올 것이다. 언제까지나 그에게 돈을 지불하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그는 아이를 원했고, 그 사실을 제외하고는 이제 중요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혼자서 그렇게 많은 멋진 생각과 꿈을 가질 수 있는 젊은이가 아니었다. (본문 中)
피츠제럴드는 목격한 사건이나 체험을 작품에 많이 반영하는 작가였다. 「기나긴 외출」은 아내 젤다의 정신 병원 입원을 소재로 상상력을 입힌 것 같다.
조현병으로 입원한 22살의 킹 부인이 퇴원하기 전, 여행을 떠나려고 남편이 그녀를 데리러 오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녀 상태가 다시 악화될까 봐 병원 측에서 그 사실을 숨기고,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기 귀찮아할 때쯤에도 매일 그녀는 의식처럼 옷차림에신경 쓰며 남편을 기다린다. 삶을 꾸리려면 어느 정도 미쳐야 다르게 말하면 어느 정도 자신만의 궤도를 고수해야 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결론이다. 삶에서 정상과 비정상 정도 구분은 정말 쉽지 않다.
「분별 있는 일」도 피츠제럴드와 젤다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미래가 불확실해 파혼당한 피츠제럴드는 직장을 그만두고 글쓰기에 몰두해 1920년 《낙원의 이쪽》으로 경제적 여유와 인기를 얻어 젤다와 결혼하는데 성공한다.
이 단편에서 조지 오켈리는 존퀼 태리에게 청혼하지만 불안정한 경제력 때문에 거절당한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경제적으로 성공한 후 다시 돌아온 조지는 그에 대한 사랑이 싸늘하게 식은 존퀼을 마주하며 그들을 감싸고 있던 사랑의 마법들이 무대에서 모두 사라져 버렸음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도 익히 알듯이.
그녀야말로 갖고 싶은 고귀한 그 무엇이었고, 분투한 끝에 마침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옛날 어스름 속에서나 산들바람 살랑거리던 밤에 주고받은 그 속삭임은 이제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 갈 테면 가라, 그는 생각했다. 4월은 흘러갔다. 이제 4월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랑이 있건만 똑같은 사랑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본문 中)
「해외여행」은 장편 소설 《밤은 부드러워》의 전신인 작품으로, 피츠제럴드와 젤다의 경험이 녹아있는 단편이다. 유산을 상속받고 여유로워진 젊은 미국인 부부 니콜과 넬슨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견문을 넓힐 겸 세계 여행을 다닌다. 니콜은 성악을, 넬슨은 그림을 공부할 계획이었지만 허영과 사람들과의 유흥 속에서 피폐해지기만 했다. 환상 공포 소설에서 볼 법한 멋진 엔딩 장면이 이 소설의 별미였다.
한참 후에 부사다(알제리 중북부의 오아시스 도시)에서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시장의 유랑객들이 모자 달린 외투를 둘둘 감고 꼼짝 않고 누웠을 즈음 그녀도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잠이 들었다. 삶은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계속되지만, 누군가는 상처를 입으며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선례도 생겨난다. 그래도 이 같은 사랑 싸움은 상당히 오래 견딜 수 있다. 그녀와 넬슨은 젊은 시절에 외로웠다. 이제 그들은 살아 있는 세계의 맛과 냄새를 원했으며, 지금까지는 서로에게서 그것을 갈구했다. (본문 中)
피츠제럴드 자신이 재밌으려고 썼다는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는 그 때문이었을까. 피츠제럴드에게서 기대하지 않았던 판타지 특성으로 가득한 단편이었다. 다이아몬드의 형형한 빛처럼 인간의 부에 대한 환상, 부를 둘러싼 인간의 양태들이 경쾌하게 펼쳐진다. 도덕적인 훈계조로 끝나 우화 같았던 게 흠이었지만 의외성 때문에 이 단편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쓴 로알드 달 소설 같았다고 하면 감이 오실 런지?
삼십 분 후에 황혼이 어둠으로 변했고, 말없이 마차를 끌던 흑인이 어둑한 앞쪽에 서 있던 불투명한 물체에게 인사를 했다. 물체는 흑인의 인사에 대한 보답으로 빛나는 원반을 비추었는데, 그 원반은 측량할 수 없는 밤의 사악한 눈처럼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차가 그 원반에 다가간 후에야 존은 그것이 커다란 자동차의 미등인 것을 확인했는데, 그 자동차는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차보다 크고 위엄이 넘쳤다. 주석보다 화려하고 은보다 가벼운 금속의 몸체가 반짝이고, 바퀴통에는 초록색과 노란색의 기하학적인 물체가 무지개처럼 박혔는데, 존은 그것이 유리인지 보석인지 감히 물어보질 못했다. (본문 中)
키스마인이 한숨을 쉬며 별을 올려다보았다. "대단한 꿈이었어. 입을 거라고는 이 드레스 하나뿐인 데다가 무일푼인 약혼자와 여기 있다니 정말 이상해! 그것도 별빛 아래에서 말이지. 전에는 별이 있다고 인식해 본 적이 없어. 늘 다른 사람에게 속한 커다란 다이아몬드라고 생각했지. 이제 별이 두려워. 별은 모든 게 꿈이었다고, 내 젊음이 모두 꿈이었다고 느끼게 해."
존이 조용히 말했다. "그래, 이 모든 이들의 젊음은 꿈이야. 일종의 화학적인 광기야."
"미친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존이 침울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들었어. 그 이상은 나도 몰라. 어쨌든 일 년 정도 우리 서로 사랑하자. 그게 우리로서는 유일하게 신처럼 마취될 수 있는 시도이니까. 이 세상에는 다이아몬드들이 있어. 또 다이아몬드와 환멸이라는 시시껄렁한 선물이 있겠지. 음, 그건 마지막에 갖고 무시해 버릴래." (본문 中)
겨울밤 한가하게 읽기 좋은 작품 구성이었다. 민음사 쏜살문고 시리즈 다른 책도 찾아보니 작품 선별이 다 훌륭했다. 디자인도 예쁘고 가격도 저렴해서 어제 한 권 또 주문했다.(과연 무슨 책일까요~)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으로 세계문학을 읽고 싶은 독자에게(그래서 명칭을 쏜살문고라고?) 추천할 만한 시리즈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