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도 사투리와 한국 음식과 각종 토속성을 시에 담은 백석 시인은 한국 시인들에게 韓國詩의 고향 같은 시인이기도 하다. 한국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던 허수경 시인의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연작시들은 그걸 고스란히 보여줬다.
* 대구 저녁국 ㅡ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대구 덤버덩 국 끓이는 저녁 움파 조고곤 무시 숭덩덩 불근 고추가리 마늘 국에서 노닥 눈 헛파는 저녁이면 어디 먼 데 가고 자파 먼 데 어느 멘지 몰로라 저녁 새 벚나무에 쪼그리고 내누어 국 냄새 감나무 가대에 오그리고 대누어 그 먼 적 대구국 기리는 저녁, 마흔뎅이 가시나 한 것 저녁 적 노다닥 찬데리여 그 흐저다한 혼이라는 길이 말종이 먼재도 길 타서 타박타박 나배도 달녁도 낭구도 마다코 걸어다미는 이 저녁 새 대구국 기리는 저녁센데 어느 먼 데 먼 데 어딘지 몰라라 저녁 새 벚낭구 가지에 눈님 새울고 국 냄새 간 감낭구 가지에 어둠님 눈구구 감고 |
** 대구 저녁국 대구를 덤벙덤벙 썰어 국 끓이는 저녁이면 움파 조곤조곤 무 숭덩숭덩 붉은 고추가루 마늘이 국에서 노닥거리는 저녁이면 어디 먼 데 가고 싶었다 먼 데가 어딘지 몰랐다 저녁 새 벚나무 가지에 쪼그리고 앉아 국 냄새 감나무 가지에 오그리고 앉아 그 먼 데, 대구국 끓는 저녁, 마흔 살 넘은 계집아이 하나 저녁 무렵 도닥도닥 밥한다 그 흔한 영혼이라는 거 멀리도 길을 걸어 타박타박 나비도 달도 나무도 마다하고 걸어오는 이 저녁이 대구국 끓는 저녁인 셈인데 어디 또 먼 데 가고 싶었다 먼 데가 어딘지 몰랐다 저녁 새 없는 벚나무 가지에 눈님 들고 국 냄새 가신 감나무 가지에 어둠님 자물고 |
--- 한국말을 쓰고 잘 아는 독자여도 허수경 시인이 경상도 사투리를 적극 활용해 쓴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연작시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시인은 직접 풀어쓴 같은 시를 앞뒤로 배치했다.
“대구 저녁국 ㅡ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보다 “대구 저녁국”이 한결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나는 앞의 시가 더 좋다. 왜?
안도현 시인은 시를 대할 때 '이해'보다 '느낌'을 더 중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그 특유의 정서와 느낌. 허수경 시인의 저 두 시의 비교처럼 풀어쓸 때 휘발되는 무엇이 있다. 나도 처음에 그랬지만 많은 사람들이 백석 시인의 시가 낯선 사투리 때문에 접근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젓갈이 입에 맞을 때까지 많이 먹거나 기다리라고 말해야 할까. 그것도 한 방법이긴 하다. 안도현 시인처럼 '느낌'을 더 중시하자고 말하기보다 나는 ‘이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고 말하고 싶다. 사전에서도 이 단어는 여러 함의를 보여준다.
이해(理解) [네이버 사전 인용]
1.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함.
2. 깨달아 앎. 또는 잘 알아서 받아들임.
3. [같은 말] 양해(諒解)(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임).
전달 받는 자 입장에서 사리 분별의 의미를 더 크게 둘 때 “대구 저녁국 ㅡ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는 “대구 저녁국”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바라는 ‘이해’란 정서적이고 개인적인 의미가 더 클 것이다. 암묵의 이해를 약속받은 詩라는 장르는 그래서 특별하다. 번역이라는 장애를 거치고도 외국 시들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일 것이다. 공감을 불러오는 정서, 한국의 서정(敍情)을 백석 시인은 알 듯 말 듯한 사투리와 토박이말을 써 수를 놓았다. 아래 시는 사투리와 토박이말은 많지 않지만 정서를 잡아내는 탁월함 때문에 인용했다.
수라(修羅)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 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아 또 문 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 백석 시인은 한국말의 변신을, 이해의 변신을 안배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언어를 통하지만 언어를 남기고 이해로 깊숙이 들어가게 만드는 시인, 그래서 우리는 그의 시를 읽고 또 읽는다.
돌다리에 앉아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ㅡ 백석 ‘하답(夏沓)’ 中
--- 단박에 아이들을 물총새로 만드는 마법에 황홀해하며 계속 계속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