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自得’을 강조하는 寓言


  옛 성현들의 말씀에서 결국 가르침과 배움의 道는 ‘自得’으로 向한다고 할 수 있다. 김영 교수는 사제관계의 우언을 연구하면서 이와 같은 점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1) “학생들에게 직접 정답을 가르쳐주기보다 학생들이 스스로 깨닫고 생각할 시간을 부여하며 침묵을 기다려주는 것이 학생들의 자존심과 창의성을 살려주는 교육방법”임을 󰡔列子󰡕의 우언 「관윤자의 가르침」을 통해 이끌어 내고 있다.

  이러한 ‘자득’을 강조하는 우언으로 姜希孟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도둑질이 직업인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자신의 솜씨를 모두 가르쳐 주었다. 아들은 자신의 재능을 자부하여 자기가 아비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도둑질을 나가면 언제나 반드시 아들이 먼저 들어가고 나중에 나오며, 가벼운 것은 아비에게 맡기고 무거운 것을 들고 나왔다. 게다가 먼 곳에서 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고, 어둠 속에서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 도둑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하루는 아비에게 자랑삼아서 말했다.

“제가 아버지의 솜씨보다 조금도 손색이 없고, 억센 힘은 오히려 나으니 이대로 나간다면 무엇은 못하겠습니까?”

“아직 멀었다. 지혜란 배워서 이르는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어서 스스로 터득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너는 아직 멀었다.”

“도둑이란 재물을 많이 얻는 것이 제일입니다. 저는 아버지보다 소득이 항상 배나 되고 나이도 아직 젊으니 아버지 나이가 되면 틀림없이 특별한 재주를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나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하기만 해도 겹겹의 성에 들어갈 수 있고 깊이 감춘 물건을 찾아낼 수는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화가 따른다.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고 임기응변하여 거침이 없는 그런 수준은 어느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너는 아직 멀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건성으로 들어 넘겼다.

다음 날 밤 아비 도둑은 아들을 데리고 어느 부잣집에 들어갔다. 아들을 보물 창고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는 아들이 보물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을 때쯤 밖에서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운 다음 자물통을 흔들어 주인이 듣게 하였다. 주인이 달려와 쫓아가다가 돌아보니, 창고의 자물 쇠는 잠긴 채 그대로였다. 주인은 방으로 되돌아갔고, 아들 도둑은 창고 속에 갇힌 채 빠져나올 길이 없었다. 빠져나갈 방도를 궁리하던 아들 도둑은 마침내 손톱으로 박박 쥐가 문짝 긁는 소리를 냈다. 주인이 소리를 듣고 말했다.

“창고 속에 쥐가 들었군. 귀중한 물건들을 망치겠다. 쫓아버려야지.”

주인이 등불을 들고 나와 자물쇠를 열고 살펴보려는 순간, 아들 도둑이 쏜살같이 빠져 달아났다. 주인집 식구들이 모두 뛰어나와 뒤쫓았다. 아들 도둑은 더욱 다급해져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는 연못가를 돌아 달아나다가 큰 돌을 들어 못 속으로 던졌다. 뒤쫓던 사람들이 말했다.

“도둑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모두가 못가에 빙 둘러서서 찾았다. 아들 도둑은 그사이에 빠져나갔다.

집으로 돌아와 아비를 원망하여 말했다.

“새나 짐승도 제 새끼를 보호할 줄 아는데,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욕을 보이십니까?”

그러자 아비 도둑이 말했다.

“이제 너는 천하의 독보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사람의 기술이란 남에게서 배운 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만, 스스로 터득한 것은 응용이 무궁한 법이다. 더구나 곤궁하고 어려운 일은 사람의 심지를 굳게 하고 솜씨를 원숙하게 만드는 법이다. 내가 너를 궁지로 몬 것은 너를 안전하게 하자는 것이고, 너를 위험에 빠뜨린 것은 너를 건져 주기 위한 것이다. 네가 창고에 갇히고 다급하게 쫓기는 일을 당하지 아니하였던들, 어떻게 쥐가 긁는 시늉과 돌을 던지는 기발한 꾀를 냈겠느냐. 너는 곤경을 겪으면서 지혜가 성숙해졌고 다급한 일을 당하면서 기발한 꾀를 냈다. 이제 지혜의 샘이 한번 트였으니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천하의 독보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그 후에 과연 아들은 천하제일 도둑이 되었다.2)


  이 우언은 현재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는 글이다.3) 이것은 강희맹이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서 지은 다섯 편의 글[訓子五說] 중의 하나로, “도둑질이란 세상에서 지극히 천하고 악한 기술이지만, 그것도 스스로 터득한 다음에야 비로소 세상에서 으뜸가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學問의 길에 있어서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느냐?”라고 반문하면서 ‘스스로 지혜를 터득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즉, ‘自得’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 1) 김영, 「군신 ․ 사제 관계 重言과 寓言」, 󰡔한국한문학 연구의 새 지평󰡕(소명, 2005), pp.1070~2. 참조.
  • 2) 姜希孟, 󰡔私淑齋集󰡕, 「盜子說」. 번역문은 김영, 󰡔한국의 우언󰡕, 현암사, 2004, pp.100~2.
  • 3) 중학교 1학년 󰡔국어󰡕 3단원(문학의 의사소통)에 「스스로 터득한 지혜」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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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Ⅱ.3. 옛 聖賢의 지혜 ― ‘가르침과 배움’


  孔子와 老子 이외의 다른 성현들의 지혜에서도 우리는 ‘가르침과 배움’에 관한 慧眼을 얻어낼 수 있다. 여기서는 孔子와 老子를 제외한 聖賢들의 ‘가르침과 배움’에 관한 명언들을 간추려 보도록 하겠다. 이 또한 우리에게 주는 귀중한 지혜일 것임에 틀림없다.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大學-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명쾌하게 따져보고 돈독히 실천하다.1)


學莫貴於自得, 得非外也, 故曰自得. -程子-

학문은 自得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데,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므로 자득이라고 한다.2)


學問是自家合做底, 不知學問, 則是欠闕了自家底. -朱子-

공부는 마땅히 스스로 해야 하나니,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스스로를 부족하게 만든다.3)


無往而非道, 無往而非工夫. -王陽明全集-

어디 간들 도 아닌 것이 없으며, 어디 간들 공부 아닌 것이 없다.4)


學必以自得爲貴. -南冥集-

학문이란 모름지기 스스로 깨침을 귀하게 여긴다.5)


佛家云: “鴛鴦繡出從君看, 莫把金針度與人.” 其意謂以繡示人, 姑不說針法, 使看者推究自得也. 若並與針法, 恐得之不深也. -星湖全書-

불교에서는 “원앙새 수놓은 솜씨는 보여줄지라도, 바늘을 남에게 주지는 말라”고 한다. 그 뜻은 수놓은 솜씨는 남에게 보여주되 수놓는 방법만큼은 말해주지 않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궁리하여 스스로 알게 한다는 말이다. 만일 수놓는 방법까지 가르쳐준다면 배우는 자가 깊이 터득하지 못할까 우려한 것이다.6)


  이 밖에도 우리나라의 뛰어난 학자인 서경덕, 홍대용, 박지원, 정약용 등의 명언들이 많이 있으나 지면이 허락지 않아 실지 못함을 다만 아쉬워할 뿐이다.7) 위에서 보인 것은 무엇보다도 ‘自得’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들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孔子는 즐거움을 찾는 배움의 자세를 말하였으되, 이것은 곧 ‘自得’과 一脈相通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배움의 道’는 다른 것이 아니라 ‘自得’인 것이며, 이 ‘自得’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섬기는 것이 ‘가르침의 道’일 것이다.

 

 


 

  • 1) 번역문은 김영, 󰡔인터넷 세대를 위한 한문강의󰡕, 한울, 2005, p.81.
  • 2) 번역문은 박희병 편역, 前揭書, p.33.
  • 3) 같은 책, p.53.
  • 4) 같은 책, p.75.
  • 5) 같은 책, p.112.
  • 6) 같은 책, p.140.
  • 7) 옛 성현과 학자들의 공부에 대한 지혜를 모아둔 책이 박희병 편역, 󰡔선인들의 공부법󰡕(창작과비평사, 1998)이다. 본고는 이 책에서 많은 부분 참고하고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 두며, 아울러 보다 더 선인들의 가르침과 배움에 관한 지혜를 알고자 한다면 이 책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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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Ⅱ.2. 老子의 ‘배움의 道’


  파멜라 메츠는 老子의 ꡔ道德經ꡕ을 ‘배움’을 주제로 다시 풀어 썼다.1)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이현주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중국 사람들은 정치가 바로잡혀 나라가 든든할 때 孔孟을 읽었고, 반대로 정치가 어지러워 나라가 흔들릴 때에는 老壯을 읽었다더군요. 제 생각입니다만, 공자 ․ 맹자는 나무 뿌리와 줄기 를 그냥 두고 잘못된 가지를 바로잡거나 병든 잎을 다듬는 방법을 말하고, 노자 ․ 장자는 아예 새 묘목을 심어 제대로 된 나무를 길러내는 법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한 나라가 서서 신선한 출발을 할 때에는 사람들이 공맹을 읽었고, 그 나라가 세월과 함께 늙어서 아무래도 새 나라로 바꿔야겠다는 민심이 움직일 때는 노장을 읽었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2)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교육이 근본부터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3)는 생각에서 老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슬기로운 교사가 가르칠 때

학생들은 그가 있는 줄을 잘 모른다.

다음가는 교사는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교사다.

그 다음가는 교사는 학생들이 무서워하는 교사다.

가장 덜 된 교사는 학생들이 미워하는 교사다.


교사가 학생들을 믿지 않으면

학생들도 그를 믿지 않는다.

배움의 싹이 틀 때 그것을 거들어 주는 교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이 진작부터 알던 바를

스스로 찾아낼 수 있도록 돕는다.


교사가 일을 다 마쳤을 때 학생들은 말한다.

“대단하다! 우리가 해냈어.”4)


  슬기로운 교사는 학생들을 시시콜콜 간섭하고 억압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교사의 존재를 모를 정도로 교사는 학생들을 자유롭게 해줘야 함을 말하고 있다. 현 우리나라의 교사는 과연 어떤 교사일까? 슬기로운 교사는 아닐지라도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교사는 몇이나 될 것인가? 생각해 보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슬기로운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지 조금 더 老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슬기로운 교사는

모든 부분들을 희망과 연민의 눈으로 본다.

전체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낮춘다.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지는 않지만

스스로 자신을 돌처럼 반드럽고 단단하게 만든다.


  교사가 학생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낮추어 학생을 섬기는 자세를 가질 때 슬기로운 교사가 될 수 있다. 학생을 섬기는 교사만이 학생들을 ‘희망과 연민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슬기로운 교사가 될 때 “학생들 위에 있지만 그들은 무겁다고 느끼지 않는다. 학생들을 앞에서 이끌지만 학생들은 조종당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며 교사를 존경”5)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사의 권위가 무너졌다고들 한탄한다. 그것은 곧 슬기로운 교사가 드물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 1) 여기서는 파멜라 메츠, ꡔ배움의 道ꡕ, 민들레, 2003.을 텍스트로 하여 老子가 전하는 가르침과 배움의 道는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 2) 上揭書, p.6.
  • 3) 上揭書, p.7.
  • 4) 上揭書, p.29.
  • 5) 上揭書,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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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Ⅱ.1. 孔子가 말하는 ‘가르침과 배움의 道’


  ‘가르침과 배움의 道’를 논함에 있어 그 출발은 孔子에서부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자는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의 정치를 바로잡아 민생을 안정시키는데 관심을 가지면서, 수많은 제자를 포용하여 가르치는 敎育者로서의 일생을 보냈다.1) 오늘날에 있어 孔子의 말씀은 많은 이들에게 지혜를 주는 고전 중의 고전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볼 때, 孔子는 大敎育者가 아닐 수 없다. 대교육자 孔子의 말씀 속에서 그의 ‘가르침과 배움의 道’를 찾아보도록 하겠다.


  Ⅱ.1.1) 孔子의 ‘배움의 道’

  孔子는 배움을 말함에 있어 그 즐거움을 가장 먼저 이야기 한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論語 學而-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論語 述而-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진리를 안 자가 아니라,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탐구한 사람이다.


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 以思, 無益. 不如學也. -論語 衛靈公-

내가 일찍이 종일토록 밥을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으며 생각해보았지만 유익함이 없었다.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였다.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論語 公冶長-

10가구쯤 되는 조그만 읍에도 반드시 나처럼 진실하고 믿음성 있는 자는 있겠지만, 나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배움에 있어서 그 자체의 즐거움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진리를 즐거워하는 사람만 못하다”2)에서 즐거움을 찾는 배움의 자세는 더욱 강조되고 있다. 현재 우리 교육의 현장에서 과연 배움의 즐거움을 찾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孔子의 말씀처럼 배움의 즐거움을 찾는 것이 교육 제도를 뜯어고치는 것보다 더욱 시급하고 근원적인 문제의 해결책이 아닐까 감히 단언해 본다.


    朝聞道, 夕死可矣. -論語 里仁-

    아침에 도를 들어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


    子貢問曰 “孔文子, 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論語 公冶長-

자공이 묻기를, “공문자를 어찌하여 文이라고 시호하였습니까?”하자, 공자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명민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까닭으로 문이라 부른 것이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論語 爲政-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안다는 것이다.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論語 憲問-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의 내면적 성취를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의 눈을 의식한 학문을 한다.


  즐거움을 찾는 배움의 자세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 배움의 즐거움이 어찌나 큰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와 같은 자세가 진정한 배움의 자세의 극치일 것임에 틀림없다. 즐거움을 찾는 배움의 자세를 孔子는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不恥下問’의 자세요, 다른 하나는 ‘爲己之學’의 자세이다. 알고자 하는 바는 그 누구에게 물어서라도 아는 것,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기 위한 배움이 아닌 자기 자신의 수양과 발전을 위한 배움의 자세를 가져야 함을 力說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Ⅱ.1.2) 孔子의 ‘가르침의 道’

  위에서 살펴 본 바, 즐거움을 찾는 배움의 자세가 곧 孔子가 말하는 배움의 道라 할 것이다. 그러나 즐거움을 찾는 배움의 자세가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교사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그렇다면 교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論語 述而-

마음속으로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으며, 애태워하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으며, 한 귀퉁이를 들어주었는데도 남은 세 귀퉁이를 가지고 반응해오지 않으면 다시 더 가르쳐주지 않는다.


  여기서 중시되는 것은 助力者로서의 교사의 역할이다. 학생 스스로 분발하게 하고, 알기를 애태워하며, 세 귀퉁이를 들고 일어설 수 있도록 한 귀퉁이를 잡아주는 ‘助力者’, 그것이 바로 교사의 역할이며, 교사가 취해야할 바람직한 자세인 것이다.

  또한 孔子는 교사가 先入見을 버려야 함을 강조한다.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論語 子罕-

나는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그런 선입견이 없다. 어떤 비루한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묻되 진실한 태도로써 한다면, 나는 그 문제의 自初至終을 듣고 성심성의껏 다 말해준다.


  즉, 선입견이 없이 학생들을 바라보고 대하는 것, 나아가 “열린 마음을 갖고 학생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3)이 孔子가 말하는 교사의 자세, 곧 가르침의 자세인 것이다. 더욱이 孔子는 가르침에 있어 4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학문과 행동과 진실과 믿음”4)이 그것이다. 학문은 곧 지식의 전달일 것이며, 그와 함께 교사의 행동 또한 가르침의 방법이 된다. 진실 된 마음을 가지고 학생들을 대하며, 학생 개개인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孔子의 ‘가르침의 道’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冉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畵.” -論語 雍也-

염구가 말하였다. “제가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힘이 부족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힘이 부족한 자는 중도에 그만두는 것이니, 지금 너는 스스로 안된다는 한계를 긋고 있구나.”


  앞서 助力者로서의 교사의 역할을 말하였다. 그러나 학생 스스로 깨우치게 하고 분발하여 힘쓰도록 도움을 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그 과정에서 겪는 좌절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위로하고 이끌어 주는, 그리하여 더욱 힘을 북돋아주는 역할 또한 교사가 갖추어야 할 자세임에 틀림없다.

 

 


 

  • 1) 김영, ꡔ논어를 읽는 즐거움ꡕ, 인하대학교출판부, 1998, p.30.
  • 2) ꡔ論語ꡕ 雍也,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 3) 김영, 「군신 ․ 사제 관계 重言과 寓言」, ꡔ한국한문학 연구의 새 지평ꡕ, 소망, 2005, p.1067.
  • 4) ꡔ論語ꡕ 述而, 子以四敎, 文行忠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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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Ⅱ. 聖賢들의 ‘가르침과 배움의 道’


  지금의 우리는 많은 위기에 直面에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꼽는 것이 敎育의 문제이다. 명나라의 유학자 王陽明은 당시의 교육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근세에 아이를 가르치는 자들은 날이면 날마다 아이들에게 字句를 익히라 다그치고 품행을    방정히 하라고 요구하지만 아이들을 禮에 의거하여 지도하는 법을 모른다. 또 아이들이 총명하    기를 바라지만 아이들을 착하게 키우는 법을 모른다. 그리하여 아이들에게 회초리를 때리고 벌    을 주기를 죄인 다루듯이 한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학교를 감옥으로 생각하여 들어가려 하지    않으며, 스승을 원수처럼 여겨 보려고 하지 않는다.1)


  그야말로 오늘날의 우리나라 교육현실을 豫見한 것이 아닐까할 정도로 이러한 문제는 지금도 여전하다 못해 더욱 甚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교육현실이 우리나라의 교육제도 全般에서 오는 것이라 하겠지만, 스승과 제자의 관계까지 慘憺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慨嘆하고 覺醒해야 할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溫故知新’과 ‘法古創新’의 격언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준다 하겠다. 溫故와 法古, 즉 옛 聖賢의 말씀을 되새겨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 1) ꡔ王陽明全集ꡕ, 若近世之訓蒙穉者, 日惟督以句讀課仿, 責其檢束, 而不知導之以禮; 求其聰明, 而不知養之以善; 鞭撻繩縛, 若待拘囚. 彼視學舍如囹獄而不肯入, 視師長如寇仇而不欲見. 번역문은 박희병 편역, ꡔ선인들의 공부법ꡕ(창작과비평사, 1998), pp.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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