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열두 방향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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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의 상상력을 엿보면 그의 다채로운 세계에 매혹되는 동시에, 나의 단조로운 사고를 자각하게 된다. 전자가 전적으로 재미의 문제라면 후자는 일종의 학습의 문제다. 어느 작품에서 이 두 문제를 모두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하나라도 제대로 제시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좋다. 이 책에는 두 가지 문제가 모두 들어 있는데, 하나의 작품이 둘을 모두 갖춘 경우는 거의 없어서 그조차도 흥미로웠다. 두 종류의 이야기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르 귄이 무슨 의도를 두었던 것인지까지 생각하거나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이야기 속 의도의 명료함과 흥미의 농밀함이 반비례한다는 인상은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다.

 

“(전략) 그런데 당신(샘레이)은 우리가 당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하지 않소?”

바로 떠날 수 있을까요? 집을 오랫동안 비우고 싶지 않거든요.” (샘레이의 목걸이)-40

 

 책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머나먼 길을 떠난 엔기어의 이야기 샘레이의 목걸이로 시작한다. 르 귄이 만족한 그 자신의 낭만성이 무엇인지 참 잘 보여 주었다. 얻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것이 의외로 가뿐히 손에 들어오는 것도, 그렇게 없던 것을 쥐는 사이에 당연히 내 것이리라 생각했던 무언가가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것도, 무척이나 낭만적이었다. 얻는 만큼 잃어서 낭만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제각각 그렇다는 소리다.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처음에는 내 것이 아니었던 그것을 결국은 얻을 것이다. 하다못해 그 일부라도. 그리고 그렇게 갖는 동안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것이 사라지고야 말 것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그게 어떻게 없어지는지도 몰랐던 것이 사라지는 이치를 그렇게 배운다. 이렇게 될지 알았다면 없는 것을 찾지 않고, 있는 것을 잃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한 번쯤은 생각하겠지만 입 밖에 내지도 깊이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그때는 원하는 것이 있었을 뿐이므로. 누구나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르누아르가 좀이 슨 검은 가운을 입는 동안 키슬크는 자신의 은색 튜닉을 실용적이면서 특징 없는 외투로 가렸다. 페니위더가 생각에 잠겨 목에 벌레 물린 곳을 긁는 동안 보타는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넷은 아침거리를 구하러 집을 나섰다. 연금술사와 성간 고고학자가 프랑스어로 말하며 앞서 가고, 갈리아에서 온 노예와 인디애나에서 온 교수가 라틴어로 말하며 손을 잡고 뒤따랐다. 좁은 길은 붐볐고,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네 사람 위로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사각탑 두 개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옆으로는 센 강이 부드럽게 출렁였다. 바야흐로 파리는 4월이었고, 강둑에는 밤꽃이 피어 있었다. (파리의 4)-77

 

 「파리의 4이 참 아늑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일 뿐인데도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만큼은 그저 평온했다. 시간을 건너뛰고서도 어떤 소란도 없이 그때 겪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경우만을 잘도 이어서 붙여 놓았다. 르 귄은 이 네 사람이 이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이대로 그렇게 파리의 골목골목을 거닐며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그려냈다. 대단한 갈등이나 사건, 무엇보다도 사유가 없어서 이런 마음을 끌어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렇게나 소소한 서사로 이렇게 따사로운 정취를 이루었다는 것이야말로 탁월하다. 봄날의 교토를 거닐 때 감도는 감미로운 몽상이 무엇이었는지 여기서 배운 듯하다.

 

극한 지방 탐사대원들은 팀 동료가 지성인이고 착실히 훈련을 받았으며 정서가 불안해도 개인적으로 공감대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랐다. 대원들은 밀폐된 선실과 역겨운 장소에서 함께 일해야 했으며, 따라서 각자의 망상, 절망, 편집증, 혐오감, 강박 관념 따위가 대원들 간의 관계를 해칠 정도로 크지는 않을 거라고 기대하는 게 당연했다. 늘 그럴 수는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대부분의 시간 동안에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315

 

 인간을 자유롭게 우주로 보낼 수 있는 시대가 되어도 인간관계는 여전히 복잡하고 미묘하며 왜곡될 수밖에 없겠지만, 그렇게나 발전한 시대인 까닭에 오히려 인간들이 서로를 더욱 못 견디게 될 수도 있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에서 르 귄은 그런 상황을 보여 준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뿐인 배경 속에서, 여전히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 과학과 기술이 그렇게나 나아졌는데도 인간이 여전히 상대의 한계를 용인하기 위해 저렇게나 애를 써야 할 정도라면 지금보다 더 인간관계에 시달린다고 생각해도 틀리지는 않을 듯하다. 여러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대를 견디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를 견디지 못하는 방식도 견디지 못해서 결국 자신을 망가뜨릴 때까지 서로에 대한 감정을 키우고야 만다. 이방인인 그들을 공격하는 숲 속의 나무들은 그들 사이에서 자란 무수한 혐오감과 비슷해 보인다.


앞쪽에, 그곳에, 저녁 녘의 넓은 들판에서 마른 하얀 꽃들이 나부끼며 속삭였다. 72년이 지나도록, 라이아는 저 풀들의 이름을 배울 짬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혁명 전날)-498 


 이 책에 담긴 모든 이야기를 되새길 수는 없다. 그저 내 상상력의 범위를 넓혀 준 것만으로 충분했던 이야기도 있고,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 유쾌했던 이야기도 있으므로 그 이상 말을 더하면 번거롭다. 다만 어느새 왕년의 혁명가가 되어 버린 혁명 전날속 라이아가 그랬듯이 모르는 이름의 존재만큼은 기억해 두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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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열두 방향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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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대의 전후 관계에 엄격한 사람은 아니다(연대의 전후 관계에 엄격하기란 불가능하다.어떤 글은 쓰는 데 1년이 걸리기도 하고,그 이후 2, 3년이 지나도록 발표되지 않을 수 있으며,퇴고를 거칠 수도 있다.그런 경우 글을 완성한 날을 언제로 보아야 하겠는가).- P9

이 이야기(‘샘레이의 목걸이‘)로부터 단편집의 마지막인 1972년에 쓴 단편까지, 내 글의 문체는 공공연한 낭만주의에서 벗어나 느리지만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그것은 발전이었다. 나는 여전히 낭만주의자이고 그 점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며 또한 내가 낭만주의자인 게 기쁘다. 하지만 ‘셈레이의 목걸이‘의 솔직 담백함과 단순함은 점차 단단하고 강력하고 복잡한 것으로 변하게 되었다. (샘레이의 목걸이)- P14

그리고 정말로 딸이 태어났다. 두르할과 샘레이는 딸의 이름을 할드레라 지었고, 자그마한 갈색 머리통 위의 솜털은 길게 자라나 영주 가문의 유산인 순수한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아이가 가지게 될 유일한 황금이 될 터였다...... (샘레이의 목걸이)- P20

˝키리옌에는 여자아이들이나 황금 혹은 이야기의 결말 따위가 깃들 여지가 더 이상 없구나. 이곳의 이야기는 끝났어. 이곳은 망해 텅 빈 성일 뿐이야. 레이넨의 아들은 모두 죽었고, 보물도 모두 사라졌다. 그러니 네 갈 길로 가거라, 딸아.˝ (셈레이의 목걸이) - P26

˝(전략) 그런데 당신(샘레이)은 우리가 당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하지 않소?˝
˝바로 떠날 수 있을까요? 집을 오랫동안 비우고 싶지 않거든요.˝ (샘레이의 목걸이)- P40

로캐넌이 손님들을 향해 걸어가지 여인(샘레이)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을 돌려 로캐넌을 바라보았고, 로캐넌은 깊숙이 허리를 굽혀 절한 다음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고개를 숙인 뒤 눈을 감았다. 이것은 로캐넌이 ‘만능 이종문화 경배법‘이라 부르는 몸짓이었으며, 로캐넌은 꽤 우아한 자세로 이 인사법을 실행에 옮겼다. 로캐넌이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미인은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샘레이의 목걸이)- P44

로캐넌은 손바닥 가득히 푸른 불꽃과 황금을 담고 곧장 아름다운 외계 여인(샘레이)에게로 돌아섰다. 여인은 목걸이를 받기 위해 손을 내미는 대신 고개를 숙였고 로캐넌은 목걸이를 들어 여인의 머리털 너머로 미끄러뜨렸다. 여인의 황갈색 목에 다리 잡은 목걸이는 불타는 도화선 같았다. 여인이 너무나 강한 자부심과 기쁨과 고마움을 얼굴에 나타내며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었기에 로캐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서 있었고, 자그마한 관장은 자기 나라 말로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라고 허둥지둥 중얼거렸다. (샘레이의 목걸이)- P47

둘(르누아르와 페니위더)은 생애 처음으로 행복했다. 사실, 너무나 행복해서 그전까지 앎에 대한 욕망에 억눌려 있던 다른 종류의 욕망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파리의 4월)- P70

여자(키슬크)는 리타 헤이워스 같은 매력을, 아니 그보다 좀 더 고상한 매력을 풍겼다. 리타 헤이워스와 모나리자를 합해놓은 듯하다고나 할까. (파리의 4월)- P74

˝견우성에서 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7천 년 정도 미래에서요.˝ 여자(키슬크)는 더욱 신비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여자의 프랑스어 억양은 미식축구부 장학생으로 들어온 신입생보다도 더 형편없었다. ˝저는 고고학자입니다. 파리 제3지역의 폐허를 발굴하는 중이었지요. 말을 이렇게 형편없이 해서 죄송합니다. 말을 배울 만한 소재가 비석밖에 없었거든요.˝ (파리의 4월)- P74

르누아르가 좀이 슨 검은 가운을 입는 동안 키슬크는 자신의 은색 튜닉을 실용적이면서 특징 없는 외투로 가렸다. 페니위더가 생각에 잠겨 목에 벌레 물린 곳을 긁는 동안 보타는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넷은 아침거리를 구하러 집을 나섰다. 연금술사와 성간 고고학자가 프랑스어로 말하며 앞서 가고, 갈리아에서 온 노예와 인디애나에서 온 교수가 라틴어로 말하며 손을 잡고 뒤따랐다. 좁은 길은 붐볐고,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네 사람 위로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사각탑 두 개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옆으로는 센 강이 부드럽게 출렁였다. 바야흐로 파리는 4월이었고, 강둑에는 밤꽃이 피어 있었다. (파리의 4월)- P77

나는 복잡한 기술에 대해서는 다소 지루해하지만 생물학, 심리학, 천문학과 물리학의 사색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무척 좋아한다. 내 작품에는 과학자가 자주 등장하는데, 대부분 외롭고 모험심 강하고 고립되어 있으며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명인들)- P80

˝(전략) 밤이든 낮이든 가리지 말고 언제든지 오게나. 그리고 가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가고. 배반당해야 한다면 당하는 수밖에. 우리는 서로를 믿어야 한다네. 신비로움은 사람에 속해 있는 게 아니야. 우리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게 아니라 기술을 연마할 뿐이라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나?˝ (명인들)- P96

미드는 이단으로 고발되었다. 사람들은 미드가 벌판에서 어떤 도구로 태양을 가리키는 장면을 목격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거리를 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 사람은 이 세상과 신 사이의 거리를 재려고 시도했다. (명인들)- P100

중년의 외로운 시기인 최근, 페스틴은 힘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과 동시에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는 부담에 시달렸다. (해제의 주문)- P132

아, 개울 속의 물고기가 되었으면. 아니 그보다 더 상류, 샘이 솟아나는 근처, 숲 속의 나무 그늘 아래, 오리나무 뿌리 아래 괴어 깨끗한 갈색 물에 숨어 사는 물고기가 되었으면...... (해제의 주문)- P137

˝왜냐하면 이름은 사물 그 자체니까요. 그리고 (‘통로‘를 통과하면 갖게 되는) 참이름은 사물의 참된 본질이에요.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사물을 통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맞게 말했나요, 선생님?˝ (이름의 법칙)- P151

언덕아래 씨는 잽싸게 주문을 외워 안쪽 문을 잠갔지만 주문을 외우다 한두 근데 실수를 했나봅니다. 동굴의 텅 빈 대기실이 곧 달걀 프라이 냄새와 지글지글 잘 구워진 간 냄새로 가득 찼으니까요. (이름의 법칙)- P151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실을 늙은 선정 포게노에게 전해주자 선장은 보이지 않는 눈 위의 하얀 눈썹을 곤두세우고 말했습니다. “바깥 해역을 혼자 여행하는 사람은 딱 한 부류야. 마법사나 요술쟁이 아니면 현자지......” (이름의 법칙)- P152

젊은이는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봇짐장수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포게노 선장에게 젊은이가 떡갈나무 지팡이를 지니고 있다는 말을 전해주자, 선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답니다. “한 마을에 마법사가 둘이란 말인가. 안 좋아!” 그러고 나서 늙은 선장은 늙은 잉어처럼 입을 꼭 다물어버렸답니다. (이름의 법칙)- P152

검은수염은 굴드 할머니에게 물었어요. “마법사가 없는 섬은 처음 봤습니다. 이가 아프거나 소가 마르거나 하면 어떻게 하죠?” (이름의 법칙)- P154

돌연 아르가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쳤다. 어린 시절부터 항상 누군가 자신을 위해 대답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다웠다. “왜 우리가 동쪽으로 가는 거지?” (겨울의 왕)- P201

도시 전역에서 아이들은 포틀랜드의 초록빛 공원들과 긴 거리를 뛰어다니며 어린아이답게 놀고 있었다. 혼자 노는 아이들은 아주 가끔씩만 있을 뿐이었다. 뭔가 더 큰 보답을 바라며 그렇게 혼자 노는 아이들은 타고난 도박사다. (멋진 여행)- P216

어떤 사람들, 즉 타고난 도박꾼은 언제나 화산 옆에 살기를 원한다. (멋진 여행)- P218

그리고 그게 무서운 일이다. 낯선 사람이 낯설다는 것. (아홉 생명)- P228

˝그렇지. 하지만 아일랜드인은 더 이상 없어. 내가 마지막으로 듣기로는 섬 전체에 몇천 명밖에 없었어. 그리고 자네도 알겠지만, 산아제한을 하지 않아 음식이 바닥났지. 그리고 3차 기근이 찾아왔을 때 성직자만 빼고 아일랜드인은 모두 죽었어. 그리고 성직자는 모두 독신주의야. 모두가 아니라 대부분이라고 해야겠군.˝ (아홉 생명)- P242.243

동정심이란 받을 필요가 있을 때 주는 것이다. (아홉 생명)- P243

˝지금까지 목은 늘 어둠 속에서 잘려왔어. (후략)˝ (아홉 생명)- P258

세상에는 심연이, 갈라진 틈이, 맨 마지막으로 걸어야 할 걸음이 존재한다. (물건들) - P275

˝(전략) 남편은 봄이 되면 어린 양고기가 세상에서 최고 맛있다고 하다가 가을이 되면 구운 돼지고기가 세상에서 최고 맛있다고 했죠. (후략)˝ (물건들)- P279

극한 지방 탐사대원들은 팀 동료가 지성인이고 착실히 훈련을 받았으며 정서가 불안해도 개인적으로 공감대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랐다. 대원들은 밀폐된 선실과 역겨운 장소에서 함께 일해야 했으며, 따라서 각자의 망상, 절망, 편집증, 혐오감, 강박 관념 따위가 대원들 간의 관계를 해칠 정도로 크지는 않을 거라고 기대하는 게 당연했다. 늘 그럴 수는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대부분의 시간 동안에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P315

˝(전략) 숲이라는 단어에는 필연적으로 이질적 세계라는 은유가 함축되어 있으니까.˝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P343

˝숲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는 산불 같은 존재일지도 몰라.˝ 매넌이 말했다. ˝허리케인이나, 위험한 존재로 보일 거야. 식물이 볼 때,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위험한 존재야. 뿌리가 없는 건 이방인이고 두려운 존재야. (후략)˝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P349

˝옛날에는 대단한 광산이었어.˝ 광부들은 자부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땅속의 별들)- P384

천체 물리학 전공으로 우주 프로그램에 참여한 휴즈는 아주 성적이 좋았다. 사실대로 말하면, 월등하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때문에 휴즈의 군대 상관 상당수는 골머리를 앓았다. 군대에서 높은 지능이란 불안정과 불복종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시야)- P411

도스토옙스키는 위대한 예술가이자 급진적 인물이었지만, 도스토옙스키 초기의 사회 급진론은 거꾸로 그를 격렬한 반동으로 만들었다. 반대로 아주 유순하고 천진난만할 정도로 세련되어 보이는(자신의 글을 읽는 모든 독자가 자신처럼 우아하리라 생각하고 ‘우리‘라는 단어를 쓴 것을 보라!) 미국인 (윌리엄) 제임스는 진정으로 급진적 사상가였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P452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모두 아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직접 와서 본 사람도 있고, 단지 그런 아이가 있다는 것만 아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아이가 그곳에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이유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들의 행복, 이 도시의 아름다움,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정, 아이들의 건강, 학자들의 지혜로움, 장인의 기술, 그리고 심지어는 풍성한 수확과 온화한 날씨조차도 전적으로 그 아이의 지독하리만치 비참한 처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P463.464

나는 그곳을 제대로 묘사할 수가 없다. 그런 곳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 있는 듯하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P467

원칙을 만드는 것과 그 안에서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혁명 전날)- P476

편애, 엘리트 의식, 지도자에 대한 숭배. 이런 것들은 슬며시 돌아왔고 도처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라이아는 이것들이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한 세대 안에 뿌리 뽑히는 것을 보고 싶어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로지 시간만이 거대한 변화들을 만들어낸다. 어쨌거나 이 방은 크고, 멋지고, 양지바른 곳이었고, 세계 혁명을 시작한, 침 흘리는 늙은 여자에게 꼭 맞았다. (혁명 전날)- P478.479

나이와 질환은 인간을 이원론자로 만들고 현실 도피주의자로 만든다. (혁명 전날)- P481

세이세로의 조선소를 파괴한 라이아가, 7천 군중 앞에서 아노일테 수상의 면전에 저주를 퍼부으며 당신은 조금만 돈벌이가 됐어도 자기 불알을 뗴어내 청동칠을 한 뒤 기념품으로 팔았을 거라 목소리를 높이던 라이아가, 새된 소리를 지르고 불경한 말을 해댔으며 경찰에게 발길질을 하고 성직자에게 침을 뱉었으며 공중 앞에서 ˝여기 독립 민족 국가 아이오가 세워지다 기타 등등˝ 따위 개소리가 적혀 있던 캐피톨 광장의 커다란 놋쇠판에 공공연히 오줌을 갈겨댄 라이아가 이제는 모든 이의 할머니, 사랑받는 노파, 친근한 낡은 기념물, 숭배받는 자궁이 되다니. (혁명 전날)- P489

앞쪽에, 그곳에, 저녁 녘의 넓은 들판에서 마른 하얀 꽃들이 나부끼며 속삭였다. 72년이 지나도록, 라이아는 저 풀들의 이름을 배울 짬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혁명 전날)- P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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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 도대체 이야기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듀나 지음 / 우리학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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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듀나가 생각하는 장르의 원칙이란 무엇보다도 그 장르의 오래된 팬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것인 듯하다. 이 책은 장르의 범위, 개념, 문법부터 그에 반영된 사회의 통념까지 끊임없이 바뀌었고 바뀌고 있음을 설명하면서, 그런 까닭에 이 세계에서 기득권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팬들은 장르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훼방을 놓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시종일관 신랄하게 지적한다. 듀나가 생각하는 장르의 특성과 각각에 부합하는 문법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듣고 싶어서 이 책을 집어든 독자가 있다면, 퍽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는 하나 이상의 장르의 애호가라고 자부하는 사람일 테니까. 보다시피 이 책은 이른바오래된 장르 팬들이 개인적 취향과 추억을 내세워서 장르와 사회의 변화를 외면하며 장르의 변화와 성장을 지체시키는 원인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오리지널 스타트렉 시리즈는 당시의 기준에 따르면 엄청나게 진보적이었습니다. 흑인 여성과 아시아인과 러시아인 남성, 외계인과 지구인 혼혈 남성이 당연한 고정 멤버였고 미국 텔레비전 역사상 최초로 흑인과 백인의 키스 장면을 내보냈던 프로그램이었죠. 지금 와서 보면 여러모로 낡아 보이지만 진보를 향한 방향성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설정 놀이를 하는 팬들은 시리즈의 방향성 대신 고정된 설정에 집착하게 됩니다. 함장이 여성이고 함교에 백인 남자가 한 명밖에 없었던 스타트렉: 보이저 시리즈에 대한 반발이 얼마나 컸었는지. 그때를 생각하면 좀 이가 갈립니다. -126~127

 

 작가로서 골수팬의 애정이 지니는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다. 특히 오랜 독자들의 열성이 세계관과 저변을 확대시키는 강한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장르 문학에서 그런 팬들의 한계 효용을 인식하기는 쉬워도 적시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장르 문학의 경계와 저변이 확대되는 이 시기에 작가 중 누군가는 해야만 할 이야기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꾸준히 한두 권 씩 꾸준히 나오고 있는 장르 문학 소개서들 사이에서 이 책이, 다름 아닌 듀나의 책으로서 갖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렇듯 내부를 향한 (자각 혹은 자정에의) 충고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당연히 장르의 탐험에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비슷한 자극을 반복하고 싶어 하며, 변화를 거부하니까요. 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해 가능하다고 경멸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죠. -99~100

 

 바로 그래서 듀나, 혹은 이 책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 보아야 자기 손해다. 설령 장르 문학에 닥친 페미니즘의, 다문화의, 다인종의, 비백인의, 탈경계의 흐름이 부당하고 역차별적이라 하더라도 이제 이 추세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고 충실한 팬들의 분노와 저항을 가볍게 무시하고 그들을 계몽하려 노력하는 대신, 앞으로 장르 문학이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서 어떻게 변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도록 돕는다. 한 사람의 낙오자라도 정성스럽게 교화시켜서 함께 미래로 향하는 역할은 자기 몫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강조한 덕분에, 읽는 내내 즐거웠다. 어쩌면 사회나 문화의 변화란 무엇인가가 크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변화조차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집착하지 않는 데서 비롯될지도 모른다. 장르 문학도 그렇지 않을까.

 

허구의 세계가 젊음을 유지하고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세계관과 아이디어를 가진 세대를 받아들이고 늙은이들은 뒤로 빠져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변화한 세계는 아무리 훌륭해도 분명 근본주의자 팬덤의 맘에 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을 굳이 신경 써주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154

 

 단순히 장르 문학의 범주를 소개하고 현재의 문법과 미래의 가능성을 논의하는 책이었다면, 과거와 현재의 자산인 팬덤과 그들이 신봉하는 장르 세계의 기존 규칙들은 소중하고 섬세하게 서술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공적이며 정중한 이론평론서들이 택하는 방식이며, 물론 타당하다. 보편적으로 생각한다면 앞으로의 이야기는 이제까지의 그것과 떼어 낼 수 없으니까. 하지만 미래가 전적으로 현재와 과거에 구속될 수는 없으며, 그렇지도 않다. 다가오지 않은 시간인 까닭에 예측할 수 없는 사고(事故)의 지분은 미미하지 않다. 하물며 미래에 닥칠 이야기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거기서 지분의 크기를 걱정해야 하는 쪽은 과거와 현재에 속한 존재들일 것이다. 이 책은 그 점을 사뭇 편파적으로 저격했다. 그동안 즐기며 아껴온 이야기에서 벗어나야만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은 냉소적인 동시에 낙관적이다.

 

SF나 판타지는 우리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유를 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야기꾼이 그걸 원한다고 해도 독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해요.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는 인간이거나 인간처럼 행동하는 존재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주 어디를 무대로 삼아도 그런 존재가 주인공이어야 해요. 저에겐 좀 짜증 나는 제한입니다. 이 세계에서 달아나려고 이런 이야기를 만드는 건데 아무리 멀리 가도 인간성이라는 목줄에 잡혀 있는 거죠. -53~54

 

 앞으로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이 책이 신경 쓰는 대상은 과거에 집착하며 발목 잡는 낡은 팬들이 아니라, 인간을 독자로 삼는 이상에는 벗어나기 어려운 인간성이라는 속성 자체이다. 이 조차도 자신들의 관심과 애정과 투자가 갖는 힘을 과신하는 애호가들에 대한 냉소로 여겨지는 면이 있지만, 그보다는 누구나 필연적으로 집착하고야 마는 인간성의 개념이 결국은 바뀔지, 어떻게 바뀔지의 문제가 장르 문학의 미래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짚어 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낡은 팬과 새로운 팬의 요구를 적당히 중재하는 차원이 아닌, 인간성에 대한 관점을 넓히는 데에 있다는 사실이 일종의 극적 설득력을 발휘한 셈이다. 버리고 떠나야 할 대상과 떠나서 쫓아갈 대상을 집요하고 명쾌하게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일종의 장르적 매력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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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 도대체 이야기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듀나 지음 / 우리학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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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저는 오셀로가 그렇게 쉽게 질투의 희생자가 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결코 데스데모나 앞에서 허풍을 떨며 만들어낸 이야기 속 주인공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무리 훌륭한 군인이라도 이야기 속 주인공과는 경쟁이 안 되지요.- P.10

생물학적인 존재만으로서 인간은 그렇게까지 재미있는 동물이 아닙니다.- P.11

하지만 여전히 저에게 허구의 이야기란 바다와 육지에서의 감동적인 사건들에 대한 것입니다. 전 이런 이야기가 제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 저를 데려다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야기꾼으로서 전 독자들에게 역시 같은 일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P.12.13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어떤가요. 범죄, 음모, 모험, 섹스, 로맨스, 거의 슈퍼히어로에 가까운 주인공을 갖춘 신나는 대중소설입니다. - P.20

1920년대만 해도 추리소설은 엄격한 형식을 통해 정의될 수 있는 장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린 범죄를 다룬 거의 모든 소설을 추리물이라고 부르죠.- P.24

장르가 만들어지는 데엔 이성적인 이유 따위는 없습니다. 힘을 얻고 그 힘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냥 존재하고 그 힘이 떨어지면 죽는 것입니다.- P.25

다시 말해 자신의 작업에서 문학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 문학성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들이 문학의 영토를 넓혀온 것입니다. 이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탐험가가 되려면 일단 영토 바깥으로 나가야 하잖아요.- P.34.35

예를 들어 특정 시대의 평범한 목소리를 재생하려면 위대한 책들만 읽는 건 문제가 됩니다. 그들은 당시의 평범성을 극복했기 때문에 지금도 읽히는 것이거든요. 위대한 빅토리아조 소설 속에 나오는 사람들 상당수는 당시의 평범한 빅토리아조 영국인들과 다른 식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빅토리아조 여성의 표준으로 제인 에어를 끌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죠. 위대한 책들만 읽다 보면 우린 과거를 왜곡하게 됩니다.- P.42

대부분 옛날 연극들은 문학적, 연극적 가치 때문에 살아남습니다. 하지만 오페라는 사정이 다르죠. 음악만 훌륭하다면 당시엔 인기였지만 곧 잊힐 운명이었던 이야기도 살아남으니까요. 내용만 따진다면 ‘나비 부인’이나 ‘토스카’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공연되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잖아요. 오페라 애호가는 마땅히 잊혀야 할 한심한 이야기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입니다.- P.45

SF나 판타지는 우리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유를 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야기꾼이 그걸 원한다고 해도 독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해요.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는 인간이거나 인간처럼 행동하는 존재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주 어디를 무대로 삼아도 그런 존재가 주인공이어야 해요. 저에겐 좀 짜증 나는 제한입니다. 이 세계에서 달아나려고 이런 이야기를 만드는 건데 아무리 멀리 가도 인간성이라는 목줄에 잡혀 있는 거죠.- P.53.54

사람들은 예술이란 개념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어요. 예술이 되면 여분의 가치를 더 얻게 된다고 기계적으로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그럴 리가요. 무언가가 예술이라고 불린다면 그건 예술이라는 상자 안에 들어 있다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사람들은 예술이란 개념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어요. 예술이 되면 여분의 가치를 더 얻게 된다고 기계적으로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그럴 리가요. 무언가가 예술이라고 불린다면 그건 예술이라는 상자 안에 들어 있다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P.58.59

여전히 훌륭한 작품들은 만들어질 것이고 운이 좋다면 그들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감상되고 기억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영역에서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높아질 거예요. 고정된 이야기들을 얌전히 감상하는 사람들보다 살아 숨쉬는 이야기들이 꿈틀거리고 비명을 지르고 투쟁하다가 소멸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해 즐기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런 세계가 된다면 어디에나 널려 있는 창작자보다 이야기 규칙, 그러니까 우주의 창조자들이 더 중요하게 여겨질 날이 올 수도 있겠죠.- P.61

퍼즐 미스터리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요. 얄팍한 인물들을 말로 삼아 만든 복잡한 밀실과 알리바이 트릭의 구조물도 아주 잘 만들었을 때엔 거의 바흐의 푸가처럼 정교한 형식미를 갖출 수 있는 거죠. 인간적 매력이 떨어질 수는 있지만 그건 바흐의 음악도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P.69

추리, SF, 호러, 판타지는 성격상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이웃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겹쳐져 있습니다 특히 SF의 경우 이들 중 하나라도 떼어낸다면 장르 자체가 붕괴됩니다.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나 세계를 상상력으로 창조하고(판타지), 미지의 대상에 대한 공포를 그리고(호러) 그 대상을 논리적으로 규명하는(추리) 장르이니까요.- P.75

예를 들어 이디스 워튼의 ‘기쁨의 집’은 제가 정말로 무서워하는 소설이고, 주인공 릴리의 몰락을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한데, 어느 누구도 이 책을 호러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자생 능력이 없는 상류사회 여성의 몰락은 아무리 가차 없고 잔인해도 호러가 아니라 멜로드라마이기 때문이죠.- P.79.80

현실 세계에서 공포는 생존을 위한 장치입니다. 우린 공포를 통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 벗어납니다. 당연히 이는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하지만 허구를 통해 공포의 자극을 미학적으로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공포의 맛은 보다 미묘합니다.
이러다 보니 호러물의 공포는 매운맛이 가미된 요리 비슷하게 소비됩니다. 두 개의 방향이 존재하죠. 하나는 매운맛, 그러니까 공포의 강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풍미, 그러니까 공포의 맛이죠. 이 두 개를 곱하면 호러물의 가치가 나옵니다.- P.81

호러는 지금까지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해왔고 그 결과물은 결코 공포 자극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나에게 무섭지 않다’는 게 결과물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무시해야 할 이유가 될까요? 어림없는 소리죠.- P.83

어느 순간부터 호러는 여자들이 겪는 공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호소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P.90

다시 말해 호러 장르의 잠재적인 위험성을 염려하는 건 오히려 장르의 발전에 도움이 됩니다.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새로운 이야기와 의미를 찾는 건 장르의 안전성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P.90.91

그들은 당연히 장르의 탐험에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비슷한 자극을 반복하고 싶어 하며, 변화를 거부하니까요. 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해 가능하다고 경멸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죠.- P.99.100

같은 작품이라고 해도 장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오손) 웰스와 (쥘) 베른은 (휴고) 건즈백 따위는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아름답고 압도적인 SF를 썼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들의 소설에 열광했고 몇 명은 모방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그 작품들의 영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건 건즈백이 ˝이것이 SF다!˝라고 선언한 이후였습니다.- P.104

지금도 수많은 물리학자가 과거로 가는 시간 여행을 연구하고 있지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과제로 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P.105

‘과학적 상상력과 문학의 결합’으로서 SF는 현실 세계의 사회적 변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놀이터로서의 장르는 쉽게 보수화됩니다. 이야기가 쌓이면서 서부극의 우주처럼 세계가 고정되기 때문이죠.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그 세계는 백인 남자들이 우주를 질주하고 날아다니며 외계인과 전쟁을 벌이는 곳이었습니다.- P.125

오리지널 ‘스타트렉’ 시리즈는 당시의 기준에 따르면 엄청나게 진보적이었습니다. 흑인 여성과 아시아인과 러시아인 남성, 외계인과 지구인 혼혈 남성이 당연한 고정 멤버였고 미국 텔레비전 역사상 최초로 흑인과 백인의 키스 장면을 내보냈던 프로그램이었죠. 지금 와서 보면 여러모로 낡아 보이지만 진보를 향한 방향성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설정 놀이를 하는 팬들은 시리즈의 방향성 대신 고정된 설정에 집착하게 됩니다. 함장이 여성이고 함교에 백인 남자가 한 명밖에 없었던 ‘스타트렉: 보이저’ 시리즈에 대한 반발이 얼마나 컸었는지. 그때를 생각하면 좀 이가 갈립니다. - P.126.127

하지만 창작자는 시대에 맞추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게 매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죠. 아무리 자칭 골수팬이 이를 갈아도 소용없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희생자들입니다. 모두를 얼러대며 챙길 수는 없어요. 가망 없으면 버리고 가야지.- P.127

SF와 판타지는 일반 소설보다 넓은 세상을 커버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이 세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백인 남자들의 비중은 줄어들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 지구에 백인 남성들은 몇 퍼센트나 되나요? 10퍼센트는 되려나요? 하나 더. 지금까지 백인 남자들이 이 우주를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장르에는 엄청난 미개척지나 남아 있습니다. 백인 남자가 아닌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쓰는 게 더 재미있는 시대가 된 것이죠.- P.135.136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라는 어드밴티지를 빼앗기면 어떨 수 없이 더 재능이 있고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작가들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는 작가들, 백인 남자들이 둘레에 쌓아놓은 울타리 바깥의 세상은 이해할 능력이 없는 독자들. 이들의 공격이 유치하고 추잡해 보이는 것도 다 그 삼류성이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역습은 쉽게 죽을 거 같지 않아요. 인간은 쉽게 설득되는 종이 아니니까요.- P.136

허구의 세계가 젊음을 유지하고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세계관과 아이디어를 가진 세대를 받아들이고 늙은이들은 뒤로 빠져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변화한 세계는 아무리 훌륭해도 분명 근본주의자 팬덤의 맘에 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을 굳이 신경 써주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P.154

하지만 오로지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글을 쓰고,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수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 그냥 자기보다 미개한 사람들 사이에서 신 대접을 받고 싶은 사람들. 여러분은 임진왜란에 뛰어들어 레이저포로 일본군을 무찌르고 신 대접을 받고 싶으신가요? 전 아닙니다만 그런 욕망이 얼마나 흔한지는 알고 있지요.- P.170

독자나 이야기꾼이 추구하는 욕망과 쾌락이 너무 쉽게 제공되면 그건 포르노가 됩니다.- P.171

‘스타트렉’과 ‘스타워즈’의 기계들을 보세요. 다들 오묘하게 낡았습니다.- P.180

운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한 요소예요. 운이 없었다면 인디아나 존스와 제임스 본드는 등장하고 10분 만에 죽었습니다.- P.195

캐릭터의 매력과 캐릭터의 훌륭함은 또 다른 것이고, 훌륭한 이야기가 꼭 훌륭하거나 매력적인 캐릭터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니지요.- P.197

어쩌겠어요. 우리는 우리보다 똑똑한 사람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P.198

책은 독자의 이익과 즐거움을 위해 읽는 것입니다. 죽은 작가들은 살아 있는 사람의 기억에 기생하는 유령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이익까지 신경을 써주어야 할 이유는 티끌만큼도 없지요. 요즘같이 습관처럼 이어져온 가치관들을 하나씩 꺼내 검증해야 마땅한 시대엔 더욱 그렇습니다.- P.205

한때 크리스티와 아시모프로 설명될 수 있었던 추리와 SF 장르의 형태는 20세기 초중엽에만 잠시 존재했던 거품처럼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당시 장르가 점유하고 있던 세계는 지금 훨씬 정리하기 어렵고 혼란스럽고 역동적인 곳이 되었습니다. 이 책이 장르물을 구분하고 설명하고 모범적인 작법을 찾는다는 원래 기획에서 벗어난 것도 그 때문이지요.- P.205.206

전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5중주가 마지막으로 들리는 날이 제가 아는 문명이 끝나는 때라고 생각하는데, 음악도 역시 스토리텔링이고 이야기의 가치가 일시적이라면 그 시기가 의외로 빨리 올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천국을 아름다운 음악이 울리는 곳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천국을 지배하는 것은 침묵뿐일 수도 있지요. 써놓고 보니 좀 ECM레코드의 캐치프레이즈 같군요.- P.207.208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는) ‘제인 에어’의 모방작이지만 샬럿 브론테가 절대로 건드릴 수 없었던 영역으로 용맹하게 돌진하는 작품이기도 하지요.- P.211

제 의견은 책을 쓰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요동치며 변하고 동시에 서너 개의 모순되는 의견을 품기도 하니까요. 저는 이들을 평면화해 완벽하게 아귀가 맞는 책을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결국 거짓말이 될 것이고 여러분은 어차피 이 책에서 필요한 것만 골라 취하지 않겠어요?-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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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대를 잊으면 - 트루먼 커포티 미발표 초기 소설집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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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에 이것저것 주워 모은 구슬이며 과자 포장지, 놀이동산의 입장권 등을 담아둔 알루미늄 상자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우연히 찾아서 다시 열어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아마 이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할 듯하다. 꼭 트루먼 커포티가 작가 시절의 가장 초기였던 10대 때 쓴 작품이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단편의 단편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짧은 분량에 하나의 이야기가 잘 담긴 까닭이다. 어린 시절의 하루하루도 지금 보면 비좁고 어수선하지만, 당시에는 나름대로 넓고 가지런했다. 그래서 그때는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 작품들은 10대 초중반의 어린 커포티가 자신의 삶 속에서 얻은 그 다양한 소재와 사유를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었는지 잘 보여 준다.

 

여자는 싸구려 자명종을 힐끔 보았다. 3시 반, 하루 중 가장 쓸쓸하고 가장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각이었다. 가게는 답답한 곳으로, 등유와 신선한 옥수수 가루, 오래 묵은 사탕 냄새가 풍겼다. 그녀는 다시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8월 오후의 태양이 하늘에 뜨겁게 걸렸다. (밀 스토어)-27

 

 훗날 활짝 꽃피는 대가의 초기작이기에, 그 단서이자 맹아로서의 성격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고 의미가 있지만 그렇다면 이 단편들 자체의 가치는 다소 가려질 듯하다. 이 매끄러운 이야기를 쓴 작가가 당시에 작가로서의 야심이 가득한 10대 소년이었다는 사실에 좀 더 주목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헤어진 남자를 생각하며 한적한 동네의 심심한 오후를 보내던 어느 젊은 여성 점원에게 닥친 한 사건으로 순식간에 긴장을 고조시켰다가 이내 태평하게 해결해 버리는 밀 스토어, 당시의 커포티가 밋밋한 일상을 감내하면서도 날카롭게 연마한 극적 상상력을 드러낸다. 자신의 도벽을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하기보다는 자기도 이걸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다면서 마치 남의 사건인 양 초조해하는 여고생의 이야기 힐다는 자신의 모순을 남다른 매력으로 포장하고 싶어 하는 10대 특유의 욕망이 그럴싸하게 반영되었다.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척하면서.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어째서 음악이 내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지 알았어요. 그건 일종의 대체품이었던 겁니다. 더 고운 것을 대신하는 영광스러운 대체품. 무언가. 무언가......” 그는 그녀를 보았다. “당신 같은.” (서쪽으로 가는 차들)-171

 

 서쪽으로 향하는 차를 함께 타게 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사연을 각각 그려낸 서쪽으로 가는 차들은 파국에 가까운 결말도 그렇거니와, 그 차에 모인 사람들의 상이한 성격과 서사들을 압축적으로 그려내는 수완이 인상적이다. 어쩌면 장거리 버스를 타면서 그 안의 여러 승객을 보며 그들의 삶과 생각을 이리저리 궁리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물론 10대다운 평면성도 드러나지만, 스스로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마치 인식한 듯이 그 안에서 가능한 한 가장 생생한 세계와 인물을 구현해 내려는 집요함이 더 또렷하다. 훗날의 커포티에 비하면야 미숙하더라도, 이 또래의 어떤 작가가 그보다 더 낫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그보다 더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뭇 떨리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저 장면은 그 단적인 예일 것이다. 자신은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다고 허세를 피우느니,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지극히 충실했다는 점에서 그는 이미 트루먼 커포티였다.

 

이제 곧 그의 집 앞에 당도할 것이었다. 바로 저 언덕을 올라 내려가기만 하면, 곧 도착한다. 근사한 작은 집으로, 견고하고 튼튼했다. 그가 살기에 완벽한 곳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그대를 잊으면)-70

 

 이 이야기들 속에는 어쩔 수 없는 애틋함이 있다. 단순히 유년 시절-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성숙하지만-에 쓴 작품이어서도, 이 중 여러 작품의 화자나 배경이 유년기의 아이들이어서도 아니다. 자신은 지금 당장이라도, 언제라도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환상이나 착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마냥 부여잡은 채 현실을 외면하는 소녀, 샐리의 이야기인 세계가 시작되는 곳조차도 조금은 애틋한 구석이 있다. 그 어린 나이에 이미 지속될 수 없는 것들에게 대한 이야기를 너무도 태연하게 풀어낸 까닭이다. 나른한 여름 오후 한때의 소동이든(밀 하우스), 꽤 긴 시간 이어졌던 첫 사랑의 끝이든(내가 그대를 잊으면), 소년이 소문의 탈옥수를 추적하는 한밤의 모험(늪의 공포)이든, 커포티는 어떤 사건이라도,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이 그렇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어린 작가가 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짐작을 넘어서, 그것이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럼에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 나섰기에, 이 쓸쓸함이 고스란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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