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세포로부터 - 우리 안의 우주를 탐험하는 생명과학 오디세이
벤 스탠거 지음, 양병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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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나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 이렇게 당연해지기까지의 과정을 돌아보는 경험은 흥미롭다. 전혀 당연하지 않았던 사실에 마땅한 당연함을 부여하는 과정 자체가 우선 흥미롭거니와 그 과정에서야말로 이 당연한 사실들 사이사이의 여전히 당연하지 않은 지점, 즉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지점이 잘 드러나는 덕분이다.

 

 인체에서 세포라는 존재들의 역할, 그 복잡한 역할들을 인류가 규명해 온 지난한 역사, 무엇보다 인체라는 유기체가 결국 단 하나의 세포에서 발생한다는 사실과 이 사실에서 비롯한 인체와 세포, 생명 현상의 특성, 그 본질이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당연해지기까지의 과정 간의 상호 작용, 이 세 기둥세포의 역할, 세포 연구의 과학사, 하나의 세포로 귀결되는 인체 발생의 원리와 이 원리를 규명한 과학이 서로 주고받은 영향이 이 책을 지탱하고 있다. 안다. 지금 저 앞의 문장이 너무 길다.

 

20세기의 위대한 생물학자 중 하나인 시드니 브레너Sydney Brenner는 발생이 유럽식 계획과 미국식 계획 중 한 가지 방식을 통해 진행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유럽식 계획에서는 계통lineage이 모든 것이므로 세포가 어디에 있는지보다 어디에서 왔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반면 미국식 계획은 보다 평등주의적이어서 세포의 출처sources보다 위치location가 더 중요하다. 브레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럽식 계획에서 세포는 부모가 시키는 대로행동하는 반면 미국식 계획에서는 이웃이 시키는 대로행동한다.

브레너의 은유는 가소성과 그 반대 개념인 전념성commitment의 차이를 드러낸다. 계통에 의해 정체성이 정의되는 세포(유럽식 시스템)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궤적을 위해 다듬어져 있기 때문에 선택지가 제한적이다. 반대로 그러한 제약 없이 태어난 세포(미국식 시스템)의 경우, 선택지가 열려 있어서 경험에 따라 미래 경로가 결정된다. 배아는 가소적 세포와 전념적 세포의 혼합물로, 그 균형이 발생 초기에는 가소성, 나중에는 전념성 쪽으로 기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세포도 나이가 들면서 그 방식이 고정되는 셈이다. -51~52

 

 이렇게 세포에 대한 당연한과학적, 역사적, 인식적 성과를 인상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사실은, 다른 측면에서는 이 책에 상투적인 의미에서 경이로운 사실은 찾기 어렵다는 의미도 띤다. 이런 측면은 저자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가 이미 당연한 요소들을 이토록 집요하게 교차시킨 이유도, 경이롭다고 수식되는 사실들이 그 자체로 충분히 상투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서다. 이 책은 진정한 경이로움은 이미 당연한 것들 사이사이에 오래전부터 깃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런 관점의 상투성이야말로 누구나 기꺼이 경이롭다고 받아들이는 사실에 내재된 상투성보다 지적하기 편할 뿐이다. 발생생물학에 관한 세 개의 기둥으로 지탱되는 이 책은 바로 그런 지적을 감수했다. 이 정도의 전문성을 지닌 저자가 자신의 경력보다도 대중적 필요를 위한 작업에 이 정도의 공을 들였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포의 생물학적 역할, 이 역할을 규명해 온 과학사, 인체 발생이 근본적으로 단 하나의 세포에서 발생한다는 사실과 이 사실을 밝힌 과학의 상호 작용의 세 축은 그 하나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는 주제다. 하지만 이미 그런 책은 많이 나왔고, 또 나올 것이며, 아마 큰 주목을 받는 일은 흔치 않을 것이다. 대중 독자들이야말로 그런 하나의 주제만으로는 세포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지식의 한계를 고려해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는 것이 적절할 때도 있지만 모든 주제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주제를 둘러싼 여러 관점을 수렴시켜야만 비로소 이해를 도울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세포가 그렇다. 하나로써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세포가 결국 단 하나만 되거나 여전히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세포로 나뉘는 현상, 또 그렇게 나뉠 수 있는 원리, 이런 사실 자체를 몰랐을 때 겪는 직관적 어려움을 넘어서 세포와 발생의 본질로 다가가는 과정을 아울러야만 세포가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파악할 수 있다. 현상, 원리, 과정을 각각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지금 세포에 관한 이 주제를 왜 읽어야 하는지 독자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단지 그렇게 쓰는 사람이 편해질 뿐이다. 반면에 이 책은 세포의 생물학적 역할과 그 역할을 규명한 생물학자, 과학사를 교차시켜서 서로의 의의를 직관적으로 명료하게 표현해 냈다.

 

(한스) 슈페만Hans Spemann은 배순세포가 가진 힘을 포착하기 위해 이 작은 조직에 형성체onganizer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였다. 유도현상이 발생학의 핵심 개념으로 굳어지면서 그는 1935년 노벨상을 수상했지만, 결정적인 실험을 수행했던 제자 (힐데) 만골트Hilde Mangold는 노벨상 수상에 참여하지 못했고 자신의 발견이 과학계에 미치는 영향도 보지 못했다. 19249, 부엌의 휘발유 히터가 폭발하면서 만골트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의 논문이 발표된 직후였다. -51

한편 제임스 틸James Till(어니스트) 매컬러Ernest McCulloch와 완전히 다른 경로로 OCI(온타리오 암 연구소)에 들어왔다. 틸은 매컬러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으며, 새벽 5시부터 밤 9시까지 일해야 했던 서스캐처원의 농장에서 자란 덕에 강인하고 집중력이 강했다. 대학 시절 뛰어난 분석력으로 교수들의 관심을 모았던 그는 졸업 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예일 대학교의 생물물리학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박사를 마친 뒤에는 미국에서 얼마든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지만 그의 뿌리는 북부에 있었으니, 해럴드 존스Harold Johns로서는 어렵지 않게 틸을 캐나다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매컬러과 함께 줄기세포의 비밀을 풀어나가며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동안에도, 제임스 틸은 매년 가을이면 어김없이 고향으로 돌아가 농작물 수확을 도왔다. -246

 

 가치 판단이나 취향의 영역과는 거리가 가장 멀다고 할 수 있는 분야인 까닭에, 대중 과학서는 그 책을 읽기보다 그 책을 말하기가 어렵다. 이해했다거나 동의했다는 것 외에 다른 표현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다만 언급 가능한 여러 사례 중 특정한 사례를 제시했을 때, 저자의 그 선택에 대한 인상을 말하는 것은 여전히 의미는 없거나 매우 작을지라도, 최소한 가능은 하다. 하나의 세포에서 인체라는 유기체가 발생, 기능하는 원리를 탐구해 온, 그리고 어디서 어떻게든 서로 관계를 맺는 여러 과학자의 삶 속에서 그들의 연구와 밀접한 개인적 배경을 이 책은 적확하게 짚어준다. 이 책의 굵은 세 기둥에 비하면 전체 구조의 일부에 새겨진 무늬에 가깝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발생생물학이라는 전체 구조에 엄연히 존재하는 개별성과 우연성을 상기시키는 사례들이므로 설득력이 있다. “슈페만과 만골트는 세포 간 대화의 기초만 상상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 보편적인 대화가 신호전달 경로초기 배아의 형태와 패턴을 조절하는 일련의 진화적으로 보존된 분자들‘(5장 참조)에 의해 매개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206)거나 틸과 매컬러와 베커는 줄기세포를 분리할 방법을 찾지 못했고, 이는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가 이 분야의 발목을 잡지는 않았다.”(263)는 현재의 발생생물학이 학문적 필연성라는 구조와 개인적 우연성의 간섭 속에서 형성됐음을 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 기초연구에 대한 대부분의 자금은 국립보건원에서 제공되는데, ‘모듈형 R01 보조금modular R01 grant’이라는 기초 자금 지원의 수준은 1999년 이후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이는 발견의 기회가 그 어느 때보다 큰 시기에 텅빈 지갑을 손에 들고 있는 꼴이다. 부족분 중 일부는 자선 활동으로 채워지고, 제약업계는 소규모로나마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자금 격차를 메우기에 충분치 않아 기초연구 수행 역량이 점점 감소하는 추세다. 세상에 나온 기본적인 발견의 혜택은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행해지지 않은 발견이 사회에 미치는 비용은 측정하기가 훨씬 더 어려운 법이다. -385

 

 중견 발생생물학자인 저자가 단발적인 대중 강연의 수준을 넘어서, 일반 대중을 위해 자신의 전공 분야에 대해 이 정도로 공을 들여 저술한 핵심적인 이유는 책의 말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밀도, 지향의 영미권 대중 과학서에서 낯익은 구성이기도 하다. 기초 과학 연구에 대한 공적 지원의 필요성을 시민이자 납세자인 대중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우선적으로는 지원 확대의 여론을 환기시키는 목적이 크겠지만, 기존의 공적 지원이 축적한 성과를 지원의 주체에게 구체적으로 알리는 의미도 무시할 수 없다. 2023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이자 헝가리 출신 미국 이민자인 커리코 커털린이 미국에 자리를 잡은 후, 미국 국립보건원의 자금 지원에서 번번이 탈락했다는 일화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났듯이, 지원 규모의 축소는 물론이고 기준 역시 더욱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고 있다. 따라서 보다 본질적인 의미의 지원 확대를 사회적으로 호소하는 이런 저술은 소명 의식이나 사회 환원보다도 현실적인 절박함에 훨씬 가까울 것이다. 당장의 효과가 크지는 않을지라도, 전문가다운 경험, 관점, 고민을 전공 밖의 대중에게 전하는 데서 시작하는 정합성이야말로 기초과학, 그중에서도 발생생물학 그것도 세포가 주제인 이 책에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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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말 잘 듣는 개로만 받아들여져도 곤란하다. 개를 기르는 사람은 말을 듣지 않는 개를 길들였을 때 더 좋아하니까. (위래, 마젠타 C. 세레스의 사랑과 혁명) - P24

이 드넓은 우주에서 통일된 하나의 행성이나, 몇 개의 위성 거주구 따위를 묶은 연합체, 성계 동맹 따위를 제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수천 광년 단위로 떨어진 수백 수천 성계들을 하나의 권위 아래에 놓을 수 있어야만 제국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관문은 머나먼 별들 사이를 넘나들게끔 하지만 관문선이 닿지 않는 머나먼 미답지들은 제국의 통제 밖에 놓여 있다. 지구의 정신과 문명을 잃어버리고 미개하게 단절된 선주민들을 제국은 다시금 포용할 의무가 있기에, 황제 폐하는 대원정을 결정했다. 대원정의 방법은 단순하지만 확실했다. 황제 폐하의 목소리가 닿지 않을 정도로 먼 곳에 있다면, 그들에게 황제 폐하와 그 심복들을 복제해서 제국 밖으로 보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똑같은 통치자가 똑같은 방식으로 통치한다면 그 또한 제국이니까. (위래, 마젠타 C. 세레스의 사랑과 혁명) - P2627

기대했던 대로 남자는 박투술에 익숙하지 않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남자는 총을 버리지 않는다. 무의식중에 총을 가지고 있으면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 총구가 당장 자신을 향하고 있는데도. (위래, 마젠타 C. 세레스의 사랑과 혁명) - P3839

일인칭의 원한은 이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티끌만도 못하다. (위래, 마젠타 C. 세레스의 사랑과 혁명) - P50

그리고 포이페는 아일랜드어로 완전하다는 뜻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야 길상우는 포이페 켈리와 메르센 켈리가 쌍둥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둘은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그것도 어쩌면 우주의 법칙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비밀을. 왜 진작에 포이페를 붙잡고 캐묻지 않았을까. 후회해 봐야 소용없었다. 포이페는 사라졌고두 사람을 찾을 단서는 아일랜드라는 국적이 전부였다.
길상우의 발상이 빛이 난 부분은 그다음이다. 메르센 소수와 완전수를 따서 쌍둥이 딸의 이름을 지었다면 우주의 비밀을 알고 있는 쪽은 딸이 아니라 아버지인지도 모른다. 길상우는 켈리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모든 논문을 뒤지기 시작했다. 시기는 최소 30년 전, 분야는 물리나 수학일 것이다. 상우의 예상은 적중했다. 다만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로레인 켈리,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1989년에 ‘무아레 현상을 이용한 플랑크 단위 미시구조의 탐색‘이라는 주제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게다가 로레인은 아직도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상우는 홀린 듯 휴가를 내고 더블린으로 향하는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남세오, 벨의 고리) - P9899

"사적인 이야기가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보다 저는 교수님께서 쓰신 논문이 궁금합니다. 무아레 현상과 플랑크 단위에 대한 논문 말입니다."
"오. 세상에! 가족 문제에 이어 이번에는 30년 전에 쓴 학위 논문까지 들추겠다는 건가요? 대체 이 늙은이를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이유가 뭐죠?" (남세오, 벨의 고리) - P102

한마디로 말해서 우주의 구조는 난수가 적힌 난수표다. 그게 숨은 변수가 적힌 양자의 비밀문서다. 우리 우주에 진정한 난수란 존재하지 않는다. 컴퓨터로 난수를 생성해 본 사람은 시작 지점이 같으면 항상 같은 순서로 난수를 불러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컴퓨터에는 무작위로 숫자를 고르는 능력이 없다. 시작 지점과 불러오는 규칙을 알려 주면 커다란 난수표를 찾아가며 숫자를 고른다. 우주도 마찬가지다. 양자 현상의 불확실성은 무작위가 아니라 우주의 난수표에 의해 결정된다. 상자 속의 양자가 빨간색일지 파란색일지는 이미 난수표에 적혀 있다. (남세오, 벨의 고리) - P106107

포니아가 뫼를프의 말에 동의하며 악수를 하는 동안, 하랑은 눈을 감았다. 새파란 빛의 공허 속에서 거대한 화구가 타오르고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갈고리 물체가 빛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고개를 돌리니 공허를 떠도는 크고 새하얀기 같은 존재도 보인다. 시선을 내리자 완전히 녹아내린 바다의 표면이 보인다. 바다의 표면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색일까? 어떻게 움직일까? 하랑은 머릿속에서 논리를 지우고 낮추고 직감과 즉흥에 상상의 광경을 맡겼다. 그러자 검푸른 액체로 된 산과 언덕, 계곡이 나타나서는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얼음이 사라진 바다였다. 새파란 산이 언덕 위로 무너지고 계곡이 갈라질 때마다 새하얀 무언가가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먼지일까? 얼음? 자그만 공기 방울? 말도 안 되는 엉터리 광경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하랑은 상상을 멈추지 못했다. 그때 상상 속 바다의 표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표면을 찢고 나와 공기 중으로 솟아 오른 것은 거대한 세뿔고래였다. 세뿔고래는 무사히 적응을 한 것이다! 하랑은 기뻐하며 세뿔고래가 몸의 빛깔을 화려하게 바꾸는 모습을 감상했다. 세뿔고래는 공기를 잠시 맛보고는 중력을 따라 다시 바다의 표면을 웅장하게 찢으며 사라졌다. 그러고는 고개를 내밀어 멀리 떨어진 마른 땅을 바라봤다. 바다 아래만 해도 놀라울 만큼 다양한 풍경이 있었다. 마른 땅의 세상에서는 얼마나 놀랍고 다양한 광경이 펼쳐질까? 그곳에서도 동물과 식물이 살 수 있을까? (해도연, 거대한 화구) - P196197

세상에 적합한 희생이란 없었고 문명이 고도화를 이룰수록 더더욱 그러했으므로. (이하진, 지오의 의지)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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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이 어떻게 지금과 같이 되었는지에 대한 인과적 설명은 혼란스러운 공간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 때문에 특히 매력적이다. - P14

20세기에 접어들 무렵, 자연주의 전통은 차츰 ‘실험에 기반한 동물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바뀌어갔다. 자연주의와 실험생물학experimental biology이라 할 수 있는 이 새로운 접근법의 차이를 명확히 밝히기 위해 하나의 비유를 들어보고자 한다. 진자시계가 주어지고, 그 작동 원리를 알아내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상상해보자. 먼저 우리는 자연주의적 접근 방법인 관찰과 추론을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시곗바늘의 규칙 적인 움직임과 그 방식, 각 바늘의 회전과 다른 두 바늘의 회전 사이에 나타나는 연관성, 초침과 분침과 시침의 주기가 1:60으로 일정하다는 점 등등. 그러나 시계의 작동 원리, 즉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원인이나 바늘 사이의 물리적인 연관성에 대한 질문을 받을 경우, 관찰만으로는 고작해야 추측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시계를 열어 내부를 들여다보고 그 메커니즘을 명확히 이해할 때까지 부품을 만지작거리는 것뿐이다. - P3132

(배아의 발생 경로를 밝힌) 그 우연의 주인공은 박사학위를 취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2세의 과학자 한스 드리슈Hans Driesch였다.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던 드리슈는 1889년 논문을 완성한 뒤 극동으로 여행을 떠나, 자신이 성장한 독일에서와 달리 전체론적 관점에서 자연 세계를 바라보는 철학을 흡수했다. 이후 고국으로 돌아가던 중 그는 당시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가 "천국의 꽃"이 라 묘사한 베수비오산 근처의 도시 나폴리에 닿았고, 잠시 쉬어가려 했던 이곳은 이후 10년 동안 드리슈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나폴리는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가장 활기찬 도시 중 하나였을 뿐 아니라, 그즈음 건립된 생물의학 연구 센터인 동물학 연구소Stazione Zoologica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이 연구소는 새로운 연구 패러다임을 구축하여, 마치 예술가에게 스튜디오와 물품을 빌려주듯 과학자들에게 실험 공간과 장비를 대여하고 있었다. 그 모델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대학 생활의 경쟁적인 요구에서 벗어나 연구에 몰두하고자 하는 과학자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들었다(운 좋게 휴직 허가를 받을 수 있는 경우라면 말이다). 게다가 나폴리만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연구에 필요한 해양 생물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에, 연구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드리슈는 대학교수 자리를 갈망할 이유가 없었고, 이러한 자유로움은 두말할 것 없이 본국으로 돌아가면 번거로운 교수직이 기다리고 있는) 연구소의 다른 동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이탈리아에 남기로 한 그의 결심에는 연구소의 과학적 명성이 주요한 몫을 했겠지만, 나폴리의 밤 문화 역시 하나의 즐거운 이유가 되었다. 그는 나폴리를 거점으로 삼아 지중해는 물론 북아프리카 및 아시아 전역을 여행했으며, 독신남이라는 자신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 P3940

(빌헬름) 루Wilhelm Roux와 드리슈가 실험을 수행할 당시 세포의 가소성이라는 개념은 직관에 반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세포가 갑자기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 이 개념의 설계자인 드리슈가 누구보다 강력하게 이 개념에 문제를 제기했다. 세포의 운명처럼 중요한 요소가 우연에 맡겨진다고 상상하기에는 배아발생 과정이 너무도 정확하며 재현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포가 변화하는 환경에 어떻게 적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드리슈는 다른 설명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명력‘ 또는 ‘영혼‘이라는 의미로 만든 엔텔레키entelechy라는 용어를 끌어와 이 불가사의한 현상을 설명했다. 어떤 신비로운 영향이 아니라면 어찌 세포의 행동이 그리도 극적으로 바뀔 수 있을까? 1910년 무렵, 드리슈는 실험생물학을 완전히 포기하고 남은 생애 동안 철학, 초심리학, 심지어 심령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바이스만의 모자이크 모델을 뒤흔들었지만,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모델을 찾지 못했다. 그는 이제 정신을 놓은 듯 보였다. - P4445

(한스) 슈페만Hans Spemann은 배순세포가 가진 힘을 포착하기 위해 이 작은 조직에 형성체onganizer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였다. 유도현상이 발생학의 핵심 개념으로 굳어지면서 그는 1935년 노벨상을 수상했지만, 결정적인 실험을 수행했던 제자 (힐데) 만골트Hilde Mangold는 노벨상 수상에 참여하지 못했고 자신의 발견이 과학계에 미치는 영향도 보지 못했다. 1924년 9월, 부엌의 휘발유 히터가 폭발하면서 만골트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의 논문이 발표된 직후였다. - P51

20세기의 위대한 생물학자 중 하나인 시드니 브레너Sydney Brenner는 발생이 유럽식 계획과 미국식 계획 중 한 가지 방식을 통해 진행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유럽식 계획에서는 계통lineage이 모든 것이므로 세포가 ‘어디에 있는지‘보다 ‘어디에서 왔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반면 미국식 계획은 보다 평등주의적이어서 세포의 출처sources보다 위치location가 더 중요하다. 브레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럽식 계획에서 세포는 "부모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반면 미국식 계획에서는 "이웃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
브레너의 은유는 가소성과 그 반대 개념인 전념성commitment의 차이를 드러낸다. 계통에 의해 정체성이 정의되는 세포(유럽식 시스템)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궤적을 위해 다듬어져 있기 때문에 선택지가 제한적이다. 반대로 그러한 제약 없이 태어난 세포(미국식 시스템)의 경우, 선택지가 열려 있어서 경험에 따라 미래 경로가 결정된다. 배아는 가소적 세포와 전념적 세포의 혼합물로, 그 균형이 발생 초기에는 가소성, 나중에는 전념성 쪽으로 기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세포도 나이가 들면서 그 방식이 고정되는 셈이다. - P5152

실제로 배아를 밀어붙이는 무형의 발생력developmental force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드리슈가 상상했던 엔텔레키나 ‘영혼’과 다르다. 오히려 발생에 추진력을 부여하고 전념성과 가소성 사이의 균형을 조정하는 실체는 화학과 물리학의 모든 법칙에 예속된다. 수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드리슈가 인식한 그 신비한 외력external force은, 수십억 년에 걸쳐 각 접합체에 ‘발생 청사진‘을 부여한 진화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말하자면, 단일세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우리의 유전자에 내재되어 있었다. - P53

‘흰색 눈‘이라는 표현형의 유전 여부를 확인하려면 짝짓기가 필요했다. 소중한 표본을 잃지 않기 위해 신중을 기해가며, (토머스 헌트) 모건Thomas Hunt Morgan은 흰색 변이 파리와 붉은 눈을 가진 정상 파리의 짝짓기를 시도했다. 맥 빠지게도 이 1세대 잡종, 이른바 ‘F1 세대‘의 모든 파리는 붉은 눈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멘델이 실험한 완두콩의 열성형질—작은 키와 흰색 꽃—이 한 세대를 ‘건너뛰는‘ 듯 보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그는 계속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F2 세대에 이르러 실망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F1 세대의 자손들이 멘델의 예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결과를 보였기 때문이다. 붉은 눈을 가진 파리 세 마리마다 달처럼 창백한 눈을 가진 파리가 한 마리씩 끼어 있었다. - P7273

모건은 이 결과에서 두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첫째, (휘호) 더 프리스Hugo de Vries가 식물에서 보여주었듯, 동물에서도 변이가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둘째, 식물과 동물은 동일한 유전 규칙을 따르는 우성 및 열성 대립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유전 패턴에 뭔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으니, 파리의 눈 색깔과 성별 사이에 예상치 못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즉, F2 세대의 암컷 파리는 모두 붉은 눈을 가졌지만, 수컷 파리는 절반이 흰 눈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수컷과 암컷을 합쳐야만 3대 1의 비율이 분명해졌다). 이 형질은 멘델의 열성 대립유전자처럼 작동하는 동시에, 파리에서만 관찰되는 특이한 방식을 보였다. 어떤 식으로든 성별이 흰 눈의 유전을 제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 P73

(앨프리드) 허시Alfred Hershey와 (마사) 체이스Martha Chase는 바이러스의 DNA와 단백질 중 어떤 것이 바이러스 전파를 담당하는지 알아내고자 영리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한 실험 설정에서는 방사성 황radioactive sulphur이 있는 상태에서 파지가 복제되도록 함으로써 바이러스의 단백질에 표지를 붙이고(황이 없는 물질인 DNA는 이 조건에서 표지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어 별도의 실험에서는 방사성인radioactive phosphorus이 있는 상태에서 바이러스를 배양함으로써 DNA에 표지를 붙였다(이 경우 일부 단백질에도 방사능이 표지되지만, 대부분의 방사능은 DNA에서 파생된다). 마지막으로, 허시와 체이스는 각각의 바이러스 배양액을 신선한 세균과 따로따로 혼합했다. 그러면 바이러스가 세포를 감염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 세균세포에 ‘표지된 황‘, ‘표지된 인‘, 또는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지 확인하기만 하면 되었다. 결과는 너무나 명확했다. 세포에 들어간 유일한 물질은 방사성 인이었고, 방사성 황은 내부로 들어가지 않은 채 표면에 남아 있었다.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들기 위한 모든 지침은 오로지 DNA만이 가지고 있었다. - P87

돌이켜보면 그것은 젊은 생물학자에게 일어날 수 있었던 최고의 일이었다. 그 일을 통해 친절하고 이해심 많은 교수인 미하일 피시버그Michail Fischlberg에게서 발생학을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곤충만큼 (존) 거든John Gurdon을 사로잡지는 못했지만 발생학 또한 꽤 매력적인 학문이었다. 성장하는 배아의 모양과 형태에 큰 관심을 기울이는 발생학자들을 지켜보면서, 그는 애벌레와 나비의 복잡한 날개와 가슴 무늬를 떠올렸다. 수업에서 배운 것 외에는 배아발생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을 때, 피시버그는 거든에게 기회를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스물세 살에 거든은 피시버그의 연구실에 자리를 잡고 배아의 신비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 P100101

모든 요인이 그 추진력에 기여했을 수 있지만, 여느 과학자들이 공감하는 거든의 주된 동기는 일종의 사냥, 즉 남들이 모르는 퍼즐을 혼자서만 풀 수 있는 기회였다. 새로운 자연적 사실을 발견하고, 이름을 붙이고, 그 특징을 설명하는 최초의 사람이 되는 즐거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거든은 교실에서의 주입식 교육을 거부하고 스스로 설계한 지식의 길을 통해 자연 세계에 대한 이해 방식을 깨우치며 자랐고, 이러한 독립성이 그를 초심자에서 실험주의자로 변모시켰다. 피시버그의 연구실에서는 온전히 혼자 일한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 P106107

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아니다. 발견의 기쁨은 곧 의심으로 바뀌기 때문에, 실험실에서 환희는 일종의 예외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혹시 실험 과정에서 어떤 실수가 있었던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실험을 실패로 이끈 교란 요인이나 계산 착오는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이 특히 심각해지는 것은 자신의 결과가 이전에 보고된 연구 결과와 상충될 때이다. 그리고 기존의 연구 결과가 권위 있는 연구팀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심각성은 두 배로 커진다. - P116

이듬해 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선임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 (시드니) 브레너Sydney Brenner가 작은 모임을 주최했다. 크릭과 다른 저명한 생물학자들, 그리고 (프랑수아) 자코브Francois Jacob도 그 모임에 초대되었다. 모임은 킹스 칼리지에 있는 브레너의 연구실에서 열렸고, 모든 참가자들이 각자의 생각을 기탄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마치 살인 사건의 증거인 양, 전 세계의 다양한 실험실에서 수행된 실험 결과가 토론의 주제로 올라왔다. 물론 핵심 질문은 이것이었다. ‘유전자와 그 단백질 산물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그룹 내에서 하나의 모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분자 X가 그 중심에 있음을 알고 자코브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화가 진행되면서 X의 독특한 특성이 점점 분명해졌다. X는 빠르게 생성될 뿐 아니라 빠르게 파괴되었으니, 이는 세포 내에 있는 다른 물질 대부분과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브레너와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은 이러한 특징을 가진 물질—파지인 람다와 유사하나 분명히 구별 가능한 세균이 박테리오파지에 감염되자마자 나타나는 분자—가 최근에 기술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문제의 분자는 특별한 유형의 리보핵산ribonucleic acid, RNA으로, 세포 내 전체 RNA의 아주 작은 부분을 구성하기에 그동안은 무시되어온 DNA의 화학적 친척이었다. 하지만 이 분자의 행동이 X와 완전히 똑같았으므로, 브레너와 자코브는 이 분자에 ‘메신저 RNA(mRNA)‘라는 이름을 붙였다. - P151

식물에서 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기체는 전사 조절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유전체에 의해 코딩된 많은 전사 억제자transcriptional repressor 외에도 세포에는 비슷한 수의 전사 활성화자transcriptional activator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활성화자들은 RNA 중합효소의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유전자 스위치를 켜는 역할을 한다. 전사를 조절하는 단백질인 억제자와 활성화자를 통칭하여 전사인자 transcriptional factor라고 하며, 이들의 유일한 목적은 유전자에 발언권을 부여하거나 침묵시키는 것이다. 인간 유전체에는 1500개에 달하는 전사인자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전체 유전체의 5~10퍼센트에 해당한다. 그 주요 목적이 다른 단백질의 생산을 조절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높은 수치다.
그렇지만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조절에 대한 이만한 투자는 생명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고정된 지침을 지닌 정적인 유전체는 세포가 환경에 반응할 수도, 다른 세포와 소통할 수도 없게 만들 것이다. 앞 장에서 살펴본 가소성, 즉 세포 손실이나 세포 사회를 형성하는 사건에 대처하는 배아의 능력은 유연한 유전체 없이 불가능하다. 전사 조절은 세포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가장 일반적이며 가장 오래된 방법이다. 따라서 성장에서 회복, 감각에서 기억에 이르기까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생물학적 과정은 다양한 DNA 서열이 mRNA로 변환되는 속도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 P158159

"대장균에게 진실인 것은 코끼리에게도 진실이다!" 모노는 이렇게 선언했다. - P166

유전학적 접근 방법의 목표는 기존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설을 생성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는 어디로든 이어질 수 있다. 유전학적 탐험, 즉 특정한 이상을 가진 변이체를 찾기 위한 노력의 결과는 질서 정연한 모델이 되기도 하고 혼돈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예측이 불가한 유전학적 접근은 소심한 이들에게 다소 부적절한 방식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제 곧 만나게 될 과학자들처럼 충분한 추진력과 비전을 가진 이들에게는, 유전학이 메커니즘의 장막을 걷어내고 배아발생과 단일세포 문제의 근본적인 비밀을 밝히는 중요한 도구, 즉 ‘어떻게‘를 위한 출발점으로 작용한다. - P168

5장에서 살펴보았듯 배아에서는 엄청난 양의 세포 간 대화가 이루어지며, 각 세포는 분자 신호를 통해 자신의 위치나 기타 정보를 전달한다. 그러나 세포가 발판을 마련하는 데는 단순히 신호의 유무뿐 아니라 신호의 수준도 중요하다. 세포가 분자 메시지-분비된 단백질이나 기타 정보가 풍부한 분자를 전달할 때, 그 농도는 원천에서 멀어질수록 감소한다. 가까운 세포는 ‘강한‘ 신호를 수신하고 멀리 떨어진 세포는 ‘약한‘ 신호를 수신하며, 이것이 차이를 만든다. 우리가 휴대폰의 신호 막대를 보고 기지국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짐작하듯이, 우리 몸의포는 분자 농도에 따라 신호원으로부터의 거리를 알아낸다. 이 신호 강도의 차이를 흔히 ‘기울기gradient‘, 근접성의 지표로 작용하는 분자를 ‘형태원morphogen‘이라 한다. 이렇듯 원천에서 멀리 확산될 수 있는 분자, 즉 용해성 인자soluble factor 외에도, 세포의 형태는 직접 접촉 또는 세포를 한 방향이나 다른 방향으로 밀거나 당기는) 물리력을 통해 형성될 수 있다. - P200

배아가 낭배형성을 준비함에 따라 속세포덩이 내의 세포는 점차 평평해져서 배아덩이위판epiblast이라는 단층 세포 시트로 변화한다. 그 표면에 움푹 들어간 부분이 나타나고 확장되어 ‘원시선primitive streak‘이라 불리는 참호로 성장하는데, 균열을 둘러싼 세포는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천체처럼 수십 개씩 삼켜져 반대편에서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낭배형성은 발생의 통과의례-해리포터에 나오는 기숙사 배정 모자를 떠올리면 된다로, 일단 원시선을 통과한 세포는 배아의 세 가지 배엽(외배엽ectoderm, 중배엽mesoderm, 내배엽endoderm)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
이 세 배엽은, 말하자면 서로 다른 교육 체제에 비유할 수 있다.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교수나 기업가가 될 가능성이 높고, 기술학교 출신은 기술자가 될 가능성이, 신학교를 나온 사람은 성직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와 비슷하게 각 배엽에 속하는 세포도 특정한 경로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가 가장 활기를 띠는 법, 우리 몸의 조직 대부분은 세 배엽 출신의 세포로 고루 구성되어 있다. 다양한 세포 요소, 즉 낭배형성의 새로운 졸업생들을 일관성 있고 기능적인 단위로 엮어내는 것이 형태발생의 역할이다. - P202203

슈페만과 만골트는 세포 간 대화의 기초만 상상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 보편적인 대화가 ‘신호전달 경로‘—초기 배아의 형태와 패턴을 조절하는 일련의 ‘진화적으로 보존된 분자들‘(5장 참조)—에 의해 매개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일부 경로의 경우, 양 당사자(세포)는 마치 직접?대화하듯 서로 인접해야 한다. 반면 다른 경로들은 다소 넓은 공간에서 작동하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호의 존재 여부뿐 아니라 그 강도에 따라 정보 전달의 기울기를 형성한다. 마지막으로, 인슐린이나 성장호르몬과 같은 호르몬에 의해 시작되는 신호처럼 원거리에서 작동하는 신호는 혈류를 통해 몸 전체를 순환하며 무한한 활동 범위를 제공한다.
이를 신문, TV, 전화, 라디오 등 다양한 형태의 방송 매체에 빗대어 생각하면, "매체가 곧 메시지"라는 마셜 매클루언의 말은 배아에도 해당되는 셈이다. 분자 신호의 종류마다 세포에 전달되는 의미가 다를 테니 수백 개의 신호 전달 분자가 지시에 관여할 것 같지만, 정작 배아는 겨우 한 다스 정도의 뚜렷한 통신 시스템에만 의존한다. - P206

소화관과 마찬가지로 팔의 모양은 전구세포가 받는 신호의 상대적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 신체 내부에서 기관이 형성되는 동안, 팔과 다리는 배아 표면의 작은 세포 군집인 ‘사지 싹limb bud‘에서 시작된다. 사지 싹은 두 가지 구성 요소(외배엽 유래 상피세포층과 그 아래에 있는 미분화된 중간엽 세포 군집)로 시작된다. 상피가 대화를 시작하면 중간엽이 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반응하여 신호 강도에 따라 자신의 시공간적 위치를 인식하고, 이어 다른 세포들도 참여하여 발생 중인 부속기관의 다른 구석으로 대화를 이어간다. 그러다 각 말단의 영역이 제 소명을 인식하면서 대화는 성장과 분화라는 행동으로 전환된다. 팔의 근위부는 근육을 형성하고 팔이음뼈를 조립하며, 원위부는 손목, 손, 손가락의 뼈들을 만든다. 물론 신경도 이 활동에 초대된다. 다리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진행된다. 팔과 다리가 형성될 즈음에는, 처음 이 과정을 촉발한 상피와 중간엽 사이의 대화는 잊힌 지 오래다. - P214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크기 조절은 생물학에서 가장 밝혀내기 어려운 분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는 아마도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매우 많기 때문일 것이다. 발생과 관련한 대부분의 측면을 제어하는 유전자 발견에 있어 매우 유용한 것으로 입증된 유전학적 접근 방법조차 크기 조절을 이해하는 데는 제한적으로 사용될 뿐이다. 동물이 생물학적 비율을 조절하는 방법을 이해하려면 새로운 도구와, 더 중요하게는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 그것이 마련되기 전까지 크기 조절은 자연의 수많은 블랙박스 중 하나로 남아 있을 것이다. - P225

물론 아직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 발생을 유도하는 분자 메시지의 수는 약소한 수준이지만(수백 개에 달하는 전사인자와 신호 전달 분자에 비하면), 세포가 실제로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러한 지침의 상가 효과additive effect다. 각각의 조합이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므로, 모든 세포는 세포 사회에서 활로를 찾기 위해 수조 가지 계산을 통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발생생물학은 단일 유전자와 단일경로에 초점을 맞추던 방식에서 유전자 네트워크와 단백질 상호작용체interactome(단일 유전자나 단백질이 변경될 때 퍼지는 파급효과)를 고려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다. 세포, 조직, 유기체를 바라보는 통합적 접근 방법인 시스템생물학systems biology은 대규모 컴퓨터와 수학적 모델링을 통해 단일 세포의 처리 능력을 대략적으로 추정한다. - P229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배아발생이 인간 질병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섬유모세포(조직에 견고성을 제공)의 성장을 자극하는 배아 신호는 성인에게 섬유증fibrosis(장기 부전의 전 단계인 조직 흉터)을 유발한다. 또 성장 프로그램(하나의 세포를 신생아를 구성하는 수십억 개의 세포로 확장)이 부적절하게 활성화되면 암이라는 질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 프로그래밍 된 세포 사멸을 조절하는 유전자는 신경퇴행질환, 심장병, 자가면역질환과 같은 다양한 질환의 원인이 된다. 결국 자연이 신체의 구성에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과정이 신체 파괴의 수단이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으며, 이는 우리 생물학의 축복이자 저주인 셈이다. - P230

가장 시급한 목표가 단순히 원본의 복사본을 만드는 것이었던 단세포 세계에서는 (세포 수준에서의) 균일성이 허용되었으나, 다세포 세계에서는 다양성이야말로 최우선적 과제가 되었다. 독특하고 복잡한 작업—초기에는 흡수·분비·감각·운동, 나중에는 시각·청각· 의사소통—을 지원하려면 이질적인 세포 유형이 필요했으니 균일성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다. 다세포로의 도약은 분열division과 분화differentiation 사이의 조율, 즉 세포의 ‘수‘와 ‘다양성‘ 모두의 증가를 요구했다. 요컨대 진화는 우리가 처음에 던졌던 바로 그 수수께끼, 즉 ‘단일세포 문제‘에 직면했던 셈이다. 그리하여 자연이 찾아낸 해결책의 열쇠는 그 두 가지 기능을 모두 수행할 수 있는 특별한 유형의 세포, 바로 줄기세포stem cell였다. - P242

한편 제임스 틸James Till은 (어니스트) 매컬러Ernest McCulloch와 완전히 다른 경로로 OCI(온타리오 암 연구소)에 들어왔다. 틸은 매컬러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으며, 새벽 5시부터 밤 9시까지 일해야 했던 서스캐처원의 농장에서 자란 덕에 강인하고 집중력이 강했다. 대학 시절 뛰어난 분석력으로 교수들의 관심을 모았던 그는 졸업 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예일 대학교의 생물물리학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박사를 마친 뒤에는 미국에서 얼마든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지만 그의 뿌리는 북부에 있었으니, 해럴드 존스Harold Johns로서는 어렵지 않게 틸을 캐나다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매컬러과 함께 줄기세포의 비밀을 풀어나가며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동안에도, 제임스 틸은 매년 가을이면 어김없이 고향으로 돌아가 농작물 수확을 도왔다. - P246

분석은 간단한 저울만 있으면 되는 저차원 기술일 수도, 정교한 현미경이 동원되는 첨단 기술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분석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재현 가능한 측정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견고성은 분석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따라서 분석은 당면한 질문에 맞게 제대로 조정되어야 한다. 방사선이 체내 세포의 생존력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하고자 했던 틸과 매컬러에게 이는 곧 자체적인 분석법의 개발을 의미했다. - P248

틸과 매컬러와 베커는 줄기세포를 분리할 방법을 찾지 못했고, 이는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가 이 분야의 발목을 잡지는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연구자들이 실험 대상에 손을 대지 못하는 상황에는 수긍할 만한, 혹은 적어도 대칭적인 측면이 있었다. 예컨대 고에너지물리학자들 또한 수년간 방사성 입자를 보지 못한 채 연구해야 한다는 비슷한 제약에 직면해 있던 터였다. 틸과 매컬러의 과학적 후손인 전 세계 연구자들은 그나마 조혈줄기세포(정확히는 혈액 줄기세포)를 분리하지 않고도 그 특성을 연구할 수 있었다. - P263

그로부터 2년 뒤 크로아티아의 생물학자 이반 다먀노프Ivan Damjanov와 동료들은 스티븐스의 실험에서 한 단계 나아가, 배아덩이위판 단계까지 진행된 생쥐의 배아를 채취하여 완전히 다른 위치—신장—에 이식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이번에도 기형종이 자랐다. 자궁에서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었다면 갓난 생쥐로 성숙했을 배아—모든 면에서 평범한 세포—가 이식된 곳에서 종양을 형성한 것이다. 배아발생과 발암 사이의 경계는 생각보다 모호했다. 즉 정상세포라 해도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 있으면 끔찍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 P272

때는 톰슨과 기어하트가 인간 ESC를 만드는 방법을 정의한 이듬해인 1999년이었다. 야마나카는 자신의 ‘녹아웃 코어‘에서 매일 생쥐 ESC를 연구했고, 인간 ESC가 언젠가 의학에 혁명을 일으키리라는 믿음을 널리 공유했다. 그는 줄기세포를 자신의 독립적인 연구 프로젝트의 주제로 삼기로 결정했다. 다만 그가 찾고자 한 것은 당시의 다른 연구자들이 추구하던 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들이 줄기세포를 분화시키는 보다 나은 방법을 찾으려 했던 반면, 야마나카가 찾는 것은 ‘분화된 세포를 줄기세포로 역분화하는 방법‘이었다. - P289290

질병 모델링 연구 중 많은 경우는 더 나은 치료법이 절실히 필요한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근이영양증 등의 신경근 질환에 집중되어왔다. 이러한 질병은 인간의 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환자 샘플을 구하기 어려운 데다, 동물 모델 연구의 경우엔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iPSC를 대안으로 선택했다. 예컨대 하버드의 연구원인 클리퍼드 울프Clifford Woolf와 케빈 에건 Kevin Eggan은 iPSC를 통해 운동뉴런이 더 이상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희소 유전 질환인 근위축성측색경화증 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ALS(루게릭병)을 연구하고 있다. 그들은 야마나카와 같은 접근 방법을 이용해 루게릭병 환자로부터 iPSC를 만든 다음, 여러 인자를 혼합하여 운동뉴런과 유사한 세포로 분화하도록 유도했다. 환자의 iPSC에서 유래한 운동뉴런은 대조군 운동뉴런(건강한 사람의 iPSC에서 유래한 것)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전기적 행동을 보였는데, 이는 해당 운동뉴런이 실제로 질병의 특성을 반영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들은 예의 전기적 결함을 교정하는 약물을 물색하여 뇌전증epilepsy 치료제가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고, 이 연구 결과는 임상으로 이어졌다. - P295296

어떤 의미에서 질병은 배아발생 작업의 ‘취소‘, 즉 발생 과정에서 구축된 세포 네트워크의 분자적 해체를 의미한다. - P298

그러나 종양과 배아는 생각보다 많은 유사점을 공유한다. 가장 명백한 것은 암과 배아발생의 전형적 특징인 ‘성장‘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의 유사점은 세포 증식이라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방대한 세포 통신 네트워크는 종양을 단순한 암세포 집합체 이상의 존재로 만든다. 세포 분화 및 가소성 프로그램 중 상당수는 배아에서 처음 확립된 절차의 복사본으로, 종양세포는 이에 의존하여 이동하고 전이되며, 심지어 줄기세포도 종양의 복잡한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 P301302

정상세포를 암세포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변이의 수는 천차만별이며, 단 한 번의 변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대부분의 종양은 결장의 용종이나 피부의 반점 등 전악성惡性 성장으로 시작하여, 수년에 걸쳐 점점 더 많은 변이성 충격이 발생함에 따라 악성으로 발전한다. 결과적으로, 암을 유발하는 변이가 축적되는 데 시간이 걸리므로 나이가 들수록 암의 위험은 증가한다. 자연은 생식 가능한 시점까지 암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할 뿐, 그 이후의 일은 거의 고려하지 않은 채 진화의 명령을 이행해왔기 때문이다. - P304

다만 두 가지 예외가 있으니, 그중 하나는 뇌, 척수, 말초신경계에서 전기자극을 전달하는 세포인 뉴런이요, 다른 하나는 심장의 펌프질을 담당하는 근육세포, 즉 심근세포다. 이 두 세포 유형은 암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이 신체에서 분열 능력을 상실한 몇 안 되는 세포 중 하나라는 점은 아마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사실 분열의 제약은 ‘뇌졸중이나 심장마비로 죽은 뉴런이나 심근세포는 쉽게 대체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치명적이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세포분열이 제한됨으로써 종양 형성으로부터도 보호받는 셈이니, 어쩌면 이것이 향후 다른 암의 예방법에 대한 실마리로 작용할지 모를 일이다. - P307

이 두 가지 요소—어떤 세포 유형에 어떤 변이가 발생하는가—야말로 종양의 유해한 경과와 취약성에 대한 가장 완벽한 그림을 제공할 것이다. DNA 염기서열 분석의 발전으로 우리는 장비를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수천 개의 종양을 조사하든 개별 환자를 조사하든, 변이를 찾아내는 일은 더 이상 어렵지 않다. 암의 근원을 파악하는 작업이 지연되는 건, 장비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특정 종양이 시작된 세포의 특성을 파악하는 우리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각 종양은 고유한 기원을 지닌다는 사실, 바로 여기에 아킬레스건이있다. - P309310

가장 극단적인 버전의 암 줄기세포 가설에서, 종양의 모든 성장 잠재력은 세포의 작은 하위 집합인 암 줄기세포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가정된다. 만약 이 가설이 맞는다면 의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의사는 종양의 전체 크기를 줄이는 능력에 따라 항암 치료의 효능을 판단하며, 따라서 가장 좋은 치료법은 종양을 가장 많이 축소시키는 치료법이 된다. 그러나 종양을 극적으로 축소할 수 있는 치료법조차 암을 완치하는 경우는 드문데, 암 줄기세포 가설이 그 이유를 설명한다. 표준치료법—암 줄기세포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대부분의 종양세포를 죽이는 약물—으로 완화remission 과정에 들어간 종양의 경우, 남은 줄기세포가 재성장을 위한 기질을 제공하므로 다시 자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 P314

배아와 종양 사이의 유사성은 새로운 항암 전략을 위한 풍부한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지식의 커다란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 APML을 제외하면 암세포를 보다 양성적인 형태로 분화시켜 종양을 치료하는 방법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는 종양에서 암 줄기세포를 찾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설사 찾을 수 있다 해도 이를 표적으로 삼는 방법을 모른다. 이에 더하여 우리는 암세포가 EMT를 겪도록 유발하는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이 과정을 차단할 약물도 없다.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단 하나, 암이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운적이라는 사실이다. - P317318

지금껏 ‘암세포의 기원‘과 ‘암세포의 통제할 수 없는 성장을 지배하는 사건‘을 설명하느라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이 있으니, 대부분의 경우 암세포는 종양 덩어리의 소수를 차지할 뿐이라는 것이다. 종양을 구성하는 세포 중 대부분은 암세포가 아니라, 종양이 계약직 하인으로 가두어놓은 정상세포사악한 방식으로 종양에 봉사하는 면역세포, 혈관, 섬유모세포다. 종양에서 암세포가 차지하는 비율은 5분의 1 미만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머지 비암성 요소들은 통상 종양 미세 환경tumor microenvironment이라 불리는 세포 이웃을 형성하며 우리에게 연구와 치료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 P318

안타깝게도 (주다) 포크먼Judah Folkman(2008년에 사망)의 비전은 부분적으로만 실현되었다. 항혈관신생 요법anti-angiogenesis therapy은 현대 종양학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지만, 그가 기대했던 만큼의 보편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이러한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은 생물학적 시스템의 ‘중복성redundancy‘에 있었다. VEGF가 차단되면 다른 신호가 대신하여 혈관신생을 중재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중복성은 정상 조직에서 신호 경로가 오작동 할 때 세포에 일종의 백업시스템을 제공하지만, 종양에서는 암세포가 항암제의 효과를 우회하도록 도움으로써 해악을 미친다. - P320

종양 내의 복잡성은 압도적인 수준이나 그 모두가 혼돈인 것만은 아니다. 종양 형성의 초기 단계, 즉 종양 미세 환경이 막 형성되는 시기에는 일련의 명령 체계가 존재한다. 섬유모세포는 면역세포와, 면역세포는 혈관세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모두 종양세포라는 동일한 지휘관에게 응답한다. 그런 의미에서 암세포는 주변 환경을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재구성하는 능력을 가진, 악성 형성체pernicious organizer 역할을 하는 셈이다. - P322

생물학자들은 종양과 배아 사이의 유사점을 오랫동안 인식해왔으며, 보베리는 유전체의 차이가 이 둘을 구분 짓는다는 개념을 도입했다. 암과의 전쟁(‘전쟁‘이 적절한 비유라면)은 정밀 무기-종양을 제거하거나 무력화하기 위한 수술, 방사선, 독성 화학물질 등 없이 시작되었으나, 20세기 후반 종양학자들이 종양세포의 분자 및 유전정보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하여 종양의 고유한 생화학적 특징으로 인한 취약성에 초점을 맞춘 표적 치료법targeted therapy, 즉 의학적 스마트폭탄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암을 상대로 이어온 생물의학적 갈등의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있으니, 그 핵심은 종양을 ‘암세포의 집합체‘가 아니라 ‘배아 조직의 사악한 도플갱어‘로 인식하는 것이다.
과학자와 의사에게, 배아는 암의 진단과 치료에 유용한 많은 비밀을 간직한 보물 상자나 다름없다. 하지만 암과 발생 사이의 깊은 연관성이 보다 명확하게 밝혀짐에 따라, 거꾸로 암이 배아에 대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더 가르쳐줄지도 모른다. - P322323

9장에서 살펴보았듯 뉴런은 출생 이후 거의 분열하지 않으며, 그로 인해 암에 대한 저항력을 갖되 재생되지도 않는다. 온갖 의도와 목적을 위해, 우리는 평생 동안 사용할 뉴런을 가지고 태어난다. - P329

"기초과학자들은 마치 실험의 결과가 이미 밝혀지기라도 한 양 3년, 4년, 5년 차 연구비로 무엇을 할 것인지 증명해달라는 요청을 점점 더 많이 받고 있다." (빌) 케일린Bill Kaelin의 말이다. 이는 새로운 지식의 예측 불가능성을 무시하고 밤의 과학의 역사—발견 뒤에 도사리고 있는 파괴적인 힘—를 무시하는 근시안적 사고방식에서 비롯한 현실이다. - P360

이 책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주로 젊은이들이며, 이는 오늘날의 연구 프로젝트에서도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풍경이다. 가장 큰 발견은 여전히 모든 분야에 만연한 가정, 선입견, 당연시되는 한계에 휘둘리지 않는 경력 초기의 과학자들로부터 나올 가능성이 높다. 환경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여, 아무개 기지Station 나 아무개 다락Attic, 혹은 플라이 룸과 같은 전문가 집단이 대학 학과와 연구소의 형태로 자문, 비평, 협업을 위한 풍부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지적 추진력은 여전히 연구의 필수 요소다. 섭리가 발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나, 땀이 수반되지 않는 한 지식은 발전하지 않는다. - P383

그러나 현대 의학에서 사용되는 치료법의 상당수가 그 결과와 향후 적용을 예측할 수 없었던 기초연구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본질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지식은 예측 가능성에 아랑곳없이 구불구불한 밤의 과학을 헤매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 P384

미국의 경우 기초연구에 대한 대부분의 자금은 국립보건원에서 제공되는데, ‘모듈형 R01 보조금modular R01 grant‘이라는 기초 자금 지원의 수준은 1999년 이후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이는 발견의 기회가 그 어느 때보다 큰 시기에 텅빈 지갑을 손에 들고 있는 꼴이다. 부족분 중 일부는 자선 활동으로 채워지고, 제약업계는 소규모로나마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자금 격차를 메우기에 충분치 않아 기초연구 수행 역량이 점점 감소하는 추세다. 세상에 나온 기본적인 발견의 혜택은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행해지지 않은 발견이 사회에 미치는 비용은 측정하기가 훨씬 더 어려운 법이다. - P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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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 생명의 언어라면 - 수면부터 생체 리듬, 팬데믹, 신약 개발까지, 생명을 해독하는 수리생물학의 세계
김재경 지음 / 동아시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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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수학 교육에서 미적분의 역할에 대한 논쟁은 종종 들어 왔다. 즉 그리 신선한 주제는 아니다. 학교에서 배웠던 기억을 더듬어서 그 무용성을 지적하는 의견이 있다. 그 맞은편에 미적분의 효용이 최근의 과학과 기술 발달에서 얼마나 광범위한지, 대학에 입학해서야 필요한 학과에서 새로 가르치느라 어떤 비효율이 일어나는지 등의 반박도 있다. 이렇게 상이한 입장들은 물론 대학 입시라는 장에서 가장 날카롭게 부딪힌다. 하지만 수학 교육과 미적분의 역할에 관한 더 큰 문제는 대학교와 대학 입시 너머에 있음을 이 책은 선명하게 보여 준다.

 

그렇습니다. 적분은 쉽게 측정할 수 있지만 그다지 관심 없는 속도로부터 궁금하지만 측정할 수는 없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

 

미적분학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30

미분은 속도 변화를 직관적으로 묘사하게 해주고, 이것의 적분은 직관적이지 않은 미래를 예측하게 해줍니다. -48

 

 이 책의 부제처럼 수면부터 팬데믹까지수리생물학은 인간의 직관이 놓치거나 풀지 못한 생명 현상의 원리를 이해하고 방향을 예측한다. 그 핵심 수단이 본질적으로 계산 기계인 컴퓨터이며 그 컴퓨터의 핵심 언어는 미적분이다. 그리고 컴퓨터와 미적분이 결합해 생명 현상을 번역하는 수리생물학에서 의학, 약학, 생명과학 등의 연관 분야와의 협업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의 미적분은 인간이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계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직관으로 해석할 수 없는 생명 현상을,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는 수리 언어의 핵심 문법이 미적분이다. 인간의 역할은 생명 현상을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도록 미적분으로 묘사하고, 그 컴퓨터가 생명 현상을 해석하는 과정을 운용하는 것이다. 당연히 인간이 미적분을 잘 알아야 하지만, 그 구체적, 세부적 계산까지 인간의 몫은 아니다.

 

이번 연구가 시사하는 바는 기존의 치료 체계를 여러 관점에서 더 정밀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치료 시간의 관점에서, 그리고 성별의 관점에서 질병을 바라볼 때 비로소 더욱 효과적인 치료도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특히, 시간이라는 차원을 추가해 약의 효과를 예상하려면 시간에 따른 변화를 예측하는 미분방정식 기반의 수리 모델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132

이렇게 계산 결과를 보면 납득이 가지만, 이 결과를 보기 전까지 정상세포와 감염 세포의 수가 오르락내리락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컴퓨터를 이용하기 전에는 우리가 직관을 이용해 얻은 결과들이 언뜻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우리의 직관에 잘 와닿지 않더라도 정상 세포와 감염 세포의 수가 오르락내리락하며 서로 공존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시스템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이보다 훨씬 복잡한 실제 생명 시스템을 인간의 직관만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불가능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결론을 내릴 가능성도 높습니다. -53~54

 

 생명 현상은 생명체의 평생부터 하루하루의 생존까지 시간 척도 간의 편차가 크고, 생명체 내외에서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의 종류와 그 요인들이 상호 작용하는 양상은 다양하다. 결국 이 모든 조건이 결합한 생명 현상은 인간이 한번에 하나로 꿰어서 직관적으로 예측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영역이다. 애초에 인간의 인지 능력은 이런 수준의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하는 상황까지는 상정하지 않고 진화했다. 이제야 급하게 필요해졌지만 준비되지 않은 역량이다. 생명 현상을 미적분으로 묘사하는 수리생물학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이 복잡한 주제를 정확히 분석할 수 있어서인 동시에, 인간의 인지적 특성이 이 주제와는 영 상성이 좋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인간이 생명 현상의 방정식을 포괄적으로 구성하는 측면과 그 미적분을 토대로 컴퓨터가 생명 현상을 구체적으로 계산해석하는 측면은 구분될 수밖에 없다. 미적분의 역할과 효용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것과 그 계산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완전히 같은 의미도 아니다.

 

 따라서 미적분의 계산 원리를 교육하고 숙지하며, 미적분 계산 능력을 제고하는 것만이 미적분의 유일한 의무 교육 방식은 아니다. 그것이 정량적 평가와 대학 입시를 전제한 가장 효율적, 일반적인 미적분 교육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다. 이 책은 미적분이 필수적인 의무 교육 과정에 편성되어야 할 이유를 보여 주지만,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교육 방식은 내가 겪었거나 생각하는 그것과 다를 듯하다. 미적분은 생명 현상을 번역하는 수리 언어, 수식의 핵심 문법이지만 연구 주제가 아닌 연구 도구다. 인간이 미적분이라는 도구 자체가 될 필요는 없는 셈이다. 그래서 더더욱 모두가 미적분을 능숙하게 다루지는 못할지라도, 가급적 많은 사람이 미적분의 역할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남에게도 말할 수는 있어야 한다. 미적분이 의무 교육의 필수 요소가 되어야 한다면 바로 그래서다.

 

융합 연구를 자주 하는 만큼, 강연이 끝날 때마다 자주 받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녀를 어떻게 하면 융합 연구자로 키울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저의 대답은 늘 똑같습니다. 융합 연구자의 두 가지 특성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첫 번째 특성은 대화를 유쾌하게 이어가는 것입니다. 운이 좋게도, 저는 지난 10여 년간 의학, 약학, 생명과학 분야 연구자들 수십 명과 협력해 융합 연구에서 여러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실패한 공동 연구도 있었지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융합 연구를 함께 성공적으로 끝맺은 이들은 모두 유쾌한 대화 상대였습니다. (중략)
두 번째 특성은 자신이 아는 것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잘 설명하는 것입니다. 융합 연구는 서로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여 동일한 문제를 놓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219~220쪽


 결국 이 책은 미적분을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수학자의 글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막연하거나 단호한 당위의 영역과 무관하다. 뿐만 아니라 저자 본인의 구체적이며 유연한 융합 연구, 협업의 성과를 미적분의 가치와 효용으로 연결하는 까닭에 설득력이 더욱 높다. 수학교육으로 학부를 시작한 저자가 최근 각광받는 수리생물학자가 되기까지의 과정, 의학약학면역학 등 수학적 접근이 낯선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력해 연구한 경험들, 생명과학의 오랜 난제 앞에서 수학자로서 겪은 시행착오까지 간결하면서도 진솔하게 풀어내서 더욱 흥미로웠다. 앞으로도 저자에게 이렇게 대중적인 저술까지 할 수 있는 환승 시간들이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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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할아버지가 오래 알고 지내던 손님이 다도실을 리뉴얼하는데 문고리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잘은 모르나 손님의 어머님이 다도 선생님인데 희수 기념으로 개장하는 것이라 축하의 의미를 담은 디자인으로 바꾸고 싶다고 했단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형이 "거북이 문고리가 좋겠네" 하고 중얼거렸다.
당시 형은 아직 여덟 살 정도였는데 창고 안에 있는 부품 전부를 놓아둔 장소까지 달달 외웠다.
깜짝 놀란 할아버지가 형과 함께 창고를 보러 가서 형이 꺼낸 문고리를 보고 또 놀랐다고 한다. 오래된 물건이지만 상태도 좋고 거북이 등딱지 부분에 손을 잡도록 만들어놓은 디자인도 근사했기 때문이다. 결국 할아버지는 그 문고리를 사용하였다니 그때부터 이미 형은 상당한 심미안을 지녔던 듯하다.
그렇게 그 무렵부터 문고리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었는데,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잘은 모르나 교토의 가쓰라리큐(일본 왕족의 별장—옮긴이)에는 ‘달‘을 본뜬 문고리가 많이 있다고 한다.
"언젠가 그 문고리를 느긋하게 손질하고 싶어."
그 장면을 상상하는지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던 형 모습을 기억한다.
나도 형 일을 돕게 된 이후 그 문고리를 사진집 등을 통해 보았다.
확실히 한자 ‘달 월‘ 자를 본뜬 모양이나 달 형태를 그대로 모방한 모양 등 가쓰라리큐를 위해 특수 제작한 그 문고리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지금이라면 형이 넋을 잃는 것도 이해하지만, 당시 문고리라는 존재는 ‘우리 형은 어쩌면 조금 별난지도 모르겠다‘라고 인식한 계기에 불과하다. - P15.16

도자기를 잘 모르는 나도 네즈미시노(1570년대 일본 기후현 미노 지역에서 하얀 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를 이르는 말—옮긴이)가 도자기 종류 중 하나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리고 좋은 찻종,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져 경매될 정도의 유래가 있는 찻종에는 특별한 이름이 붙는 물건이 많다는 것도 안다.
‘가마이타치‘는 통통한 네즈미시노 회색 찻종의 이름인 듯하다.
찻종에는 풍류적인 이름이 많다. 그 찻종의 ‘정경‘(구운 색, 표면의 모양, 요철, 겉모양의 인상 등을 빗대 이렇게 말하는 모양이다)을 표현했다고들 하는데 나로서는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많다.
"뭐? 이 모양이 학으로 보인다고? 정말로? 으음, 그거 거의 로르샤흐 테스트 아니야? 그 왜 그림을 그린 후 반으로 접은 다음에 펼쳐서 나온 모양을 보고 무엇으로 보이는지 조사하는 정신 분석 같은 거. 손님, 괜찮아? 고민이라도 있어?"
이렇게 묻고 싶어질 때도 있다. - P35

S 선생님은 유명한 젊은 다도 선생님인 모양이다. 고미술에도 조예가 깊어서 그에 관한 에세이도 썼다고 한다.
"선생님이 가마이타치로 몇 번인가 차를 우리셨대. 그러고는 ‘사용감은 아주 좋은데, 어쩐지 심보가 고약한 구석이 있군, 이 찻종‘이라고 말씀하셨어."
흠.
"심보가 고약하다는 게 무슨 의미야?"
"글쎄. 나도 그렇게 되물었는데 선생님도 ‘설명을 잘 못하겠네‘ 하시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뭐라 해야 좋을까. 붙임성 있고 상냥해서 쉽게 친해진 사람인데 다른 곳에서 내 험담을 하는 걸 들었다는 느낌이랄까‘라고 하셨어."
그것이 ‘가마이타치‘라는 이름이 붙은 유래일까. - P38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우리는 언뜻 보기에 평범하게, 하지만 나름대로 꽤 감칠맛 나는 인생을 보내고 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를 테니 떳떳치 못한 심경일 때도 있고 스릴을 느낄 때도 있다. - P97

어디까지나 나는 ‘커피숍에서 치즈케이크를 먹는 것을 좋아한다‘이기에 ‘치즈케이크를 사서 집에서 먹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행동이고 흥미가 없다. - P102.103

카페 문화는 지역마다 조금씩 달라서 인구 대비 커피숍이 확연하게 많은 곳과 적은 곳이 있다.
적은 곳도 카페 문화가 없어서가 아니다. 옛날부터 다도가 성행했던 곳에는 자택에 화로가 있어서 차를 끓이는 습관이 있기에 밖에서는 마시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다.
그런가 하면 커피숍이 잔뜩 있어서 휴일에는 가족끼리 단골 커피숍에 가서 브런치를 먹는 곳도 있으니 식문화는 그야말로 흥미롭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곳저곳에서 가게를 방문하는 일은 직업상 이동이 많은 형과 나의 자그마한 즐거움이다. - P104

처음 들어간 가게에서는 역시 블렌드 커피를 주문하는 것이 기본이다. 블렌드는 점주의 취향이 드러나기에 자신의 취향과 맞는지도 알 수 있다. - P107

K 점주가 집 정리를 부탁하고 싶다는 친구를 소개해주고, 끝내는 자기 가게의 폐점 정리도 맡길 정도로 친해지리라고 이때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N마치는 오래된 역참 마을로, 작지만 오랫동안 교통의 요지 중 하나였다. 이런 곳은 눈에 띄지는 않지만 사람과 물건의 왕래가 잦고 갖가지 물건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 뒤로 고마운 매입처 중 하나가 되었다.
처음으로 우리가 K를 방문한 지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K 점주에게 연락이 왔다. - P119

나는 타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버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렇게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 P127

이발사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몰랐는데 일본 타일은 정해진 몇 곳에서 거의 다 만들어진다더군."
"네, 메이지 시대(1868~1912년)에 국가가 운영하는 연구소와 공장이 교토에 세워지고, 국가 주도로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은 원래 요업이 성행했는데 처음에는 주로 메이지 유신으로 고객을 잃은 교야키(교토에서 만들어지는 도자기의 총칭—옮긴이) 장인이 중심이 되었다고."
형이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군. 형은 K에서의 일 이후 타일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 P127

약속한 가게가 있는 곳은 신바시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커다란 상업빌딩이었다.
옛날에 지어진 빌딩은 어쩐지 분위기가 독특하다. 묵직한 공기, 느긋한 통로 공간. 전체적으로 만듦새에 여유가 있고 잘 닦여진 바닥이 둔탁하게 빛난다. - P133.134

이 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그 여기저기에서 부모님이 만든 집과 시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것이 또 엄청나게 많아서 설마 이런 벽촌에(실례)까지, 하고 생각되는 장소에서도 일한 흔적을 만난다.
"아버지랑 어머니, 얼마나 일을 하신 걸까."
"이러니 우리가 얼굴도 거의 못 보지."
"이런 페이스로 계속 일을 했다면 사고를 당하지 않았어도 언젠가 과로사하셨을 거야."
세계 유산에 등재된 산골짜기의 오래된 집락을 방문했다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이 지은 민가를 발견했을 때는 형도 나도 기가 막혔다.
두 분이 지은 집은 어째서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고, 마음을 담아서 지었다는 점이 전해져왔다.
친밀감이 있고 아담해서 마음이 편안한 집. 이런 집이라면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집.
일반적으로 건축가는 자택에 자신의 사상을 담아 그것을 명함 대신으로 한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결국 두 분은 자신들의 집을 짓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 P155

둘째, 이것은 예전부터 어렴풋이 느낀 것인데 세상은 거의 모든 일이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시작할 타이밍, 무언가를 그만둘 타이밍, 무언가를 물을 타이밍 그리고 무언가를 고백할 타이밍.
세상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있으면 그것은 대개 그쪽에서 다가온다. ‘어느새 그렇게 되어 있더라‘, ‘지금밖에 없다고 직감했다....... 이런 타이밍은 대체로 옳다. - P193

촉촉이 비가 내리는 오후, 우리는 교토에 있었다.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교토는 사족을 못 쓰는 곳인지, 일을 끝낸 다음이라고는 하나 형은 항상 교토에 들를 때마다 자신의 문고리 컬렉션을 찾아 헤맨다.
형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친한 골동품점에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문고리는 없었지만 형은 우아한 앤티크 경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람이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원한다고 생각하는지는 천차만별이라, 그 덕에 이 장사가 성립될 수 있는 거라 절실히 느낀다. 그리고 나는 경첩에 흥미가 없다는 사실도.
제시액이 서로 맞지 않아서 잠시 흥정이 이어진 결과 경첩은 그대로 그 골동품점에 남게 되었다. - P194

덧붙여 풍경 소인의 정식 명칭은 ‘풍경이 들어간 통신 날짜 소인‘이다. 요컨대 명승고적 등의 도안이 들어간 소인을 말한다.
우편을 보낼 때 일반적으로 찍는 소인은 날짜와 시간대와 담당 우체국 이름밖에 적혀 있지 않지만, 풍경 소인에는 각양각색의 정취가 느껴지는 도안이 그려져 있다. 가마쿠라의 대불이라든가 이세신궁 같은 명소의 그림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런 특성 탓에 어느 우체국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나름대로 기념이 될 만한 것이 있는 우체국에 비치되어 있다.
물론 각 풍경 소인이 비치된 우체국에 부탁하지 않으면 찍을 수 없다. 우송도 의뢰할 수 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우표를 사서 메모장에 붙이고 창구에 내밀어 풍경 소인을 찍어달라는 기본적인 방법을 이용한다. - P248

"그래. 컬렉터는 모으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니 모으는 것 자체가 재미있을 뿐 실은 마음속에서는 컬렉션의 완성 그 자체는 바라지 않아. 모은다는 행위와 모은 것 하나하나가 내가 여기 있다는 존재 증명 같은 것이야. 내가 사라져도 물건은 남아. 내가 모은 것의 집합체가 내 인생의 덩어리 같은 거지."
잠깐 사이를 두고 형이 말을 이었다.
"네 풍경 소인을 보고 생각했어. 스탬프 랠리는 저도 모르게 모으고 싶잖아? 스탬프 수첩에 공백이 있으면 어떻게든 메우고 싶어져. 그것도 마찬가지야. 그 공백은 존재의 공백이야. 자신이 그곳에 없었다는 공백이 무서운 거야. 그러니 네가 말하는 ‘느슨함‘이 부러운 이유는 그 공백이 무섭지 않은 점, 공백을 개의치 않는 점이야."
"흠."
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래서 컬렉터라는 인종은 그다지 자각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다고 더 강하게 바라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
더욱더 예상외라고 생각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형은 결코 ‘나서는 타입‘이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컬렉터 또한 소극적인 사람이 많으니 놀랍네."
"응. 나도 인생 자체에 집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분석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을 때는 뜻밖이었어." - P261.262

"참 재미있단 말이야. 일러스트레이터나 화가 본인과 만나면 ‘그렇군, 이 사람이 그런 선을 그리는구나‘ 하고 늘 이해가 돼. 이름은 몸을 나타낸다가 아니고 선은 몸을 나타낸다지." - P345

또 어디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지 않나 긴장하는 동시에 우리는 이 장소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세월이 자아내는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셔터의 녹, 콘크리트의 갈라진 틈, 그러데이션으로 변한 함석 색깔. 그것이 고대 유적처럼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을 내보인다.
"장소의 힘은 엄청나니까 그 땅이 내뿜는 에너지에 어울리는 작품을 만드는 일은 힘들어요."
갑자기 다이고 하나코의 말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 P378

그녀들의 역할은 끝났다.
다이고 하나코에게 그 도란을 전해준 것으로 이제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밝은 여름이 눈앞에서 달려간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여름이라는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 P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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