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생물을 상대하는 것은 매우 소모적이다. 필연적으로 손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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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로 드시겠어요?"
"뭐, 아메리카노?"
이번 인터뷰는 무난하겠는데. 수리 누나가 들으면 비과학적인 생각이라면서 입에 거품을 물겠지만, 커피 메뉴를 물었을 때 돌아오는 대답에 따라 그날 인터뷰가 어떻게 진행될지 어느 정도는 감을 잡을 수가 있다. 아메리카노는 당연히 가장 무난하게 흘러가는 편이다. 거기에 ‘뭐‘까지 붙었다. 물으면 묻는 대로 술술 이야기해줄 거라 기대해도 좋다. 물론 어디까지나 인터뷰 경력 4년 차 비전문 개인 유튜버의 견해일 뿐이지만.
공감대를 형성하는 동시에 가격의 차이로 인한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하고 자리로 돌아가 인터뷰 장비를 꺼내 테이블에 놓으며 눈치를 살핀다. 간혹 녹취라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 P9

유령이라고 불리는 그들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조금 멀리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나의 중학생 시절로. 이것은 분명 번거로운 일일 테지만 불가피하다. 공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사적인 일이다. 목적이 분명한 일이면서도 그 스펙트럼은 꽤 넓기 때문에 앞으로의 이야기를 통해 바라다보는 세상은 퍽 다르게 보일 것이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그것이 나의 목표니까. - P21

뭐든 벤치마킹해서 적당히 새로운 요소를 가미해 이름에 ‘K‘ 자를 붙이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학당‘은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지구상에 다른 ‘학당‘은 없었기 때문이다(있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과감하게도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 완전몰입형 가상현실 공립학교의 이름을 그냥 ‘학당‘ 이라고 지어버렸다. - P22

나는 고민하다 홍문관 쪽으로 뛰어가 고개를 쳐들고 기와 장식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흔적이 있었다. 나는 소리쳤다.
"여기예요."
결이 어긋난 흔적을 유심히 올려다보는 건이 선배를 선생님 보듯 쳐다보면서 나는 말했다.
"엄마가 시각적인 요소에 좀 집착하거든요. 그래서 쓸데없이 디테일한데, 그게 가끔 이렇게 오류가 나요. 그걸 찾는 거예요." - P2829

나는 엄마가 특유의 장인 정신을 발휘해 마지막으로 디자인을 검토하는 데 정신없는 틈을 타 이미 검토를 마친 홍문관 안쪽, 소설과 비소설 서가 경계의 사각지대에 나만의 비밀의 방을 만들어 드나들었다.
사실 가상현실 게임의 하우징 기능을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게다가 나는 다른 애들이 몬스터를 잡고 놀 때 엄마를 도와 가상현실을 디자인했다.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것만 해도 웬만한 아마추어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엄마의 작업실 자체가 개발자 전용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그곳은 신계나 다름없었고 나에게는 신과 같은 권한이 있었다. 나는 그 권한을 행사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인정하는 바, 그것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깊이 반성한다. - P3334

건이 선배가 재빨리 상황을 정리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사회생활을 해온 사람은 확실히 달랐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말이다. - P47

"들어갈 거지?"
"동아리방이요, 아님… 동아리요?" - P48

"너, 이 태조 카사노바 같은…."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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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 허블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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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다른 이야기가 마치 같아 보여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같으면서도 다른 결, 다르면서도 같은 무늬를 찾고 더듬어 나가는 기쁨이 끊이지 않았다. 혁신적인 기술이 도입되고, 화성을 비롯한 지구 밖으로 인류의 활동 반경이 넓어지는 와중에도 여전히 인류 사회에, 혹은 그중에서도 한국이라는 국가와 그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충분히 존재할, 존재할 법한 어떤 흔적과 고민들을 섬세하면서도 예리하게 담아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들이 마치 일련의 연작 소설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달라질 미래에 인류가 직면하게 될 미처 예상치 못한 문제들을 참신하게 구현하는 작품도 물론 너무나 흥미롭지만, 모든 것이 격변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남아 있을 자취들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 작품은 무척 각별하다.

 

태양계 개척지는 여러 국가에서 이주한 시민이 원래 국적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연방 도시였다. 화성인들은 가족, 친구, 가까운 지인들끼리는 각자의 모어母語로 소통하지만, 학교나 일터 등 공공 영역에서는 모두 영어를 사용했다. 엘리트 중심으로 이뤄진 화성 이주 첫 세대에서는 영어 사용이 비교적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다양한 민족, 직업, 경제적 배경을 가진 이주민들이 도착하자 많은 것이 빠르게 변했다.

그때부터 말의 변화가 감지됐다고 한다. 화성은 극한의 환경이었기에 신속하고 정확한 의사소통이 생존과 직결됐다. 제각각인 영어 숙련도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이 안 돼, 누르다, 빨간 버튼”, “확인하다, 산소 탱크, 같은 식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민족의 단어와 그 단어를 조직하는 방법이 화성 영어에 기여했다. (단어가 내려온다)-62~63

 

 현재의 인류가 받아들이는 많은 것이 뒤바뀐 후에도 미래까지 이어질 속성이 있다면 단연 언어일 것이다. 구어(口語)나 문어(文語), 혹은 이와 다른 어떤 매체를 이용하더라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에는 서로의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 언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무척 당연한 사실일 수도 있지만, 달이나 화성에 정착지를 건설하고, 경험과 기억의 모든 내용을 속속들이 기록·저장하게 되며, 사실상 인류와 매우 유사한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한 후에도 여전히 인류가 지금과 같은 언어를 쓴다는 것은 충분히 경이로운 일이다. 이 책에 실린 작품 중 단어가 내려온다는 바로 그 지점을 극대화하고 있다. 15세 즈음의 인류에게 각자의 언어로 하나의 단어가 내려오며그것이 인류의 언어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지학(志學)’의 설정은 언뜻 보면 과장되거나 복잡한 것 같지만, 읽어 나갈수록 정교하고 구체적인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화성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인류의 삶뿐만 아니라 언어가 적응해 나가는 방식에 대한 묘사는 간명하고 논리적이었다. 이 작품은 인류의 삶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여전히 언어가 그 속에서 맡을 크고 무거운 역할을 무척 또렷하고 아름답게 보여 주었다.

 

미지에게 한국어는 불가해한 모국어였다. 한국어는 정확하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을 위한 언어 같았다. 말의 내용보다 먼저, 말의 이면에 깔린 화자의 기분을 인지해야 한다는 알람이 늘 켜져 있었다. 방금 혜리의 문자에선 그 알람이 최고 경보 단계로 빛났다. 물음표는 많았지만, 어느 것 하나 대답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어떤 대응을 해야 하는지 역시 알 수 없었다. 미지는 그저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미지의 우주)-126~127

 

 인류의 삶이 크게 바뀔수록 그 틈바구니에서 변치 않는 것들의 존재감은 더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중 상당수는 언어와는 달리 지금의 우리로서는 훗날에는 좀 사라졌으면 하는 것들이겠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미지의 우주분향은 그렇게 질기고 지긋지긋하게 버틴 것들과 바뀌어 버린 세상이 맞물릴 때의 소음을 예리하게 포착해 냈다. 언어로서의 한국어의 징글맞은 위계성(位階性), 과도한 맥락 의존성은 과학 기술의 발전과 사실상 무관한 속성이어서 굳이 사라질 이유가 없으므로, 아마도 화성에서도 능히 살아남을 것이다. 무척 크게 바뀔 것 같은 미래가 어떤 면에서는 의외로 너무나 그대로일 수도 있으며, 벗어나기 어려운 고단함 역시 그 지점에서 비롯될 것임을 미지의 우주는 세련된 방식으로 암시한다. 미래의 한국어에도 지금과 다르지 않은 성격이 있다면, 미래의 한국 사회와 한국인 역시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화성 이주 2세 한국인인 미지의 우주속 직장인이자 양육자인 여성 미지가 한국에서 화성으로 갓 이주해 온 주변의 전업주부 양육자들과 빚는 미묘한 갈등, 한국으로 연수를 가기 위해 겪어야 하는 온갖 어려움은 한국의 외부자인 미지의 경험과 시선에 대한 작가의 깊이 있는 접근 덕분에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또한 이 작품은 지금의 한국인들이 불가피하거나 필연적이라고 받아들이는 현실의 조건들이 계속 이어진다면 얼마나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울지 생각하게끔 돕기도 한다. 이런 성격은 지구를 벗어나서도 제사를 지내겠다고 사서 소란을 피우는 이야기를 최대한 온화하게 바라보는 분향에서 더욱 극대화된다.

 

그간 여러 인간의 다양한 마지막을 함께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최대한 많은 것을 남기기 위해 몇 페타바이트에 달하는 기록을 기탁했죠. 하지만 그런 사변적인 기억이 인류의 집단적 안위에 기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21세기 기록관리학자들의 노동력은 대부분, 해일처럼 밀려드는 기탁 자료를 적절한 방식으로 압축 폐기하는 데 쓰이고 있습니다. 분류되거나 라벨링되지 않은 기록의 존재 값은 어차피 0에 수렴합니다.”

조이는 말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헤아릴 수 없는 심해의 해류를 거스르는 흰긴수염고래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이 시점에서 인생을 종료하고 모든 기록을 폐기하겠다는 A17-13님의 결정은 매우 아름다워 보입니다.” (마지막 로그)-42~43

체계 없이 넘치는 기록은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못한다. 어떤 감각이든 정보가 되기 위해서는 처리가 우선이다.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망각은,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는 순간 완료된다. (일식)-236

 

 어쩌면 과학 기술의 발전은 그 자체로 인간의 삶을 바꾼다기보다는 단지 기존의 삶을 편리하고 신속하게 만드는 도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결국 기존의 인간의 한계 역시 개선되거나 극복되기는커녕 더욱 극대화될 수도 있다. 기술의 힘에 기대어 자신의 생전 모든 경험과 기억을 축적시켜서 데이터로 환원해 봐야 무망한 불멸을 희망하는 끈질긴 공허함을 망각하게 만들 뿐,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마지막 로그일식은 단호하지만 명쾌하다. 과학과 기술만으로 바뀌는 것도 있지만, 도저히 바뀌지 않는 것도 존재한다. 그렇게 바뀐 삶에서도 바뀌지 않은 것의 의미는 의외로 크고 무거울 수 있다. 그것을 사소하게 여긴다면 더더욱 그렇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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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불한 금액이 누릴 수 있는 서비스의 범위를 결정하는 세상이었다. 나에게 제공된 서비스가 그 범위의 위쪽 경계에 얼마나 가까운지 매번 신경이 쓰였다. 조금이라도 더 상위의 무언가를 누리기 위해 기를 썼다. (마지막 로그) - P10

전 애인은 꽤 많은 부수의 책이 나가는 인기 저자였고 나는 담당 편집자였다. 말하기도 하찮은 이유로 세 달 만에 관계는 종료됐다. 그는 서로의 삶을 포개는 데 필요한 질문과 대답, 양해와 허락, 공유와 수정, 그 모든 것을 고집스레 회피했고, 나는 들어야 할 말을 듣기 위해 공들여 질문하는 법을 몰랐다. (마지막 로그) - P17

한 번도 불 밝힌 적 없던 세상이 완벽한 어둠에 잠길 채비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 로그) - P18

기운을 내기 위해 먹는 에너지바, 미세먼지와 바이러스의 전파를 피하기 위한 마스크, 지각하지 않기 위해 아침마다 서둘러타는 무인 자동차 카풀…. 목적과 용도가 분명하다 못해 절박한 것들로만 이뤄진 이 일상에, ‘꾸역꾸역’만큼 어울리는 부사가 또 있을까. (마지막 로그) - P20.21

고삐 풀린 광기에 휩싸인 세상이라지만 네트 밖에서는 그조차 고요했다. 네트 밖에는 세상이 없었다. (마지막 로그) - P22

"죽고 싶은 마음,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근거는 갑자기 사라지기도 해요. 안락사 담당 안드로이드들은 그런 감정 변화인지에 특화된 앱을 장착하고 있어요. 담당 안드로이드가 좀 더 살아보라며 손을 내민다면 굳이 마음을 다잡지 말아요." (마지막 로그) - P30

"그간 여러 인간의 다양한 마지막을 함께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최대한 많은 것을 남기기 위해 몇 페타바이트에 달하는 기록을 기탁했죠. 하지만 그런 사변적인 기억이 인류의 집단적 안위에 기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21세기 기록관리학자들의 노동력은 대부분, 해일처럼 밀려드는 기탁 자료를 적절한 방식으로 압축 폐기하는 데 쓰이고 있습니다. 분류되거나 라벨링되지 않은 기록의 존재 값은 어차피 0에 수렴합니다."
조이는 말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헤아릴 수 없는 심해의 해류를 거스르는 흰긴수염고래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이 시점에서 인생을 종료하고 모든 기록을 폐기하겠다는 A17-13님의 결정은 매우 아름다워 보입니다." (마지막 로그) - P42.43

인간 행동의 패턴은 언제나 나(조이)의 호기심을 자아냈다. 나는 그러한 호기심마저 이상 행동임을 알고 있었기에, 관리자 및 네트워크에 공유되지 않도록 로그를 자체 조작해왔다. (마지막 로그) - P49

A17-13 역시 안락사 연기 권유 시 성공 가능성이 99퍼센트에 육박하리라는 것을 첫날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조이)는 이를 권유하지 않았다. 안락사 재고를 권고하라는 메시지를 무시했다. 맑은 마음으로 쌓아 올린 결심을 충동적으로 되돌린 인간들이 주어진 시간을 견디며 어떻게 망가지는지 나는 보았다.
가장 먼저 두 눈의 총기가 지워진다. 그리고 시간, 장소, 사람에 대한 기억이 순차적으로 사라진다. 내게 자유의지를 심어준 개발자 역시 마지막 순간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미루고 내게 의지했다. 그 결정은 그의 의지가 아닌 본능이 내린 것이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마지막 로그) - P50

인간, 아니 생명의 무한한 능력은 익히 알고 있으므로 A17-13 역시 주어진 시련을 결국은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A17-13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될 것이었다. 그는, 그리고 나는 그러지 않기를 원했다. (마지막 로그) - P51

태양계 개척지는 여러 국가에서 이주한 시민이 원래 국적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연방 도시였다. 화성인들은 가족, 친구, 가까운 지인들끼리는 각자의 모어母語로 소통하지만, 학교나 일터 등 공공 영역에서는 모두 영어를 사용했다. 엘리트 중심으로 이뤄진 화성 이주 첫 세대에서는 영어 사용이 비교적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다양한 민족, 직업, 경제적 배경을 가진 이주민들이 도착하자 많은 것이 빠르게 변했다.
그때부터 말의 변화가 감지됐다고 한다. 화성은 극한의 환경이었기에 신속하고 정확한 의사소통이 생존과 직결됐다. 제각각인 영어 숙련도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이 "안 돼, 누르다, 빨간 버튼", "확인하다, 산소 탱크, 꼭" 같은 식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민족의 단어와 그 단어를 조직하는 방법이 화성 영어에 기여했다. (단어가 내려온다) - P62.63

나는 1년에 한두 번, 방학 때마다 아빠를 만났다. 지지난 여름방학에는 아빠가 자신의 단어를 알려줬다. 누스마레루盗まれる. ‘훔침 당하다‘라는 의미다. 띄어쓰기를 했듯이 한국어에서 ‘훔침 당하다‘는 단어가 아니다. 일본에서도 역시 예전에는 사전에 ‘훔치다‘라는 기본형만이 등재돼 있었다. 아빠 세대에 접어들어 일본에 피동형 동사의 지학 사례가 급증했고 급기야 단어로 인정받았다.
피동문이란 주어가 동사의 능동적인 주인이 아니라, 의지와 상관없이 동사를 당하는 입장에 있는 문장을 뜻한다. 일본어는 한국어보다 동사에 피동 표현을 붙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언어이긴 했다. 그러나 아예 그런 표현이 지학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또 다른 얘기였다. 주변국 언어학자들은 책임 소재를 흐리고 싶어 하는 일본 사회의 시대적인 흐름을 반영한 것이 아니냐며 볼멘 분석을 늘어놓았다. (단어가 내려온다) - P72.73

사회와 역사가 충분히 무르익기 전에는 절대로 등장할 수 없는 단어도 있었어요. ‘어떤 공동체가 A라는 단어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의 말에는 이미 B가 있다‘라는 식으로 단어와 개념, 단어와 단어 사이에 모종의 경향성이 있거든요. 이를테면 어떤 부족이 ‘국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들은 ‘가족‘이란 낱말을 이미 사용하고 있으리라는 짐작 같은 거요. (단어가 내려온다) - P75

"이누이트 말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가리키는 단어가 수백 개가 된다는 게 사실이야?"
"당연히 아니지."
우리는 함께 웃었다. 이누이트어는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어근에 조사나 어미가 줄줄이 붙어 문장이 된다고 했다. 게다가 이누이트 문자에는 띄어쓰기가 없었다. 눈과 관련한 단어를 둘러싼 낭설이 무지한 사람들을 오랫동안 매혹시킨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춥겠더라‘ 같은 말도 단어 하나로 볼 수 있을 텐데, 그 의미는 ‘나는 온도가 낮으리란 것을 과거에 직접 느꼈기 때문에 추측할 수 있다‘ 정도겠지. (한국어는 어미를 잘만 활용하면 많은 정보를 굉장히 효과적으로 담을 수 있는 절묘한 언어다. 그중에서도 내 생각에 화자가 직접 감각한 사실에 대해 말할 때만 사용할 수 있는 회상의 어미 ‘-더-‘는 으뜸이다.) (단어가 내려온다) - P84

2020년대에 접어들자, 세계적으로 이상 기후는 더 이상 ‘이상‘이 아닌 정상 기후처럼 이어졌다. 폭설과 폭우, 한파와 폭염, 산불과 가뭄이 매 계절 끊이지 않았고 유행병의 창궐은 흡사 연례행사였다. 인류가 지구에 미치는 해악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오랜 기간 사용했던 운영체제가 과한 메모리를 사용하는 복수의 애플리케이션을 감당하지 못해 광범위한 오류를 양산하는 꼴이었다. (분향) - P100

나도 울 엄마 제사 지내고 싶다. 그러면 남편은 또 흔쾌히 그러자 했겠죠. 근데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이번에 보니까 사진 속 시조부랑 시부가 완전 붕어빵이더라고요. 얼굴도 가물가물하다는 할아버지 차례상을 빌리면서도 우리 엄마 생각은 못 하는 저 착한 남자 역시 언젠간 저 얼굴로 늙어가겠죠. 그럴 때가 있어요. 남편 얼굴이, 이주선에서 봤던 영영 작은 점으로 멀어지는 지구처럼 느껴질 때가. (분향) - P103

많은 이들은 생존에 필수적인 물과 공기를 매 순간 신경 써야 하는 극한 상황이 초기 화성 이주민을 극도로 힘들게 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난관은 따로 있었다. 지구의 월드와이드웹처럼 익숙한 것을 당연하게 누릴 수 없는 상황이 그 무엇보다 큰 역경으로 부상했다. 지구에서 공기처럼 누렸던 빠른 통신이 화성에서는 당연하지 않았다. 행성 간 화상 통화는 자주 끊겼고, 데이터 전송 속도는 너무 느렸다. (분향) - P103

살아서 다시 한번 기쁘게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 무엇으로 도전할 수 없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말없이 바라보고 사무치게 쓰다듬는 것. 그건 내가 너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었다. (분향) - P109.110

현지에서 지구 식재료를 공급하는 게 예전만큼 어렵지는 않았지만, 단 한 평의 경작지도 비용과 직결되는 현실은 변함없었다. 오크라, 두리안, 깻잎 등 특정 문화권에서만 사랑받는 채소나 과일은 대규모 이주 및 현지화 식물 목록에 여전히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 같은 식물이 아쉬운 이들은 알음알음 소규모 가정 재배를 시도했다. 늘 깻잎을 아쉬워했던 엄마 생각이 나서, 미지는 내심 귀찮았지만 일단 씨앗을 받아두었다. (미지의 우주) - P114.115

‘메이드 인 화성‘ 콘텐츠를 향한 사용자의 갈증은 지속적으로 유의미한 증가세를 보였다. 지구의 사계절, 지구의 도시, 지구의 중력에 별다른 애틋함이 없는 화성 정착 2세대인 강미지 사용자 분석팀장에게 이는 중요한 징후였다. 게다가 한국산 콘텐츠의 팬덤이 21세기 초반 이후 다시 한번 전 인류에게 주목받고 있었다. 덕분에 연수 기업 리스트에는 한국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다수 포함됐고, 연수 대상자 역시 한국어 능통자를 선호했다. 도전할 만한 의미는 물론 승산도 있었다. 지원 일정은 다소 빠듯했다. 행성 간 왕복선이 2년 주기로 돌아오는 화성-지구 대접근기에만 운행하기 때문이었다. (미지의 우주) - P117

사실 미지는 놀이터에서 이뤄지는 인간 보호자들과의 모든 네트워킹이 어느 정도 귀찮고 불편했다. 화성 이주 2세대이자 풀타임으로 일하는 자신을 그들이 마뜩잖아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때로는 자신이 그들과는 다르다는 모종의 우월감도 들었다. 그런 선 긋기가 그들에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까지 알았지만 미지는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쩔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미지의 우주) - P120.121

미지에게 한국어는 불가해한 모국어였다. 한국어는 정확하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을 위한 언어 같았다. 말의 내용보다 먼저, 말의 이면에 깔린 화자의 기분을 인지해야 한다는 알람이 늘 켜져 있었다. 방금 혜리의 문자에선 그 알람이 최고 경보 단계로 빛났다. 물음표는 많았지만, 어느 것 하나 대답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어떤 대응을 해야 하는지 역시 알 수 없었다. 미지는 그저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미지의 우주) - P126.127

어떤 상황에서라도 반사적으로, 해맑게 축하해야 하는 소식이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일, 깊은 고민 끝에 돌이키지 않기로 결정한 일, 그 누구도 결정의 책임을 당사자에게서 덜어줄 수 없는 일, 새 생명이 오고 있다는 소식은 그중에서도 으뜸이라고 미지는 믿었다. 그것은 미지가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새긴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미지의 우주) - P137

"왜, 동네 한국인들, 딸 친구 엄마들 눈치 보여? 섭섭해하지마. 그 사람들도 힘들고 무서워서 그래."
"다들 여기 오기 전까지는 화려한 경력으로 잘나갔던 사람들이에요. 세상 무서운 게 있을까. 막말로 화성까지 오는 결정을 남자가 일방적으로 내릴 순 없잖아요. 그렇게 올 땐 자기들도 각오를 했을 텐데…"
"울면서 웃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그런다. 짐승을 인간으로 길러내는 재미야 자기도 잘 알겠지만, 그렇다고 저녁 밥상 자리에서 남편은 사내 정치 이야기하는데 오늘 냉장고 정리 다 끝내서 속이 다 시원했다, 이런 얘기를 웃는 얼굴로 할 수 있을까? 자기네 부모님이야 마침 좋은 시기에 건너오셨겠지만, 지구에선 몇백 년 동안 여자들이 내내 뿌리 뽑힌 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살았어. 남자들이 선발대로 깃발 꽂으면 여자들이 살림해대며 애들 주렁주렁 매달고 뒤따랐겠지. 교수였던 우리 아버진 이 학교 저 학교 옮겨 다니며 연봉과 랭크 올리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우리 엄만 평생 불행했어.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도, 아니 더 많은 것을 기약하기 위해 지구에 훌쩍 다녀올 수 있는 자기는 진짜 행운아야." (미지의 우주) - P147.148

"푸른 점으로 지구가 멀어지는 순간 다들 할 말을 잃었어. 옆사람이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지. 지난 삶이 전부 거짓말처럼 느껴지더라. 가끔 생각해. 혹시 그 이주선이 통째로 폭발했고 우린 모두 함께 저승에 온 건 아닐까." (미지의 우주) - P149

여남은 명의 호모 리터스 무리가 뭍에서 불과 10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너울대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인근 수종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단단하고 가벼운 나무껍질을 나름의 방식으로 다듬어 원시적인 서핑 보드로 사용했다. 모두가 그 위에 엎드려 대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당한 파도를 기다리던 모양이었다. 저만치에서 흥얼대던 너울이 육지에 가까워지자 비스듬히 갈라지며 해변을 향해 달음질쳤다. 나무껍질 위에 엎드린 채 양팔로 물을 저어 잔파도를 하나씩 넘어서던 해변 인간 중 한 명, 멀리 보는 눈을 가진 누군가가 좋은 파도를 골라 앞장서면 다른 이들이 따라나섰다. 준비된 상태로 양질의 파도를 맞이한 한 명이 보드 위에 직립하면 예상 길목에 있던 동료들은 길을 피해주는 에티켓도 엿볼 수 있었다. 좋은 기회를 연거푸 옆 사람에게 양보한 해변 인간 한 명이 마침내 썩 좋은 파도를 골라잡았다. (행성사파리) - P192.193

링링 부녀와 쏘니와 진 커플은 어느덧 저만치 앞으로 나섰다. 꽤나 큰 너울이 옆으로 다가오는 것을 쏘니가 발견했다. 서두른 끝에 잡아탈 수 있었지만 어색한 보드 때문인지 쏘니는 이내 균형을 잃고 내팽개쳐졌다. 바로 그때 링링이 등 뒤로 다가오는 작지만 단단해 뵈는 파도를 감지했다. 링링은 파도를 등진 상태로 온전히 온몸을 사용해 타이밍을 맞춘 끝에 두 발로 보드를 딛고 일어섰다. 때맞춰 뒤를 잇는 좋은 파도, 욕심내지 않는 안정적인 자세 덕분에 링링이 꽤나 멀리까지 눈 깜빡할 사이에 미끄러졌다.
미아는 우연과 안목, 실력이 만나야만 이루어지는 링링의 퍼포먼스를 홀린 듯 바라봤다. (행성사파리) - P195.196

착륙장 문으로 미아가 성큼 발을 내딛었다. 마중객들 틈에서 엄마와 아빠의 얼굴이 보였다. 미아가 자신도 모르게 속도를 높이며 그대로 엄마 품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먼 우주에서 일어난 아이의 변화가 햇살처럼 엄마를 덮쳤다.
"다녀왔습니다! 할 말이 진짜 많아요."
엄마는 부쩍 자란 아이에게서 햇살 내음이 난다고 느꼈다. 그 변화를 한껏 들이켜는 엄마 역시 듣고 싶은 말이 한가득이었다. 마치 처음인 듯 아이와 눈을 마주치면서 엄마가 말했다.
"많이 컸구나, 우리 아가." (행성사파리) - P209

어쩌면 나는 이를 부러워하고 있는 걸까. 밤하늘의 아무 별이나 가리키며 그것이 내 것이려니 믿어버릴 수 있는 무구한 대상화를, 가늠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으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멀리멀리 보내겠다는 무해한 욕망을.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 - P219

감각을 포착하는 최선의 방법은 기꺼이 놓아버리는 것임을 나는 안다. 우리가 함께 그림자를 통해 빛을 더듬던 그때처럼. (일식) - P226

하진은 Y에게 말했다. 많은 이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과 달리 결정적인 순간은 없다고, 선택의 이유는 희미하고 일상의 습관이 주름처럼 남을 뿐이라고. (일식) - P231

B는 상대방의 호응 없이 발화를 이어가는 게 익숙해 보인다. 예술계나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이들은 상담 세션에서 다루기 아주 용이하다. (일식) - P232

체계 없이 넘치는 기록은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못한다. 어떤 감각이든 정보가 되기 위해서는 처리가 우선이다.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망각은,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는 순간 완료된다. (일식) - P236

언젠간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장기 고객인 소설가 V가, 아니 V의 변호사가 연락했을 때 하진은 생각했다. V는 타인과의 대화에 유난히 집착했다. 두세 명의 지인과 저녁을 보낸 이후에는 음성 감지 프로그램을 동원하여 모든 대화를 녹취하고 사전에 마련한 키워드에 따라 대화의 주제를 태깅하고 또 분류했다. 하진은 V가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야기 창작이 직업인 사람의 습벽이리라 짐작했다. V의 단편집을 우연히 읽는데 하진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생생하게 묘사된 많은 에피소드와 대화가 V가 강박적으로 분석하고 분류했던 실제 대화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일식) - P247

확실한 것은 기억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만큼 헛된 일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일식) - P247.248

한 번도 부서진 적 없는 마음과 너무 멀리 와버린 마음, 더 이상 거짓과 진심을 구별할 수 없다고 믿는 마음과 열쇠를 찾을 수 없는 마음, 그러나 끝내 포기할 수 없는 마음들을 나는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일식)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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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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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는 분명 선량할 것이다. 스스로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사람이 사흘 밤 연속으로 마주친 아기 고양이를 위해 통조림과 스크래치 기둥을 샀다는 결말부에서 그 사실을 확신했다. 그를 어떤 인간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읽는 내내 신경이 쓰였는데 이 장면에 이르러서야 고양이가 매듭을 지었다. 그는, 고양이에게 기꺼이 마음을 내어 준 이 작품 속 는 좋은 사람이다.

 

 이 점을 확실히 하고서야, 역시 좋은 사람인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화자는 이 고양이를 거두었듯이 석사 과정 동기인 빌리 캠벨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인간은 고양이와 다르다. 인간은 일방적인 호의를 받아도 얼마든지 마음속에 악의를 쌓을 수 있는 존재다. 그 호의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그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자괴감과 베푸는 자에 대한 부담감 역시 갖는 것이 인간이다. 전액 장학금을 받고서도 뉴욕에서의 생활비, 주거비를 감당하기 버거워서 컬럼비아 대학교 순수예술 석사과정(MFA)을 그만두고 장학금에 급여까지 받을 수 있는 좀 더 생활비가 저렴한 도시의 학교로 편입하려 했던 빌리의 처지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1주일에 한 번 청소와 때때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것만으로 지내던 곳보다 훨씬 쾌적한 아파트에서 함께 지내자는 화자의 제의는 믿기 어려운 호의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제의한 화자 본인이 자신의 제의가 얼마나 관대하고 경이로운 것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화자가 빌리에게 베푼 호의는 그 자신도, 빌리도 계속해서 의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크고 무거웠다. 화자는 빌리가 자신이 베푼 호의에 부담감을 느낄까 봐 끊임없이 의식하며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빌리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 가 절대 잊지 못했음을 반증한다. 그런데 애초에 아무 이유도 대가도 없이 자신의 거처를 자신보다 재능 있는 친구에게 제공하고서도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의 구절처럼 범인(凡人)에게는 선을 행하기보다 그것을 자부(自負)하지 않기가 훨씬 어렵다. 화자는 빌리에게 집을, 함께 먹는 식비를, 술값을, 자신의 어머니가 사는 보스턴이나 빌리의 사촌 결혼식에 함께 다녀올 비용 대부분을 하염없이 들이부으면서 혹시 그가 자신에게 부채감을 느낄지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실상 화자의 바람은 빌리가 자신의 도움에서 느끼는 거북함을 드러내지 않고 그가 자신을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주지 않는 것, 단지 그뿐이었다.

 

 빌리가 화자에게 끊임없이 신세를 지며 느꼈을 빈곤에 대한 자괴감, 불안감 자체는 언제나 화자의 관심 밖이었다. 언제나 에게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가난하지만 문재(文才)가 탁월한 대학원 동기에게 호의를 베풀고서 생색내는 속물로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 호의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빌리가 그렇게 당장의 곤란을 해소한 후에는 항상 직면했을 슬픔과 고통에 는 언제나 너무나 무책임했다. 빌리의 곤궁을 해소해 준 사람이 언제나 였기에 빌리에게 열등감을 상기시킨 사람도 늘 였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했던 화자는 그 사실에 너무도 무지했다. 빌리와의 관계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함께 흡입할 코카인값까지 내고서는 빌리가 여태 교묘하게 자신을 이용했다며 분노하던 후반부 장면에서, 재능 있는 친구의 애정을 갈구하면서도 그의 입장을 고려하는 데는 너무도 무능했던, 결국 자기 자신을 감싸기에 여념이 없었던 화자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는 자신이 빌리에게 베푼 호의를 감당하지도 잊지도 못했다.

 

 빌리는 의 생각보다 그에 대해 훨씬 많이 알았다. 그의 배신에 가까운 행위는 물론, 빌리 자신이 항상 그에게 신세 지는 처지라고 화자가 의식하고 있음을, 실상 화자는 빌리의 모멸감보다 자기 체면에 연연할 뿐임을 간파했다. 단지 화자가 아무것도 몰랐을 뿐이다. 그러므로 빌리를 너무도 몰랐던 를 너무나 잘 알았던 빌리 사이의 파국은 필연이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이야기는 빌리가 몰랐던 단 하나, 그를 향한 의 애정이 있어서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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