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는 것. 그건 바로 진공이죠. 프랑스인들은 이를 수비드(sous vide)라고 하는데, 인터넷 번역기에 돌려 보니 ‘텅 빈 것보다 더 없는‘이라는 뜻이랍니다. 마치 어떻게든 우리가 텅 빈 상태를 만들수 있거나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들려요. 예를 들어서 우유병에는 마지막 한 방울을 따라낸 후에 어떻게든 우유병을 더 비울 수 있다는 듯 말이에요. 제 생각에 프랑스어로 ‘진공‘이라는 단어는, 오래전 진공을 만들기 위해 공기를 전부 다 빨아낸 후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마지막 공기 방울을 꺼내기 위해 노력했던 그 경험에서 생긴 것 같아요.
"다 비웠나?"
"네!"
"아직이야. 더 비워야 해!" - P20

마지막으로 이 결과에 대못을 박은 건 바로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맥스웰과 뉴턴의 세기의 논쟁에서 뉴턴을 승자로 꼽았지만(당연하죠!) 아인슈타인은 그 여론과 다르게 맥스웰을 최후의 승자로 꼽았습니다. 하지만 뉴턴을 이기기 위해서는 뉴턴이 말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틀 전체를 없애야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모든 움직임은 상대적이다."라고 주장했고 그 주장은 후에 복잡한 수학으로 증명되었죠. 세상에 절대적인 시계나 자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움직이는지를 알 수 있는 건 절대 기준틀이 아닌 그저 다른 것들이 기준이 되어서 가능한 것이죠. - P30

입자도 없고, 빛도 없고,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의 진공 그 자체에도 우리가 절대로 없앨 수 없는 에너지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주 자체에 ‘끊임없는 불안‘과도 같은 그런 에너지가 있다는 말이에요. 불행히도 진공 에너지를 이용해 어떤 재미있는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아는 모든 물리학 법칙, 과학과 생명이라는 존재가 바로 그 배경 에너지 위에 생겨났어요.
그렇다면 진공에 대체 얼마만큼의 에너지가 있을까요? 묻지 마세요. 멍청한 대답밖에 못 드려요. 그래도 꼭 대답해야 한다면……, 무한합니다. 맞아요. 진공에 존재하는 에너지는 무한해요. 우리가 아는 한(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이걸 연구해 왔어요.) 우주에는 무한한 진공 에너지가 있습니다. 상자 하나를 가져다 안에 있는 것을 모두 비워 보세요. 축하해요. 이제 상자에는 무한한 에너지가 담겼어요. - P35

대기와 행성은 서로 얽혀 있어요. 서로 없어서는 안 되는 연인처럼요. 대기 중의 탄소는 다양한 화학 과정을 통해 암석 내부로 침투하게 되고, 지각의 판구조가 바뀌면 그 암석들은 행성의 깊은 내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온화한 움직임 속에서 지각과 대기는 서로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고 행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합니다. - P42

신체에서 가장 산소가 많이 필요한 부분이자 꽤 중요한 기관인 뇌는 산소가 규칙적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몇 초 만에 알아차립니다. 곧바로 절전 상태가 되고 의식과 같은 중요하지 않은 기능들은 꺼지게 되죠. 진공에 노출된 후 단 10초 안에 여러분은 잠이 들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죽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말이에요. 안전한 곳으로 끌려 나온다면 충분히 깨어날 수 있고(의식을 회복할 수 있고) 상대적으로 스트레스 없는 삶을 살게 되겠죠. 하지만 몇 초가 몇 분이 되면서 여러분 몸 내부에 있는 신체 기관들이 산소가 부족함을 깨닫고 절전 모드로 하나둘씩 전환됩니다. 결국엔 여러분 내부의 모든 조직의 전원이 다 꺼지게 되겠지요. 의사들은 이러한 과정을 ‘죽음‘이라고 부르고, 최대한 피하라고 조언하죠. - P50

이 혜성들이 어떤 피해를 입힐 수 있는지 한번 보고 싶으세요? 지구의 천문학자들은 1994년 슈메이커-레비9 혜성의 잔인한 폭격을 목격했습니다. 그 혜성은 목성에 부딪히기 전 21개의 조각으로 부서졌고요. 당시 목성은 충분히 커서 그저 툴툴 털어 버릴 수 있긴 했지만, 목성의 대기가 약간 변했는데요. 이는 전 세계 핵무기 공급량의 600배에 달하는 위력을 가진 가장 큰 충돌이었기 때문이죠.
태양계에서 행성의 왕인 목성이 이 부서진 혜성 조각들을 다 삼켜 버린 것에 감사해야 해요. 그것도 태양계 내부로 진입하기 전에 말이죠. 아니면 연약하고 고립되어 있던 지구가 그 얼음 조각들의 조준선에 딱 놓일 뻔했거든요. 오랜 세월 동안 목성은 행성들 사이에서 그 거대한 중력을 이용해 산란 원반이나 오르트 구름에서 날아오는 신생 혜성의 궤도를 굴절시키거나 흡수시키는 골키퍼 역할을 해 왔습니다. 지난 40억 년 동안 얼마나 많은 혜성들이 우리 대신 그 거대한 행성에 충돌했을까요? - P83

코로나가 어떻게 그렇게 뜨거워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꽤 이상합니다. 코로나의 가장 안쪽 층은 절대 온도 6,500도의 태양 표면입니다. 가장 바깥쪽 층은 절대 온도 0도보다 고작 몇 도 높은 우주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차가운 두 층 사이에 100만 도를 웃도는 코로나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주의 또 다른 심오하고 매혹적인 그리고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입니다. - P102

이 패턴은 놀라울 정도로 규칙적으로 반복됩니다. 지구의 천문학자들은 수천 년 동안 태양 흑점을 관찰했습니다.(기록은 했지만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지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천문학에서는 아주 흔한 경우였죠.) 그러나 지난 수백 년 동안 이러한 흑점을 도표화하고 지도화해 온 결과, 태양이 흑점 정점에서 다음 주기의 흑점 정점으로 이동하는 데 약 11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왜 4년이나 27년이 아니라 11년인가요? 그건 아무도 몰라요. 이상하게도 태양이 점점 약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세기 동안 흑점 수는 정기적으로 감소해 왔으며, 어떤 해에는 흑점이 전혀 보이지 않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최대 활동조차도 과거의 일부 최소 활동만큼 활동적이지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그건 아무도 모르니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 P105

외부 태양계에도 문제가 덜 되죠. 방사선량은 거리의 제곱에 따라 감소하므로 거리가 두 배로 늘어나면 유해지수가 4분의 1로 줄어드니까요. 그러나 내부 행성, 특히 수성은 사악한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공기가 없는 달이나 소행성에 서식지를 꾸미는 경우, 이 서식지 설계자는 바로 이 문제, 많은 방사선량을 피하기 위해 서식지를 지하 깊숙이 배치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터지기를 기다리는 걸어 다니는 암, 시한폭탄에 불과할 것입니다. - P109

그런데 문제이든 아니든, 대기권 내에 있는 한, ‘일반적‘으로 괜찮습니다. ‘100퍼센트‘가 아니라 ‘일반적‘이라고 말한 점에 유의하세요. 지구처럼 자기장이 강한 행성에 있는 게 훨씬 더 안전합니다. 나침반의 침을 움직이는 그 자기장과 같은 자기장이 태양의 하전입자를 움직일 수 있어요. 입자들은 행성의 자기장을 만나면 그 주위를 감아 돌다가 행성의 자기극을 향한 고속도로를 따라 행성의 자기극으로 흘러들어 갑니다. 그러고는 대기권으로 충전하여 (말장난 주의!)‘ 원자에서 전자를 떼어 내어 오로라를 만들어 아름다운 하늘을 보여 줍니다. 지구를 정면에서 조준하는 코로나 방출과 같은 큰 사건이 일어지 않는 한, 오로라를 보려면 추운 곳으로 가야 한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행성의 (대기의) 보호를 받는 사람들은 열대지방에서도 꽤 밝은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우주에 있는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한테는 다른 이야기죠. - P112113

거대한 별에서 발생하는 비교적 온화한 태양 활동은 가장 강력한 방어 체계도 쉽게 압도할 수 있습니다. - P119

익숙해질 거예요. 하지만 그들[우주선(cosmic ray)]이 방사선이긴 해요. 여전히 암을 유발할 수 있는 그런 광선 말이에요. 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적절하게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대신, 이 나쁜 녀석들은 대부분 수소, 약간의 헬륨, 약간의 리튬, 약간의 무거운 원소 등 우주의 다른 모든 물질과 같은 종류의 쓰레기로 만들어집니다. 거기에 반 컵의 전자를 추가해 보세요. 저어 주고 뚜껑을 덮은 후 100만 도에 다다른 오븐에 넣어 보자고요. 완성되기 10,000년 전에 뚜껑을 열고 반양성자와 양전자를 뿌려 줍니다. 크러스트가 노릇노릇하게 익으면 오븐에서 꺼내시고 그 안의 입자들이 상대론적이 된 것을 확인하실 수 있을 거예요. 따뜻할 때 상을 차려야지요. - P122

물론 천체물리학의 대부분의 놀라운 일들이 그렇듯이, 이 이론이 실제로 일어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맞는 이야기인 것은 맞지만, 이 과정이 우주선 가속의 대부분을 설명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상상할 수 있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과정, 즉 우리가 실험실에서 재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능가하는 과정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아내기가 쉽지는 않죠. 어쨌든 말이죠, 우주선은 여기에 있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거예요. 제가 여기저기서 전문 용어들을 좀 썼는데 데이트나 파티에서 한번 사용해 보세요. 하지만 2차 페르미 가속은 뒷주머니에 넣어 두고 꺼내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사람들이 여러분이 천체물리학자라고 생각하길 원하지 않으시겠죠? - P125126

그리고 지구 자기장은 지구를 감싸고 있으며, 지리적 극 근처의 대기권에 구멍을 뚫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전입자들이 놀라운 속도로 대기권 안으로 날아들어 오는 거죠. 그리고 이동하면서 대기 상층부에 있는 분자에서 전자를 빼앗아 갑니다. 결국 그 빼앗긴 전자들은 원자 옆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데, 이때 전자는 빛의 형태로 약간의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최종 결과, 이 모든 하전입자가 대기로 유입되면서 우리를 위해 작은 빛의 쇼를 펼치곤 하죠.
우리는 이것을 ‘오로라‘라고 부릅니다. 너무 아름다운 현상이에요. 다음에 지구에서 오로라를 보게 되면 그것은 지구가 모든 방어 시스템이 완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라 생각하시면 되겠어요. - P133

그런데 그러지 마세요. 목성은 태양계에서 가장 센 자기장을 가지고 있어요. 태양보다 더 강한 자기장이에요. 이는 말 그대로 태양계 전체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오로라를 만들어 냅니다. 목성 주변 환경은 이러한 고에너지 하전입자로 매우 두껍게 덮여 있기 때문에 지구에서 가장 튼튼한 우주선도 몇 궤도 이상을 돌지 못하고 기계적 손상을 입게 됩니다. 정말 지독한 곳이죠. - P134

일반적으로 우리가 엑스선 검사를 받을 때는 엑스선 때문에 암에 걸릴 확률이 약간 커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지금 당장 내 몸 안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내요. 그렇게 위험과 검사 결과의 균형을 맞추는 거죠. 그러나 우주선은 누가 요청하지도 않았고 필요하지도 않은 엑스선 검사인 셈이지요. 해가 거듭될수록 우주 반대편에서 죽어 가는 별 때문에 지구에서 암에 걸릴 확률이 더 커질 수 있다는 거예요. - P139

대부분의 우주선은 양성자이지만, ‘양성자‘ 자체는 단일의 입자가 아닙니다. 양성자는 다른 입자, 즉 쿼크 입자들이 글루온에 의해 붙어 만들어진 입자입니다. 그것은 공 같은 거예요. 복잡한 녀석들이 뭉쳐 있는 덩어리입니다. 양성자를 단일 개체로 생각하지 말고 생물학적 세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세요. 사람이 세포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물질들이 양성자로 만들어질 수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니죠. 세포는 다른 물질로 만들어져 있고 마찬가지로 양성자도 다른 물질로 만들어져 있다는 겁니다. - P145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알려 드릴게요. 이 입자 소나기에 있는 입자 중 하나가 뮤온입니다. 뮤온의 수명은 수 마이크로초(1마이크로초는 10의 -6승 초)로,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대기권 상층에서 지상에 닿을 만큼 그 수명이 길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를 가진 뮤온은 상대성 이론의 시간 연장 효과 덕분에 입자의 내부 시계는 느려져서 작은 파괴의 힘으로도 이 세상을 가격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시간을 갖게 됩니다. - P147

별의 죽음은 찬란하고 감동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성간 수로를 무거운 원소로 오염시키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 P163

천문학자들과 탐지자들은 어두운 성운과 별을 형성하는 복합체를 새로 발견할 때마다 은하 지도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있습니다. 특히 은하계 중앙면을 탐험할 때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은하 지도가 최신으로 업데이트되어 있는지 확인하여 안전한 경로를 계획할 수 있도록 하세요. - P167

갑자기 무너져 내리는 카타스트로피 붕괴를 겪고 있는 거대한 분자 구름(giant molecular cloud, GMC)의 경우, 난기류가 시작되면 구름이 파편화되어 한때 균일했던 거대한 성운이 이제 조각조각 떨어져 나와 다른 모든 것과 단절된 채 독자적인 북소리에 맞춰 행진을 하게 되죠. 아이를 낳고 친구들 모임에서 사실상 사라져 버리는 친구처럼, 이 조각들은 그들만의 우주에 남아 있을 수도 있겠네요. 덩어리, 덩굴손, 시트, 이러한 것들이 기체 구름이 보여 주는 매우 복잡하고 풍부한 구조들입니다. - P170171

그러나 원시 행성계의 바깥쪽은 충분히 온도가 낮아서 얼음으로서 번성하여 다른 먼지 형제들과 합쳐져 더 큰 덩어리를 만들게 됩니다. 모든 항성계에는 모별의 크기와 강도에 따라 얼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경계선이 있는데요. 이를 서리선(frost line)이라고 합니다. 우리 태양계에서는 이 서리선이 소행성대 거리 정도에 있습니다. 이 선을 지나면 결국 행성으로 변할 덩어리들은 중심에 있는 별을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서리선 안쪽 중력 우물과 더 가까이 자리 잡은 동료들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거대합니다. - P186187

블랙홀을 검게 만드는 것은 블랙홀의 표면에서의 탈출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빠르기 때문입니다.(나중에 ‘표면‘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블랙홀을 탈출하려면 빛의 속도보다 더 빨리 가면 되겠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반론의 여지가 없죠. 우리 우주에서 빛보다 빠르게 이동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 P195

예를 들어 태양 질량의 몇 배에 달하는 블랙홀은 가로 길이가 수 킬로미터에 불과합니다. - P196

탈출 속도가 빛의 속도와 정확히 같은 곳인 표면을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라고 하는데요. 지평선이라는 단어가 이름에 들어간 이유는 지평선이 가장자리, 어떤 경계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행성 위에 서 있을 때 표면에서 볼 수 있는 것의 한계가 바로 지평선이죠. 그 너머에는 완전히 미지의 세계인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을 것이고요. 따라서 블랙홀의 지평선은 미지의 새로운 세계, 잠재적으로 알 수 없을 수밖에 없는 세계로 진입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사건‘이라는 단어는 왜 붙었을까요? 글쎄요, 그건 그곳이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이겠죠. 파티 같은 이벤트 말이에요. 파티지만 여러분이 죽을 수 있는 곳입니다. - P196

우리가 중력이라고 부르는것은 시공간 기하학이 만들어 낸 결과물입니다. - P197

네,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이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다지별 상관없었던 것 같아요. 그쵸? 그런데 어떤 똑똑한 사람으로부터 이런 질문이 즉각 나왔던 거죠. 물질의 공을 슈바르츠실트 반지름보다 작게 뭉개면 과연 어떻게 될까. 괜찮을까요?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까요?
이럴 경우 어떻게 되는지는 일반 상대성 이론의 수학은 그곳에서 일어날 붕괴 즉 완벽하고, 완전하고, 돌이킬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그렇다고 어떤 비난도 받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붕괴가 어떻게 일어날지 정확히 알려 줍니다. 어떻게든 물질 덩어리를 슈바르츠실트 반지름 아래로 뭉개 버리면, 단순히 중력이 이길 것이고, 중력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모든 것이 중심을 향해 붕괴하고, 그 주변(한때 좌표 특이점이라고 불렸지만 곧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슈바르츠실트 반지름 안쪽으로의 모든 지역)의 중력이 압도적이 되어 어떠한 물질로, 심지어는 빛조차도 빠져나갈 수 없게 됩니다.
블랙홀이 생겼습니다. - P199200

(카를) 슈바르츠실트는 평생 블랙홀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수학이라는 안정성 있는 도구를 바탕으로 이 모든 것을 알아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 P200

태양을 가져다가 태양 질량의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에 해당하는 5킬로미터 지름의 크기로 축소시키면 블랙홀이 됩니다. 지구를 가져다가 땅콩만 한 크기로 압축하면 블랙홀이 되는 거예요.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 경우라도 걱정 마세요. 방금 블랙홀을 만들었고 지금 당장 걱정해야 할 알레르기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상관없습니다. - P200

여러분은 거울에 스스로를 비춰 보며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질량이 크지 않고 그 질량에 해당하는 중력도 약하기 때문에 블랙홀이 아닙니다. (사실 중력은 힘 중에서 가장 약한 힘입니다. 중력이 지금보다 10억 배의 10억 배 또 10억 배 더 강해도 여전히 가장 약한 힘일 것입니다. 왜 그렇게 약한가요? 좋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답은 아무도 모릅니다.) - P201

그게 말입니다, 블랙홀을 형성할 수 있을 만큼 있는 대로 작게 물질을 쑤셔 넣거나,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을 만큼의 자기 중력을 만들고, 마침내 자신의 슈바르츠실트 반지름보다 작은 거리의 안쪽으로 포개질 수 있게 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물질로 시작해야 합니다. 태양보다 적어도 8~10배는 더 많은 물질로 말이죠. 그래야만 다른 모든 힘을 압도하고 블랙홀을 만들기에 충분한 중력이 생깁니다. 또 설사 그렇게 된다 해도 블랙홀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은 건 마찬가지예요. 가장 큰 별은 죽을 때 격렬하게 폭발하는 경향이 있으며 (나중에 즐겁게 탐험할 수 있도록) 대부분의 질량은 깊은 우주로 날아가 버리거든요. 따라서 폭발 후 중력이 작용하여 블랙홀을 만들기에 충분한 물질이 남아 있을 정말 정말 큰 별이 필요합니다. - P203

블랙홀 표면에서 방출되는 입자가 있다고요? 제가 보기엔 빛 같은데요. 그렇다면 그 에너지는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블랙홀 자체에서 얻은 거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진공에서 튀어나온 입자가 우주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을 우주 자체가 발견했다면 누군가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그 청구서는 블랙홀의 우편함에 정확히 도착할 겁니다. 그 대가로 블랙홀은 약간의 질량을 잃는 방식으로 그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죠. - P211

(사건의 지평선 내부에서 형성된 것은 영원히 갇혀 있지만, 그 일방통행의 경계 근처에 있는 것은 단지 고통스럽게 오랫동안 갇혀 있을 뿐입니다.) - P212

전자가 미세 블랙홀에 부딪힐 확률은 야구공으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야구공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여기저기서 미세한 블랙홀이 마구 떠돌아다니고 있을 수 있지만, 너무 작고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 P213

별과 은하가 처음 생겨났던 우주 존재의 첫 수억 년 동안에는 별이 되는 첫 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블랙홀을 형성하기에 충분한 물질이 붕괴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이것이 우주에 존재하는 거대한 블랙홀의 원인일 수 있는데, 그 과정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기 전까지는 크게 논의하지 않기로 하죠. - P214

태양 두 개 질량의 블랙홀 궤도를 도는 것은 태양 두 개 질량의 별 궤도를 도는 것과 똑같습니다. 열이나 빛, 따뜻함, 햇빛 등 생명체가 살아갈 만한 요소야 전혀 없지만, 그 주위 궤도를 돌 수는 있어요.
탐험가 앨리스와 밥은 블랙홀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완벽하게 안전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멀리 있어야 하냐고요? 정확한 질량에 따라 다르지만, ‘충분히 먼 거리는 없다‘는 게 제가 드릴 수 있는 적절한 조언일 거예요.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블랙홀의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의 10배 이상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 P215

백색왜성 표면의 중력은 매우 강해서, 만약 여러분이 백색 왜성에 고립된다면 광속의 2퍼센트 정도의 속력을 낼 수 있는 로켓이 있어야만 탈출할 수 있습니다. - P265

오리온자리의 어깨에 있는 붉은 거대 별인 베텔게우스를 보세요. 이 별은 조만간 초신성이 될 것입니다.(천문학에서 ‘조만간‘이란 향후 수백만 년 정도를 뜻합니다.) 마침내 폭발하면 1,000년 전의 새로운 별이 그랬던 것처럼 대낮에도 하늘에서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것은 강렬한 빛의 단일 점으로 나타나고 밤에는 보름달보다 더 밝을 것입니다.
베텔게우스가 죽으면 자정에 편안하게 책을 읽어 줄 수 있을 정도로 밝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한밤중에 서서 그 거대한 별의 마지막 격렬한 순간에서 방출되는 빛에 의해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를 볼수 있을 것입니다. 과장이 아니에요. - P287

수명이 다한 거대한 별을 조심하세요. 별이 태양 질량의 10배가 넘는다면 폭발에 너무 가까이 다가갈 위험이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보이는 별에서 폭발적인 죽음의 폭발로 바뀌는 데는 단 몇 초밖에 걸리지 않으며 경고도 거의 없습니다. 충격파와 감마선으로 인한 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는 최소 수십 광년 떨어진 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 P311

보통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으시죠? 자석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하루 종일 자석을 가지고 놀 수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가장 강한 자기장도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그네타나 일반 중성자별(부연하자면, 뉴트로타라고 부르면 좋았을 텐데 아무도 제 말을 듣지 않습니다.)에 가까이 가면 신체 화학이 무너집니다. 심장을 뛰게 하고 뇌를 생각하게 하는 생물학적 과정인 분자의 배열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 여러분은 그냥 용해되어 버리는 거죠. 이러한 작은 별 지진이 중성자별의 표면을 잠시 파열시켜 결함을 일으키면 자기장이 예기치 않게 강화될 수 있습니다. 자기장의 변화는 전기장으로 이어져 자기장으로 전환되어…… 결국 빛이 되어요(•전기장과 자기장이 함께 있으면 그게 곧 빛이지요. 빛은 결국 전기장과 자기장이 만드니까요.). 전자기선, 특히 감마선요. - P322

우리은하 가장 깊은 곳, 작은 블랙홀의 잔해와 수많은 거대 별들로 둘러싸인 그곳은 야수 그 자체가 묻혀 있는 것과 같은 셈이죠. 우리 인간은 그런 극한에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순수한 중력과 악의로 가득 찬 거대한 생명체가 우리 인간이 우주에서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상기시키며 증오하는 곳이 바로 그곳, 바로 우리은하의 중심부입니다.
감히 그 이름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내부로 여행할 때 마주칠 수 있는 상황을 경고해 드려야 하기에 반드시 말해야 합니다. 중력을 말하는 거예요. 어둠을 말하는 거고요. 무한함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미지의 것에 대해, 그리고 공허에 대해 말하는 거지요.
은하계의 죽은 중심에 있는 죽은 중심. 바로 초대질량 블랙홀인궁수자리 A*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P333334

다른 은하로 이사한다고 해서 초대질량 블랙홀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피할 수 없어요. 마치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 누구나 어두운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보는 모든 은하는 검은 심장을 가지고 있거든요. 가스, 별, 심지어 암흑 물질(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까지 은하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원재료는 중력이 좋아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중앙에 다 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물질과 중력이 중심에 있고, 그리고 중력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없으니 알아차리기도 전에 블랙홀이 형성되어 있을 것입니다. - P335

또한 제가 블랙홀의 크기를 두 가지로만 이야기했다는 점도 눈여겨보실 수 있습니다. ‘작고 새우 같은‘ 크기와 ‘큰(뭐든 꿀꺽 삼킬 만한) 물고기‘ 크기입니다. 블랙홀은 태양 질량의 수 배에서 50배에 이르는 작은 블랙홀과 태양 질량의 수백만 배에 이르는 초대형 블랙홀, 이 두 가지 종류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일까요? 중간 크기의 블랙홀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태양보다 1,000배 또는 10,000배 더 큰 블랙홀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요? 왜 아주 작거나 아주 큰 거 이렇게 두 가지의 크기로만 나뉘는 걸까요? 물론 초대질량 블랙홀은 극단적인 질량으로 가는 도중에 어느 시점에서든 중간 질량이어야 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블랙홀의 거대화 과정은 우주의 누구도 알아차리기 전에 비교적 빠르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일단 정착하고 진화한 거대한 블랙홀은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은신처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모든 거대화와 초거대화가 아마도 은하가 처음 형성되기 시작한 우주 초기에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중간 크기의 은하가 남아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모두 덩치들이 커진 후지요.
작은 블랙홀은 고향 은하의 거대한 부피 속에서 고립되고 외롭기 때문에 작은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커져 가는 블랙홀은 초대질량 블랙홀로 가는 도중에 멈추지 않을까요? 우주는 단순히 중간 크기의 블랙홀을 만들 수 없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 P338339

저에게 해결책이 있습니다. 숙제를 하나 드릴게요. 가장 가까운 왜소 은하로 가서 중간 크기의 블랙홀이 보이면 알려 주세요. 은하 중심에는 너무 많은 위험이 있으니 그쪽으로 가려고 하지는 마시고요. 하지만 왜소은하계는 거의 무해하기 때문에 그곳에서 답을 찾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지요. 아니면 천문학자들에게 10년 정도 더 시간을 주면 됩니다.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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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물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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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키장, 국도와 지방도 교차점, 습지대 산책로, 주택가의 쓰레기 수거장, 패밀리 레스토랑. 사건의 종류는 살인, 교통사고, 방화, 인질극으로 범위가 넓지만 사건의 배경은 특히 일상에 가깝다. 이 중 몇 편은 얼마 전 일본에 다녀오며 읽었는데, 주변이나 TV에서 본 듯 익숙한 장소들의 사건이어서 한결 몰입이 됐다. 애초에 서울에서도 흔한 풍경이지만, 일단 이 연작 단편의 화자인 군마 현경 수사1과의 가쓰라 경부와 등장인물들이 일본인이므로 이런 언어들이 오가는 곳에서 있었을 법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다. 어차피 군마현에는 가지도 않았지만. 신칸센으로 교토에서 도쿄로 내려갈 때 스쳐 갔으려나.

 

가쓰라는 문득 자기가 아직 신참 형사였던 시절을 떠올렸다. 형사과에서는 위화감은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훈련받았다. 그 시절, 일반 기업에 평생 몸담았던 71세 남성이 정년 후에 경비원으로 일을 한다면 뭔가 특별한 사정이 있어 금전이 필요한 건지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리라. 지금 가쓰라는 딱히 뒷조사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가연물)-236

과장까지 승진한 니토베는 부하들이 자신에게 충실하기를 요구한다. 달리 말하면 니토베는 예스맨만 곁에 두기 좋아하고, 중심으로 하는 진언보다 노골적인 아침과 추종을 좋아했다. 경찰이라는 상명하복 조직에서 윗사람이 까마귀는 하얗다고 하면 아랫사람은 맞는 말씀이옵니다, 하고 따르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니토베의 부하 중에 그의 안색을 살피는 형사는 거의 없다. 니토베 스스로가 자기 기분이나 맞추는 형사와 유능한 형사를 비교해 보고 후자만 수사1과로 데려오기 때문이다. 어딘가 한 명쯤, 심복으로 삼을 만한 유능한 형사가 없는지 간절히 바라면서 니토베는 결국 자기 뜻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실력주의 집단을 조직해 왔다. 때문에 나토베는 부하들을 대할 때 늘 심기가 불편하다. (졸음)-110

 

 독자들의 일상에 밀착한 장소와 인물들을 내세워서, 그것도 단편으로 미스터리를 구성할 때 어디에 어떻게 익숙함과 생경함을 교차시켜야 할지 작가가 고민했을까 궁금했다. 그런 것은 딱히 문제가 아니라고 단언해도 물론 납득했겠지만, 그 점을 중요하게 고려했다고 말하더라도 역시 그럴 것이다. 작품 속의 소재와 구성에 특유의 분위기를 어떻게 입힐지는 전체 흐름상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쉬울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의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구현하기란 애초에 어려울 수도 있다. 사건에 임하는 가쓰라라는 경찰의 내면, 그가 처한 상황의 맥락은 지금 이 이야기가 독자의 일상과 얼마나 가까운지, 그 인상을 매듭 짓는 요소다. 이 사건들의 장소가 선거철 정치인들의 시장 방문처럼 일상을 향한 아첨이 아니라는, 작가의 결정적인 설정이다. 설정은 설정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감출 때보다, 가능한 한 정치精緻해질 때에 설득력을 얻기가 쉽다.

 

다시 말해 흉기는 현장에 있었지만 그것이 흉기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경우는 부정할 수 있다.”

혼자뿐인 회의실에서 가쓰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맛있는 차다. 도네 경찰서에는 차를 맛있게 끓이는 경찰관이 있는 모양이다. (낭떠러지 밑)-47

그렇다. 시체는 나올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누군지는 몰라도, 어째서 시체를 토막 냈을까?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하면, 설령 모든 부위를 찾아내고 피의자를 알아내도 이 사건의 진상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가쓰라는 결국 모든 것은 이 어째서로 귀결될 것이라고 예감했다. (목숨 빚)-138

 

 그렇다면 이렇게 일상의 개연성을 묘파한 후, 이런 일상에서 발생한 사건의 의외성은 어떻게 구축할까. 읽을 만해진 이야기는 어떻게 읽고 싶어질까. 가쓰라는 사실상 사건을 처음 직면할 때부터 추론의 비약을 사실상 거의 끝낸 상태다. 그가 관계자, 용의자들과 집요하게 대화하는 과정은 그 비약을 마무리하는 수순에 가깝다. 물론 나는 이런 사실을 이야기의 끝에 이르러서야 깨닫는, 전형적인 둔한 독자다. 아마도 처음부터 이야기의 구석구석에 가쓰라가 비약한 디딤돌들이 정직하고 친절하게 흩어져 있으리라는 감 정도는 있지만 내 수준은 딱 거기까지다. 대부분은 사건이 결말에 다다르도록 감을 잡지 못해서, 그 돌들이 정말 있기는 했던 것인지 의심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니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그런 감 따위는 있으나 마나다. 하지만 사건 따위는 생각보다 희귀한 일상에, 사건과 해결의 단서는 얼마든지 흩어져 있고, 그럴 수 있다. 그것을 내가 얼마나 실질적으로 알아채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물론 가쓰라와 독자가 이 작품 속에서 사건에 관해 동일한 단서를 제공받았더라도, 그로부터 진상에 대한 가설을 도출하는 구조가 경찰로서의 정량적인전문성 이상의 정성적인판단력에 기인한다면 추리 내지는 미스터리로서는 다소 불평을 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직 단서 자체에서 연역적으로 접근하는 치밀한 퍼즐 같은 미스터리는 일상을 묘파하며 설득력을 획득하는 이 작품과 범주가 다르다. 일상에서의 사건, 그 사건의 수사와 해결이라면 자의적이며 귀납적인 가정은 피할 수 없다. 애초에 이 작품을 읽을 때 누구도 나에게 그런 가정을 금하지 않았다. 가쓰라의 상사와 동료들이 수시로 불편해 하는 정경은 보고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이것이 가능의 영역에 있다는 반증이었다. 이 점도 지금 이 글을 쓰면서야 떠올리고 있다.

 

 일상에서는 수시로 단정을 일삼는 주제에, 이 단편들을 읽을 때는 참 순진하게 주어진 단서들을 찾고 엮는 데만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가쓰라는 증거와 단서가 모였을 때, 더 모으기보다 비약을 준비했다. 이 작품이 흥미진진한 것은 핵심 증거, 단서가 가쓰라 눈에만 보일 정도로 희미해서가 아니다. 선명한 사실들을 확보한 가쓰라가 위험, 의심, 비난을 감수하고 귀납적, 개연적으로 타당한 결론을 도출해내서다. 물론 마지막 진짜인가에서는 그런 예단의 예단이라도 과연 가능한 사람이 있을지 되묻고도 싶었지만, 공교롭게도 이것이 이 책의 마지막 단편이어서 납득했다. 가쓰라의 추론들을 살펴본 귀납적 결과인 셈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게다가 모두 일본의 잡지 올 요미모노에 게재된 이 책의 단편들은 수록 순서가 게재 순서와 다소 다른데, 추론이 자의적인 정도를 따지면 현재의 순서가 더욱 납득이 된다. 점점 더 멀리 뛰어넘은 셈이다.

 

그 후로 다카사키 미노와 경찰서 지역과에 노스에 유코가 거리를 헤매고 다닌다는 신고가 지속적으로 접수되고 있다. (목숨 빚)-195

시다 하루타는 사건 다음 달, 이세사키 시립 도네가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사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듯이 씩씩하게 지내는 것 같다는 소식을 훗날 이무라가 가쓰라에게 전해 주었다. (진짜인가)-328

 

 다섯 편의 이야기는 사건 자체와 다소 거리를 둔 듯한 어조와 시선의 짧은 후일담으로 마무리된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아무것도 아닌 척하며 흘리듯 말하지만 이 사건들 하나하나에 무척이나 마음 쓰는 누군가가 느껴진다. 그럴 일이 아닌데도 너무 스산해져서 구체적인 문장은 잊어버리고 이런 감각의 상황까지 묘사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한 대목도 있다. 또는 아무렇게나 터무니없이 안도가 되기도 했다. 골목 끝의 끝까지 가도록 손님을 배웅하는 일본의 요리사처럼, 이야기의 귀결을 책임지고 응시하는 이 작가의 가능한 한 긴 시선 덕분이다. 훌쩍 뛰어넘는 사람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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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생명 - 양장
류이치 사카모토.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황국영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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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전략) 아날로그 신시사이저에도 약간의 재현성은 있지만 제어된 파라미터parameter(전자악기에서 특정한 음을 내기 위해 설정하는 모든 요소를 일컫는 말-옮긴이)를 디지털적으로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않기 때문에 전원을 켠 후 경과한 시간이나 기기의 발열 등 여러 요소에 의해 소리가 바뀌므로 나중에 재현할 수 없는 소리도 상당히 많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재미를 느끼고요. -37~38

 

 피시스의 무수한 노이즈에서 두드러지는노이즈를 추출해 그 재현, 반복 가능성을 검증한다. 이 검증을 통과한 노이즈가 모여 보편타당한 로고스를 이룬다. 여기서 피시스는 사실상 노이즈와 같다. 이 책에서 대담을 하는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와 생물학자 후쿠오카 신이치는, 피시스에서 로고스를 산출하는 이 과정을 현대의 예술과 과학의 공통점으로 본다. 그리고 두 사람의 공통점은 바로 이 과정을 거슬러서, 노이즈의 원천인 피시스 자체의 역할과 가치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사카모토: 로고스로 설명하지 못하면 뉴에이지New Age(20세기 후반에 나타난, 새로운 시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영적인 운동을 말한다-옮긴이)의 세계가 되어버리니까요. 미국 과학자 중에도 뉴에이지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있지만, ‘요즘 그 사람, 뉴에이지가 다 됐던데라는 평가를 듣지 않으려면 로고스적 이해로도 납득할 수 있는 형태를 만들어야 하잖아요. 그들을 이해시키려면 로고스라는 공통 언어를 쓸 수밖에 없죠.

 

후쿠오카: 바로 그거예요. 피시스와 로고스의 대립에서 느닷없이 피시스 쪽으로 가버리면, 뭐랄까, 오컬트적으로 접근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리니까요. 세계는 항상 진동하고 있다는 식의 뉴에이지스러운느낌은 지양하고 싶어요. -119~120

 

 물론 로고스 너머, 로고스가 배제한 맥락을 재조명하는 관점 자체는 더 이상 새롭거나 놀랍지 않다. 어쩌면 다시금 로고스 자체의 교조적의의를 강조하는 훈계가 이보다는 좀 더 새롭거나 놀라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두 대담자 사카모토와 후쿠오카도 강하게 의식한 듯하다. 피시스를 예술과 과학의 영역으로 포섭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로고스의 문법으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는 둘의 공감대가 그 반증이다. 이 책의 중요한 의의도 바로 이 공감대, 보다 핵심적인 공통점에 있다. 이들이 단지 피시스를 온전히 포착,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 피시스의 포착과 제시는 창작자, 연구자 본인의 자기만족에 그칠 가능성이 재현, 반복, 검증을 요구하는 로고스에 비해 월등히 크다는 사실을 절감했음을 여기서 확인한다.

 

 단지 로고스가 자의적, 권위적으로 배제했다는 이유만으로는, 굳이 피시스를 초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수용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미 로고스의 길에서 대성했음에도 피시스의 의미를 발견한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새 길을 찾기까지 회의하는 사람은 많아도, 새 길을 찾고 나서도 회의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을 일종의 자존심 문제로 생각할 정도로, 인간 대다수의 자존감이 부실하다는 반증일지 모른다. 아무튼 다시금 피시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통찰하며, 이 지점에서 두 사람의 의견이 만나는 장면만으로도 이 책은 꽤 인상적이다.

 

 로고스를 극복하거나 압도할 피시스의 계시나 신조信條를 기대했다면, 이런 유보적인 태도에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로고스가 배제된 뉴에이지의 세계를 지향하거나 그렇다고 인정하지는 않지만 로고스를 배제할 수만 있다면 감수할 사람들 말이다. 사카모토와 후쿠오카는 이런 사람들을 이해시키느니 로고스의 사람들에게 피시스를 전하는 쪽은 택했다. 그러므로 이중으로 고독하고 곤란했을 것이다. 친구가 될 뻔한 사람은 떠났는데, 친구가 될 사람은 오지 않는 길을 간 셈이다. 그 와중에 만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소중한 것은 당연하다.

 

사카모토: 깨부순다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도자기를 빚어서 이것이 제 앨범입니다. 수령 후 부숴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동봉한 다음, 부술 때 발생한 소리를 저의 음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곤 해요. 그걸 위해 직접 흙을 찾는 여정을 떠나도 좋겠다고 생각하고요. -44

 

 이 책은 논리의 한계를 통찰했을지언정, 그것이 영성靈性으로 비약하기를 원하지 않은 두 사람의 대화다. 논리를 믿는 사람도 영성을 찾는 사람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은 이들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어쩌면 그렇게 누구도 만족하지 않는 까닭에 더더욱, 논리로써 우연을 아우르는, 그 희미하며 정묘精妙한 지점을 추구했을 뿐이다. 누군가가 만족하거나 하지 못하는 것은 애초에 중요할 수 없는 문제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보낸 도자기를 깨부수며 그의 소리를 기꺼이 듣고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 만큼, 이런 이야기만 듣고도 허세라며 싫어할 사람은 있다. 피아노를 자연으로 돌려보내듯, 흙에서 음악을 길어내려면 더 많은 소음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소음을 들을 필요도 없다. 그래서 그런 소음이 더 늘어나더라도 그런 것 따위는 더더욱 아랑곳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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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가장 긴 실만을 써서 무늬를 짠다
타스님 제흐라 후사인 지음, 이한음 옮김 / EBS BOOKS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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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에 이 책이 나오자마자 샀던 것은 저자 타스님 제흐라 후사인이 파키스탄 여성 최초로 끈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물리학자라는 점에 우선 끌려서였다. 그는 이탈리아, 스웨덴 스톡홀름대, 미국 하버드대 등에서 연구했고, 2021년 기준으로는 고향인 파키스탄 라호르의 LUMS 과학공과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다음으로는 그가 현대 양자역학, 그중에서도 2012년 스위스 제네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세른)의 힉스 입자 발견을 기준으로 지난 300여 년 물리학사의 가장 중요한 여섯 발견을 다룬 대중서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저명한 현대 물리학자들의 추천이 그 가치를 충분히 뒷받침해준다는 생각도 물론 들었고, 마지막으로 제목이 적확하고 유려했다.

 

물리학과의 우리 모두는 그 기사가 어떻게 나왔는지 잘 알았다. 균형 잡힌 시각에서 잘 쓴 기사였다. 그는 연구자들을 희화화하지 않았고, 그들의 연구 경력에 입발림하는 칭찬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기사가 크게 호평받은 것은 그가 연구 정신과 그 연구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제대로 포착했기 때문이다. 그 기사는 내가 지나다니는 복도 게시판에 꽤 오랫동안, 몇 달 동안 붙어 있었고, 나는 작게 나온 그의 사진과 이름도 본 적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레오나르도…… 뭐 그런 쪽이었다. -31

 

 이 책을 살 때부터 다소 걸렸고, 어쨌든 사고 나서도 미뤘던 것은, 결국 저자가 저 내용을 담은 형식이 소설이어서였다. 분야를 막론하고 어느 분야의 구성원이 쓴 자기 분야에 관한 소설은 썩 내키지 않는다. 드라마나 영화라면 딱히 좋지도 싫지도 않은데, 책만 그렇다. 국문학과나 영문학과 교수가 소설을 쓰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각각 국문학(), 영문학() 자체에 대한 소설을 쓴다면 그 역시 내키지 않는다. 자기 얘기를 그렇게까지하고 싶어한다는 점이 돌부리다. 이 책의 저자와 그 주제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도착한 책을 들춰보니, 물리학과 관련된 두 남녀의 미묘한 감정이 이야기의 얼개를 이룬 듯했다. 드라마나 영화는 호불호가 없다고 방금 쓴 주제에, 의사가 쓴, 병원에서 의사들이 연애하는 이야기는 매체가 무엇이든 싫지 않다고 말하기도 싫다. 어쨌든 이 책의 구성을 2012년의 물리학 관계자인 두 남녀가 지탱하고 있음에도 이 부분을 보도자료에 밝히지 않은 편집자의 마음을 이해했다. 나도 최대한 그렇게 썼을 것이다. 로맨스가 전개의 핵심이지만, 주제나 내용의 핵심은 아니니까. 안 쓸 수만 있다면야. 소설이면 이미 충분하지. 그리고 내가 고마워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로맨스도 한 스푼 들어갔다는 점을 굳이 밝혀 줬더라면, 저 지점들이 마음을 끌어도, 미리보기로 정성스레 트집 잡고서 주문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꽤 높다. 내부인이 자기 분야를 소설로 썼는데 로맨스 요소까지 있다니. 지친다.

 

내가 쓰는 기사에 스스로 점점 만족을 못 느낀다고 털어놓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그에게 여전히 과학에 관해 쓰고 싶지만, 다른 식으로 쓰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편집자가 으레 하듯이, 조가 이 새로운 방식이 어떤 것인지 물었을 때 나는 딱 부러지게 대답하지 못했다. - 23~24

이 힉스 보손 기사 말인데요,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지요? 오늘 아침 여기에서 터져 나온 감정에 관해서도 썼어요? 이 연구에 매달려온 사람들, 아니 이 연구 자체가 삶이었던 사람들의 기쁨은 담았어요? 그들의 흥분, 혼란 그리고 그들이 이 연구에 쏟아부은 피와 땀, 눈물은요?” -56

 

 사기 전에 로맨스 요소를 몰랐던 것은 행운이고, 사고서 로맨스만 잡아낸 것은 성급했다. 알고 보니 로맨스가 아니었다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역시나 로맨스는 제 구실을 했다. 단지 그 로맨스 자체가 정말로목적이 아니었을 뿐이다. 아니면 지극히 부수적인 귀결이거나. 남성 레오나르도는 과학 전문 저널리스트이고, 여성 사라는 끈 이론을 연구하는 대학원생이다. 두 사람이 힉스 입자 발견을 공표하는 2012년의 세른에서 만난다. 작가는 이 지점을 기꺼이 감수했을 것이다. 둘은 서로에 대한 호감만큼이나 자신의 작업, 저술과 물리학에 충실하다. 로맨스도 결국 그 진지함에서 기원한다. 이 얼개가 저자의 자기 미화라면, 그 설득력은 부족하지 않다.

 

맥스웰의 방정식은 겉으로 보기에는 진동하는 전기장이 진동하는 자기장을 생성하고, 또 그 반대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지. 그런데 끝없이 번갈아 진동하는 이 운동이 빛의 요람을 만든다는 사실이 드러난 거야. 빛은 맥스웰의 이론에서 파동으로 여겨져. 이 방정식에서 도출된 일정한 속도로 전자기장에서 퍼져나가는, 자체적으로 유지되는 물결치는 교란이야. -167

나는 난생처음 보는 듯 밤하늘을 응시했다. 별빛이 무심하게 태양 옆을 쌩 지나치는 대신에 사실상 고개 숙여 인사한다는 것을 과연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우리가 전혀 모르는 컴컴한 깊은 우주 공간에서 이 미묘한 사회적 인사 교환이 기나긴 세월 동안 이루어져왔다. 나는 천체가 얼마나 더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는 자연의 섬세한 예의범절이 또 뭐가 있을까? -234

방정식들은 자신들이 자취를 남긴 우회로를 충직하게 따라오면 길이 조금씩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반복해서 증명했지. -300

 

 2012년의 두 사람이 자아내는 지난 300여 년의 물리학적 사건들은 널리 알려진 거인들이나 그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시점이 아니다. 모두 뉴턴, 맥스웰, 아인슈타인, 보어 등이 아닌, 이미 그들의 업적, 그들이 바꾼 세상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여전히 경이로워하는 주변 사람들이며, 사건이 여파가 미치는 시점이다. 거대한 당사자의 일방적인 경이가 아닌, 그가 일으킨 경이의 공명을 섬세하고 설득력 있게 묘사해냈다. 파키스탄 최초의 여성 끈 이론 물리학자라는 저자의 경험은 책에 담긴 구체적인 사실의 정확성뿐만 아니라, 너무나 낯선 지식과 전환이 어떤 여지도 없이 납득될 때의 다채로운 경이감을 묘파하는 힘이 된 듯하다. 지금까지 물리학의 경로는 당연하지 않아서 놀랍고, 그 당연하지 않은 것이 제 위치를 당연히 찾아가는 까닭에 다시 놀라운 걸음들로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그저 당연하거나 당연하지 않아서 걸어온 길이 아닌 셈이다.

 

마치 온기와 보금자리를 제공했던 공리들이 조각나 부서지고, 우리는 춥고 발 디딜 곳도 없는 무지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지. 때때로 이런 식으로 사유 체계에 구멍이 뻥 뚫리는 듯할 때,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야. 해체된 조각들을 다시 모아 재구성해서 기존에 제대로 설명했던 것들을 간직하고, 앞으로 나올 새로운 설명이 들어갈 공간까지 갖춘 새 구조를 만드는 거지. -321


 이 모든 경로, 무늬를 가장 긴 실에 함께 물들이기 위해서라면 로맨스는 유일하지는 않더라도 꽤 효과적인 매체였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무엇이 알거나 모르거나 결국 혼자서는 버티지 못하고 텅 빈 자리를 마련해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그 사유 체계가 결정적이라는 반증이라면, 그렇게 빈 자리를 갖춘 사람들끼리 만나는 이야기에 엮는 것도 단지 효율적인 선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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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는 나중에 조사하면 된다. 흉기만 찾아내면 사건은 끝난다. 즉 흉기를 찾아내지 못하면 사건은 끝나지 않는다. 미즈노 다다시의 자백을 받아 낼 수 있다면 상관없지만 지금 미즈노는 의식도 없고 취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신문을 위해 며칠 기다렸는데 용의자가 부인한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다. (낭떠러지 밑) - P17

형사들 사이에서 자그마한 안도의 한숨이 퍼져 나갔다. 무모한 백컨트리를 시도했다가 조난 사고를 낸 조난자에게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무엇보다 다행이라는 마음이 솟아오르는 법이다.
분위기를 다잡듯 오다가 말했다.
"가쓰라, 계속해." (낭떠러지 밑) - P24

"앗, 잠깐......."
누카다의 안색이 변했다.
동시에 무라타도 개운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무라타도 스스로 키워 온 조사 절차와 기술이 있는데, 상사인 가쓰라가 따라와서 무라타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아슬아슬한 질문을 한다. 수사반에서 둘째가는 실력자라는 무라타의 자부심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방식이다. (낭떠러지 밑) - P28

업무 영역이 아니라고 눈을 감기에는 인간의 목숨은 너무 무겁다. (낭떠러지 밑) - P34

‘노파심에 말해 두지만 이건 잠정 의견이야. 감정서는 나중에 보내겠네. ……물론 결과가 크게 바뀔 리는 없지만. 메모할 준비는 되었나?"
"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쓰라는 통화 녹음 기능을 켰다. 스마트폰 너머에서 종이 다발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낭떠러지 밑) - P34

"다시 말해 흉기는 현장에 있었지만 그것이 흉기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경우는 부정할 수 있다."
혼자뿐인 회의실에서 가쓰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맛있는 차다. 도네 경찰서에는 차를 맛있게 끓이는 경찰관이 있는 모양이다. (낭떠러지 밑) - P47

현경 수사1과 가쓰라 팀 형사들은 상사가 밤사이 자기들을 제치고 사건을 해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가쓰라를 좋은 상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가쓰라의 수사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낭떠러지 밑) - P58

형사가 빠른 걸음으로 물러나자 가쓰라는 빳빳하게 다린 셔츠로 갈아입었다. 넥타이도 고쳐 매고 재킷을 걸치고 휴게실을 나섰다.
창밖을 보니 반달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달빛이 밝혀 주는 하늘은 구름이 적었다. 날씨는 감식 효율을 크게 좌우한다. 사건 발생 소식이 들어오면 먼저 하늘을 보는 것이 가쓰라의 습관이었다. (졸음) - P64

임의수사에는 한계가 있다. 강도치상 사건의 수사본부로서는 다구마를 체포해 조사하고 싶지만 전과가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당연히 체포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는 무릇 발생해서는 안 될 불행한 일이지만 일어난 이상 수사본부에는 절호의 기회다. 형사가 말했다.
"위험운전치상죄입니까?" (졸음) - P70

경찰관은 담당 사안이 늘어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가 담당해야 할 사안을 다른 부서에 빼앗기는 것은 그 이상으로 싫어한다. (졸음) - P73

가쓰라는 현장을 확인해 문제를 파악하고 방침을 정해 명령을 내렸다. (졸음) - P74

가쓰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힐끔 보았다. 도착을 기다리는 자료 중 방법 카메라 데이터는 들어왔지만 감식 보고서는 아직 오지 않았다. 당장 할 일은 없다.
"나도 입회한다. 기다려."
‘......알겠습니다.‘
전화 너머에서 무라타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상사가 진술 청취에 입회하면 형사는 일하기 거북해진다. 그것을 알면서도 가쓰라는 부하가 사람을 만날 때 가급적 입회한다.
사람의 표정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인간상을 대략적으로 파악한 다음, 가쓰라는 그 모든 것을 의심한다. (졸음) - P87

히라이 병원은 경찰서에서 겨우 100미터 남짓한 거리였다. 걸어가도 되는 거리였지만 가쓰라는 관할서 형사에게 명령해 차를 몰도록 했다. 무언가 긴급사태가 발생했을 때 가까운 곳에 차가 없는 사태는 피해야 한다. (졸음) - P87

반대편 차선을 지나간 차량이 있었다는 단순한 사실을 일일이 기억하기는 어렵다.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미행이라는 작업 중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 해도 오카모토의 승용차가 지나간 것을 기억하지 못한 형사들이 앞으로 이번 수사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을 일은 없을 것이다. (졸음) - P96

과장까지 승진한 니토베는 부하들이 자신에게 충실하기를 요구한다. 달리 말하면 니토베는 예스맨만 곁에 두기 좋아하고, 중심으로 하는 진언보다 노골적인 아침과 추종을 좋아했다. 경찰이라는 상명하복 조직에서 윗사람이 까마귀는 하얗다고 하면 아랫사람은 맞는 말씀이옵니다, 하고 따르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니토베의 부하 중에 그의 안색을 살피는 형사는 거의 없다. 니토베 스스로가 자기 기분이나 맞추는 형사와 유능한 형사를 비교해 보고 후자만 수사1과로 데려오기 때문이다. 어딘가 한 명쯤, 심복으로 삼을 만한 유능한 형사가 없는지 간절히 바라면서 니토베는 결국 자기 뜻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실력주의 집단을 조직해 왔다. 때문에 나토베는 부하들을 대할 때 늘 심기가 불편하다. (졸음) - P110

"목격 중언이 나왔다고 들었네. 몇 건인가?"
"네 건입니다."
스마트폰 너머에서 니토베가 순간 침묵했다. 니토베 또한 실력으로 승진을 거듭한 경찰관이다. 심야 3시에 발생한 교통사고에 네 건의 목격 증언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운이 좋았다고 기뻐하지는 않는다. (졸음) - P111

폭력이나 다름없는 졸음이 가쓰라를 덮쳤다. 미간을 힘껏 문지르며 겨우 졸음을 몰아냈을 때, 가쓰라는 자신이 질문의 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가……." (졸음) - P122

그렇다. 시체는 나올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누군지는 몰라도, 어째서 시체를 토막 냈을까?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하면, 설령 모든 부위를 찾아내고 피의자를 알아내도 이 사건의 진상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가쓰라는 결국 모든 것은 이 ‘어째서‘로 귀결될 것이라고 예감했다. (목숨 빚) - P138

가쓰라는 문득 자기가 아직 신참 형사였던 시절을 떠올렸다. 형사과에서는 위화감은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훈련받았다. 그 시절, 일반 기업에 평생 몸담았던 71세 남성이 정년 후에 경비원으로 일을 한다면 뭔가 특별한 사정이 있어 금전이 필요한 건지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리라. 지금 가쓰라는 딱히 뒷조사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가연물) - P236

"나(오다 지도관)도 윗선도 자네(가쓰라 반장) 팀의 검거율은 높이 사고 있네. 하지만 가쓰라 팀은 너무 자네의 원맨팀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어. 자네의 수사 수법은 독특해. 어디까지나 규범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면서 마지막 한 걸음을 혼자 훌쩍 뛰어넘는다. 그건 아마도 배우고 싶다고 배울 수 있는 수법이 아닐 테지. 자네도 언제까지고 현경 본부 반장으로 머물 수는 없어. 부하들이 실력을 쌓지 않으면 현경의 수사력은 저하된다." (가연물) - P242

텔레비전 같은 언론 보도에서 사건 수사에 직접 도움이 되는 정보가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 언론 보도의 주된 정보원은 경찰 발표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형사들은 텔레비전을 켜고 신문을 읽는다. 자기가 맡은 사건이 세상의 이목을 끄는 것을 보며 기운을 얻는 면도 없잖아 있지만 수사와 거리가 먼 정보, 가령 사건에 대한 행정 지원이나 대응, 검찰의 의향, 피해자의 동향 등은 언론 보도로 처음 알게 되는 사실도 많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언론 보도를 통해 수사 진척 상황이 범인에게 전달된다는 점이다. 어디까지가 보도된 정보이고, 어디부터가 범인과 경찰밖에 모르는 정보인지, 그 경계를 세심하게 파악하려면 역시 형사들도 언론 보도를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가연물) - P244

가쓰라는 사건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았다. 추궁하면 오노하라는 십중팔구 자백하리라. 하지만 가쓰라는 ‘십중팔구‘로 도박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수사는 어차피 사람의 소행, 완벽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딘가 운명적인 틈이 벌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머리카락 한 오라기의 차이라도 완벽에 다가설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가연물) - P250

아마도. 가쓰라는 생각했다. 동기가 핵심이다.
평소 수사할 때 가쓰라는 동기를 중시하지 않는다. 동기는 결국 ‘욕망‘이라는 한마디로 귀결된다. 보통 사람들의 욕망은 뻔해서, 그 대부분이 금전 욕구와 성욕, 화풀이로 집약된다. 하지만 그 세 가지로 설명되지 않는 욕망도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지혜를 쏟아부어도 예측할 수 없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을 믿고 수사하면 미로에 빠져든다. 그렇기 때문에 가쓰라는 평소 동기를 중시하지 않는다. (가연물) - P250

춘메이의 진술은 막힘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상대가 대답할 내용을 미리 준비해 두었거나, 상대의 두뇌 회전이 빠른 경우에 자연스러운 진술을 얻을 수 있다. 가쓰라는 이번에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파스타 조리법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을 춘메이가 사전에 알았을 리 없다. (진짜인가) - P310

시다 하루타는 사건 다음 달, 이세사키 시립 도네가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사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듯이 씩씩하게 지내는 것 같다는 소식을 훗날 이무라가 가쓰라에게 전해 주었다. (진짜인가)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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