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혁명 그리고 퀘스트 - 하드SF 단편선
위래 외 지음 / 구픽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드 SF’의 정의를 너무나 대충 잡은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다. 과학 지식이 좀 더 깊고 정확하게 서사와 결합한 SF하드’ SF일 것이란 수준의 얄팍한 수준이었다. 결과적으로 크게 빗나가지는 않았다. 다행인지는 모르겠다. 하드 SF에 관한 내 엉성한 정의와 이 단편집 속 작가들이 생각하는 하드 SF가 어떻게 겹치는지 살펴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큰 재미였다.

 

사적인 이야기가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보다 저는 교수님께서 쓰신 논문이 궁금합니다. 무아레 현상과 플랑크 단위에 대한 논문 말입니다.”

. 세상에! 가족 문제에 이어 이번에는 30년 전에 쓴 학위 논문까지 들추겠다는 건가요? 대체 이 늙은이를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이유가 뭐죠?”(남세오, 벨의 고리) -102

 

 이산화 작가의 마법사 에티올의 트루 엔딩 퀘스트는 최종 보스를 무찌르고 세계의 평화라는 퀘스트를 달성한 게임 제브라시아 모험기영웅들이 어째서 후속편에서는 그렇게 처참하게 변질되고 말았는지 그 원인을 이 게임 캐릭터를 분신처럼 여기는 현실의 게이머가 최근 과학의 연구들을 근거로 집요하게 파고든다. 남세오 작가의 벨의 고리에서는 양자역학의 새로운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는 시상식장의 물리학자들 앞에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피켓을 들고 시위한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과 비슷한 얼굴인데서 비롯된 긴장감이 팽팽하게 이어진다. 이처럼 이 책은 과학을 더 깊이 바라보고 끌어들이는 현재 한국 SF의 방향과 양식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보여준다. 이런 분산된 일관성이야말로 현대 과학의 성격 그 자체라는 점에서 이 단편집이야말로 하드한 SF라고 부르기에 충분하다.

 

바다의 표면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색일까? 어떻게 움직일까? 하랑은 머릿속에서 논리를 지우고 낮추고 직감과 즉흥에 상상의 광경을 맡겼다. 그러자 검푸른 액체로 된 산과 언덕, 계곡이 나타나서는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얼음이 사라진 바다였다. 새파란 산이 언덕 위로 무너지고 계곡이 갈라질 때마다 새하얀 무언가가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먼지일까? 얼음? 자그만 공기 방울? 말도 안 되는 엉터리 광경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하랑은 상상을 멈추지 못했다. 그때 상상 속 바다의 표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표면을 찢고 나와 공기 중으로 솟아 오른 것은 거대한 세뿔고래였다. (해도연, 거대한 화구) -196~197

 

 이 단편들을 쓴 작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과학의 밀도를 높인 서사를 들려준 덕분에, 과학을 소설로 쓰는 것과 이른바 과학 소설(SF)를 쓰는 것이 어떻게 다를 수밖에 없는지도 보다 선명히 보였다. 서사를 과학에 이용하는 것과 과학을 서사에 이용하는 것의 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차이는 설명력의 한계도 분명하다. 해저에서 생존하도록 진화한, 지상에서 생존했었다는 사실도 잊은, 지구가 아닌 행성의 미래 인류가 다시 땅을 삶의 공간으로 인식하기까지의 그 과정과 그 인식하는 순간의 경악과 경이를 고스란히 담아낸 해도연 작가의 거대한 화구같은 작품은 서사의 설득력과 치밀함을 위해 과학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을 들여온다.

 

 어떤 과학적 사실보다도 어렵고, 직시하기 곤란할 때조차 있는 과학을 충분히 알아도, 혹은 알아서, 그 과학의 가정마저 철저히 부인하는 인간의 한계야말로, 과학이 있는 까닭에 인간들이 서로 직면할 수밖에 없는 밑바닥이다. 과학이 있어도 없는 취급당하거나 있으나마나한 존재처럼 보이는 이 역시 과학의 핵심이다. ‘거대한 화구처럼 결국 그런 어거지를 뚫고 나가는 힘 역시 과학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라도, 인간이 땅에서 살 수 있을 리가, 살았을 리가 없다는 악다구니는 과학의 일부인 셈이다.

 

 서사가 승한 SF는 물론 좋다. 서사가 승한 바로 그 이유로 좋을 수밖에 없다. SF의 서사가 승해도 그것이 꼭 과학에 박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걸 이 책 덕에 생각했다. 서사가 승한 SF가 있는가하면, 서사처럼 과학이 함께 승한 SF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 이야기만의 각별한 감각을 보여준 단편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세 예능을 읽다‘라는 제목을 듣고 처음에는 제아미世阿弥와 리큐利休, 그리고 꽃꽂이의 이케노보 센오池坊専応 등과 같은 명사 중심의인물 열전 형식으로 풀어가려고 했지만, 오히려 중세 예능에 대한통상적이지 않은 문제나 주제를 설정한 후에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쪽이 흥미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따라 ‘권진勸進‘ ‘천황제天皇制‘ ‘렌가蓮歌‘ ‘선禅‘이라는 네 가지 주제를 정하고, 각각의 측면에서 중세의 예능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 P11

불상을 만들거나 사원을 세우거나, 신사 건물을 수리하거나 하기 위해 기부금을 모으는 행위를 권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권진은 중세에 매우 성행했었지만, 중세 말기에 이르러 세속화되었다. 근세에 들어서는 더욱 심하게 세속화되어 권진이 걸인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버렸다. - P14

이와 흡사한 예를 들자면, 일본의 불교에서는 ‘오치고상お稚児さん‘ 제도가 확립되었다. 이 제도는 속세의 미소년이 승려 세계로 들어온 것으로, 한반도와 중국, 인도에는 없지만, 일본에서 탄생한다. 아름다운 여성을 대신하여 오치고상이라 불리는 미소년이 스님과 잠자리를 갖고, 스님은 자신에게 속한 오치고상에게 다양한 학문을가르친다. 불교에서는 엄연히 여성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계율이 있지만, 일본의 경우는 오치고상 제도를 이용하여 남자를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공공연해졌다. 본래 근대 이전의 일본은 승려의 세계뿐 아니라 동성애에 관해서 매우 관용적이었다.
일본에서는 불교가 변질되어 승려의 세계에서 ‘치고稚児‘의 존재가 어느 정도 제도화되었다. 말하자면 속세가 불교계에 들어와 중간영역을 만들어가면서 승려의 세계를 변화시켜갔다. 권진히지리도 치고와 같은 중간영역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세의 일본인은 신성과 세속 사이의 중간영역 시스템을 만드는 데 매우 능숙했다고 생각한다. - P1920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교도란 모두 무연의 존재여야 한다. 석가모니도 국왕의 지위를 버리고 세상과의 연을 끊은 무연의 인간이 되어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기 때문에 불자는 모두 무연이어야 하지만, 그렇게 되기가 쉽지는 않다. 일본의 경우는 ‘진호국가鎭護國家‘ 불교로 국가 봉사를 위해 불교를 인정했었던 경위가 있으므로, 불교도를 국가공무원으로서 간주하게 된 역사는 깊다. 하지만 그뿐아니라 천태종天台宗의 히에이잔比叡山, 혹은 진언종眞言宗의 세계 등에서 장남에게는 귀족 집안을 잇게 하였지만, 생계를 잇기 어려운네, 다섯 번째 정도의 아들은 사원에 취직시켜서, 사원에서 일하며 생활을 영위하도록 하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헤이안중기가 되면 히에이잔이나 진언종의 세계도 귀족들의 대부분이 세력을 부리며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사원이 귀족의 사적인 소유물과 같은 장소가 되어버리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 P21

‘짓코쿠히지리十穀聖‘가 권진히지리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며, 그 짓코쿠히지리의 기원이 죠겐重源이라고 하는 인식이 중세의 염불계 승려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이 짓코쿠히지리란 열 종류의 곡식을 끊고 수행하는 승려를 일컫는 말로 산간 수행자이다. 예를 들면, 하코네箱根에 있는 짓코구 고개十穀峠라는 것도 열개국을 전망한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짓코쿠히지리의 왕래와 연관된 장소라고 생각된다. 권진히지리를 곡기를 끊은 산간 수행자라고 인식하고 있는데, 그 권진히지리의 기원이 죠겐이라고 보는 것이다. 죠겐 자신은 귀족 무사인 기紀씨 가문 출신이다. 일족에 다키구치滝口나 우마노죠馬充, 에몬노죠衛門尉가 많으므로 무사 출신이라 여겨지고 있다. 이는 고미 후미히코五味文彦도 주목하고 있듯이 사이교西行의 출신과 가깝다. - P2324

하지만, 죠겐의 아미타 신앙은 고야산高野山 계통이다. 고야산에서는 가쿠반覚鑁이라는 사람이 원정기院政期 중기쯤에 등장하여 밀교와 아미타 신앙을 융합하는 새로운 교리를 수립하였다. 그 종파가 신의진언종新義眞言宗이며 현재는 나리타산成田山의 신쇼지新勝寺와 가와사키다이시川崎大師라는 사찰로 이어졌다. 가쿠반 교리의 새로운 특색은 대일여래大日如来를 중심으로 하는 밀교 세계에 아미타신앙을 접합시킨 점이다. 대일여래란 법신法身,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 그 자체로써 그것이 실제로 현세에서 고통받는 자를 구원할 때는 아미타여래로서 나타난다고 하며, 염불 신앙과 밀교의 세계를 융합시킨 것이다. - P28

사이교는 일생에 두 번 미치노쿠陸奧(현재의 동북지방)를 여행한다. 마지막 미치노쿠 여행길인 사요노나카야마小夜の中山에서는 "노령의 나이가 되어 이 산을 다시 넘게 될 줄이야, 사요노나카야마를 넘을 수 있는 것은 목숨이 붙어 있는 덕분이구나年たけて また超ゆべしと おもひきや 命なりけり 小夜の中山"라는 훌륭한 노래가 탄생한다. 예전에 지나갔던 시즈오카현의 사요노나카야마에서 스스로의 생명의 연속성에 대해 다시 한번 놀랐다고 하는 내용의 노래를 읊은 것이다. - P29

십몇 년 전에 ‘신안선 침몰‘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한반도 남서쪽 해안의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했던 배를 발견하여 인양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는 1323년에 침몰한 배였는데, 인양 후에 다양한 유물이 나왔다. 유물 명부에서 ‘권진히지리 교센勸進聖教仙‘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아미노 요시히코는 이 배가 도후쿠지 조영을 위해 권진히지리 교센이 탔던 무역선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침몰선은 배 바닥에 대량의 동전을 싣고 있는데, 대량의 동전은 배의 안정을 유지함과 동시에 그대로 동전 수입이 되기도 하는 이중의 효용이 있었다. - P34

당시에는 여러 설교사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고칸시렌虎関師練이라고 하는 선종의 승려가 지금의 설교는 ‘변태백출変態百出‘의 모양라고 말하며, 진실을 예능으로 속이고 있다고 한탄하였다. 지넨거사의 경우는 격식 있는 설교, 다시 말해 창도唱導라고도 하는데, 그러한 설교의 장에 사사라佐々良 설교 계통인 민중 가무를 들여왔다. 그림(’덴구조시天狗草紙’)에 작은 글씨가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은 지넨거사의 노래 문구로, 그는 노래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넨은 단지 춤을 추는 것뿐 아니라,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며 가무 설교를 하고 있었다. 설교사는 상좌에 앉아 설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금의 라쿠고落語 예인이 앉았던 방석 한 장이 상좌의 자취인데, 이 상좌에서 툇마루의 평평한 곳으로 내려와 민중과 동등한 위치에 서서, 대담하게도 민중의 가무를 넣어 설교하고 있다. 새로운 유형의 설교가 이 시기에 탄생한 것이다. - P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지만 말 잘 듣는 개로만 받아들여져도 곤란하다. 개를 기르는 사람은 말을 듣지 않는 개를 길들였을 때 더 좋아하니까. (위래, 마젠타 C. 세레스의 사랑과 혁명) - P24

이 드넓은 우주에서 통일된 하나의 행성이나, 몇 개의 위성 거주구 따위를 묶은 연합체, 성계 동맹 따위를 제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수천 광년 단위로 떨어진 수백 수천 성계들을 하나의 권위 아래에 놓을 수 있어야만 제국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관문은 머나먼 별들 사이를 넘나들게끔 하지만 관문선이 닿지 않는 머나먼 미답지들은 제국의 통제 밖에 놓여 있다. 지구의 정신과 문명을 잃어버리고 미개하게 단절된 선주민들을 제국은 다시금 포용할 의무가 있기에, 황제 폐하는 대원정을 결정했다. 대원정의 방법은 단순하지만 확실했다. 황제 폐하의 목소리가 닿지 않을 정도로 먼 곳에 있다면, 그들에게 황제 폐하와 그 심복들을 복제해서 제국 밖으로 보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똑같은 통치자가 똑같은 방식으로 통치한다면 그 또한 제국이니까. (위래, 마젠타 C. 세레스의 사랑과 혁명) - P2627

기대했던 대로 남자는 박투술에 익숙하지 않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남자는 총을 버리지 않는다. 무의식중에 총을 가지고 있으면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 총구가 당장 자신을 향하고 있는데도. (위래, 마젠타 C. 세레스의 사랑과 혁명) - P3839

일인칭의 원한은 이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티끌만도 못하다. (위래, 마젠타 C. 세레스의 사랑과 혁명) - P50

그리고 포이페는 아일랜드어로 완전하다는 뜻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야 길상우는 포이페 켈리와 메르센 켈리가 쌍둥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둘은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그것도 어쩌면 우주의 법칙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비밀을. 왜 진작에 포이페를 붙잡고 캐묻지 않았을까. 후회해 봐야 소용없었다. 포이페는 사라졌고두 사람을 찾을 단서는 아일랜드라는 국적이 전부였다.
길상우의 발상이 빛이 난 부분은 그다음이다. 메르센 소수와 완전수를 따서 쌍둥이 딸의 이름을 지었다면 우주의 비밀을 알고 있는 쪽은 딸이 아니라 아버지인지도 모른다. 길상우는 켈리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모든 논문을 뒤지기 시작했다. 시기는 최소 30년 전, 분야는 물리나 수학일 것이다. 상우의 예상은 적중했다. 다만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로레인 켈리,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1989년에 ‘무아레 현상을 이용한 플랑크 단위 미시구조의 탐색‘이라는 주제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게다가 로레인은 아직도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상우는 홀린 듯 휴가를 내고 더블린으로 향하는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남세오, 벨의 고리) - P9899

"사적인 이야기가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보다 저는 교수님께서 쓰신 논문이 궁금합니다. 무아레 현상과 플랑크 단위에 대한 논문 말입니다."
"오. 세상에! 가족 문제에 이어 이번에는 30년 전에 쓴 학위 논문까지 들추겠다는 건가요? 대체 이 늙은이를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이유가 뭐죠?" (남세오, 벨의 고리) - P102

한마디로 말해서 우주의 구조는 난수가 적힌 난수표다. 그게 숨은 변수가 적힌 양자의 비밀문서다. 우리 우주에 진정한 난수란 존재하지 않는다. 컴퓨터로 난수를 생성해 본 사람은 시작 지점이 같으면 항상 같은 순서로 난수를 불러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컴퓨터에는 무작위로 숫자를 고르는 능력이 없다. 시작 지점과 불러오는 규칙을 알려 주면 커다란 난수표를 찾아가며 숫자를 고른다. 우주도 마찬가지다. 양자 현상의 불확실성은 무작위가 아니라 우주의 난수표에 의해 결정된다. 상자 속의 양자가 빨간색일지 파란색일지는 이미 난수표에 적혀 있다. (남세오, 벨의 고리) - P106107

포니아가 뫼를프의 말에 동의하며 악수를 하는 동안, 하랑은 눈을 감았다. 새파란 빛의 공허 속에서 거대한 화구가 타오르고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갈고리 물체가 빛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고개를 돌리니 공허를 떠도는 크고 새하얀기 같은 존재도 보인다. 시선을 내리자 완전히 녹아내린 바다의 표면이 보인다. 바다의 표면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색일까? 어떻게 움직일까? 하랑은 머릿속에서 논리를 지우고 낮추고 직감과 즉흥에 상상의 광경을 맡겼다. 그러자 검푸른 액체로 된 산과 언덕, 계곡이 나타나서는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얼음이 사라진 바다였다. 새파란 산이 언덕 위로 무너지고 계곡이 갈라질 때마다 새하얀 무언가가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먼지일까? 얼음? 자그만 공기 방울? 말도 안 되는 엉터리 광경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하랑은 상상을 멈추지 못했다. 그때 상상 속 바다의 표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표면을 찢고 나와 공기 중으로 솟아 오른 것은 거대한 세뿔고래였다. 세뿔고래는 무사히 적응을 한 것이다! 하랑은 기뻐하며 세뿔고래가 몸의 빛깔을 화려하게 바꾸는 모습을 감상했다. 세뿔고래는 공기를 잠시 맛보고는 중력을 따라 다시 바다의 표면을 웅장하게 찢으며 사라졌다. 그러고는 고개를 내밀어 멀리 떨어진 마른 땅을 바라봤다. 바다 아래만 해도 놀라울 만큼 다양한 풍경이 있었다. 마른 땅의 세상에서는 얼마나 놀랍고 다양한 광경이 펼쳐질까? 그곳에서도 동물과 식물이 살 수 있을까? (해도연, 거대한 화구) - P196197

세상에 적합한 희생이란 없었고 문명이 고도화를 이룰수록 더더욱 그러했으므로. (이하진, 지오의 의지) - P209

"그리고 해당 명령은 정확히 2천 8백 5십 3번 지시되었고, 시행되었습니다."
"2천・・・ 뭐? 그러니까 항상 똑같이?"
"지오는 긍정합니다. 또한 로그를 분석한 결과, 횟수가 누적될수록 명령의 입력이 지연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말을 더듬었거나 망설였다는 뜻이었을까. 아, 항상 그래왔던 것이다. 우주의 흐름은 경외롭게 거대했고 찰나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그 우주의 순간은 너무나 무한하게 다가왔다. 인간에게 역사는 바꿀 수 없이 반복된다고 체감되어 왔지만 그렇게 시나브로 변화해 왔던 것이었다. 매번 시간을 되돌리며 반복을 의심하고, 그에 쌓인 죄책감을 가늠하고, 가능성을 의심하면서, 결국 돌아가는 길을 선택할지라도 그 미세한 흐름이 모여 충분한 가치를 지닌 파랑이 되도록 그날을 고대하며. (이하진, 지오의 의지) - P2542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학이 생명의 언어라면 - 수면부터 생체 리듬, 팬데믹, 신약 개발까지, 생명을 해독하는 수리생물학의 세계
김재경 지음 / 동아시아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등학교 수학 교육에서 미적분의 역할에 대한 논쟁은 종종 들어 왔다. 즉 그리 신선한 주제는 아니다. 학교에서 배웠던 기억을 더듬어서 그 무용성을 지적하는 의견이 있다. 그 맞은편에 미적분의 효용이 최근의 과학과 기술 발달에서 얼마나 광범위한지, 대학에 입학해서야 필요한 학과에서 새로 가르치느라 어떤 비효율이 일어나는지 등의 반박도 있다. 이렇게 상이한 입장들은 물론 대학 입시라는 장에서 가장 날카롭게 부딪힌다. 하지만 수학 교육과 미적분의 역할에 관한 더 큰 문제는 대학교와 대학 입시 너머에 있음을 이 책은 선명하게 보여 준다.

 

그렇습니다. 적분은 쉽게 측정할 수 있지만 그다지 관심 없는 속도로부터 궁금하지만 측정할 수는 없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

 

미적분학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30

미분은 속도 변화를 직관적으로 묘사하게 해주고, 이것의 적분은 직관적이지 않은 미래를 예측하게 해줍니다. -48

 

 이 책의 부제처럼 수면부터 팬데믹까지수리생물학은 인간의 직관이 놓치거나 풀지 못한 생명 현상의 원리를 이해하고 방향을 예측한다. 그 핵심 수단이 본질적으로 계산 기계인 컴퓨터이며 그 컴퓨터의 핵심 언어는 미적분이다. 그리고 컴퓨터와 미적분이 결합해 생명 현상을 번역하는 수리생물학에서 의학, 약학, 생명과학 등의 연관 분야와의 협업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의 미적분은 인간이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계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직관으로 해석할 수 없는 생명 현상을,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는 수리 언어의 핵심 문법이 미적분이다. 인간의 역할은 생명 현상을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도록 미적분으로 묘사하고, 그 컴퓨터가 생명 현상을 해석하는 과정을 운용하는 것이다. 당연히 인간이 미적분을 잘 알아야 하지만, 그 구체적, 세부적 계산까지 인간의 몫은 아니다.

 

이번 연구가 시사하는 바는 기존의 치료 체계를 여러 관점에서 더 정밀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치료 시간의 관점에서, 그리고 성별의 관점에서 질병을 바라볼 때 비로소 더욱 효과적인 치료도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특히, 시간이라는 차원을 추가해 약의 효과를 예상하려면 시간에 따른 변화를 예측하는 미분방정식 기반의 수리 모델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132

이렇게 계산 결과를 보면 납득이 가지만, 이 결과를 보기 전까지 정상세포와 감염 세포의 수가 오르락내리락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컴퓨터를 이용하기 전에는 우리가 직관을 이용해 얻은 결과들이 언뜻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우리의 직관에 잘 와닿지 않더라도 정상 세포와 감염 세포의 수가 오르락내리락하며 서로 공존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시스템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이보다 훨씬 복잡한 실제 생명 시스템을 인간의 직관만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불가능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결론을 내릴 가능성도 높습니다. -53~54

 

 생명 현상은 생명체의 평생부터 하루하루의 생존까지 시간 척도 간의 편차가 크고, 생명체 내외에서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의 종류와 그 요인들이 상호 작용하는 양상은 다양하다. 결국 이 모든 조건이 결합한 생명 현상은 인간이 한번에 하나로 꿰어서 직관적으로 예측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영역이다. 애초에 인간의 인지 능력은 이런 수준의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하는 상황까지는 상정하지 않고 진화했다. 이제야 급하게 필요해졌지만 준비되지 않은 역량이다. 생명 현상을 미적분으로 묘사하는 수리생물학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이 복잡한 주제를 정확히 분석할 수 있어서인 동시에, 인간의 인지적 특성이 이 주제와는 영 상성이 좋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인간이 생명 현상의 방정식을 포괄적으로 구성하는 측면과 그 미적분을 토대로 컴퓨터가 생명 현상을 구체적으로 계산해석하는 측면은 구분될 수밖에 없다. 미적분의 역할과 효용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것과 그 계산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완전히 같은 의미도 아니다.

 

 따라서 미적분의 계산 원리를 교육하고 숙지하며, 미적분 계산 능력을 제고하는 것만이 미적분의 유일한 의무 교육 방식은 아니다. 그것이 정량적 평가와 대학 입시를 전제한 가장 효율적, 일반적인 미적분 교육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다. 이 책은 미적분이 필수적인 의무 교육 과정에 편성되어야 할 이유를 보여 주지만,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교육 방식은 내가 겪었거나 생각하는 그것과 다를 듯하다. 미적분은 생명 현상을 번역하는 수리 언어, 수식의 핵심 문법이지만 연구 주제가 아닌 연구 도구다. 인간이 미적분이라는 도구 자체가 될 필요는 없는 셈이다. 그래서 더더욱 모두가 미적분을 능숙하게 다루지는 못할지라도, 가급적 많은 사람이 미적분의 역할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남에게도 말할 수는 있어야 한다. 미적분이 의무 교육의 필수 요소가 되어야 한다면 바로 그래서다.

 

융합 연구를 자주 하는 만큼, 강연이 끝날 때마다 자주 받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녀를 어떻게 하면 융합 연구자로 키울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저의 대답은 늘 똑같습니다. 융합 연구자의 두 가지 특성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첫 번째 특성은 대화를 유쾌하게 이어가는 것입니다. 운이 좋게도, 저는 지난 10여 년간 의학, 약학, 생명과학 분야 연구자들 수십 명과 협력해 융합 연구에서 여러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실패한 공동 연구도 있었지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융합 연구를 함께 성공적으로 끝맺은 이들은 모두 유쾌한 대화 상대였습니다. (중략)
두 번째 특성은 자신이 아는 것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잘 설명하는 것입니다. 융합 연구는 서로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여 동일한 문제를 놓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219~220쪽


 결국 이 책은 미적분을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수학자의 글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막연하거나 단호한 당위의 영역과 무관하다. 뿐만 아니라 저자 본인의 구체적이며 유연한 융합 연구, 협업의 성과를 미적분의 가치와 효용으로 연결하는 까닭에 설득력이 더욱 높다. 수학교육으로 학부를 시작한 저자가 최근 각광받는 수리생물학자가 되기까지의 과정, 의학약학면역학 등 수학적 접근이 낯선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력해 연구한 경험들, 생명과학의 오랜 난제 앞에서 수학자로서 겪은 시행착오까지 간결하면서도 진솔하게 풀어내서 더욱 흥미로웠다. 앞으로도 저자에게 이렇게 대중적인 저술까지 할 수 있는 환승 시간들이 이어지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날 할아버지가 오래 알고 지내던 손님이 다도실을 리뉴얼하는데 문고리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잘은 모르나 손님의 어머님이 다도 선생님인데 희수 기념으로 개장하는 것이라 축하의 의미를 담은 디자인으로 바꾸고 싶다고 했단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형이 "거북이 문고리가 좋겠네" 하고 중얼거렸다.
당시 형은 아직 여덟 살 정도였는데 창고 안에 있는 부품 전부를 놓아둔 장소까지 달달 외웠다.
깜짝 놀란 할아버지가 형과 함께 창고를 보러 가서 형이 꺼낸 문고리를 보고 또 놀랐다고 한다. 오래된 물건이지만 상태도 좋고 거북이 등딱지 부분에 손을 잡도록 만들어놓은 디자인도 근사했기 때문이다. 결국 할아버지는 그 문고리를 사용하였다니 그때부터 이미 형은 상당한 심미안을 지녔던 듯하다.
그렇게 그 무렵부터 문고리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었는데,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잘은 모르나 교토의 가쓰라리큐(일본 왕족의 별장—옮긴이)에는 ‘달‘을 본뜬 문고리가 많이 있다고 한다.
"언젠가 그 문고리를 느긋하게 손질하고 싶어."
그 장면을 상상하는지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던 형 모습을 기억한다.
나도 형 일을 돕게 된 이후 그 문고리를 사진집 등을 통해 보았다.
확실히 한자 ‘달 월‘ 자를 본뜬 모양이나 달 형태를 그대로 모방한 모양 등 가쓰라리큐를 위해 특수 제작한 그 문고리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지금이라면 형이 넋을 잃는 것도 이해하지만, 당시 문고리라는 존재는 ‘우리 형은 어쩌면 조금 별난지도 모르겠다‘라고 인식한 계기에 불과하다. - P15.16

도자기를 잘 모르는 나도 네즈미시노(1570년대 일본 기후현 미노 지역에서 하얀 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를 이르는 말—옮긴이)가 도자기 종류 중 하나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리고 좋은 찻종,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져 경매될 정도의 유래가 있는 찻종에는 특별한 이름이 붙는 물건이 많다는 것도 안다.
‘가마이타치‘는 통통한 네즈미시노 회색 찻종의 이름인 듯하다.
찻종에는 풍류적인 이름이 많다. 그 찻종의 ‘정경‘(구운 색, 표면의 모양, 요철, 겉모양의 인상 등을 빗대 이렇게 말하는 모양이다)을 표현했다고들 하는데 나로서는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많다.
"뭐? 이 모양이 학으로 보인다고? 정말로? 으음, 그거 거의 로르샤흐 테스트 아니야? 그 왜 그림을 그린 후 반으로 접은 다음에 펼쳐서 나온 모양을 보고 무엇으로 보이는지 조사하는 정신 분석 같은 거. 손님, 괜찮아? 고민이라도 있어?"
이렇게 묻고 싶어질 때도 있다. - P35

S 선생님은 유명한 젊은 다도 선생님인 모양이다. 고미술에도 조예가 깊어서 그에 관한 에세이도 썼다고 한다.
"선생님이 가마이타치로 몇 번인가 차를 우리셨대. 그러고는 ‘사용감은 아주 좋은데, 어쩐지 심보가 고약한 구석이 있군, 이 찻종‘이라고 말씀하셨어."
흠.
"심보가 고약하다는 게 무슨 의미야?"
"글쎄. 나도 그렇게 되물었는데 선생님도 ‘설명을 잘 못하겠네‘ 하시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뭐라 해야 좋을까. 붙임성 있고 상냥해서 쉽게 친해진 사람인데 다른 곳에서 내 험담을 하는 걸 들었다는 느낌이랄까‘라고 하셨어."
그것이 ‘가마이타치‘라는 이름이 붙은 유래일까. - P38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우리는 언뜻 보기에 평범하게, 하지만 나름대로 꽤 감칠맛 나는 인생을 보내고 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를 테니 떳떳치 못한 심경일 때도 있고 스릴을 느낄 때도 있다. - P97

어디까지나 나는 ‘커피숍에서 치즈케이크를 먹는 것을 좋아한다‘이기에 ‘치즈케이크를 사서 집에서 먹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행동이고 흥미가 없다. - P102.103

카페 문화는 지역마다 조금씩 달라서 인구 대비 커피숍이 확연하게 많은 곳과 적은 곳이 있다.
적은 곳도 카페 문화가 없어서가 아니다. 옛날부터 다도가 성행했던 곳에는 자택에 화로가 있어서 차를 끓이는 습관이 있기에 밖에서는 마시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다.
그런가 하면 커피숍이 잔뜩 있어서 휴일에는 가족끼리 단골 커피숍에 가서 브런치를 먹는 곳도 있으니 식문화는 그야말로 흥미롭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곳저곳에서 가게를 방문하는 일은 직업상 이동이 많은 형과 나의 자그마한 즐거움이다. - P104

처음 들어간 가게에서는 역시 블렌드 커피를 주문하는 것이 기본이다. 블렌드는 점주의 취향이 드러나기에 자신의 취향과 맞는지도 알 수 있다. - P107

K 점주가 집 정리를 부탁하고 싶다는 친구를 소개해주고, 끝내는 자기 가게의 폐점 정리도 맡길 정도로 친해지리라고 이때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N마치는 오래된 역참 마을로, 작지만 오랫동안 교통의 요지 중 하나였다. 이런 곳은 눈에 띄지는 않지만 사람과 물건의 왕래가 잦고 갖가지 물건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 뒤로 고마운 매입처 중 하나가 되었다.
처음으로 우리가 K를 방문한 지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K 점주에게 연락이 왔다. - P119

나는 타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버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렇게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 P127

이발사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몰랐는데 일본 타일은 정해진 몇 곳에서 거의 다 만들어진다더군."
"네, 메이지 시대(1868~1912년)에 국가가 운영하는 연구소와 공장이 교토에 세워지고, 국가 주도로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은 원래 요업이 성행했는데 처음에는 주로 메이지 유신으로 고객을 잃은 교야키(교토에서 만들어지는 도자기의 총칭—옮긴이) 장인이 중심이 되었다고."
형이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군. 형은 K에서의 일 이후 타일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 P127

약속한 가게가 있는 곳은 신바시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커다란 상업빌딩이었다.
옛날에 지어진 빌딩은 어쩐지 분위기가 독특하다. 묵직한 공기, 느긋한 통로 공간. 전체적으로 만듦새에 여유가 있고 잘 닦여진 바닥이 둔탁하게 빛난다. - P133.134

이 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그 여기저기에서 부모님이 만든 집과 시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것이 또 엄청나게 많아서 설마 이런 벽촌에(실례)까지, 하고 생각되는 장소에서도 일한 흔적을 만난다.
"아버지랑 어머니, 얼마나 일을 하신 걸까."
"이러니 우리가 얼굴도 거의 못 보지."
"이런 페이스로 계속 일을 했다면 사고를 당하지 않았어도 언젠가 과로사하셨을 거야."
세계 유산에 등재된 산골짜기의 오래된 집락을 방문했다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이 지은 민가를 발견했을 때는 형도 나도 기가 막혔다.
두 분이 지은 집은 어째서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고, 마음을 담아서 지었다는 점이 전해져왔다.
친밀감이 있고 아담해서 마음이 편안한 집. 이런 집이라면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집.
일반적으로 건축가는 자택에 자신의 사상을 담아 그것을 명함 대신으로 한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결국 두 분은 자신들의 집을 짓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 P155

둘째, 이것은 예전부터 어렴풋이 느낀 것인데 세상은 거의 모든 일이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시작할 타이밍, 무언가를 그만둘 타이밍, 무언가를 물을 타이밍 그리고 무언가를 고백할 타이밍.
세상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있으면 그것은 대개 그쪽에서 다가온다. ‘어느새 그렇게 되어 있더라‘, ‘지금밖에 없다고 직감했다....... 이런 타이밍은 대체로 옳다. - P193

촉촉이 비가 내리는 오후, 우리는 교토에 있었다.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교토는 사족을 못 쓰는 곳인지, 일을 끝낸 다음이라고는 하나 형은 항상 교토에 들를 때마다 자신의 문고리 컬렉션을 찾아 헤맨다.
형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친한 골동품점에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문고리는 없었지만 형은 우아한 앤티크 경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람이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원한다고 생각하는지는 천차만별이라, 그 덕에 이 장사가 성립될 수 있는 거라 절실히 느낀다. 그리고 나는 경첩에 흥미가 없다는 사실도.
제시액이 서로 맞지 않아서 잠시 흥정이 이어진 결과 경첩은 그대로 그 골동품점에 남게 되었다. - P194

덧붙여 풍경 소인의 정식 명칭은 ‘풍경이 들어간 통신 날짜 소인‘이다. 요컨대 명승고적 등의 도안이 들어간 소인을 말한다.
우편을 보낼 때 일반적으로 찍는 소인은 날짜와 시간대와 담당 우체국 이름밖에 적혀 있지 않지만, 풍경 소인에는 각양각색의 정취가 느껴지는 도안이 그려져 있다. 가마쿠라의 대불이라든가 이세신궁 같은 명소의 그림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런 특성 탓에 어느 우체국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나름대로 기념이 될 만한 것이 있는 우체국에 비치되어 있다.
물론 각 풍경 소인이 비치된 우체국에 부탁하지 않으면 찍을 수 없다. 우송도 의뢰할 수 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우표를 사서 메모장에 붙이고 창구에 내밀어 풍경 소인을 찍어달라는 기본적인 방법을 이용한다. - P248

"그래. 컬렉터는 모으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니 모으는 것 자체가 재미있을 뿐 실은 마음속에서는 컬렉션의 완성 그 자체는 바라지 않아. 모은다는 행위와 모은 것 하나하나가 내가 여기 있다는 존재 증명 같은 것이야. 내가 사라져도 물건은 남아. 내가 모은 것의 집합체가 내 인생의 덩어리 같은 거지."
잠깐 사이를 두고 형이 말을 이었다.
"네 풍경 소인을 보고 생각했어. 스탬프 랠리는 저도 모르게 모으고 싶잖아? 스탬프 수첩에 공백이 있으면 어떻게든 메우고 싶어져. 그것도 마찬가지야. 그 공백은 존재의 공백이야. 자신이 그곳에 없었다는 공백이 무서운 거야. 그러니 네가 말하는 ‘느슨함‘이 부러운 이유는 그 공백이 무섭지 않은 점, 공백을 개의치 않는 점이야."
"흠."
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래서 컬렉터라는 인종은 그다지 자각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다고 더 강하게 바라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
더욱더 예상외라고 생각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형은 결코 ‘나서는 타입‘이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컬렉터 또한 소극적인 사람이 많으니 놀랍네."
"응. 나도 인생 자체에 집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분석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을 때는 뜻밖이었어." - P261.262

"참 재미있단 말이야. 일러스트레이터나 화가 본인과 만나면 ‘그렇군, 이 사람이 그런 선을 그리는구나‘ 하고 늘 이해가 돼. 이름은 몸을 나타낸다가 아니고 선은 몸을 나타낸다지." - P345

또 어디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지 않나 긴장하는 동시에 우리는 이 장소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세월이 자아내는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셔터의 녹, 콘크리트의 갈라진 틈, 그러데이션으로 변한 함석 색깔. 그것이 고대 유적처럼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을 내보인다.
"장소의 힘은 엄청나니까 그 땅이 내뿜는 에너지에 어울리는 작품을 만드는 일은 힘들어요."
갑자기 다이고 하나코의 말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 P378

그녀들의 역할은 끝났다.
다이고 하나코에게 그 도란을 전해준 것으로 이제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밝은 여름이 눈앞에서 달려간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여름이라는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 P5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