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란방
첸 카이거 감독, 여명 외 출연 / 쌈지아이비젼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1994년 봄이었을 것이다.
    N이 어느  날, [패왕별희] VIDEO를 보자고 했다.
    그 당시 N은 나처럼 한국나이로 16살 밖에 안 되었었다.
    그런데 N은 어떻게 그런, 나이에 비해 수준 높은 영화를 빌려와서 날 끌여들였을까?
    단순히 '경극'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그 당시만 해도 '경극'이란 단어도,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시아 역사나 문화에 대해 풀 한 포기 없는 불모지와 같은 무지한 수준이었다. 

    1,2편에 나누어져 있는 길고 긴~ 영화를 꼼짝없이 봐야 했다.
    영화 내용은, 나에게 상당히 충격적이고 신선한 '신세계'였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분장과 의상을 입은 경극 배우들이 요상한 소리로 노래 같은 음율을 앵앵
    거리는 것이 신기했다. 여자역을 하는 남자배우를 안으려는 고위 관료, 일본군의 점령 아래
    부당한 대우를 받는 그들의 삶을 이해하기엔 아직 어렸다. 

    그 후로, 한 동안은 N과 함께 나는 말할 때마다 경극 배우처럼 흉내내서 앵앵 거리는 말투로
    말하는 것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중국어라고는 '니 하오'와 '쎼쎼' 밖에 모르는 주제에 그 당시
    유행하던 중국노래 '첨밀밀'을 토시 하나 안 틀리고 외우는 괴력(?)을 발휘했었다. 

    언젠가는 중국 본토에서 경극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귀로 직접 들으리라 결심했건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잊혀져 가고 있을 때, 어제 두 번째로
    경극을 '만났다'. 바로, [매란방]이다.  

   

    중국 발음으로는 '메이란팡' 정도 될까..(긁적)
    실존했던 인물을 가지고 만든 영화라서 그런지, 아니면 과거 어릴 때 '경극의 참미(美)'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던 것을 되찾으려고 했던 건지... 나는 공부하는 것처럼 열심히 봤다.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엔 내게 있어 경극은
    아직도 어려운 과목이기에. 

    [패왕별희]가 '두 경극 배우의 삶'과 '일본군의 점령하에 놓인 당시 중국의 상황'이라는 2개의
    플롯을 보여주는, 약간은 무거운 느낌의 깊이 있는 영화라면,
    [메란방]은 한 사람의 삶과 '경극인의 명예나 가치'를 이야기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보기에 더 쉬운 편이다. 같은 감독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경극에 대해서도, 중국의 오랜 역사가 담겨 있는 문화에 대해서도 아는게 하나 없어...
    감히 무어라고 리뷰를 쓸 수가 없다. 여러가지 감정을 느끼게 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더 나는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사진 몇 장과 함께 그냥 짤막한 사담만 남긴다. 

 

   
     경극은 서민은 물론이고 부유층도 즐겼던 문화다. 그들이 열광했던 것은 단순히 저 화려함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그들이 무대 위에서 펼쳐내는 이야기들은 중국인들의 역사와 삶과 희로애락이 가득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없던 시절에는 경극이 바로 그들의 영화이자 드라마였으며, 오페라였고
     고된 삶을 떠나 정신적 유희와 감성적인 유희의 세계로 떠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는지도 모른다. 

     관객들은 배우들에게, 배우들은 관객들에게 예를 갖출 줄 알았던.
     지금처럼 TV쇼에서 방청객들로 하여금 억지웃음을 만들어내는 조잡한 것이 아닌,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찬미했던 그 아름다움이 있는 공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이 부러웠다.   

 

   
    장쯔이는 '맹소동'이라는 남자역을, 여명은 '매란방'이라는 여자역을 하면서 서로의 성별을 뒤집은
    또 하나의 '자신'을 보여준다. 이것은 감독의 의도된 연출이라 생각한다. 그 안에 많은 것을 담았겠지만
    내가 느꼈던 것은 2가지다. 하나는,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양상, 즉 직업적으로나 가정에서의 역할적
    으로나 남.녀의 위치가 바뀌거나 서로 자신의 영역을 내주는 경우가 많이 생기는 현상을 빗댄 것은 아닐까. 

    그리고 본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성적인 면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었다.
    누구나 자신 안에 여자와 남자를 함께 지니고 있다. 대체적으로 생물학적인 호르몬 분비와 사회적인 교육
    때문에 자신의 외모와 걸맞는 성별에 치중해서 살기는 하지만, 간혹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이 느끼는 쪽에
    더 치중하는, 그야말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좀 더 솔직한 부류가 나오기도 한다.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좀 더 강한 쪽의 남성성 혹은 여성성을 숨긴 채 살아가는 현대의 인간상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하고, 나는 저 장면을 보며 떠올렸다.    
    '매란방'은 여자의 감정으로, '맹소동'은 남자의 감정으로 신체와 상관없는 성별로 서로를 좋아했던 것 같다.

    

 

   

    실제 인물인 '매란방'이었던 '원화'라는 남자.
    그는 저 소년 시절부터 중년이 될 때까지 경극배우로써 품위와 자존감을 지켜왔다.
    [패왕별희]에서 '별희'역을 맡은 배우는 자신이 좋아하는 '패왕'역의 남자를 지켜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군 앞에서 공연을 하며 한 배우로써 중국인으로써 자신을 버렸지만,
    '매란방'은 강압적인 일본군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므로 인해 경극인으로써의 자신과
    중국의 자존심을 지켰다. 그래서 해방 후에, 자국민으로부터 '배신자'라는 경멸를 받으며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던 [패왕별희]의 '패왕'이나 '별희'같은 불명예는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매란방'은 중국 최초로 미국의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아시아의 정적인 아름다움을
    전달하는데 성공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중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할 만 하다.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신의 신념대로 밀고 나가는 인간을 제일 좋아하며, 존경한다.
    문자로써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목에 칼이 들어왔어도' 굴하지 않았던 '매란방'.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느니 기꺼이 무사답게 적의 손에 죽겠노라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려 했던 삼국지의 '조조'와 같은 용기로 '매란방'은 일본 점령이라는 추운
    겨울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꽃 같은 존재다.  

    그리고 그는 본인의 의사든 아니든간에, 후세에 이름이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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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2-08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란방의 실제인물 원화군요. 약간 이준기 닮은 느낌이네요.
여자보다 더 여자처럼 보여요.
전 이 영화 보며 매란방의 아내로 나왔던 그 여배우의 연기가 가슴 아프더군요.
장쯔이는 '게이샤'에서보다 좋아보였구요.
그땐 좀 정신없이 봤는데 다시 보고 싶어지는 영화에요.

L.SHIN 2010-02-08 11:45   좋아요 0 | URL
네, 아내로 나왔던, 그 분은 헌신적이고 이해심이 많고 교양있는 여성으로 나왔죠.
전 원래부터 중국 발음을 무척 좋아했는데, 이번 영화에서 인물들이 조용하고 점잖은, 그리고 너무나
이쁜 발음으로 중국어를 할 때는 '내 반드시 나중에 중국어를 마스터 할..' 이라고..다짐했답니다.^^;
[게이샤]는 아직 안 봤습니다. 흥미가 당기긴 했지만, 뭐랄까, '게이샤'는 일본인이 해야..하는
쓸데없는 고집이 있어서 말이죠. 영화의 작품성을 배제하고 말이에요.(웃음)

메르헨 2010-02-08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보고 싶었는데...^^페이퍼 보니까 또 땡기네요.
패왕별희 이후 한동안 우울했던 기억이...^^

L.SHIN 2010-02-08 11:46   좋아요 0 | URL
저도 [패왕별희]가 상당히 인상적이라서 오랫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영화죠.
이 리뷰를 쓰면서 [패왕별희]를 10대의 눈이 아닌 지금의 눈으로 다시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자하(紫霞) 2010-02-09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패왕별희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라는...
참고로 중문과출신임^^;

L.SHIN 2010-02-09 21:13   좋아요 0 | URL
오오오오오오옷-!!!!
그 어려운 중국어를 하신다는 말입니까! 말입니까! (덥썩)
우리, 친하게 지내요. 우후후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