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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 미 인 - Let the Right One i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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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이 끼익 열리면서 꼬마 흡혈귀가 일어나며 말했다.
"이 책 다 읽었는데, 다음 권 줄래?"
내가 '흡혈귀' 혹은 '뱀파이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어릴 때 읽었던 책 때문이었다.
뾰족한 송곳니가 나고, 곱슬거리는 흑발이 어깨까지 오고, 검은 망토를 휘날리던 뱀파이어는
어둠의 왕자이자 공포의 대상이었어야 하겠지만, 내가 처음 접한 것은 책을 너무나 좋아하던
또래의 소년들과 다를게 없는 순진무구한 흡혈귀였다.
그래서인지 그 이후로, 그 어떤 영화에서건 아무리 무서운 뱀파이어가 나와도 나는 그들을
두려워하는 법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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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오스칼'은 학교 동급생들에게 왕따와 괴롭힘을 당하는 소심하고 외로움이 많은 소년이다.
그는 늘 작은 나이프를 집 앞 나무에 찍으며 복수하는 상상을 하는게 고작인 힘 없는 아이.
어느 날 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소녀가 뒤에서 말하지.
"뭐하니?"
"아무것도"
"난 너와 친구 할 생각 없어!"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도 되듯 내뱉고 어디론가 뛰어가는 소녀의 등 뒤에 불끈한 소년도 외친다.
"누가 친구하고 싶대?!!"
사실, 소녀의 그 반어적 표현엔 '너에게 관심이 있어. 난 외로워. 하지만 너하고는 친구가 될 수 없어'를
담은 듯 하다. 솔직히 인간의 피를 먹고 살아야만 하는 흡혈귀 입장에서 '먹이'인 인간과 친구가 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이니까 당연한 것이긴 해도, 12살 즈음의 모습에서 성장이 멈춘 '아동 흡혈귀'는
오랜 세월 친구 없이 지내다 보니 외로운 건 매 한 가지인걸까.
서로 외로운 영혼을 가진 아이들은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끌리게 되는걸까.
해가 지고난 후 집 앞 공터에서 몇 번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어가는 두 아이.
흡혈귀는 추위를 안 탄다고 한다. 살아 있는 따뜻한 피를 마셔도 몸에 들어가면 얼음처럼 차가움으로
변하기 때문일까. 어둠에서만 사는 것이 익숙해진 탓일까.
무엇을 먹고 살든 감정을 느끼는 것은 똑같은데 말이지.
어느 날, '오스칼'은 '이엘리'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그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거부감도 없이
여전히 우정을 나누는 모습에서, 겉모습만 같을 뿐 서로 체온이 다른 '타 종족'끼리도 정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 흐믓하기만 하다. 12살 짜리의 순수한 애정, 입술을 닿는 것 뿐인데도 그것을 키스라 믿는 순수함.
어찌 보면, 인간들보다 오래 살았을 '이엘리'의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서인지 '오스칼'과의 우정을
계속 기대하는 소녀의 애절함이 더 짙게 묻어나와 조금 안쓰럽다.
'초대 받지 않은 집에는 들어갈 수 없다' 라는 흡혈귀의 규칙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오스칼'의 집에 들어온 벌로
온통 피 범벅이 되어가면서도 순진하게 웃을 수 있는 '이엘리'는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외롭게 지냈을까.
피투성이 모습을 보고 거부감이 아닌 동정심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살인'을 하지만 '악의에 의한 것'이
아닌 단지 살기 위한 '순수한 기본 욕구 충족'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저렇게 순수한 눈을 하고 있는 것일까.
먹이와 포식자와의 우정.
육식 동물인 암사자가 무리에서 쫒겨난 후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길 잃은 새끼 사슴을 자식처럼 키우는 모정이
실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오스칼'과 '이엘리'와의 우정이나 애정도 가능한 이야기.
인간이 개나 고양이 등의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들은 애완동물이기 전에 언제든지 인간들의 '먹이'가 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동물이니까.
그러나 가족같이 친구같이 서로 교감과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먹이와 포식자와의 모습은 저 둘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서로 다른 종, 상-하 관계 혹은 적대 관계의 위치에 있는 자들끼리도 정을 나눌 수 있는데
왜 인간들은 이따끔씩 같은 종인 서로에게 칼부림과 총부림을 하며 으르렁대는 것일까.
종을 초월하여 사랑하는 그 아름답고 넓은 마음이 동종에게는 왜 그렇게 매몰차고 잔인할까.
영화는 '헤피 엔딩'이다.
'오스칼'은 일상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이엘리'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친구가 생겼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왜 씁쓸한 걸까.
먹이와 포식자와의 우정의 길이가 같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예를 들면,
너무나 사랑했던 개가 천성적으로 타고난 수명이 나보다 짧아서 나를 남겨두고 가는 일이 생기는 것처럼.
결국 나중에는 또 '이엘리' 혼자 남겨지게 될까봐..
세상에 영원한건 없다고.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고, 누군가의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서 서로를 찾아다니는 것은 그래도 잠시나마 행복해지고 싶어서겠지?
모두가 외로운 존재들이니까.
지구에서 외로움을 타지 않는 생물은 아무것도 없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들이 가끔씩 있기는 해도, 모두가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며 산다.
그래서 이 아름다움이 계속되는가 보다.
Hello, world.
Let me 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