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갈망과 욕구_2006. 11. 6

 

죄의 욕구 속에는 그 범죄의 대상에 대한 탐닉하고 싶은 욕망이 내제되어 있다. 그것은 탐욕이기도 하다. 그것은 정신과 육체 및 감정에 만족을 유발한다. 그 결국이 쓴 잔임에도 그것에 다가서기 전까지는 매우 만족스러운 것으로 보여진다. 아무튼 죄를 갈망할 때는 그 대상이 가지는 속성과 특징을 경험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음에서 죄의 유혹을 많이 받는다는 것은 이미 죄를 이기려는 의지력이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의미에서 의지력은 항상은 아닐지라도 종종 죄를 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죄에 대한 대적의 의지력이 약해졌다는 것은 이미 마음이 그 죄에 대해 많은 미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 죄의 틈타는 것에 쉽게 반응하고 흥분되어진 정서와 감정 및 마음의 상태에 놓여있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태에서의 극복은 오직 영적인 정서와 정신을 마음에 자주 접하게 함으로써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서와 마음의 성향을 바꿔놓는 방법밖에 없다. 말씀의 묵상 및 영적인 묵상 그리고 기도와 찬양과 같은 방법들을 자주 그리고 꾸준히 활용함으로써 마음이 죄에 반응하는 상태로부터 멀어져있도록 꾸준히 다스려야한다. 이것은 마치, 체질을 바꾸기 위해 당장은 아니지만 꾸준히 건강보조제를 먹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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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2010-10-19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체질을 바꾸기 위한 꾸준한 노력..비유가 너무 와닿네요.
체질을 바꾸기 위한 과정이 너무 어렵고 힘듬을 알기에..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육적 감각의 교정

 
식욕과 욕망, 육의 감각들은 이미 엄청나게 개발되고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식욕과 욕망이 더 이상 증가하지 못하도록 감각의 교정이 필요하다. 오늘날 포르노의 경우 아담의 첫 범죄 당시에는 벌거벗은 것에 있어 수치를 느꼈다. 그것도 부부의 관계에서 말이다. 

 그럼에도 오늘날은 벌거벗는 것에 아주 관대하게 생각한다. 말세에 이르면서 얼마나 이러한 욕망의 감각들과 욕구는 개발되고 노골적이 되었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면서는 이러한 육적이고 세속적인 감각을 교정해가야 한다. 그것은 다른 의미로 성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와 쇼핑을 즐기고 그것에 시간과 돈을 씀으로 해서 자신의 육적인 감각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예수님께 드리는 시간과 돈은 손상되며 오히려 그들이 자발적인 의지로써 그리스도께 드리려는 바들이 파괴당하고 있다. 영적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음료이고 양식이라 하였으나 그리스도만이 참된 음료와 양식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세속적인 음료와 양식으로 자신을 채우고자하는 욕구가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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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적 판단의 두 기준_2010.08.30 
 


우리가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결정하여 행동할 때 우리는 어떤 기준을 놓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 성경의 근거이며, 둘째, 성경적 추론이다.  


성경의 근거란 무엇인가? 이것을 ‘성경적 근거’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성경의 근거란 성경에서 정확히 명시된 근거를 말한다. 성경에서 분명히 선과 악으로 명시해주는 부류의 것은 ‘성경의 근거’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근거로써 판단한다. 
 

한편, 종종 성경에 직접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것도 있다. 그것은 성경적 근거를 고려하게 된다. 이를 ‘성경적 추론’이라고 이름 붙여 봤다. 이는 성경적 근거에 준하는 것이 무엇인지 추론을 통해 결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시 어려운 것은 성경적 추론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또는 교회 안에서 거의 관습법처럼 이뤄지고 있는 바들에 있어서 종종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분명 그 다소와 강약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정도 오류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교회사를 봐도 그렇다. 칼빈과 츠빙글리는 재세례파의 신념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세례파들은 개인의 신앙에 대해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유아세례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칼빈과 츠빙글리는 재세례파의 신념을 옹호하지 않았고, 그들을 해산시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재세례파의 신념을 인정하고 있다. 또한, 부흥사 조지 휫필드는 노예제도를 긍정했다. 그러나 오늘날 노예제도는 인정받지 못한다. 이처럼 위대한 신앙의 위인들에게도 판단의 착오와 오류는 존재했다. 이처럼 현재의 교회에도 어느 부분에서는 충분히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교회의 관습법을 부정하고 싶진 않지만, 우리가 ‘성경의 근거’ 뿐만 아니라 보다 나은 ‘성경적 추론’을 할 수 있다면 무비판적인 관습법을 따르다가 생기는 마찰 또는 예기치 않은 실패로부터 오는 불신, 갈등을 좀 더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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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적 신념과 자율의 문제_2010.08.30

통상적으로 우리는 어떤 사안에 대한 의사결정을 위해 목회자의 권면을 참고한다. 우리는 목회자를 가장 신뢰한다. 목회자는 적절한 지침을 제공한다. 또한, 목회자와의 교제를 통한 지침을 확보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성경적이다. 

  
다만, 어떤 하나의 사안을 놓고서도 그것이 성경에 분명히 명시된 ‘성경의 근거’를 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일 경우는 다른 대안이 없지만, 명시되지 않은 ‘성경적 추론’을 통해 판단해야할 사안일 경우 목회자의 다양한 스타일과 신념에 따라 상이한 답변이 나올 수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각 상황과 형편에 있어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다는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을 수용해야할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전적으로 목회자의 소양에 순종해야 생각한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옳은 것이다. 
 

다만, 이러한 목회적 신념과 소양의 차이가 있음에 대해서 오히려 목회자 스스로가 자신의 관점과 신념을 얼마큼 상대에서 적용시키고 관철시키려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보다 유연해지느냐 경직되느냐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목회자를 존중해야 되고,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안에 대해 목회자의 지침을 듣는 것은 옳은 것이다. 그것은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 얼마큼의 자율을 소유하느냐도 신중히 생각해볼 부분이다. 
 

목회자는 지침을 제공할 수 있지만 자칫 지침을 관철시키려는 것이 되면 어떤 의미에서는 각각의 그리스도인이 ‘만인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자율성을 부여받은 부분에 있어 의도하지 않은 간섭과 침해를 줄 수도 있는 문제이다. 지침은 필요하지만 우리는 각각의 그리스도인을 상대함에 있어 그들이 누려야할 고유의 자율성, 하나님과 그 사람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그 사람에게 관여하시고, 허락하시는 자율성에 있어서도 존중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교회는 ‘순종을 통한 승리’를 일관되게 가르친다. 또, 누군가는 ‘순종을 통한 승리’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편은 ‘맹목적 순종을 통한 실패’를 말한다. 이럴 경우 우리는 보편적인 관점을 갖고, 순종했지만 실패했다는 사람은 무엇인가 다른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일방적인 추론하려 든다. 이미 가지고 있는 보편적 관점을 합리화시켜 해석하려는 경향을 띈다는 것이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진 않지만, 우리는 얼만큼 ‘성경적 추론’의 근거를 통해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다소 의심스럽다. 오히려 학습한대로 무비판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나는 분명 ‘순종을 통한 승리’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진리이다. 다만, ‘성경의 근거’가 아닌 ‘성경적 추론’의 경우에 자칫 목회자가 상대의 자율성과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좀 더 고려해주지 못함으로 인해 무리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 될 때, 어쩌면 ‘맹목적 순종을 통한 실패’를 말하는 경우를 야기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성경의 근거’가 아닌 ‘성경적 추론’의 사안에 대해 나는 상대의 자율성을 자칫 망가뜨리지 않고 존중해주는 겸손과 신중함, 주의 깊음으로 교제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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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나타나는 주권의 문제_2010.1.

 

누군가는 선한 삶을 사는데 끝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고 죽는다. 누군가는 고의적으로 그리스도를 배척하는데도 특별한 섭리가 작용하여 말씀 앞에 굴복케 되어 구원을 받는다. 이것을 단순히 생각하면 마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나타나는 예정론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베드로는 성전의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보고, 구원받을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적을 행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누가 구원을 받을만한 믿음이 있는지 아신다. 그 사람들을 특별히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이지만 구원받을 믿음이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누구는 선해 보이고 충분히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처럼 보여진다. 그럼에도 그에게 구원받을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다. 누구는 악하고, 고집 세고, 전혀 구원받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에게 감춰진 드러나지 않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놓치지 않는다.

또한, 성도의 무책임과 성도의 방종도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걸림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비록 전능하시지만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질서를 망가뜨리는 성도의 행위로 스스로를 제한하실 수도 있다. 예언하는 자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한 받는다고 고린도전서에 말하고 있다. 성령을 훼방하는 성도의 삶이 구원의 역사를 방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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