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유혹과 은혜_2009.12.

(부제: 회개의 중요성)

 

지난 토요일 청년회 교제시간 모 교회 전도사님께서 참석하셔서 삼손을 통해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죄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마음에 2가지의 질문을 했다. 첫 번째는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데 원인이 있다.’라는 것이다. 이때 나는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했다. 두 번째는 ‘연말이니 내년에 죄를 버리겠다하지 말고 지금 죄를 버리라’라고 했다. 이때 나는 ‘죄를 어떻게 버립니까?’라고 맘속으로 질문했다.

일련에 말씀들이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런 말씀을 들으면서 많은 청년들이 잘 받아쓸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받아쓰는 것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다. 의미를 알지 못하고 아무리 적어봐야 여전히 죄를 짓고, 죄를 버리지 못한다.

일단, 여기서 깊이 다룰 문제는 아니지만 첫 번째 질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습관적인 죄의 원인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긴다는 의미의 참 뜻을 알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을 수 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무거운 말씀인가를 느껴보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긴다는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저기 40kg짜리 쌀가마니가 있는데 옆에 꼬마를 두고 저건 아주 무거운 거란다 아무리 얘기해봐야 지식적으로 저것이 무거운 것이란 생각은 하겠지만 정말 얼마나 무거운지는 알 수 없다. 크레인에 쌀가마니를 달아놓고 천천히 하강시키면서 그 밑에서 꼬마로 하여금 떠받쳐보는 훈련을 시켜보면 그 아이는 금새 무겁다는 것과 가볍다는 것을 구별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무거운지 체휼해보지도 않은 채 아무리 받아 적어 봐야 그것이 죄를 끊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평소 말씀을 읽으면서 그냥 읽고 넘어가고 덮으면 읽었던 말씀도 잘 기억이 안 나는 판에 무슨 하나님 말씀의 무게를 알겠는가.

두 번째 질문 이것이 오늘의 주제이다. 죄를 버리라고 하는데 그걸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다. 죄를 버려야 하는 것이란 것을 알고, 버리고 싶지만 대부분 죄를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어떻게 하면 죄를 버릴 수 있는가 그것이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이다.

예전에 나는 이미 죄를 이기는 힘이 성령의 능력이란 것을 이해했고, 그것을 설교하기도 했다. 그 설교를 회상하면 이와 같다. 첫째, 상자 속에 스프링이 달린 인형이 있는데 이 인형은 죄성이다. 이 죄성은 인형처럼 상자 속에서 끝없이 튀어나오려는 운동력을 갖고 있다. 이 인형상자 옆에는 근육질의 성인 남자가 서 있고, 반대편에는 기저귀를 찬 아기가 있다. 누구 이 인형을 짖눌러 상자 속에 담아둘 수 있을까? 답은 당연하다. 바로 이 남자와 아이가 성령님을 상징한다. 성령이 충만하고 강건할 때 죄성은 제압당한다. 그러나 성령님이 소멸하여 힘이 없을 때 죄성을 이기지 못한다. 이런 비유를 말씀 한 구절에서 명확히 보여줄 수 있다. 에베소서 3장 16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옵시며’ 이것이다. 성령의 충만하신 능력의 힘이 내 속사람, 내 심령을 강건케 할 때 죄는 극복하게 된다.

또 다른 비유로 이 말씀을 이해하자면 빈 깡통 하나가 있다. 이 깡통이 제 아무리 ‘나는 다시는 깡통소리를 안 낼꺼야!’라고 결심해봤자 허사이다. 수없이 맹세하고 의지를 다져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러나 물을 채우는 순간 깡통소리는 줄어들기 시작한다. 물이 꽉차면 거의 깡통소리는 안 나게 된다. 이를 성령충만과 죄성에 비유할 수 있다. 성령이 충만히 내 안에 채워질수록 죄성은 소리를 내지 못한다. 성령충만이 소멸할수록 죄성은 깡통소리를 내며 자기 존재를 증명한다.

 

자, 이제 여기서 우리는 죄를 이기는 힘이 성령의 충만으로부터 말미암은 내 심령의 강건함에서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방법은 알지만 치명적인 하나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성령충만은 어떻게 받는 것인가(이는 딤전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_성령을 구하는 기도와 성령의 조명으로 비롯된 말씀의 집중과 이해)와 성령충만이란 것이 1회적인 사건인지 반복적인 사건인지 생각해보자. 답은 뻔하다. 성령충만을 내가 받았다고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무엇인지는 여실히 드러난다. 성령충만이 죄를 이길 수 있지만 성령충만이 불변하는 1회적 사건이 아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항구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다란 사실이다. 우리가 자신의 신앙생활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펼쳐놓고 보았을 때 성령충만했고 죄를 쉽게 이겼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다시 성령은 소멸하고 죄의 유혹에 빠질 때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부터 우리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죄를 완전히 이긴 것 같이 살아갈 때도 있지만 우리는 다시금 언제든지 원치 않던 치명적인 죄를 또 범할 수도 있다란 사실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주어진 결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가 왜 중요한지 우리는 이해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 그토록 치명적인 죄를 지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합한 자로 평가받을 수 있었는지도 이해하게 된다.



다음으로 은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이것은 내가 치명적인 죄의 시험과 유혹에 직면하여 그 죄의 문턱까지 나아갔다 되돌아온 사건으로부터 얻은 교훈이다. 여기서 나는 시험을 받는 것과 시험에 드는 것의 문제, 이성과 감정의 갈등, 죄에서 건져주는 은혜의 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먼저, 죄의 시험은 누구나 받는 것이다. 시험받지 않는 사람은 전적으로 아무도 없다. 그러나 시험에 드는 것은 다르다. 누구는 시험을 받지만 시험에 들지 않고 시험을 이겨낸다. 그러나 누구는 시험을 받고 그 시험에 듦으로써 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험을 받는 것과 시험에 드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시험에 들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궁극적으로 감정 내지 정서의 결정적인 변화가 있다. 누구든지 죄의 시험을 받으면 이성은 이것은 죄며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시험을 물리칠 때는 마음에 그 시험을 거부할 수 있는 의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험에 든다는 것은 비록 동일하게 이성이 이것은 죄며 피해야 된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감정은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마음이란 것에는 의지란 것이 작용한다. 죄의 시험을 받아 시험에 들게 되면 그때부터는 머리는 계속해서 ‘이건 죄야 해서는 안 돼.’라고 소리치지만 감정과 정서의 작용을 받는 마음의 의지는 이미 ‘그래도 이 죄를 짓고 싶어.’라고 작용하는 것이다. 분명 시험에 들 때는 감정은 마음의 의지로 하여금 죄를 짓고 싶은 욕구로 작용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것은 분명 자기 의지인 것이다. 이 마음의 의지란 것은 성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는 죄를 거부하는 것으로 작용하지만, 죄의 유혹을 받아 시험에 들 때부터는 죄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한 날은 치명적인 죄의 시험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은 시험에 들었고, 내 마음의 의지는 죄를 깊이 갈망하고 있었다. 매우 힘든 싸움이었다. 그 상황은 마치 시편(10편 등)에서처럼 은밀한 곳에 숨어서 그물을 치고 나를 넘어뜨리기 위해 서 있는 자 앞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그건 마귀였다. 마귀는 그 죄의 유혹으로 나를 넘어뜨리기 위해 그물을 치고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내 등 뒤에서 그 죄의 입을 벌리고 나를 당장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당해낼 제간이 전혀 없었다. 마귀의 은밀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괜찮아, 이번 한 번 죄 짓고 회개하면 되잖아. 참을 수 없는 갈망을 한 번 해소시키고, 그 다음 진정을 찾고 다시 회복하면 돼. 회개하면 되는 거야.’ 얼마나 치열한 싸움에 서있는지 몰랐다. 나 역시 이 시험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조차 가질 수 없었다.

그때 이성을 동원했다. 감정은 이미 죄의 노예가 되어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이 죄를 짓고 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요셉의 고백... 잠언의 말씀들... 나중은 쑥같이 되리라, 입에 모래가 가득하리라. 그래 안 돼. 이건 환상이야. 이건 착각이야. 아, 하나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솔직히 저는 정말 죄를 짓고 싶습니다. 정말 저는 죄를 갈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며 이 죄를 범하면 그 후에는 쑥같이 쓰고, 모래를 씹은 것처럼 참혹한 결과가 온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죄가 너무나 짓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정말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정녕 죄를 짓지 않게 해주십시오.’

물론, 누구나 시험에 들었을 때 죄를 짓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그냥 죄를 짓고 만다. 왜일까? 왜냐하면 마음이 죄의 시험에 듦으로써 이미 마음의 의지가 죄를 짓고 싶어 하는 의지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힘이 죄를 진정으로 이기고자 하는 의지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말 죄를 이기려면 이때는 진정으로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참된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또한, 평소 정말 죄를 안 지으려는 간절한 소망과 기도가 있을 때 하나님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황에서 정말 죄를 안 짓게 신기한 방법들로써 죄를 막아주시기도 하신다. 그것이 은혜이다.

 

죄의 유혹이 소멸했을 때 나는 매우 놀라운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나는 전적으로 내가 전혀 극복할 수 없는 시험에서 초월적인 어떤 은혜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조금도 내게서 나온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은혜였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이야, 하나님 감사하네. 기쁘네’이런 감정적인 희락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은혜란 것은 하나의 power이다. 이것은 energy이다.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이란 것이다. 마귀는 내 등 뒤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나를 당장 삼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건져진 것은 은혜이며, 그것은 어떤 힘과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비유하자면 클립은 자석 앞을 지나가면 반드시 자석에 달라붙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이 손으로 잡고 자석 앞을 지나가면 강하게 당기는 힘이 있음에도 클립은 자석에 달라붙지 않는다. 클립은 은혜를 입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은혜인가. 바로 사람이 손가락으로 잡고 있는 힘의 은혜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나는 이 말씀을 깨달았다. 히브리서 13장 9절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은혜가 마음을 굳게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교훈에 끌리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이 은혜는 바로 힘이다. power이다. 이 힘이 마음을 굳게 하는 것이다.

 

자, 이제 다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문제를 상기시켜보자. 내가 은혜로 격렬한 죄의 시험에서 빠져나왔다고 해서 앞으로도 나는 항상 죄의 시험에 들 때 은혜로 이기고 나올 수 있을까? 대답은 뻔하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다. 우리는 계속해서 연약한 것이다. 성령과 은혜가 우리를 보호하고 도와줄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1회적인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것이므로 우리는 불완전하고 연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도 우리가 이렇게 항구적인 보호 아래 항상 머물지 못한다는 것을 아신다.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도 잘 아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하지 않는 것이 최선임은 말할 필요가 없지만 혹 다시 치명적인 죄를 범할지라도 우리가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붙잡고, 다시 회개하고 치유되고 회복되길 갈망하는 그 마음인 것이다. 바로 살인과 간음을 병행한 다윗이 치유되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된 이유도 바로 이것이라 할 수 있다. 회개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것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준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큰 상급은 항상 회개하며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며, 변함없이 포기하지 않고 교회 안에서 믿음을 지키는 삶을 사는 그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죄와 싸우되 시시하게 싸우지 말고 피 흘리기 까지 대항하라는 말씀처럼 끝까지 싸울 수 있는 싸움을 다해 끈질기게 싸워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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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2010-10-19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죄를 쉽게 이기지 못하고 연약한게 바로 나 라는 사람이지만..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십자가의 능력이 말해준다.
위 글의 내용처럼 치명적인 것은 1회적인 것이 아니라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십자가를 반복해서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게 아닐까..

BH,G 2010-10-19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자주 십자가에 대한 묵상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이 시험의 빌미는 아니었나 생각케 되네도. 다시 십자가 아래로!
 


다윗의 범죄_2009.12

 

다윗의 치명적인 범죄는 사무엘하 11장에 나온다. 사무엘하는 총24장 인데, 거의 중간에 해당하는 11장-12장에서 다윗이 치명적인 죄를 범하면서 상승곡선을 타던 그의 신앙이 하강곡선을 그리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범죄란 하나의 분기점을 두고 앞뒤 상황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다. 먼저, 다윗은 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 사무엘상에서 사울의 미움을 받아 죽음의 경지를 오가며 10여년에 이르는 도피생활을 하였다. 그의 심적 고통과 괴로움은 요나단에게 호소한 ‘나와 사망은 한 걸음 사이’라고 하는 말에 잘 나타나있다. 가히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겪었다. 보통 사람이 근심과 고통, 괴로움에 빠지면 영성이 도태되기 마련이다. 대부분이 안정된 기반에서 영성을 누린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다윗이 그 오랜 도피생활에도 불구하고 시편의 많은 찬양과 주님을 의뢰하는 기도, 사무엘상에서 보여주는 믿음의 행보는 과연 하나님의 은혜라 할 수 있다.

특히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두 번의 기회에서 기름 부은 받은 자를 헤치 않는 모습은 그의 중심이 얼마나 견고했는가 분명히 드러난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런 절호의 기회를 만나면 살인죄를 지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성령충만했다. 그의 측근들이 하나님이 왕을 삼겠다고 했던 그 약속을 지키는 때가 오늘이라며 매우 그럴듯한 말로 충동했음에도 그는 정확히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분별했던 것이다. 그건 견고한 중심, 영성이 뒷받침 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그리고 다윗은 당당히 사무엘하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다. 그는 모든 환란을 벗어나면서 일대 최고의 기쁨과 충만과 은혜를 만끽한다. 그가 실로에서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옮기며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 않고 춤을 췄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상승곡선을 타던 다윗에게 치명적인 분기점이 왔다. 최상의 상태에 이른 다윗이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는 어느새 나태해져있었다. 성령은 소멸했고, 그의 분별력은 어두워졌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 생명을 위협하는 사람마저 살려줄 만큼 분별력이 있었고, 견고한 중심을 보여준 다윗이 최상의 조건을 가진 상황에서 자신의 충성된 신하를 자기 이기심을 위해 죽이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를 강탈하였고, 성폭행했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섰을 때 넘어질까 주의하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참으로 이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다. 다윗은 인생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을 때 가장 치명적인 범죄로 넘어지고 말았다. 이로부터 우리는 교훈을 얻는다. 신앙적으로 최적의 조건을 얻은 사람이야 말로 언제나 넘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윗의 이 치명적인 범죄는 그의 신앙에 일대지각변동을 야기 시킨다. 그는 중심을 쏟아 부은 간절한 회개와 통곡으로 돌이키고, 용서를 받고 이로써 하나님의 합한 자란 영예로운 지위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사실은 징계는 누구든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범죄한 다윗의 내리막은 바라보기 너무나 처량할 정도이다. 먼저, 동침함으로 잉태된 아이가 병들어 죽게 된다. 아들 암논이 누이 다말을 성폭행한다. 다말은 처량한 신세가 되고, 가장 아끼는 아들 압살롬은 암논을 살해한다. 암논은 죽었고, 압살롬은 도피한다. 다윗의 맘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사면해준 압살롬은 다윗에게 돌아와 반역한다. 다윗은 다시 그 지긋지긋한, 다시는 재회하고 싶지 않았던 도피생활에 다시 자신을 내맡긴다. 심지어 신발도 신지 않고 급히 도망쳤다. 사울에게 도망다닐 때도 신발은 신었을 것이다. 요압은 압살롬을 살해한다. 가장 아끼던 아들이 군대장관의 창에 찔려 죽은 것이다. 다윗은 목놓아 운다. 여기서도 끝이 아니다. 세바가 반란을 일으킨다. 세바의 반란을 잠재운 후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로 말미암은 흉년에 대한 해결을 호소한다. 또, 블레셋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다. 그러면서 사무엘하는 말미로 다가간다. 마지막에 24장에 이르러 다윗의 어리석은 인구조사로 재앙이 이스라엘에 임하여 온역에 7만명의 백성이 죽는다. 이로써 사무엘하는 끝나는 것이다.

그 눈물겨운 고난을 딛고 왕이 되어 섰는 줄로만 알았던 다윗이 그 섰던 자리에서 넘어져 남은 생애 계속되는 징계와 고통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신앙의 내리막인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신앙의 그래프는 바로 우리 신앙의 그래프이기도 하다. 최적의 조건에서 두려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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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2010-10-19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윗이 최적의 조건을 가졌을때 사실 그떄가 신앙의 끝이 아닌..
이제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외로움이 아닐까..영과 육은 반비례 하는것 처럼. 다윗은 육신이 최적의 조건일때
범죄를 하는 등 영의 최악을 경험했고 회개 이후 영혼의 조건이 최적일때
그의 육신은 어려웠고 고난의 삶이 시작되었다.
어쩌면 이때 다윗은 진짜 하나님이 함께하는 신앙생활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죄의 갈망과 욕구_2006. 11. 6

 

죄의 욕구 속에는 그 범죄의 대상에 대한 탐닉하고 싶은 욕망이 내제되어 있다. 그것은 탐욕이기도 하다. 그것은 정신과 육체 및 감정에 만족을 유발한다. 그 결국이 쓴 잔임에도 그것에 다가서기 전까지는 매우 만족스러운 것으로 보여진다. 아무튼 죄를 갈망할 때는 그 대상이 가지는 속성과 특징을 경험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음에서 죄의 유혹을 많이 받는다는 것은 이미 죄를 이기려는 의지력이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의미에서 의지력은 항상은 아닐지라도 종종 죄를 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죄에 대한 대적의 의지력이 약해졌다는 것은 이미 마음이 그 죄에 대해 많은 미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 죄의 틈타는 것에 쉽게 반응하고 흥분되어진 정서와 감정 및 마음의 상태에 놓여있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태에서의 극복은 오직 영적인 정서와 정신을 마음에 자주 접하게 함으로써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서와 마음의 성향을 바꿔놓는 방법밖에 없다. 말씀의 묵상 및 영적인 묵상 그리고 기도와 찬양과 같은 방법들을 자주 그리고 꾸준히 활용함으로써 마음이 죄에 반응하는 상태로부터 멀어져있도록 꾸준히 다스려야한다. 이것은 마치, 체질을 바꾸기 위해 당장은 아니지만 꾸준히 건강보조제를 먹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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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2010-10-19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체질을 바꾸기 위한 꾸준한 노력..비유가 너무 와닿네요.
체질을 바꾸기 위한 과정이 너무 어렵고 힘듬을 알기에..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육적 감각의 교정

 
식욕과 욕망, 육의 감각들은 이미 엄청나게 개발되고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식욕과 욕망이 더 이상 증가하지 못하도록 감각의 교정이 필요하다. 오늘날 포르노의 경우 아담의 첫 범죄 당시에는 벌거벗은 것에 있어 수치를 느꼈다. 그것도 부부의 관계에서 말이다. 

 그럼에도 오늘날은 벌거벗는 것에 아주 관대하게 생각한다. 말세에 이르면서 얼마나 이러한 욕망의 감각들과 욕구는 개발되고 노골적이 되었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면서는 이러한 육적이고 세속적인 감각을 교정해가야 한다. 그것은 다른 의미로 성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와 쇼핑을 즐기고 그것에 시간과 돈을 씀으로 해서 자신의 육적인 감각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예수님께 드리는 시간과 돈은 손상되며 오히려 그들이 자발적인 의지로써 그리스도께 드리려는 바들이 파괴당하고 있다. 영적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음료이고 양식이라 하였으나 그리스도만이 참된 음료와 양식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세속적인 음료와 양식으로 자신을 채우고자하는 욕구가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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