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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적 판단의 두 기준_2010.08.30 
 


우리가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결정하여 행동할 때 우리는 어떤 기준을 놓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 성경의 근거이며, 둘째, 성경적 추론이다.  


성경의 근거란 무엇인가? 이것을 ‘성경적 근거’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성경의 근거란 성경에서 정확히 명시된 근거를 말한다. 성경에서 분명히 선과 악으로 명시해주는 부류의 것은 ‘성경의 근거’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근거로써 판단한다. 
 

한편, 종종 성경에 직접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것도 있다. 그것은 성경적 근거를 고려하게 된다. 이를 ‘성경적 추론’이라고 이름 붙여 봤다. 이는 성경적 근거에 준하는 것이 무엇인지 추론을 통해 결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시 어려운 것은 성경적 추론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또는 교회 안에서 거의 관습법처럼 이뤄지고 있는 바들에 있어서 종종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분명 그 다소와 강약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정도 오류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교회사를 봐도 그렇다. 칼빈과 츠빙글리는 재세례파의 신념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세례파들은 개인의 신앙에 대해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유아세례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칼빈과 츠빙글리는 재세례파의 신념을 옹호하지 않았고, 그들을 해산시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재세례파의 신념을 인정하고 있다. 또한, 부흥사 조지 휫필드는 노예제도를 긍정했다. 그러나 오늘날 노예제도는 인정받지 못한다. 이처럼 위대한 신앙의 위인들에게도 판단의 착오와 오류는 존재했다. 이처럼 현재의 교회에도 어느 부분에서는 충분히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교회의 관습법을 부정하고 싶진 않지만, 우리가 ‘성경의 근거’ 뿐만 아니라 보다 나은 ‘성경적 추론’을 할 수 있다면 무비판적인 관습법을 따르다가 생기는 마찰 또는 예기치 않은 실패로부터 오는 불신, 갈등을 좀 더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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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적 신념과 자율의 문제_2010.08.30

통상적으로 우리는 어떤 사안에 대한 의사결정을 위해 목회자의 권면을 참고한다. 우리는 목회자를 가장 신뢰한다. 목회자는 적절한 지침을 제공한다. 또한, 목회자와의 교제를 통한 지침을 확보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성경적이다. 

  
다만, 어떤 하나의 사안을 놓고서도 그것이 성경에 분명히 명시된 ‘성경의 근거’를 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일 경우는 다른 대안이 없지만, 명시되지 않은 ‘성경적 추론’을 통해 판단해야할 사안일 경우 목회자의 다양한 스타일과 신념에 따라 상이한 답변이 나올 수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각 상황과 형편에 있어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다는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을 수용해야할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전적으로 목회자의 소양에 순종해야 생각한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옳은 것이다. 
 

다만, 이러한 목회적 신념과 소양의 차이가 있음에 대해서 오히려 목회자 스스로가 자신의 관점과 신념을 얼마큼 상대에서 적용시키고 관철시키려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보다 유연해지느냐 경직되느냐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목회자를 존중해야 되고,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안에 대해 목회자의 지침을 듣는 것은 옳은 것이다. 그것은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 얼마큼의 자율을 소유하느냐도 신중히 생각해볼 부분이다. 
 

목회자는 지침을 제공할 수 있지만 자칫 지침을 관철시키려는 것이 되면 어떤 의미에서는 각각의 그리스도인이 ‘만인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자율성을 부여받은 부분에 있어 의도하지 않은 간섭과 침해를 줄 수도 있는 문제이다. 지침은 필요하지만 우리는 각각의 그리스도인을 상대함에 있어 그들이 누려야할 고유의 자율성, 하나님과 그 사람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그 사람에게 관여하시고, 허락하시는 자율성에 있어서도 존중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교회는 ‘순종을 통한 승리’를 일관되게 가르친다. 또, 누군가는 ‘순종을 통한 승리’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편은 ‘맹목적 순종을 통한 실패’를 말한다. 이럴 경우 우리는 보편적인 관점을 갖고, 순종했지만 실패했다는 사람은 무엇인가 다른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일방적인 추론하려 든다. 이미 가지고 있는 보편적 관점을 합리화시켜 해석하려는 경향을 띈다는 것이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진 않지만, 우리는 얼만큼 ‘성경적 추론’의 근거를 통해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다소 의심스럽다. 오히려 학습한대로 무비판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나는 분명 ‘순종을 통한 승리’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진리이다. 다만, ‘성경의 근거’가 아닌 ‘성경적 추론’의 경우에 자칫 목회자가 상대의 자율성과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좀 더 고려해주지 못함으로 인해 무리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 될 때, 어쩌면 ‘맹목적 순종을 통한 실패’를 말하는 경우를 야기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성경의 근거’가 아닌 ‘성경적 추론’의 사안에 대해 나는 상대의 자율성을 자칫 망가뜨리지 않고 존중해주는 겸손과 신중함, 주의 깊음으로 교제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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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나타나는 주권의 문제_2010.1.

 

누군가는 선한 삶을 사는데 끝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고 죽는다. 누군가는 고의적으로 그리스도를 배척하는데도 특별한 섭리가 작용하여 말씀 앞에 굴복케 되어 구원을 받는다. 이것을 단순히 생각하면 마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나타나는 예정론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베드로는 성전의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보고, 구원받을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적을 행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누가 구원을 받을만한 믿음이 있는지 아신다. 그 사람들을 특별히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이지만 구원받을 믿음이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누구는 선해 보이고 충분히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처럼 보여진다. 그럼에도 그에게 구원받을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다. 누구는 악하고, 고집 세고, 전혀 구원받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에게 감춰진 드러나지 않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놓치지 않는다.

또한, 성도의 무책임과 성도의 방종도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걸림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비록 전능하시지만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질서를 망가뜨리는 성도의 행위로 스스로를 제한하실 수도 있다. 예언하는 자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한 받는다고 고린도전서에 말하고 있다. 성령을 훼방하는 성도의 삶이 구원의 역사를 방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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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형제님과의교제_2009.12.01

 
식사가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나는 K형제님의 신앙관을 듣게되었다. 그것은 최근에 있었던 그 분의 신앙적인 사색이 주된 내용이었는데, 요지는 근 3년 정도 우찌무라 간조의 전집을 다 읽었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생각에 어떤 큰 변화가 야기되었다는 것이다. 중점내용은 우찌무라 간조는 교회를 떠나 독립주의 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과 그가 17세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실제 회심한 것은 23살 미국 유학중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자신을 회고할 때 이미 17세 때부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K형제님은 두 가지의 혼란에 빠져있었다. 첫째는 우리 침례회 교회가 어느 시점부터는 전도인들의 교권주의가 강화되고 있으며,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정확하다는 이유에서 뭉쳐지면서 지나친 배타적 성향 등등 교회관이 흔들린다는 점이었다. 둘째는 우찌무라 간조의 회심과 그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는 시기를 고려할 때 구원이란 것이 우리 침례회가 가르치는 ‘깨달음’과 ‘거듭남의 확신’과 같은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 그 자체의 중요성을 배척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소위 정통파 장로회, 칼빈주의적 사고에서 단순히 믿는다는 고백과 믿는다는 진심만으로 구원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는 그런 류의 말이었다. 결과적으로 K형제님은 구원관이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 나는 그 분이 조심스레 꺼내는 자신의 논지들을 차분히 들었다. 물론, K형제님은 조심스러워했다. 그것은 소위 기존의 우리교회의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하는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나의 논지를 펼치기 시작하면서 K형제님은 당황했고, 놀라기 시작했으며, ‘병훈 형제 말 잘하네. 전도인 해도 되겠네’, ‘와, 놀라운데~ 대한예수교침례회에서 이런 형제 만나기 힘든데’, 떠날 땐 ‘형제, 오늘 내가 진짜 큰 교훈을 얻었다.’ 등등 감탄사를 연발했다.
 

나의 논지는 이와 같다. 신학과 사상이란 것이 기독교가 중세 로마시대부터 공인되어 국가적 종교의 형태이자 생활의 윤리가 된 서양에서는 신학은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믿든 그러하지 않든 기독교의 윤리와 사상은 매우 일반적인 것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진정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시급했다. 더불어 많은 어설프게 믿는 자들이 오류를 범했기에 성경적 사상가들은 그것을 변론해야 했고,(가장 큰 것은 카톨릭 교리때문이다.) 신학과 사상은 매우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는 것도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사정이 좀 다르다. 유교적 문화권에 기독교란 것은 그 자체로 매우 독창적이고 일반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기독교 신학이란 것은 색깔 자체가 다를 뿐 아니라 세계적인 신학과 공통점을 연결하기는 어렵다. 그런 환경적인 차이는 신학을 얼마나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도 달라지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우리교회에서 서양의 기독교 사상과 신학을 접목하고 공부한다는 것은 그 시도부터가 쉬운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럼으로 해서 신학을 부정하고 싶진 않지만 접목점을 찾아가려는 시도 자체가 기독교가 성장해온 배경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이질적일 수 밖에 없고 위험한 소지가 다분히 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교회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과 교회가 하나의 네트워크 된 형태로 발전한 상황에서 보자면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서양에서처럼 목회자가 독립된 자기 교회에서 목회를 한다면 각자 자기의 사상과 생각이 틀려도 속된 말로 따로 놀면 그만일지 모르겠지만, 우리교회는 연합체제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기준과 선에서 복음이라는 가장 중요한 진리를 중심으로 공통적인 요소를 갖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교회가 공개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권장한다는 것 자체가 유익하지 못한 것이 된다. 분명 그렇게 되면 교회는 완전히 분열되어 수도 없이 조각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방대한 기독교 역사 속에 만들어져 온 신학을 폐기할 것인가? 그렇지 만도 않다. 다만, 접목을 잘 시키는 방편에서 접근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이다. 교리나 신학적 견해는 사실 모든 사람이 다 틀리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도 성경에 대한 이해와 접근법은 다 다른 것이다. 우리가 교제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이라는 가장 중요한 하나의 중심 진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신학과 사상이 조금 다른 것은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더 지혜롭다는 것이다. 나무가 한 기둥에 하나의 뿌리를 박고 서 있지만 가지는 동서남북 사방을 뻗어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학이라 할지라도 그가 칼빈이든 루터이든, 조나단 에드워즈 이든 누가 되었든 그들의 신학과 사상이 무결점의 사상은 결코 아닌 것이다. 분명 누구나 틀린 요소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 책을 통해 그들의 사상이 마치 진리인양 그것을 일방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이미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므로 신학에 접근하고 이해할 때는 무엇보다 ‘객관성’과 ‘균형’을 필요로 한다. 이 말은 어떤 사상가의 말과 논지를 듣고 ‘아~ 이렇구나! 이거구나!’라며 감탄하며 그것에 흥분해서 심취해서는 위험한 것이다. 그가 A는 B이다라는 논지를 전개했다면 우리는 그냥 ‘아, 이 사람은 이것을 이렇게 생각했구나. 이렇게 받아들였구나.’란 정도로만 인식하고 넘어가면 된다. 보다 3인칭의 관점에서 관찰자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칼빈이 다르고 루터가 다르고 에드워즈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이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들로 오류를 소지하고 있다. 진리는 오직 성경일 뿐이다. 이로써, 사상이란 안경으로 성경을 이해하려는 시도부터도 건전하지 못하다. 성경으로부터 사상을 이해하고 판단해봐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란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교회가 완전하지는 않다. 완전한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생각해볼 때, 그것이 오늘 현재는 가장 완벽한 교회인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겠는가!.(이건 마치 세대주의적인 관점에서 교회를 이해하는 것이리라^^)

분명 칼빈이 교회와 루터의 교회가 지금에 와서 보면 부족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그곳이 복음의 전당이었고 그 시대의 가장 완벽한 교회인 것이다. 난 우리 교회도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 신학과 사상이 좀 틀린 것은 가지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 그 자체이다. 신학적인 사상을 많이 알고, 그것으로 논쟁과 토론을 일삼는 것은 재밌고 즐거운 일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갔을 때 가치 있는 어떤 것으로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중세시대 논쟁이 중요했던 이유는 성경적인 교리와는 너무나도 엉터리이고, 마귀적인 카톨릭 교리가 파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만큼 불가피하지 않다.  

그럼에도 아직도 개신교 안에서 그런 무지한 논쟁에 핏대를 올린다는 것음 복음이란 핵심적 진리를 핵심으로 소유하지 않은 자들의 자기기만인 것이다. 비유하지면, 어떤 무지한 자들이 미개인에게 자동차는 나무바퀴를 달고도 100KM 이상 달릴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자동차 전문가들이 와서 터무늬 없는 가르침에 기겁을 하고 자동차는 타이어를 달아야 달릴 수 있다고 가르치게 되었다. 그래서 거짓은 구별되었고, 미개인들은 분별력을 가졌다. 근데 그 다음부터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계속되었다. 타이어의 사이즈, 고무의 재질, 브랜드 이런 것들을 놓고 어느 것이 더 좋다고 옥신각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변치 않는 진리는 어떤 타이어든 장착이 되면 차는 달리는 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최상의 것에 차이는 좀 있겠지만. 신학이란 그런 것이기도 하다.

칼빈주의도 소용없고, 알마니안주의도 소용없다. 복음을 어떻게 전했느냐 그것만이 남는 것이다. 신학적 논쟁은 그렇기 때문에 불필요한 변론과 다툼을 일으키는 것이고 소모전이다.

정통적 신학으로부터 우리 교회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도 어리석은 것이다. 그렇다고 신학적인 정통 맥락을 무시하자는 건 아니다. 그것이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정체성도 카톨릭적 입장에서 벗어난 진로였기 때문에 카톨릭에서 정체성을 인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언제나 불변하는 진리는 복음은 성경의 핵심이며 이것을 나눴다면 우리는 다 형제이며, 자매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보다 포용적인 자세에서 다른 관점을 이해하고 받아주면서 현재 내가 속해 있는 복음의 자리에서 충실히 복음전도의 사역에 임하는 것이 참된 정체성인 것이다.

저녁에 K형제님께 문자가 왔다. ‘오늘 형제 만나 좋은 하루였고 감동있는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부족해 구원에 대한 관점을 충분히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지만 K형제님은 강하게 나로 하여금 함께 일하자고 권해왔다. 그의 얼굴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고, 나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의 결정은 이와 같은 것이데, 가끔 교제를 할 수는 있어도 K형제님과는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내가 피곤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주, 종종,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 하려는 형제님과 끝없는 소모전을 벌일 수 있으며, 그것 자체가 무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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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_2007. 11. 24



올해 기도제목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 의지의 상관관계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또한, 개인이 가지는 열망과 노력, 의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끌어오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곤 한다.

나는 사람의 의지가 어느 정도만큼 하나님의 의지에 영향력을 끼칠까 궁금했다. 이로써 내 의지에 국한된 단순한 인간적인 의로 파생된 열정으로 무엇인가를 하지 않길 바랐다.

오늘은 다시금 이 기도제목을 아래는 가운데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사람이 가지는 강력한 의지는 결과의 향상을 가져다주며, 소망의 문을 여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안에서 허락된 것이란 생각이었다.

하나님께서 전혀 마음도 없었던 것을 사람의 강력한 의지와 간구가 이룰 수 있게 할 수 있는가.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런 것 같다. 성경에서 모세나 아브라함이나 기타 등등... 선지자들이 긍휼을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하나님은 이미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간구를 할 수 있도록 의지를 불어넣으셨고, 그것을 허락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베풀고자 하신 긍휼을 그들의 기도로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신 것 같다.

결국 하나님의 모든 주권과 섭리 아래에서 사람은 일련의 강력한 갈망과 의지를 품을 수 있으며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셨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의 의지가 하나님께 작용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실상은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의 섭리에서 시작된 것인 것이다.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로 간다고 하였다. 사람 역시 만물의 하나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없이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모든 것이 실상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며 사실상 사람이 무엇인가를 시작하고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란 말은 진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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