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스 스타트(2): 동물원에 있는 그리스도인_2012.02.03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9.)

 

(히브리서11:36~38) 또 어떤 이들은 희롱와 채찍질 분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초대교회의 시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들처럼 핍박과 박해와 고난과 고초에 대해 가장 선명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세대가 있을까? 핍박의 세대에 있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칼날 앞에 서는 것이었다. 그들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단 한번도 칼 앞에 서 본적이 없는 세대가 왔다. 우리는 TV 앞에 앉아있는 것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건대 적어도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히브리서 1136~38절을 전적으로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저 말씀의 한 글귀도 헤아리지 못한다. 동일한 구세주를 쫓아 동일한 복음과 그 은혜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서로의 삶의 정체성에 대해 우리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 깊은 이질감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고민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궁극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바로,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그 질문이다. 사실상 이 질문은 거의 난제에 가깝다. 어느 누군가가 핍박의 세대의 그리스도인과 풍요와 사치의 그리스도인을 놓고 어느 누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 물론. 우리는 흑백의 논리로는 그 어떤 해답도 찾지 못한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답을 정의 내릴 기준을 찾을 수 없다.

 

마치, 동물원에 누워 관람객의 과자를 받아먹는 곰을 보면서 숲과 강을 헤쳐 달리며 연어를 낚는 야생의 곰을 떠올리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 곰들은 서로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 곰들이 서로 마주쳤다고 상상해볼 때, 그들의 생김새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곰을 보고 있는 꼴이 될 것이다. 무엇이 그토록 다른 것일까?

 

동물원에 드러누워 과자를 받아먹고, 사육사가 정성스레 다듬어주는 물고기를 먹고, 그저 어슬렁거리며 무기력하게 동물원을 배회하는 곰. 겨울이 되면 난방이 되는 인공굴에 들어가 잠을 자고, 봄이면 나와서 해 아래 일광욕을 즐기며 드러누워 자는 곰. 먹고 자는 것에 대해 아무런 염려와 고민이 없는 곰. 추운 겨울 사냥감을 찾지 못할까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는 곰. 모든 것이 부족하지 않는 동물원의 곰. , 내일이면 관람객이 던져줄 맛있는 과자를 받아먹을 상상을 하고 잠이 드는 곰.

 

그러나 단 한가지 잃어버린 모든 것. 바로, 이글거리는 생존의 눈을 뜨고, 몸을 던져 먹이를 사냥하며 거친 자연과 싸워 이기는 투쟁심과 극기력. 혹한의 계절에도 굴하지 않는 생존의 힘. 바로, 진정함 곰의 본능! 숲과 강에서 포효하며 나무를 쓰러트리고, 짐승을 뒤쫓으며 거친 물살을 거슬러 헤엄쳐 연어를 낚는 강인함. 그것이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참으로 우리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곰의 모습이요 정체성이라 한다면 적어도 동물원의 안락한 곰은 진정한 의미에서 곰이 아니다. 아니다. 곰이다. 적어도 DNA.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는 곰은 아니란 그 얘기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인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할 것이다. 칼날에 선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상상하지 않는 세대. 더 좋은 집과 차, 더 나은 삶의 복지와 문화혜택을 바라는 세대. 더울 땐 에어컨 아래로, 추울 땐 히터 아래로. 육체의 모든 고난와 어려움에 대해서는 자연적인 섭리조차도 부인할 수 있는 첨단의 편리 속에 길들여진 동물원의 그리스도인. 인공굴의 안락함. 내일 죽을지 모른다는 각오를 할 필요가 없이 내일을 즐길 것을 꿈꿀 수 있는 세대. TV와 오락들, 새로 나온 재밌는 영화. 휴식과 교제를 제공하는 파리바게뜨, 카페베네, 롯데리아. 그러나 알고 있었던가 그러므로 우리가 무기력하다는 것을. 식어버린 열정, 나약한 의지, 무절제함과 무분별한 상식. 잃어버린 신앙에 대한 투쟁심과 도전정신. 그 환란의 세대가 가진 매서운 눈매와 뜨거운 눈물과 희생에 대해서 전적으로 무지한 오늘의 세대.

 

무엇이 하나님과 우리가 기대하는 그리스도인이었던가. 무기력하고 나약하며 아무런 공포와 두려움 없이 어슬렁거리며 과자를 받아먹고 일광욕을 즐기는 동물원의 곰 같은 그리스도인? 아니면, 자연의 원리를 따라 본능에 충실하게 자연과 싸워이기며, 세상과 싸워이기면서 혹한의 계절과 공포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잔인한 생명력과 투쟁심으로 포효하는 야생의 그리스도인?

 

그러므로 적어도 나는 나 자신에게 되물을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맞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DNA만큼은. 그러나 기대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풍요롭고 안락하기 때문에 벌거벗음이라든지, 핍박이나 박해라든지, 고난이나 환란이라든지 그런 세대에 대한 묵상은 고사하고. 누리는 풍요로움 안에서 더 나은 풍요의 집을 짓고, 풍요의 산을 오르고, 풍요의 환락을 꿈꾸고 있는 비참한 세대. 안락과 구경꾼이 던져주는 과자를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는 세대. 고난과 환란 앞에 당당하고 강인한 심장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세상 앞에 그저 새가슴이 되어버린 그리스도인 세대.

 

참으로 우리는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에 대해 말할 자격이 그 어느 세대보다도 부족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다. 참된 성경적 그리스도인의 표준 앞에서 어쩌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토록 많은 말씀이 선포되고, 그토록 깊이 있는 강해와 가르침이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식어진 가슴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많은가.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들이나 우리는 진정한가?

 

오히려 저 야생을 가자. 저 오지의 선교지로 가자. 차라리 그것이 더욱 깊은 가르침이요, 동시에 무기력을 깨우는 참된 능력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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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그리스도인 2012-02-23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글에 대한 제 생각 역시 비슷합니다. 하지만 군대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
또한 반은 문명화된 오지로의 여행과도 비슷해서 현재는 그런 불만은 없지만.
사회에 나가면 저도 역시 비슷하게 될것같습니다. 고민이 많습니다

BH,G 2012-02-23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우리가 성령의 인치심과 복음 안에서 거듭났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본질이겠죠. 다만, 그 이후 그리스도인다운 삶에 대한 문제가 정말 그리스도인 답다라고 할 수 있는지.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을 정체성에 빗대어 생각해봤던 묵상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 너무나 다른데 어쩌면 초대교회 성도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힘든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묵상의 마무리도 어떤 환경에 있든 우리가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 안에 관계되어 살아가면서 훈련받고 있다는 점을 들면서 변치 않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면서 끝나지요. 군대라는 환경 역시 형제님이 그곳에서 하나님과 관계되면서 신앙을 지키고, 고민하시는 만큼 형제님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고. 앞으로도 사회에 나와서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신의 신앙에 대해 고민하면서 살아 가시겠죠.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란 정체성의 한 단면이라 생각봅니다. ^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