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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의 목적 - 조나단 에드워즈가 본
조나단 에드워즈 지음, 정일오 옮김 / 솔로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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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 안에서 나의 기쁨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은 모순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 영광을 위한 간절한 열망이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배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 완전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스러움을 스스로 만족하신다. 이것은 자화자찬, 자기만족의 단순한 인간적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실제로 그렇게 완전하시고 영광스러우시기 때문에

스스로 만족하고 영광스럽고,, 영광을 받으실 수 밖에 없는 완전한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으신다.

피조물은 하나님 영광의 반사체이다. 우리의 역할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게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미 완전한 영광을 갖고 계시고, 그 영광을 우리가 비추는 피조물인 것이다.


책이 너무 어려웠다.. 두 번은 못 읽을 것 같다... 접근하기 너무 어려운 책...

그래서 평점을 높이 줄 수가 없었다.. 영미권에서도 어려운 책인데, 번역서이기 까지 하다...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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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이웃 돕기는 하나님의 은혜 받는 비결이다 - 조나단 에드워즈 명설교 시리즈 7
조나단 에드워즈 지음, 백금산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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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 명설교 시리즈'란 테마로 발행된 소책자이다. 구입한 건 아닌데 괜찮은 독자였는지 증정품으로 삽입되어 왔다. 얇은 책자라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

원제는 'Much in Deed of Charity' 뭐, 풍성한 자선행위. 그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굳이 '불우이웃돕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이다.'라고 설교가 전달하는 중심메시지로 제목을 바꿨는지는 모르겠다. 부제 정도로 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에드워즈가 맘에 들어할까? 본문으로 채택된 말씀은 고넬료이다.

 

(행10:4-6)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본문으로 부터 고넬료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게된 동기, 성령을 입은 계기가 바로 그의 기도와 구제의 풍성함에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더불어 잠언의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잠11:25). 세례요한의 가르침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3:11) 등 자선과 관계되는 여러 말씀들을 병행인용하며 자선이 신자에게도 매우 필요한 행위이며,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통로라고 말씀한다.

 

분명, 이 설교의 메시지로 부터 가난하고 어려운 자에 대한 자선과 성도에게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바라시는 바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설교 그대로를 인용하자면 자선은 신자의 의무이다.)

 

한편, 내용 중 이해하기 난해한 부분도 있었다. 의구심이라고 해야겠다.

 

(마 7:13-14, 개역)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구절이 그리스도께서 자선을 의무사항으로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라는 것이다.(p.37)

 -(본문중)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들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 원칙이 아주 좁고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문과 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언뜻보면 평범해보인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흐름에서 이 구절이 자선이 의무임을 염두에 두고 마지막에 정리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5장, 6장에서 자선을 언급했음을 지적하시면서.

그러나 산상수훈에는 수많은 메시지들이 담겨있다. 팔복. 율법. 분노. 간음. 이혼. 맹세. 복수. 원수사랑. 구제. 주기도문. 재물. 걱정마라. 비판하지 마라. 구하라찾으라두드리라. 좁은문 등등.

그러므로 이 좁은 문에 대한 구절이 자선과 연관된다는 해석은 나로서는 납득이 되질 않았다. 내가 볼 때는 이 구절은 여러 산상수훈 중 하나인 좁은 문에 대한 교훈. 천국에 가는 길이 그만큼 좁고 협착해 천국에 가는 사람이 적다는 그 교훈일 뿐이다.

 

두 번째, 고넬료가 기도와 구제로 인해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말한다.(p.44)

 -(본문중) 고넬료처럼 하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할 뿐 아니라 힘닿는 대로 자선을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고넬료와 같이 성공하는지, 성령이 충만해지는지, 그리스도와 친밀해지는지를 보십시오.

 첫째, 자선 행위는 성령이 특정 개인의 영혼에 신령하고 달콤한 영향력으로 다가오게 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둘째, 만일 부모나 가장들이 자기 집의 소유를 자선하는 데 많이 사용한다면 자선 행위는 성령이 가족 위에 부어지는 좋은 방법입니다.

 셋째, 한 집단이 사람들이 자선 행위를 풍성히 하면 성령이 사람들 위에 충만히 부어집니다.

 

그리고 휫필드나 어떤 부흥사들의 자선행위를 통한 부흥과 성공적인 사역도 말한다.

다만, 다소 모호한 것은 있다. 우선, 고넬료가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께서 그 들으심이 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베드로를 초빙하게 되었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성령이 임했다. 그러나 이것이 본문에서 처럼 자선행위 자체가 성령의 개인적인 임재나 가족단위의 임재가 된 근거라고 정의하는 것에는 애매하다. 그것이 성령을 받도록 하는 동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한 부분을 차지할 수는 있겠지만, 자선행위 자체가 성령충만을 받는 직접적인 동기라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느낌이다. 오히려 직접적인 동인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고넬료의 구제가 성령충만의 결과를 얻기 위한 최초의 동기제공은 됐지만, 그 자체가 성령충만의 직접적인 동인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베드로를 초빙해 설교를 듣게 되었다는 사실이 성령충만의 직접적인 동기였다는 것이다.

 

성전의 미문의 앉은뱅이는 자선행위는 커녕 자선을 받아서 살아갔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켰을 때 그는 성령충만하여 뛰고 걸으며 찬양했다. 성령은 자유롭게 일하시며,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임재하신다. 물론, 에드워즈는 자선행위가 성령충만을 받는 하나의 유력한 방편이 된다는 얘길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다만, 본문에서 처럼 '자선행위=성령충만' 과 같이 자선행위 자체가 직접적인 성령충만의 동기라고 단정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단순히 에드워즈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접근하는 그리스인들에게 편견을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나머지 판단은 또다른 독자들에게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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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합주회 조나단 에드워즈 클래식 5
조나단 에드워즈 지음, 황혁기.정성욱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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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서는 초교파적으로 성도들이 함께 연합하여 기도하는 것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성경적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스가랴 8장과 다니엘 및 요한계시록을 통해 나타는 천년왕국과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권위가 무시되고 있는 사회의 암울함에 반하여 교회가 함께 기도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간구해야 된다는 것이다.

 처음 앞부분을 읽으면서는 에드워즈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임재가 일종의 부흥으로 간주되었으나 차츰 그것이 '천년왕국'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어째서 에드워즈는 이 천년왕국의 임재를 두고 특별한 연합기도의 필요성을 주창했는지 의아함을 가지게 했다.

 에드워즈는 천년왕국이 일종의 부흥의 한 형태로 이 지상에 이뤄질 하나님의 현현을 기대한 것인지 아니면 천년왕국의 지상성취를 그대로 보면서 그것이 우리의 기도 가운데 영향을 받을 그 어떤 부흥으로 이해한 것인지 정확한 판단이 서질 않았다.

 아무튼, 이러한 부분을 건너 뛰고라도 교회가 하나의 연합된 기도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굉장히 의미있는 일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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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G 2009-12-03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대주의적 관점에서 천년왕국설은 총 3가지 학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이 이것이다. 전천년설은 천년왕국 이전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휴거가 있다는 것이고, 후천년설은 천년왕국 이후에 재림과 휴거가 있다는 것이다.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이란 상징적인 의미이지 실현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이러한 과점에서 볼 때 조나단 에드워즈는 후천년설을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챤으로써 천년왕국은 전천년설이 더 비중이 있다고 생각된다.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 세계기독교고전 42
조나단 에드워즈 지음, 양낙홍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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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사의 많은 거장 가운데 조나단 에드워즈에 관한 비평은 매우 건전하고 긍정적이란 인상을 받아왔다. 지금까지 그의 업적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접하였으나 실상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를 통해 그의 자서전과 일기, 결심문을 읽어본 것이 고작이었다. 이번에 읽은 이 '놀라운 회심 이야기'가 사실상 두번째에 해당한다.

 

 보통 부흥이란 주제를 논하는데 본서가 많이 인용된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가 무엇을 어떻게 말했길래 이 책을 강조하나 조금은 반신반의하였다. 하지만 직접 읽으면서 참으로 귀한 책이란 것을 느꼈고 마음의 많은 위로마저 주었다.

 

 에드워즈는 이 책에서 그가 사역한 노샘프턴 교회에 임한 성령의 부흥역사를 매우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조심스러운 자세로 겸손히 설명한다. 그것도 자세히 말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의 교회 가운데 있었던 성령의 역사가 거짓이 아님을 말하고 싶어하고 그가 본 부흥으로 말미암은 사람들의 인격적이고 심리적인 변화들에 예의주시하였음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부흥에 관한 건전한 시각을 갖고 있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특별히 부흥에 관한 자신의 일반적인 견해를 크게 갖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다만, 그가 경험한 부흥이 자연스럽게 온 것이었고 그래서 그것을 겸손하고 조심스러운 자세로 어느 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려하면서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많은 이들이 에드워즈의 부흥을 가장 성경적이고 하나님 주권적인 부흥에 대한 묘사라고 추켜세우는 것인지 모른다.

 

 한편, 부흥이 옴으로써 신자들에게 나타난 심리적인 변화를 잘 설명해주는 2장에서는 단지 부흥에 관한 것 이상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나타날 수 있는 심리적인 고충과 갈등을 함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고 생각되었다. 사실, 이 부분에서 내 마음에 많은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하였지만 그가 이 부흥에 관한 기록을 함에 있어 매우 객관적이고 한 극단에 치우치려하지 않았던 점에서도 매우 감사와 위로가 되었다.(에드워즈는 이 책 외에도 늘 양자간의 편견에 치우치는 것을 주의했던 것으로 안다.)  왜냐하면 내가 바라는 바가 바로 이러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소위 칼빈주의와 알마니안주의가 매우 대립적인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데 이 점에 있어 나는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싶다. 물론, 내가 아직 이러한 신학적 지식이 매우 부족하여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칼빈주의자들도 또한, 찰스 피니나 요한 웨슬레도 사실상 구원받은 한 형제이다. 그들의 사상과 견해에 다소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너무 편협한 자세로 비방을 하는 것은 교리적 지식의 완전함을 떠나 성경적인 연합원리에서 논쟁과 다툼, 분열을 야기하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누가 스스로를 완전한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위대한 지성에 이를지라도 그가 인간의 영역 안에  있었던 한 그의 지식에는 흠이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견해와 다소 다르다고 너무 비난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라 본다. 다만, 다소의 문제가 있는 부분을 발견한다면 그에 대해 객관적인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주의를 주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 다음 맞는 부분에 있어서는 또한, 인정을 하면서 한 형제로써의 의가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점에 있어서 조지 휘트필드는 웨슬리와의 관계를 잘 다루지 않았나 생각케 된다.

 

 또한, 이렇게 사람의 지식에 흠이 있고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이러한 불완전한 자들을 통해서도 놀라운 복음전도와 부흥사역을 일으키시지 않으셨는가.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취할 바를 취하셨는데 어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된 자들이 지나친 편견을 드러내려하는지 감히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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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위로 - 조나단 에드워즈의 묵상
돈 키슬러 외 지음, 조계광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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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책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직접적인 저작은 아니다. 다만, 조나단 에드워즈의 여러 작품들로부터 발췌한 인용문을 그 주제별로 묶어 편집했다. 따라서 에드워즈의 이지적이면서도 영감어린 교훈들을 느낄 수 있도록 잘 구성되어있다. 위대한 지성으로 불리는 에드워즈의 건전하고 깊은 영성과 영적 메시지를 간결한 묵상형태의 편집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하루 한 장식의 묵상집으로 활용해도 될 만큼 유용함이 많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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