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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이웃 돕기는 하나님의 은혜 받는 비결이다 - 조나단 에드워즈 명설교 시리즈 7
조나단 에드워즈 지음, 백금산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5년 3월
평점 :
'조나단 에드워즈 명설교 시리즈'란 테마로 발행된 소책자이다. 구입한 건 아닌데 괜찮은 독자였는지 증정품으로 삽입되어 왔다. 얇은 책자라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
원제는 'Much in Deed of Charity' 뭐, 풍성한 자선행위. 그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굳이 '불우이웃돕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이다.'라고 설교가 전달하는 중심메시지로 제목을 바꿨는지는 모르겠다. 부제 정도로 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에드워즈가 맘에 들어할까? 본문으로 채택된 말씀은 고넬료이다.
(행10:4-6)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본문으로 부터 고넬료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게된 동기, 성령을 입은 계기가 바로 그의 기도와 구제의 풍성함에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더불어 잠언의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잠11:25). 세례요한의 가르침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3:11) 등 자선과 관계되는 여러 말씀들을 병행인용하며 자선이 신자에게도 매우 필요한 행위이며,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통로라고 말씀한다.
분명, 이 설교의 메시지로 부터 가난하고 어려운 자에 대한 자선과 성도에게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바라시는 바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설교 그대로를 인용하자면 자선은 신자의 의무이다.)
한편, 내용 중 이해하기 난해한 부분도 있었다. 의구심이라고 해야겠다.
(마 7:13-14, 개역)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구절이 그리스도께서 자선을 의무사항으로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라는 것이다.(p.37)
-(본문중)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들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 원칙이 아주 좁고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문과 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언뜻보면 평범해보인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흐름에서 이 구절이 자선이 의무임을 염두에 두고 마지막에 정리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5장, 6장에서 자선을 언급했음을 지적하시면서.
그러나 산상수훈에는 수많은 메시지들이 담겨있다. 팔복. 율법. 분노. 간음. 이혼. 맹세. 복수. 원수사랑. 구제. 주기도문. 재물. 걱정마라. 비판하지 마라. 구하라찾으라두드리라. 좁은문 등등.
그러므로 이 좁은 문에 대한 구절이 자선과 연관된다는 해석은 나로서는 납득이 되질 않았다. 내가 볼 때는 이 구절은 여러 산상수훈 중 하나인 좁은 문에 대한 교훈. 천국에 가는 길이 그만큼 좁고 협착해 천국에 가는 사람이 적다는 그 교훈일 뿐이다.
두 번째, 고넬료가 기도와 구제로 인해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말한다.(p.44)
-(본문중) 고넬료처럼 하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할 뿐 아니라 힘닿는 대로 자선을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고넬료와 같이 성공하는지, 성령이 충만해지는지, 그리스도와 친밀해지는지를 보십시오.
첫째, 자선 행위는 성령이 특정 개인의 영혼에 신령하고 달콤한 영향력으로 다가오게 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둘째, 만일 부모나 가장들이 자기 집의 소유를 자선하는 데 많이 사용한다면 자선 행위는 성령이 가족 위에 부어지는 좋은 방법입니다.
셋째, 한 집단이 사람들이 자선 행위를 풍성히 하면 성령이 사람들 위에 충만히 부어집니다.
그리고 휫필드나 어떤 부흥사들의 자선행위를 통한 부흥과 성공적인 사역도 말한다.
다만, 다소 모호한 것은 있다. 우선, 고넬료가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께서 그 들으심이 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베드로를 초빙하게 되었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성령이 임했다. 그러나 이것이 본문에서 처럼 자선행위 자체가 성령의 개인적인 임재나 가족단위의 임재가 된 근거라고 정의하는 것에는 애매하다. 그것이 성령을 받도록 하는 동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한 부분을 차지할 수는 있겠지만, 자선행위 자체가 성령충만을 받는 직접적인 동기라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느낌이다. 오히려 직접적인 동인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고넬료의 구제가 성령충만의 결과를 얻기 위한 최초의 동기제공은 됐지만, 그 자체가 성령충만의 직접적인 동인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베드로를 초빙해 설교를 듣게 되었다는 사실이 성령충만의 직접적인 동기였다는 것이다.
성전의 미문의 앉은뱅이는 자선행위는 커녕 자선을 받아서 살아갔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켰을 때 그는 성령충만하여 뛰고 걸으며 찬양했다. 성령은 자유롭게 일하시며,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임재하신다. 물론, 에드워즈는 자선행위가 성령충만을 받는 하나의 유력한 방편이 된다는 얘길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다만, 본문에서 처럼 '자선행위=성령충만' 과 같이 자선행위 자체가 직접적인 성령충만의 동기라고 단정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단순히 에드워즈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접근하는 그리스인들에게 편견을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나머지 판단은 또다른 독자들에게 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