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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터졌다. 희대의 스캔들이라며 '디젤게이트 사건'으로 까지 회자되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폭스바겐. 독일의 명차 브랜드이며 도요타와 함께 세계 1위를 다투는 자동차그룹이다. 특히 아우디, 포르쉐, 람보르기니, 부가티, 벤틀리 등 잘 알려진 고급 브랜드를 소유한 자동차 거대집단인 셈이다.


이 거대 자동차회사가 전세계를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였다는 사실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발단은 폭스바겐이 개발한 Clean Diesel. 디젤엔진의 경우 질소산화물이 다량 발생되는데 이 물질은 수분과 반응해 산성비가 되고, 오존층을 파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수입차에 대한 배기규제를 유럽보다 2배 더 강화하고 있다. 결국 디젤엔진의 배기정화기술이 더 요구되는 셈이다. 사실 배기가스 정화만 놓고보면 어려운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정화장치가 강화될수록 자연히 공기배급도 불편해지기에 결과적으로 엔진성능이 크게 떨어지게 된다. 그런데 폭스바겐은 이러한 기술적 한계를 뛰어넘었다며 Not a concept car를 표방하며 클린 디젤을 미국에 수출해왔다.(참고로 현대차는 기술이 없어 디젤차를 미국에 팔지 못했음.) 하지만 이것은 조작이었던 것이다.


폭스바겐은 기술적한계를 뛰어 넘었던 것이 아니라, 배기가스 검출을 위해 정차중일 때는 테스트모드가 작동해 정화장치가 가동되게 했고 실제주행모드에선 정화장치가 꺼져 엔진이 원래성능을 발휘하도록 프로그래밍했던 것이다. 그 결과 실제주행시에는 기준치의 40배에 달하는 질소산화물이 발생되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사기였던 동시에 클린 디젤은 여전히 컨셉의 영역이었던 셈이다.


사건이 터지자 폭스바겐의 시가총액은 무려 40조원이 증발해버렸고, 미국은 최대 21조원에 이르는 벌금을 내릴 수도 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리콜대상차량은 전세계 1100만대를 웃돌고, 집단소송 움직임까지 보이면서 사실상 폭스바겐은 폭망했다고 말한다.


폭스바겐의 이번 사건은 지난 도요타 리콜사태와 더불어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준다. 도요타의 경우 '마른 수건도 다시 짠다.'라는 기치 아래 철저한 원가절감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해왔고, 모든 제조업체의 표준이 된 '도요타 웨이'가 있다. 그러나 지나친 원가절감으로 품질에 누수가 생기기 시작했고 리콜비용을 막고자 로비로써 해결하려다 들통이나고 말았다. 원가절감이라는 新이 안전이라는 최고의 가치 위에 올라서 주객이 전도되면서 위기를 겪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 제일주의라는 신앙적 가치를 잃으면 다른 신들이 우리 가치의 최상위에 오르게 되고 우리 신앙은 오래지 않아 무너지고 만다. 시험당한 가룟 유다처럼 말이다. 또,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충족한다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윤리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Clean Diesel 인냥 스스로를 과장하고 자신과 상대방까지 기만하곤 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바리새인은 종교적 윤리에 최선을 다하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만큼 의롭지 않고서는 천국에 못 갈 것이라고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세리가 더 의롭다함을 받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가 외적인 행위에만 기반된 것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바리새인의 행위기반 윤리는 천국에 들어갈만큼 의로왔다. 그러나 내면과 양심과 겸손에 있어 자기죄를 보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자기를 의롭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주는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도 꽤나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워졌다고 생각하면 자칫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고 마음이 높아지기 쉽다. 아이러니같지만 사람이 얼마나 행위중심적인 사고기반 위에 있는지 생각해보면 정말 그러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십계명도 지켜야 한다. 그걸 지켜서 천국을 가는 건 아니지만 못 지킬걸 지키지 말라고 주신것도 분명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Not a concept car' 라고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는 것일 거다. 우리 역시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사람들 앞에서 테스트모드일 때와 주행모드일 때가 다르다. 더더욱 우리 양심은 아예 그런 구분된 프로그래밍이 필요치 않을 정도다.


그러나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설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는 그날.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라고. 그날 내 신앙의 시가총액은 얼마나 폭망하게 될까. 내 신앙에 세리가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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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들어 각종 매체에서 연일 어느 뮤지션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생전에는 종종 비호감과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던 그이다. 그러나 새삼 그의 죽음이 증명해 낸 것은 수만은 안티들의 수면 아래 있던 조용한 팬들의 애도였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3,40대 층이다. 나 역시 어느덧 30대 중반이기에 그의 음악적 궤도를 지켜본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나 역시 중고교 학창시절에 그의 음악을 사색하며 지나왔다. 사실 최근에는 더 그러했겠지만, 당시에도 그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지극히 대중적인 동시에 불편한 진실을 감수해야 할 처지였다. 자기만의 음악세계와 철학이 너무나 분명한 뮤지션이었기에 대중의 호불호도 분명했고, 더구나 그의 안타까운 전력이 더욱 그를 기괴한 인물로 전락시켜놓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가 19살 구원을 받기 전까지는 거의 모든 음악장르를 구애 없이 잡식하던 터라 적어도 그가 어떤 뮤지션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뮤지션으로서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보통의 대중음악이 흥을 돋우거나 정서적 공감을 누리는 것이었다면, 그는 자기성찰을 통해 음악으로 사색할 수 있는 재료를 제공해주었다.


한편, 이제 영원한 죽음의 문을 지나간 그는 오늘의 나에게는 사실 그 어떤 의미의 대상도 아닐 것이다.그런데 한가지의 여운은 남겨준다. 바로 열망이다. 그는 가수가 아니라 뮤지션이었다. 좋은 곡을 받아 노래를 부르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기스타가 아니었다. 심지어 아이돌의 계보로 출발하였음에도 스스로 그 자리를 비켜갔다. 보통 싱어송라이터라도 전성기가 지나면 더 이상의 자기 음악적 색깔을 담은 새로운 창작물을 생산하기 힘든 법이다. 음악에 대한 도전과 열정, 새로운 철학과 장르에 대한 개발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히 프로듀서로 전향하면서 후배들의 음악을 만들어주는 일에 주력한다.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음악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는 자기만의 곡을 만들어 왔다. 그 의미는 음악에 대한 단순한 열정을 넘어 소위 소명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란 의미다. 그는 종종 음악을 향한 자신의 열망을 노랫말로 말해왔다.

생애 처음 기타를 사고 음악을 하기로 맘 먹었을 때, 비웃는 친구들 걱정하는 친구들 함께 음악을 시작한 친구들이 있었지만 지금 그의 곁에는 그 친구들이 없노라고. 그러나 나는 영원히 원한다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세상에 길들어지는 것이지만 남들과 닮아가는 사이 꿈은 우리 곁을 떠난다고. 즉, 그는 음악으로 평생 밥 먹고 사는 것이 힘든 현실에서 세상에 길들여져야 했지만, 꿈을 잡았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불안한 미래 때문에 함께 하자고 말하지 못했다고 두 번이나 노래했다. 사랑보다도 음악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의 장례식장에 울려 퍼진 민물장어의 꿈도 그렇다. 민물장어인 자신이 민물이란 생태적 근원을 넘어 바다의 거친 파도 아래까지 가고자 하는 음악적 목표를 위해 자기를 깎고 따뜻한 저녁과 가족의 웃음소리까지 고갤 흔들어 잊어버리며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쉬지 말고 가라하는…. 그만큼 음악을 향한 그의 열정은 고독하기 짝이 없었고, 음계 위의 수도사처럼 음악에 자기 삶을 걸었던 것이다.

 

언젠가 구원을 받은 후 이 곡을 듣게 되었을 때, 마치 난 이 곡이 오지에서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죽어가는선교사의 노래처럼 들렸다. 그에게는 음악이 곧 복음이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유가 우리에겐 정말 우울한 명제일테지만. 그런데 이 우울한 명제가 내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너의 복음은 무엇이냐라고. 그가 노래한 것처럼. 이것 아니면 진짜 죽음, 이거 아니면 정말 끝장 내 전부를 걸어보고 싶은 니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한때는 청년의 그 순수한 열정으로 정말 오지의 선교지로 가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죽을 수 없을까? 죽기 싫어진 걸까? 지금 누리는 것이 많아서 포기할 수 없다라는 단지 그 변명이 아니었다. 그때의 순수한 열정에 못 미치는 것도 물론 중요한 변명의 하나이겠으나, 오히려 더 두려운 변명이 생긴 것이다.

 

이제는 나 하나 희생하고 죽어서 될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이토록 큰 두려움일 줄은 과거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열정뿐 아니라 오히려 신앙의 패기와 자신감마저 움츠러든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길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는 아도니람 저드슨과 허드슨 테일러를 동경했지만 이제 나는 처자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하지 않으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그 말씀 앞에서 망설이고 심각하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열망이란 것이 대상을 향한 그저 자기 혼자만의 열정으로만 결론 지어지는 것도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열정도 중요하지만 자기에게 책임지어진 어떤 기대와 의무 조차도 져버릴 수 있을 만큼 소명과 사명감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던 거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인생을 소명과 사명감으로 불태울 수 있다라면 그것은 가히 위대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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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3:11, 개역)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유리창 같은 밤하늘 위 별은 빛나고, 바람은 차가운 12월의 겨울. 마지막 교사모임을 참석하고 돌아왔다. 해가 바뀌면 교회학교 아이들은 여전히 분반수업을 하고, 우리의 교사들은 여전히 선생님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교사가 아니다.

 

 교회학교를 위해 내게 주신 달란트를 많이 투자했다. 나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경험이란 스승을 통해 값진 것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와서 가장 많이 생각되는 것이 하나있다. 지식, 유능함, 많은 가르침. 덕의 요소는 너무나 많을 것이다. 그러나 리더의 중요한 의무중에 하나는 울타리를 잘 치는 것이었다.

 

 방목하는 양들을 위해 잘 건조된 풀, 고영양식의 사료, 포근한 잠자리. 그 모든 것이 우선되어야 되겠지만 울타리가 없다면 양들은 불안할 것이다. 언제 덮칠지 모르는 이리와 늑대로 인해 편안한 마음으로 고급 양식을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할 것이다. 좋은 풀, 좋은 잠자리가 그 가치를 잃어버린다.

 

 교사들이 즐거운 마음과 기쁨으로 봉사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의무였다. 그러나 처음엔 그걸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다그쳤고, 원망했고 또, 책망했다. 아니다. 나는 보호해야 했고, 평안한 마음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힘써야 했다. 오늘 나는 익숙해진 코트를 벗으며 다시금 반성해본다. 위로를 주고 싶었던만큼 주지 못했던 것. 격려를 하고 싶었던만큼 하지 못했던 것. 아이들과 대화하려고 무릎을 꿇지 않았던 것. 그러므로 나는 너무나 해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시린 마음을 다시 도닥여본다. 언젠가 또 다른 위치에서 앞을 걸어가야 된다라면 나는 초원의 평온한 양들을 바라보며 웃고, 한 손의 망치로 울타리를 고치고 있을 것이다. 단단히 못질을 하고 삐져 나온 못 끝을 망치로 쳐서 구부리며, 그래서 이리가 넘어오지 못하고 양들은 못에 찔려 상처받지 않는. 양들은 나를 보지 않겠지만, 안전하고 평온할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환경은 변해가며 모습들은 달라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신다. 함께한 시간도, 그렇지 않은 시간도 나와 하나님에겐 모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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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my core value?_2011.12.19

 

연말 워크숍 때 유명강사의 교육시간을 가졌다. 유수의 대기업 회장들이 듣는다는 교육기관의 강사였다. ‘가치관 경영에 대한 4시간 강의를 들었다. 심플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경험한 사례를 곁들여 유익한 시간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기업을 이끌고, 고객을 파악하고 그것을 위해 얼마나 치열한 공부와 연구와 시도와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지 실로 놀라울 정도이다. 종종 혁신적인 아이디어, 혁신적인 마케팅 등을 통해 기업의 주도권이 바뀌고, 새로운 시장이 열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복음의 기업을 확장해가는데 얼만큼 혁신적인 걸까? 많은 전도인들이 깊이 있게 공부하고 연구한다. 사실적인 증거자료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복음전도에 나선다. 충분히 혁신적이다. 더불어 한국을 중심을 복음이 활발히 증거되는 것도 놀랍다. 그러나 좀 더 노력하자.

 

 알카에다는 목숨을 바쳐 그들의 신념을 위해 싸운다. 그들의 신념을 위해 임신부도 폭탄을 매고 자살테러를 감행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영광이며, 사명의 모두이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조직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게 하는 것일까? 조직의 신념이 자신의 신념이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신념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그것은 정녕 목숨조차 버릴 수 있는 확고하고 위대한 신념이 되었을까? 신념을 액자에 담아 벽에 걸어두는 것으로 안주해버리기에 너무나도 많은 안락과 풍요와 핑계와 유혹이 도처에 가득하다.

 

 가치관 경영의 3가지 요소에 대해 들었다.

 

-사명(mission) : 왜 사는가? 존재이유. 그것을 생각하면 사명이 된다.

 -핵심가치(core value) :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액션 할 것인가?

 -비전(vision) : 무엇이 될 것인가?

 

 성경을 배울 때마다 늘 듣는 주제와 일맥상통했다. 우리의 사명, 우리의 행동방식과 삶의 모습, 우리의 비전. 교회는 이미 가장 모범적인 가치관 경영의 실례였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내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익숙해진 본질을 너무나 잊고 살아가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은 정체성를 정립하는 질문이다. 물론, I’m a really Christian. 수학공식처럼 정답이 술술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되묻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액션 할 것인가? 내게 주어진 사명이 분명하다면, 나의 정체성이 분명하다면 내 삶의 모습은? 내 삶의 표준은? 내 삶의 방식은? 그러므로 나의 궁극적인 질문은,

 

 ‘What is my core value?’

 

 나의 핵심가치는 무엇이란 말인가. 복음에 대해, 전도, 말씀, 기도, 교제, 성결, 뜨거움, 참됨, 순결, 정직, 소망, 사랑, 긍휼, 자비, 은혜, 도덕, 성실, 탐구, 갈망, 회개, 눈물, 호소, 열망, 바라봄, 경건, 겸손.

 

 사명은 있으나 핵심가치는 빠져있지는 않았는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있으나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방식과 액션은 어디에 있는가. 현재에 만족할 수 없고, 안주할 수 없다. 회개하라 뜨겁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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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점 줄까?_2011.12.08

 

동서고금, 남녀노소,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바쁜 연말이다. 연말 인사고과를 진행중이다. 오늘 내 손에 한 뭉치의 평가표가 주어졌다. 이미 각 부서에서 부서원들이 자신의 팀장 리더십을 평가한 결과물이다. 평가항목별로 부여된 점수를 따라 합계점수가 잘 집계되었는지 검토하란 임무가 던져졌다.

 

 아니나 다를까 몇 군데에서 평가점수가 잘못 집계된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차츰 검토가 재밌어졌다. 팀장님이 할 일을 내가 하게 되니 자연스레 각 부서에서 팀장에 대한 평가가 어떤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한 장의 평가표에 불과하지만 마치 그 종이 몇 장을 통해 그 부서의 분위기, 팀장과 부서원의 남모를 신뢰와 공감을 다 꿰뚫어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던 와중.

 

 한 가지 의미 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내게 짧지만 의미 깊은 묵상을 던져준다. 동일한 부서의 동일한 팀장을 놓고 부서원마다 어쩜 그렇게 평가결과가 다른 것인지. 그 중에서도 품질관리팀이 내 사색의 문을 열어준다.

 

 품질관리팀장의 평가 최고 점수 98, 최하 점수 42.

 

 10여평 남짓한 품질관리팀 사무실에서 10명이 모여 근무하고 있다. 동일한 팀장을 놓고도 극적인 평가가 아닐 수 없다. 최하 점수의 곱을 해도 최고점보다 14점이 적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준과 시각이 얼마나 다른가. 동일한 사람이면서도 누군가에게는 롤모델이 되는 뛰어난 팀장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당장 짐 싸고 가야 할 팀장에 불과하다.

 

( 14:10, 개역)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정직한 것일까? 앞에 있는 사람은 항상 판단 받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게는 98, 누군가에게는 42점 짜리다. 누가 옳은 것일까? 결론은 아무도 옳지 않다는 것. 바울은 자기 자신도 평가할 수 없었다.

 

( 119:137, 개역)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정직하시니이다』

 

 평가표를 다 넘기고 바닥이 드러날 때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그리스도인은 이 제일 뒷장에 하나님의 평가표가 있겠지? 앞에 아무리 98, 42점이 가득해도 마지막에 남은 하나님의 평가표만 정직하겠지.’

 

 그렇다. 사람의 평가를 들으면 낙심하기 쉬워지지만, 하나님의 평가를 들을 땐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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