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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의 부족

습관의 문제로부터 연계되어 같은 선상에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훈련의 부족’이란 개념입니다. 신약성경 14권을 기록한 바울의 삶을 그의 서신을 통해 바라볼 때 우리는 바울이 얼마나 철저히 훈련 받은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우리가 바울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울과 같은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에 보면 바울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하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정말 심령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당한 바울의 훈련이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2절에는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함에 처할 줄도 알아 자신은 풍부와 비천함을 막론하고 모든 상황에서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진술합니다. 그것이 바울의 훈련이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높은 곳과 지극히 천한 곳까지 그 수위를 가리지 않고 훈련을 받았습니다. 아니, 훈련을 당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실상 혹사를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 믿음의 선배이자 동시에 도무지 우리로써는 흉내 낼 수 없는 신앙의 절대 경지에 이른 위인입니다.

단순한 예로 우리는 생활의 조금만 불편이 있고, 물질의 어려움에 봉착해도 믿음의 시험을 당하거나 좌절하거나 원망하거나 심지어 실족까지 합니다. 그 사람이 집을 잃어버린 것도 아닙니다. 단지 생활비의 문제가 있을 때도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 그런 것입니다. 나는 빈곤에 처할 줄도 안다고. 나는 풍족함도 누려봤지만 빈곤에 처하는 법도 배워서 이제 부하든지 빈곤하든지 그 어떤 외적인 환경이 내 믿음이나 내 신앙 내 상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바로 그것이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바울의 고백이 가진 근본적 의미일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바로 ‘훈련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행 24:25-26, 개역) 『[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바울이 고소를 당해 지방수도였던 가이사랴의 관내 옥에 갇혀 있었을 때였습니다. 벨릭스 각하는 바울과 대질심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익히 벨릭스란 사람이 매우 탐욕적이고 부도덕하며 파렴치한 인간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벨릭스 앞에서 설교하길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을 주제로 설교하였던 것입니다. 그 설교는 적중했습니다. 벨릭스는 실제로 그 설교를 들으면서 양심의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벨릭스란 사람의 이중적 태도였습니다. 본문에서 분명히 벨릭스는 두려움을 호소하는 동시에 뇌물을 기대하는 부정축재의 욕망에 사로잡히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순수하지 못했고,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요?

바로 그것은 이 벨릭스란 사람이 이날까지 평생을 살아오면서 탐욕에 연단된 마음으로 살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사실적으로 도덕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는 윤리적이지 못했고, 성결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탐욕과 방탕과 부도덕과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훈련되어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대 사도인 바울의 그 장엄한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한 강론을 들으면서도 그의 마음은 완전히 KO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은 느꼈지만 그는 길들여진대로, 그의 습관대로, 그의 훈련되어진 방식대로 동시에 뇌물을 기대하는 탐욕주의자였습니다.

십일조에 있어서도 그 습관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불순종에 길들여졌다는 의미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훈련 받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람은 십일조의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벨릭스처럼 양심의 호소를 자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떨쳐버릴 수 없는 이기심과 탐욕, 변명에 훈련 되어진 자아로 말미암아 이중적 태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벨릭스는 말했습니다.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그는 양심의 가책과 두려움을 느낄 때 심한 불편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의 얼굴과 강론을 듣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를 다시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가장 근본적인 양심에 호소하는 그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단순히 싫어해서 무시하고 묻어버리기엔 그 내포된 바가 너무나 중대함도 느꼈던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영원과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문제임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지금 당장은 그 짓눌러오는 양심의 통증을 떨쳐버리고 싶었습니다. 숨을 쉬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가 길들여진 방식대로, 그가 훈련된 방식대로 탐욕과 이기심에 치밀어 올라오는 자신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심리학적으로 공감해서 이해하려고 시도해볼 때 벨릭스가 심한 내적갈등을 겪음과 더불어 내적장애를 호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심적인 상태는 바로 하나님 말씀 앞에서 우리가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할 때 겪는 우리의 내적갈등 및 슬픔과도 굉장히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 심한 갈등과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 피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말씀 앞에서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며, 그래서 다시 말씀 앞에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일조의 온전치 못한 행위에 있어서도 습관의 문제와 더불어 이것은 훈련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하나의 동인이 되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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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의 장애

(말 3:7, 개역)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이 본문에서 저는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란 구절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오랜 세월에 걸쳐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선민으로써 합당한 예배와 섬김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의 두 가지 상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않았다는 것. 즉,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서 떠나 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들의 그런 외도와 불성실이 단기적인 현상이 아니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라는 표현으로부터 오랫동안 자행된 고질병. 하나의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 세대에 걸쳐서만 하나님의 규례를 벗어나 제 맘대로 살아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관례이자 하나의 전통처럼 자리잡은 불순종이며, 불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의 그런 불신앙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반복되어 유전된 하나의 전통이자 습관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렘 22:21, 개역)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여기서도 역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순종은 습관의 문제라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예배와 순종의 삶에서 불순종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불순종의 종이 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모와 그 할아버지와 그 열조부터 그것이 답습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불순종된 삶의 궁극적인 동인 중에는 ‘습관’의 문제를 결코 배제시킬 수 없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고, 순종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단서 하나를 찾게 됩니다. 바로 그것은 습관의 문제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 구원을 받고, 신앙의 삶에 참여하면서부터 가장 먼저 직면하는 문제는 술을 끊는 문제입니다. 결코 쉽게 이기지 못하는 욕망과 다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의 습관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게임중독자, 흡연자, 낚시광 등 특별한 취미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들 역시 처음 신앙의 삶에 동참하는데 여러 모양으로 시련을 경험합니다. 모두다 습관이 결정적인 마찰을 일으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 역시 동일한 갈등을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김과 예배하는 올바른 삶의 방식에 대해 열조로부터 제대로 교육받고, 훈련 받지 못했습니다. 결과 그들은 어릴 적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청종하는 습관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럼으로 그들은 그 습관을 좀처럼 잘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되물림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십일조에 있어서도 이러한 현상은 곧잘 접목됩니다. 좀처럼 십일조에 있어서 개선이 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습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배워야 할 신앙의 초기 시점에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습관을 양육하지 못했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듣고, 배워왔지만 실제적으로 그것을 순종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결과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느끼고 인식하지만 동시에 습관을 두지 못함으로 인해 끝내 행위의 순종에서는 결렬되는 일종의 장애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장애’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해보십시오. 이 말이 ‘불구’란 의미는 아닙니다. 인터넷 연결이 잘 되지 않으면 우리는 ‘통신장애’란 말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쓰인 ‘장애’란 표현과 같은 의미입니다. 장비에 불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이유로 장애를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해야 함을 알고, 하고 싶긴 한데 왠지 모르게 실천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장애’입니다. 온전한 십일조 행위에 대한 순종의 행위가 그들에게 습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컴퓨터를 배운 사람은 타자를 치는데 장애를 느낍니다. 타이핑을 잘 하고 싶은데 독수리 타법을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그 초기 장애를 꾸준한 반복을 통해 극복한다면 그는 타이핑에 능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초기 장애의 상태에서 반복되는 꾸준한 타이핑을 하지 않거나 할 기회가 부족하게 되면 그는 처음 컴퓨터를 만진 때로부터 꽤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수리타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러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전히 장애를 느끼는 것입니다.

십일조에 있어서도 이러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배우는 시점과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기회와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꾸준한 순종의 행위를 통해 습관시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십일조에 있어 계속되는 장애의 상태에 길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8: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습관이 잘못될 때 그것은 습관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다른 병리적인 현상을 동반하게 됩니다. 이를 고린도전서 8장 7절에서는 이와 같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신앙의 잘못된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어떤 잘못된 문제를 야기시키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식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부정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우상의 신전에 바쳐진 것이라면 굳이 그 사실을 알고도 먹는다는 것은 거리끼는 것입니다. 같은 상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함께 참예하고 동참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우상의 재물은 알고서는 먹지 말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일부 사람들이 우상의 재물인줄 알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습관을 따라 거리낌 없이 우상의 재물을 먹음으로 해서 다른 형제자매님들의 마음에 걸림을 주었습니다. 더불어 자신들 스스로도 그 우상의 재물을 여전히 고집하는 습관으로 인해 그 양심이 약하고 더러워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재물 자체에는 어떤 더러운 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음식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상의 상에 올라간 이상 굳이 그것을 알고 그 거리끼는 양심으로 먹을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탐에 빠진 사람들은 우상의 재물에 대한 양심의 부정함을 느끼면서도 그들은 양심을 호소를 무시하고 그 우상의 재물을 탐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들의 양심은 무뎌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과 달리 차츰 그들은 익숙하게 별 다른 거리낌 없이 우상의 재물을 형제자매님들이 보는데도 불구하고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양심이 약학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으로 성경읽기를 게을리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처음엔 그것에 대한 각별한 가책을 느낍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별 거리낌 없이 성경을 읽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모처럼 시간이 나도 성경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TV를 켜거나, 신문이나 잡지를 읽거나, 인터넷이나 십자수 기타 취미로 여가를 사용해버립니다. 십일조에 대한 불순종의 습관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습관이 그들에게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미 그 양심이 약하고 더러워진 결과입니다. 양심이 약하고 더러워졌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망의 법과 성령의 법이 싸우는 것을 말하면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자아와의 싸움이 치열함으로 인해 선을 온전히 행하기에 전력할 수 없는 무기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살려고 해도 그러한 싸움으로 무력감을 느낄진대 하물며 그 양심이 약하고 더러워진 그리스도인은 얼만큼 선을 행하기에 무능력함을 느끼겠습니까? 잘 보십시오. 십일조의 순종하는 습관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들이 대체로 얼마나 비의욕적이고 영적인 일에 무기력한지를. 그들은 교회 안에 참예하지만 언제나 무엇인가 모르는 무기력과 나약함에 길들여져 있음을. 사실상 그는 결코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사람이 못됩니다. 비양심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비윤리적인 성향의 사람입니다. 비록 그가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자칫 그것이 지나친 표현이고, 아닌 것같이 생각될지 몰라도 만약, 정기적으로 갚아야 할 당신의 돈을 갚아주지 않으면서 자신은 버젓이 구두와 옷, 파리바게트와 카페를 이용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면 도둑놈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있는데, 그가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그 사람은 파렴치 범입니다. 어떻게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주를 섬긴다며 봉사하고, 찬양을 부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주를 섬김에서가 아니라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 양심의 가책을 덜어보고 무마시켜보기 위한 다른 방편을 활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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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문제

(고후 8:12, 개역)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고린도후서 8장 자체가 마케도니아 교회의 후한 연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의 연보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할 마음이 있다면 그 있는 만큼이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있겠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없다면 그 이유는 할 마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다고 인정하시나요? 이 말씀을 적용해 보면 우리는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적용해 보고 싶은 어떤 사람의 변명을 들려드리겠습니다. 할 마음이 없었다는 책망에 대한 이 사람의 변명은 이런 것입니다. ‘아뇨, 전 할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저도 정말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막상 내자니 금액이 적어 모양새가 나지 않아 못했을 뿐이예요.’ 어떻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울의 이 말씀은 이러한 사람을 포함해서 하신 말씀이란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변명하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할 마음이 있었다면 그 마음이 있는 대로 하나님은 받으시는 것이 있으실 것입니다. 마음이 없는 것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누군가 전혀 물질의 참여가 없었다면 그는 사실상 참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라구요.

이 교훈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얕은 의지로 우리의 부족한 행위에 대해 많은 변명을 하게 되는지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아냐, 나도 정말 하고 싶었어.’, ‘나도 진심이었다구 다만…’ 그러나 이런 표현은 모두 정말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지 못했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해야 한다는 의무감내지 필요성은 충분히 인식했지만 실제적으로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빠지는 모순이며, 우리가 취하는 자기기만의 실체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마음에는 일종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더 큰 문제들도 발견됩니다.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이사야는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문제를 적나라하게 꼬집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완악했습니다. 그 마음의 결과 그들은 모든 인식할 수 있는 감각기관에 마비가 초래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침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고침을 받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순종해야 함을 깨닫는 것에 있어서 모든 방법과 수단을 닫아버렸습니다. 완악한 마음의 문제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십일조에 있어서 고침 받는 것조차 두려워합니다. 그들의 고민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내가 만약, 십일조를 하기 시작하면 당장 이번 달부터 내 씀씀이는 타격을 받게 될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적금을 깨버려야 돼. 그건 최소한 연간 200만원의 적금을 줄이는 결과를 낳는 거지. 안 그래도 얼마 모으지도 못하는데. 또한, 십일조 하는 만큼의 금액을 보완하려면 난 택시를 타거나, 파리바게트를 이용하거나, 카페에 가는 건 아예 포기해야 될 거야. 아니, 그렇게까지 각박해지는 생활은 정말 참기 힘든 일이야. 난 그 정도로 믿음이 견고하진 않다구. 정말 주님을 섬기긴 힘든 일이군. 나도 주님을 섬기고 싶지만, 나도 십일조를 하고는 싶지만 그것을 하기엔 너무 힘든 희생이 요구되고 있어. 난 도무지 자신이 없군. 안돼. 십일조 말씀을 들을 때마다 괴롭긴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구.’

그는 분명 괴로움을 느끼지만 궁극적으로 바뀌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이것입니다.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고침을 받을까 두렵구나. 난 고난이 싫어. 난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학 1:4, 개역)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은 재쳐 두고 각자 자기들의 집만 멋지게 지어서 사는 것을 보고 학개가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한 마디입니다. 판벽한 집이란 벽을 쳐서 두른 집이란 의미로 곧, 잘 지어진 좋은 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담이 무너지고, 돌이 깨지고, 거미가 줄을 치고, 시랑이 들어가 잠을 자고 똥을 누고 있는데, 그들은 아랑곳 않고 자기들만 시랑과 동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담을 쳐놓고 좋은 집을 지어서 안식하고 있었습니다. 학개의 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정말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라는 당신들의 양심이란 말입니까! 저 하나님의 전 안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거미가 줄을 치고, 시랑과 늑대가 자기 처소인양 짓밟고 들락거리며 울부짖습니다. 벌레들이 지성소까지 들어가고, 황량한 모래먼지와 낙엽과 쓰레기들이 저 거룩한 지성소까지 수북하게 싸였습니다. 저기가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저 모양이거들 하나님의 백성이란 당신들이 높이 쌓고 튼튼히 채워 견고한 망대처럼 집을 두르고 아름답고 멋진 집을 지어 기쁘다고 안식하고 있으니 그것이 당신들의 양심이었단 말입니까! 이를 위해 당신들이 페르시아에서 이곳까지 되돌아온 것이었단 말입니까! 차라리 당신들조차 황무한 집에 있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저 비바람에 휩쓸려 가거늘’

네, 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소유의 재물인 십일조함은 황무하기 그지 없는데 우리의 적금통장은 판벽된 집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이 우리의 양심이란 말입니까?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의 실상입니까?

이제 마지막 마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행 5:3-4, 개역)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여기서 언급되는 마음의 문제는 ‘사단의 마음’입니다. 아나니야는 고의적으로 땅값 얼마를 감췄습니다. 이런 고의적인 속임과 거짓말. 위선적인 아나니야의 태도에 대해 베드로는 이 문제의 동인이 무엇인지 이와 같이 밝힌 것입니다. 그것은 사단의 마음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성령을 속이려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단의 별명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압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경고하시면서 네 아버지는 마귀이며, 거짓의 아비라고 천명했습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아나니야에게 말하는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했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속이고 거짓말하는 거짓의 아비 마귀가 네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마저 속이려 했고, 속일 수 있다고 착각해버렸습니다. 불가능한 속임수에 도전했습니다. 마귀에게 속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각자의 십일조에 대해서 그 얼마를 감추려 할 때, 그 마음은 사단의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호소하시는 성령님을 속였던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성령님은 결코 그런 마음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성령님은 정직한 십일조를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속였습니다. 사단의 마음 거짓의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 얼마를 또는 그 전부를 감춰버렸습니다. 그 사람이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원리입니다. 성령을 근심시키고, 소멸시키는 사람입니다. 실상 그는 성령님을 배제하고 사단의 지배 아래에 속고 속이는 위선에 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비참한 상태를 감지하지 못합니다. 행함이 없이 그저 도를 들으면 되고, 찬양 부르면 되고, 봉사하면 되고, 십일조 말씀 할 때 잠시 괴로워해주면 되고, 하나님의 집은 황량하면 되고, 나는 판벽한 집이 있으면 되고… 그렇게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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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부재

앞서 우리는 발람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십일조에 순종하고자 함에 있어서도 여전히 ‘욕심’이란 것이 우리의 순종을 방해할 수 있음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부터는 이에서 더 나아가 우리가 실제적으로 십일조가 잘 되지 않는 어떤 이유들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약 1:22-25, 개역)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도를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야고보서는 행함으로 증거되는 믿음의 실체를 잘 다뤄주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지나치게 행위의 의를 묘사하는 것처럼 오인될 수 있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바는 믿음의 의로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으로 말미암아 행위의 의를 전혀 무시하려고 했던 자유주의자들에게 주는 권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야고보서는 로마서3장 31절 말씀의 구체적인 해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롬 3:31, 개역)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야고보는 모세의 율법이 아닌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를 율법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곧, 그리스도의 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면서 도를 실제로 행하는 자가 되는 것에 주력하고 단순히 듣고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야고보의 독특한 증명은 ‘만약 누군가가 도를 들은 후 실행하지 않게 되면 그는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이란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증명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도를 듣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실행하는데는 항상 어리숙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대부분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어째서 도를 듣고도 행치 않으면 자기기만에 빠진 것일까요? 무엇보다 여기서 말하는 ‘도’란 것 자체가 행함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법과 사랑을 체험한 후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행함과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에게 있어 ‘믿음’이란 것은 반드시 ‘믿음의 행위’를 가져오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 ‘도’를 계속 들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야기시킬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자란 것입니다.
지난 번에 얘기했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씨앗으로 묘사됩니다. 생명이 있는 씨는 반드시 심기워져 싹이 되고 이삭이 되고 곡식을 맺는데 까지 자라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씨는 변화를 야기시키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과 동일하게 ‘도’를 들을 때 우리의 생각과 기준에 변화가 생깁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행위에 있어서도 변화를 야기시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도를 듣고도 행하지 않고 머물러 있다면 그 사람은 속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뭔가 잘못 들었든지, 야고보의 말처럼 듣고 잊어버렸든지, 아니면 제대로 들었지만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가치관을 바꾸지 않았든지, 양심이 파선했든지 어떤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문제에 대해 전혀 개선하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행함에는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잘못된 자아에 속았기 때문에 개선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동안 십일조에 있어 계속된 묵상을 나눴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십일조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정의를 재정립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내 의무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순종의 행위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자기기만’에 빠진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속이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릇된 것을 보았지만 돌아서서는 애써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자기의 가치관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는 순종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릇된 마음이 듣기는 들어도 행하지는 않는 상태로 만들어버렸고, 이 상태 그대로를 방치해버렸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야고보가 이런 사람은 결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본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들여다 본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자칫 이 말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란 의미로 와전되지 않길 바랍니다. 다만, 그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완전한 법과 사랑의 깊이를 충분히 숙고하고, 깊이 있게 바라보지 않았던 사람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그리스도를 지나칠 정도로 얕게 체험한 사람일 뿐이란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체험하는 것에 있어 표면에서만 맴돌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 깊은 것을 신중히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겉돌면서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딴전을 피우며 그 모양이 어떠함을 잊어버리는 경박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듣고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충분히 깊이 바라보고, 묵상하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찾게 됩니다. 그 사람은 듣고 실행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신중하게 오랫동안 그리스도의 깊은 것을 바라보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눈은 떠졌고, 세밀하게 관찰하였으며 이로써 그 생각과 가치관이 차츰 실제적으로 변화되고 새로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변화된 가치관을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실행하는 믿음은 잠깐의 흉내 또는 얕은 그리스도의 지식으로 행하는 척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약 2:22, 개역)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다음으로 야고보는 보다 직접적으로 이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한다.’ ‘행함을 통해 믿음은 온전케 되는 것이다.’ 이제 이 의미도 생각해봅시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이 구절은 믿음의 행위는 행위만으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믿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것은 행함으로 믿음의 완전함이 증명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종합해 볼 때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위 안에 믿음이 공존하고 믿음의 행위가 숨은 믿음의 완전함을 증거한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우리는 십일조가 되지 않는 분명한 한 가지의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먼저, 그는 그리스도의 법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 사람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인식, 그리스도를 양심으로 느끼는 그 정도는 매우 빈약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대열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은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에게서 십일조의 부재는 빈번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최초에 그들은 그것을 굉장히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깊이 있게 ‘자유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체험해보지 못했고, 그들의 가치관과 물질에 대한 기준이 변화되지 못한 탓입니다. 또한, 더불어 십일조의 순종이 안 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역시 이 정의 역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의미는 아닙니다. 그는 믿음의 성장이 이뤄지지 않은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린 그 의미도 재차 살펴보았습니다. 십일조에 있어 순종하는 행위가 나타나지 않음은 그의 믿음이 그 행위 안에 공존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행함으로 믿음의 완전함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그는 행하지 않습니다. 그의 믿음의 온전치 못한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다만, 대체로 이러한 경향은 초신자들에게 쉽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종종 이 원리는 구신자들에게도 곧잘 적용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바로 후자의 경우입니다. 구신자들의 경우 그들이 신앙의 반열 안에 들어온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믿음은 초신자의 수준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믿음이 아직 어리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실상은 그 보다 더 치명적입니다. 그것은 ‘소아 증후군’이란 희귀병에 걸린 것과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끔 해외토픽에 이런 사례가 소개됩니다. 나이는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이르렀지만 발육상태는 여전히 초딩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그런 경우를 ‘아직 어린 것일 뿐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건 병입니다. 그리고 그건 정상이 아닙니다. 사실 그들은 불행한 자들이며 정상적인 인간집단으로부터는 소외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보는 것에 익숙하기에 이러한 문제를 곧잘 인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영이십니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때가 지나도 믿음이 자리지 않는 것은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그건 치명적인 불구입니다. 그런 불구자가 그리스도인이란 범주 안에서는 세상의 불구자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불구자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육신적인 불구가 있었다면 할 수 있는대로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별의별 노력을 다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적인 불구이기 때문에 소외되고 있습니다.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도 소외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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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 증후군

10가지의 재앙과 더불어 자행된 바로의 강퍅함을 생각해보면서 이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영적교훈 하나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애굽에 10가지의 재앙이 비롯된 것은 전적으로 바로의 강퍅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시종일관 강퍅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는 재앙이 내릴 때마다 일련의 반성과 항복을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재앙이 거둬지자 그의 마음은 다시 원래의 강퍅한 상태로 급속히 되돌아갔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애굽은 무려 10번의 재앙이 누적된 것입니다. 그 구절 몇 가지를 살펴봅시다.

1. 개구리재앙
(출 8:8, 개역)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여호와께 구하여 개구리를 나와 내 백성에게서 떠나게 하라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릴 것이니라』
(출 8:15, 개역) 『그러나 바로가 숨을 통할 수 있음을 볼 때에 그 마음을 완강케 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2. 파리재앙
(출 8:24-25, 개역) 『[24] 여호와께서 그와 같이 하시니 무수한 파리 떼가 바로의 궁에와 그 신하의 집에와 애굽 전국에 이르니 파리 떼로 인하여 땅이 해를 받더라 [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출 8:32, 개역)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3. 우박재앙
(출 9:27-28, 개역) 『[27]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28] 여호와께 구하여 이 뇌성과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
(출 9:34-35, 개역) 『[34] 바로가 비와 우박과 뇌성의 그친 것을 볼 때에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강케 하니 그와 그 신하가 일반이라 [35]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4. 독종재앙
(출 10:16-17, 개역) 『[16]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서 이르되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득죄하였으니 [17] 청컨대 나의 죄를 이번만 용서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을 내게서 떠나게 하라』
(출 10:20)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이와 같이, 바로는 재앙이 올 때마다 일시적으로 자신의 강퍅함을 돌이켜 하나님께 항복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돌려보낼 테니 용서해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의 용서를 받아 주시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언제 항복했었느냐는 듯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며 ‘하나님께 강퍅하기’란 초심으로 되돌아가버렸습니다. 결국 바로의 최종 항복은 10번째 장자 죽는 재앙이 있고서야 진정으로 항복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돌려보내주었습니다. 물론, 그 후에도 다시 군대를 동원해 추격을 하다 홍해에서 모두 수장되는 최후 심판을 받았지만 말입니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바로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자의 죽음’이란 가장 충격적인 징계를 받고서야 강퍅한 마음을 처음으로 완전히 내려놓았습니다. 더군다나 10번의 재앙이 이르기 까지 이미 9차례의 재앙을 통해 너무나도 많은 손해와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이러한 바로가 하나님의 재앙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강퍅해함으로 최후의 치명적인 패배를 자초하기까지 반복된 일련의 어리석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이 사례를 통해 다음과 같은 영적교훈 하나를 제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계시할 때 사람이 그 빛에 합당한 반응으로 화답하지 않게 되면 사람은 차츰 더 그 마음이 강퍅해져 간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부를 때, 각 사람의 영혼 안에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도록 빛을 비춰주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빛을 거부하기를 반복할 때, 차츰 그 사람의 마음도 빛에 반응하는 것에 더욱 무뎌져 갑니다. 일종의 내성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을 한 마디로 정의해서 ‘파라오 증후군’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했습니다. 그러나 재앙이 올 때, 그는 하나님의 존재와 뜻이 계시됨을 느꼈습니다. 일시적으로 그는 그 계시에 반응하여 굴복했습니다. 그러나 그 계시가 거둬지면 그는 이내 마음을 되돌이켜 강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를 반복하자 그는 무려 그것을 10번에 이르기까지 반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의 마음은 차츰 하나님의 계시하심에 굴복해야 된다는 사실에서 더욱더 무뎌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10번째 극단의 방법으로 그를 완전히 부러뜨려야 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가 반복될 때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면 할수록 결과적으로는 심히 감당하기 어려운 징계를 초래하게 될 것이란 의미이기도 합니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증언은 이와 같습니다.

(사 48:4, 개역)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로써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순종할 것을 배우고 자랐던 백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요? 바로 ‘친숙은 경멸을 낳는다.’란 교훈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은 너무나 익숙했고,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에 길들여지지 않음으로 해서 차츰 그들은 전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도 않은 상태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는 파라오 증후군 중에서도 최악의 상태까지 나아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책망과 경고가 너무나 익숙했습니다. 그냥 시시했습니다. 전혀 그들의 영혼이 일깨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의 영성은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행 7:51, 개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그들의 조상이 했던 것처럼 여전히 그들이 곧은 목과 마음으로 할례 받지 못한 귀로써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않고 성령을 거스려 하나님께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오늘 이 교훈을 우리에게도 적용해봅시다. 우리는 계속해서 십일조에 대한 묵상을 나누어 왔습니다. 이 묵상을 나누면서 우리는 십일조란 개념을 새롭게 재정립하기도 했고, 아직 바라보지 못한 다른 각도에서 이해해보기도 했습니다. 자연히 십일조에 대한 순종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마음에 합당하게 반응하여 실제 순종하는 행위를 가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바로의 행위를 답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일시적으로 온전치 못했던 자신의 십일조 행위에 대해 반성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돌아서서는 그 마음이 돌이켜 강퍅하게 해버리고 실제로 십일조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몇 번이고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갈수록 더더욱 십일조에 있어 순종하기 어려워져 가는 심히 강퍅해져 가는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파라오 증후군’에 감염된 것입니다. 그 결국은 무엇이겠습니까? 10번째 최악의 징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 최악의 징계를 당한 후에야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시겠습니까?

그동안 우리는 10가지 재앙을 볼 때마다 바로를 정죄해왔습니다. 그 어리석음과 걍팍함에 혀를 찼고, 비난해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이 그렇다는 것은 전혀 눈치채질 못했습니다. 전적으로 영적인 무지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바로 이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이후에라도 실제적인 돌이킴이 없을 때, 그 사람은 이젠 더 강력한 어떤 조치가 아니고서는 그 마음이 더 강퍅해지고 말 것입니다. 10가지 재앙까지 나아가지 않도록 합시다. 2~3가지 재앙까지 왔다면 여기서 돌이킵시다. 10번째 재앙은 심히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

로마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롬 1:18, 개역)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가공할만한 진노하심이 하늘로부터 나타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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