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문제
(고후 8:12, 개역)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고린도후서 8장 자체가 마케도니아 교회의 후한 연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의 연보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할 마음이 있다면 그 있는 만큼이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있겠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없다면 그 이유는 할 마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다고 인정하시나요? 이 말씀을 적용해 보면 우리는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적용해 보고 싶은 어떤 사람의 변명을 들려드리겠습니다. 할 마음이 없었다는 책망에 대한 이 사람의 변명은 이런 것입니다. ‘아뇨, 전 할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저도 정말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막상 내자니 금액이 적어 모양새가 나지 않아 못했을 뿐이예요.’ 어떻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울의 이 말씀은 이러한 사람을 포함해서 하신 말씀이란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변명하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할 마음이 있었다면 그 마음이 있는 대로 하나님은 받으시는 것이 있으실 것입니다. 마음이 없는 것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누군가 전혀 물질의 참여가 없었다면 그는 사실상 참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라구요.
이 교훈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얕은 의지로 우리의 부족한 행위에 대해 많은 변명을 하게 되는지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아냐, 나도 정말 하고 싶었어.’, ‘나도 진심이었다구 다만…’ 그러나 이런 표현은 모두 정말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지 못했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해야 한다는 의무감내지 필요성은 충분히 인식했지만 실제적으로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빠지는 모순이며, 우리가 취하는 자기기만의 실체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마음에는 일종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더 큰 문제들도 발견됩니다.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이사야는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문제를 적나라하게 꼬집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완악했습니다. 그 마음의 결과 그들은 모든 인식할 수 있는 감각기관에 마비가 초래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침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고침을 받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순종해야 함을 깨닫는 것에 있어서 모든 방법과 수단을 닫아버렸습니다. 완악한 마음의 문제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십일조에 있어서 고침 받는 것조차 두려워합니다. 그들의 고민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내가 만약, 십일조를 하기 시작하면 당장 이번 달부터 내 씀씀이는 타격을 받게 될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적금을 깨버려야 돼. 그건 최소한 연간 200만원의 적금을 줄이는 결과를 낳는 거지. 안 그래도 얼마 모으지도 못하는데. 또한, 십일조 하는 만큼의 금액을 보완하려면 난 택시를 타거나, 파리바게트를 이용하거나, 카페에 가는 건 아예 포기해야 될 거야. 아니, 그렇게까지 각박해지는 생활은 정말 참기 힘든 일이야. 난 그 정도로 믿음이 견고하진 않다구. 정말 주님을 섬기긴 힘든 일이군. 나도 주님을 섬기고 싶지만, 나도 십일조를 하고는 싶지만 그것을 하기엔 너무 힘든 희생이 요구되고 있어. 난 도무지 자신이 없군. 안돼. 십일조 말씀을 들을 때마다 괴롭긴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구.’
그는 분명 괴로움을 느끼지만 궁극적으로 바뀌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이것입니다.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고침을 받을까 두렵구나. 난 고난이 싫어. 난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학 1:4, 개역)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은 재쳐 두고 각자 자기들의 집만 멋지게 지어서 사는 것을 보고 학개가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한 마디입니다. 판벽한 집이란 벽을 쳐서 두른 집이란 의미로 곧, 잘 지어진 좋은 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담이 무너지고, 돌이 깨지고, 거미가 줄을 치고, 시랑이 들어가 잠을 자고 똥을 누고 있는데, 그들은 아랑곳 않고 자기들만 시랑과 동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담을 쳐놓고 좋은 집을 지어서 안식하고 있었습니다. 학개의 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정말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라는 당신들의 양심이란 말입니까! 저 하나님의 전 안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거미가 줄을 치고, 시랑과 늑대가 자기 처소인양 짓밟고 들락거리며 울부짖습니다. 벌레들이 지성소까지 들어가고, 황량한 모래먼지와 낙엽과 쓰레기들이 저 거룩한 지성소까지 수북하게 싸였습니다. 저기가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저 모양이거들 하나님의 백성이란 당신들이 높이 쌓고 튼튼히 채워 견고한 망대처럼 집을 두르고 아름답고 멋진 집을 지어 기쁘다고 안식하고 있으니 그것이 당신들의 양심이었단 말입니까! 이를 위해 당신들이 페르시아에서 이곳까지 되돌아온 것이었단 말입니까! 차라리 당신들조차 황무한 집에 있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저 비바람에 휩쓸려 가거늘’
네, 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소유의 재물인 십일조함은 황무하기 그지 없는데 우리의 적금통장은 판벽된 집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이 우리의 양심이란 말입니까?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의 실상입니까?
이제 마지막 마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행 5:3-4, 개역)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여기서 언급되는 마음의 문제는 ‘사단의 마음’입니다. 아나니야는 고의적으로 땅값 얼마를 감췄습니다. 이런 고의적인 속임과 거짓말. 위선적인 아나니야의 태도에 대해 베드로는 이 문제의 동인이 무엇인지 이와 같이 밝힌 것입니다. 그것은 사단의 마음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성령을 속이려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단의 별명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압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경고하시면서 네 아버지는 마귀이며, 거짓의 아비라고 천명했습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아나니야에게 말하는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했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속이고 거짓말하는 거짓의 아비 마귀가 네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마저 속이려 했고, 속일 수 있다고 착각해버렸습니다. 불가능한 속임수에 도전했습니다. 마귀에게 속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각자의 십일조에 대해서 그 얼마를 감추려 할 때, 그 마음은 사단의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호소하시는 성령님을 속였던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성령님은 결코 그런 마음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성령님은 정직한 십일조를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속였습니다. 사단의 마음 거짓의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 얼마를 또는 그 전부를 감춰버렸습니다. 그 사람이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원리입니다. 성령을 근심시키고, 소멸시키는 사람입니다. 실상 그는 성령님을 배제하고 사단의 지배 아래에 속고 속이는 위선에 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비참한 상태를 감지하지 못합니다. 행함이 없이 그저 도를 들으면 되고, 찬양 부르면 되고, 봉사하면 되고, 십일조 말씀 할 때 잠시 괴로워해주면 되고, 하나님의 집은 황량하면 되고, 나는 판벽한 집이 있으면 되고… 그렇게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