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한 자여 조심하라!_2011.12.05

(신 6:10-14, 개역)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 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12]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14]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어쩜 그리도 앞날의 비극을 보고 말하는 것처럼 콕 짚어 주는 걸까?
광야를 통과하는 것만큼 가장 지루하고 고독스러운 시험은 없었다. 광야, 그 자체로 이가 갈리는 여정이다. 그 고통의 여정이 필요했던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오만하고 불순종하는 모진 마음이 낮아져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마음을 연단하고 시험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결국 마지막에는 젖과 꿀의 땅 가나안이 있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아름다운 땅. 복에 겨운 땅.

환상의 땅으로 그들은 나아갔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 모진 광야를 지나면 아무런 수고 없이 소득과 풍요를 누린 모든 것이 갖춰져 스스로 열매와 소득을 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이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

건축하지 않아도 이미 건축되어진 성읍들을 얻는다. 스스로 수고로이 채우지 않았다. 채움을 입는다. 고역스럽게 우물을 파지 않아도 우물에서 물을 깃는다. 심지 않아도 소출을 얻는다. 그저 배부르다.

그러므로 무려 40년의 기막힌 눈물의 골짜기, 그 광야의 수난과 가난과 낮아짐을 너무나도 빨리 망각해버린다. 그리고 하나님마저도. 그 기막힌 고난의 끝에 풍부와 안락과 만족함을 얻었거늘 그러므로 그것이 여호와를 망각하는 시작이 된다. 따라서, 모세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견고히 말한다. 조심하라!

요한계시록은 오늘날의 교회를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통해 언급하고 있다.

(계 3:17, 개역)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고난과 희생의 때를 지나 이제 안락할 수 있다한다면. 가난과 궁핍의 때를 지나 이제 풍족할 수 있다한다면. 마냥 즐거워할 일이 아니다. 이제 또 다른 가시가 돋을지 모를 일이다. 조심하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두려운 이름_2011.12.05

(신 6:2, 개역)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모세가 수없이 반복하고 되풀이하는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떠나지 말고 평생 동안 순종하라는 것이다. 사실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란 성경구절을 볼 때, 적잖이 놀라게 된다.

아니,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남은 평생을 여호와를 경외하며 산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닌가? 그렇다. 당연하다. 처음 구원받을 때부터 배워오고 들어온 너무나 익숙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익숙하기에 당황하지 않는 것일 뿐. 구원받은 지 만 13년이 다되었다. 내 나이 만 30세. 30년 생애의 절반도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으로 살아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경외하고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았는지 알고 있다. 많은 순간 경외하지 못했다. 순종하지 못했고, 기도하지 못했고, 겸손하지도 경건하지도 못했다. 때로는 깊은 불신앙과 침체도 있었다.

13년도 순탄치 못하거늘 말씀은 평생에 여호와를 경외하라신다. 당연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곰곰히 생각해볼수록 너무 높은 요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말씀 앞에 떳떳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말씀은 standard, 완전히 지키지 못해도 기준은 분명해야 하니까… 그렇게 자위하면 될까?

휴거나 사망, 불가항력적인 예외를 빼고 나면 앞으로 30년도 더 넘게 살아야 한다. 30년 뒤에도 나는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도 성경을 펼쳐 들면 말씀은 여전할 것이다. ‘네 평생에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때도 말씀은 그저 standard일 뿐이라고 자위할까? 두려워진다. 내게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서 내게 전적으로 다른 삶의 표준을 요구하신다. 또한, 기대하신다. 30년 뒤에 혹 내가 이방인처럼 살아가더라도 여전히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 이름이 생명책에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평생에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하나님의 직설적인 명령은 그냥 듣고 배워서 될 문제가 아니란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부단히 연습해야 한다. 경건에 이르는 연습! 싸워야 한다. 혈육의 속한 싸움이 아닌 어둠의 권세와 말이다. 그냥 서있으면 이뤄지는 명령이 아니었다. 끊임없는 자아와의 싸움, 훈련과 연습, 싸움과 승리. 그것을 평생토록 반복함으로 이루어야 할 것임을 말이다.

그 고단한 영적전쟁 앞에서 우리의 변명은 너무나도 많다. 형제, 자매님들의 충분한 공감까지 얻어낼 수 있는 합리적인 변명들도 충분하다.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30년 뒤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말씀하실 것이다. 어떤 합리적은 변명으로 나의 불법과 태만을 변호할지라도 성경은 영원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윗은 사울의 창을 피했네_2011.11.27 

(삼상 19:9-10, 개역) 『[9]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10]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다윗의 일생에는 수많은 대적들이 있었다. 처음 그가 목동으로 양을 지킬 때 그는 사자와 곰, 이리로부터 자신의 양을 지켜야 했다. 그가 기름부음을 받자 그의 전쟁은 제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그는 3라운드부터 본격적으로 싸움꾼이 되었다. 실제로 군대장관이 된 그는 전장에 나가는 장수가 되었다. 그의 주요 대적은 블레셋 민족이었다. 사울왕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시대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각축전이었다. 그러므로 이 당시 다윗은 군대장관으로 끊임없는 블레셋과의 국지전에 나아가야 했다. 뿐만 아니라 이 잦은 국지전에서 명성을 얻은 다윗은 제4라운드로 접어들었다. 바로, 그의 일생일대에 가장 지독한 대적 사울과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사울과의 전쟁에서 다윗은 지난 모든 전쟁에서 보다 전적으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결코 칼을 빼들지 않았다. 이것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양상이 다른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전쟁에 그는 휩쓸려야만 했다. 다윗은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대적을 의심해야만 했다. 사울은 자신이 섬기는 주인이자, 이스라엘의 왕, 기름부음을 받은 자. 또한, 그의 장인이었다. 바로 그가 그의 일생의 가장 지독한 대적이라니.

한편, 사울은 어째서 다윗의 가장 지독한 대적으로 자처한 것일까? 물론, 그것은 사울의 질투와 시기심, 왕권에 대한 기득권. 명예욕과 체면 때문이었다. 사울은 왕의 자리에 오른 뒤 유독 자신의 체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가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기스의 아들 사울로 소개되는 그의 초반 사역을 보면 그는 매우 평범하고, 근실하고, 겸손한 청년 사울로 묘사된다. 그러나 왕이라는 자리가 사울을 바꿔놓았다. 왕권을 소유한 사울은 차츰 백성들 앞에서 왕으로서의 자신의 지위와 명성과 권력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모든 독재자들이 지녔던 공통된 변화이다.

사울은 다윗의 영성과 유능함을 발견했다. 백성들이 다윗의 능력을 드높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울의 관점에서 정당한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권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질서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왕인 자신의 위치에 대한 하나의 도전적인 병폐였다. 사울은 다윗을 정직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때부터 사울은 교묘한 방책과 계략으로 다윗을 궁지에 몰리게 했다. 왕의 체면을 깎는 도전자는 용납해서는 안 될 일! 사울이 사무엘로 부터 버림받음을 선언 받는 장면 속에서 사울이 얼마나 자신의 체면에 중독된 사람인지 발견할 수 있다.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면서도 교묘한 속임수로 왕의 사위가 되어줄 것을 청했다. 정녕 다윗을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자기 딸 미갈을 아껴서도 아니었다. 심지어 딸 미갈을 팔아서라도 다윗을 올무에 걸리게 만들고 결국에 그의 수중에서 암살하고자 했다. 사울은 다윗을 짓밟고 싶었다. 자신에게 명성과 체면에 흠집을 준 다윗에 대한 숨은 적의와 복수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었다. 처음 다윗은 순진했다. 그는 사울의 은밀한 계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번의 죽음의 손길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의 중재로 말미암아 끝까지 왕궁에 머물고 있던 다윗의 순진한 모습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초월해 가장 궁극적인 사실을 주목해야 된다. 사울과 다윗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정직함이었다. 사울은 정직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를 그릇된 욕망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윗은 수많은 허물과 실수와 그릇됨에도 불구 철저히 정직하기 위해 무릎을 꿇은 사람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명예와 체면보다 하나님 앞에 정직에 대해 심각하게 반응할 줄 아는 양심을 갖고 있었다.

그 옛날 사울이 다윗을 벽에 박고자 창을 던졌다. 그 창의 이름은 체면과 권력, 명예와 기득권. 그러나 정직한 다윗은 그 창을 피했다. 권력이 없는 자의 유일한 무기는 정직함. 오늘 나도 그 창을 피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게 사랑이란 혹사_2011.11.25

(고후 11:23-28, 개역)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바울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처음 그는 그리스도인을 잡아 죽이는 일을 자신의 최대 사명인냥 받아들이고 외국의 성까지 가서 그리스도인을 몰살시키는데 주력했다. 신약성경에서 비록 바울의 등장이 매우 잔혹하긴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향한 특별한 뜻과 목적을 갖고 그의 인생에 개입하시기 시작했다.

다메섹 도상에 일어난 그의 회심은 아마, 기독교 역사사상에서도 가장 극적인 회심 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기독교의 가장 지독한 박해자처럼 등장했지만 신비주의적인 경험을 통해 전적으로 회심에 성공한 사람이었다. 더불어 그 이후 그의 삶의 전향 또한, 놀라울 정도로 극적이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고, 가장 엄격한 파를 쫓았다. 정통 유대인이면서 기독교의 박해자였다. 그런 그가 회심한 이후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신의 생명을 바치고 오히려 박해 받음을 자처하며 그의 태생이 지니는 모든 부귀영광을 포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다메섹 전후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다.

거짓 사도의 농락당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서신에서 그의 울분석인 항변에서 바울의 수난을 엿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수고에 대해 ‘수고를 넘치도록 하였다.’라고 말한다. 감옥에서의 생활, 수없는 구타와 폭행을 당했다. 심지어 그는 돌에 맞아 기절하기도 했다. 배를 타고 여행을 하는 동안 세 번씩이나 풍랑으로 인한 파선으로 생명을 잃을 뻔했다. 그의 여정에는 항상 무시무시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거의 그는 알몸으로 오지에 내몰린 모험가처럼 살았다. 강, 시내, 광야, 바다의 위험, 강도와 동족, 이방인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 등등 그가 직면한 모든 환경과 인간관계에서 조차 그는 위험천만한 곡예의 줄을 탔다. 심히 피곤한 인생이었다. 또한, 그는 제대로 자지 못할 때도 많았다. 굶주리며 갈증에 허덕이며, 추위와 헐벗음과도 다퉜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기독교 신앙의 위인이기보다 사지에 내몰린 저주받은 인간 같았다.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그의 삶은 거의 불구덩이 속에 던져졌다. 도대체 그에게 예수가 무엇이었기에 그의 삶은 그토록 처참해진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했던 바울. 다른 모든 것이 그저 배설물이 되어버린 해괴망측한 사람.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아무도 바울을 제정신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바울의 수난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이, 사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완전히 혹사를 당한 사람이구나!’ 분명, 바울은 특별히 훈련 받고 연단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바울의 훈련을 생각할 때 사실상 그가 훈련이기보다 완전히 혹사를 당한 사람이란 것을 재차 발견할 따름이다. 정통 유대인으로 베냐민 지파요 바리새파의 가문의 촉망 받는 청년 바울은 극적인 회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헌신한 후 지나칠 정도로 혹사당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그것이 정당한 사랑의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더 놀라운 사실이다.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다. 바울은 후회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 혹사당하는 삶에 대해 조금도. 어째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어진다. 사랑은 이토록 다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고백하게 된다. 나는 정직한 의미에서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굵은 껍질 밑 얇은 속살_2011.11.19

(신 3:25-27, 개역) 『[25]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26]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27]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 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가나안 입성을 앞에 두고 모세는 말한다. 자신은 절대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노라고. 그러나 그것이 결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고 말이다. 모세, 그는 하나님의 가로막으심으로 결단코 가나안을 밟을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이 설교를 하는 모세를 상상해본다. 그리고 그의 여정을 되돌아본다.

40세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목동으로 살아가던 살인자를 부르셨다. 하나님은 그의 무능을 호소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억눌러 거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로 내세우셨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직분을 맡았다. 모세는 그 자체로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거기에다 그의 사역의 시작은 너무나 비참했다. 바로 앞에 나아갔다가 오히려 백성들의 학대가 더 거세져 민족적 배반자로까지 내몰렸다. 일당 백도 아닌 일당 수 백만명.

홍해 앞에서 또 한 번 원망과 미움을 받았다. 기적도 있었고 환희도 있었다. 그러나 광야를 맴돌면서 그는 수 없는 비난과 화살과 당을 짓는 무리들과 비겁자들과 불신자들과 불신앙의 회중들과 다투고 싸워야만 했다. 그는 철저히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수없이 참아야 했다. 수없이 울어야 했다. 수없이 부러지고 고통 받아야만 했다.

므리바 물에서 물이 없다고 격노하는 회중의 경박한 신앙과 불신앙과 철없는 모습에 딱 한 번 맞대응 했다. 분을 삭히지 못해 반석을 두 번 세차게 내리치며 물을 쏟아져 나오게 했다. 그러므로 그 일이 불씨가 되어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결단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임을 천명 받았다. 그러나 그때는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있을 무렵이 아니었다. 슬펐지만 보다 현실적으로 와닿지는 않았다.

40년의 광야생활의 종지부를 찍는 오늘 이 시점에 다다르면서 그는 얼마나 하나님께 매달렸을까? 정말 저 가나안에 나 역시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의 마음은 얼마나 미어져왔을까? 뿐 아니다. 사실 그는 얼마나 원통하고 억울했을까? 지난 40년의 세월 그가 얼마나 수고했단 말인가? 그의 뼈저린 희생과 피눈물과 고난들이 무엇 때문이었단 말인가? 무지한 백성을 가나안에 입성시키기 위해 그가 그 모든 것을 감수하였건만 정작 그는 그 므리바 물의 한 사건을 말미암아 영원히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게 되었다니!

그러나 오늘 저 비통한 설교를 하는 모세의 모습을 보자. 진정 내가 모세였다면 나는 태연히 그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쏟아지는 눈물과 서러움에 목이 매여 말하지 못하진 않았을까? 아니, 오히려 격노하며 하나님께 대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모세의 설교 장면서는 결코 모세가 울었다든지. 하나님의 대적이 되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저 단단한 사람 모세를 보자. 저 견고한 사람 모세를 보자. 사실 그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슬픔과 뼈저리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다. 눈앞에서 모든 수고의 대가를 그저 바라만 보고 밟을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결코 그는 울지 않는다. 목이 매이지도 않는다. 왜? 바로, 그것이 지난 40년의 숱한 고난과 좌절과 훈련과 희생과 징계과와 고통으로 빚어진 단단하고 견고한 그의 심장 때문이다. 그는 심하게 낙심하지만 결코 외형적으로 무너져 내리진 않는다. 결코 나약하지 않은 내공! 그 사람이 바로 모세인 것이다. 그 많은 고난과 수고와 훈련이 만들어준 모세의 웅장한 모습에 겸허해진다. 당신은 위대한 사람! 그러나 당신의 그 여린 속마음을 느낄 수만 있을 것 같다. 수 백 년을 살아온 고목의 껍질은 숱한 세월의 풍파에 굵고 단단하지만 여전히 그 질기고 단단한 껍집을 파고 들어가보면 속에는 여리고 부드러운 속살이 있음을 말이다. 장구한 세월의 풍파를 이겨온 고목처럼 여리지만 흐트러지지 않는 견고한 당신을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