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기반아래_2015.06.19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80.)

 

(요한복음65~9)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빌립과 안드레의 대조적인 모습 속에서 믿음의 기초가 어디에 기인하는지 발견한다. 무리가 시장하고 먹을 것이 필요한 시점에서 예수님께서 특별히 시험하실 목적으로 빌립에게 질문을 던졌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빌립은 예수님의 질문 앞에서 현상을 매우 현실적으로 직시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이백 데나리온의 큰 돈으로도 이 많은 무리를 먹일 수 없다는 것이다.

 

빌립이 암울한 답변을 하였을 때, 또 다른 제자 안드레가 물끄러미 끼어들었다. 그리고 작은 도시락 하나를 예수님께 건넸던 것이다. ‘이거 한 아이가 건네준 도시락인데, 이게 아무 것도 아닌 건 압니다…’

참 놀라운 일이다. 이백 데나리온의 떡으로도 모자랄 판에, 어린 아이야 그 순진함에 자기 도시락을 내놓을 수 있었다지만 안드레 마저 그 도시락을 예수님께 내놓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보이신 것이다.

 

상황을 바꿔보자. 만약, 그 아이가 자기 도시락을 빌립에게 가져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얘야, 이건 너나 먹으렴. 지금 이걸 가지고 나노조각으로 나눠서 주란 말이냐

 

빌립과 안드레의 차이가 무엇이었을까. 안드레 역시 도시락 하나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적어도 도시락을 예수님께 가져다 드릴 믿음의 순수함 정도는 있었다. 어째서 예수님께서 빌립을 시험코자 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예수님은 빌립과 안드레의 대조되는 모습을 통해 믿음의 기초에는 당위적으로 순수함이 수반하여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신 것이다.

 

우리가 믿음의 삶에 있어 범하기 쉬운 오류는, 성경에서부터 교회운영과 교회생활에 이르기까지 너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위에서 이해하려 든다는 것일 거다. , 신앙이 논리 위에 있어야 하는데 논리가 신앙을 지배하려는 것이다. 그것을 쉽게 자기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표현으로 대신하곤 한다.

 

그렇다. 우리가 성인이라면 아이처럼 순진하긴 어려울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 믿음의 기반 아래에는 안드레처럼 초라한 도시락을 예수님께 의탁시킬 수 있는 만큼의 그냥 그런 순진함과 순수함은 바탕 되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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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서쪽으로 가자_2013.08.06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9.)

 

( 12: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라함과 그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 출신이었다. 특히, 데라는 우상숭배자이자,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데라는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서쪽인 가나안으로 이주하기 위해 여정을 시작한다. 가나안을 가기 위해서는 서북쪽에 위치한 하란을 거쳐서 다시 서남으로 이동해야 했다. 지도상에서 보면 갈대아 우르와 하란, 가나안이 삼각형으로 연결된다. 마침, 데라는 하란에 머물 때 사망하고 만다. 아브라함은 낯선 땅에서 아버지를 잃고 만단. 다시 갈대아 우르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다. 하나님은 처음 여정이 목적지였던 가나안으로 이주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간다. 그리스도인은 여호와의 말씀을 좇는 사람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할 때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수많은 이유와 핑계들이 생기기도 한다.

 

( 12: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가나안에 당도한 후 그 땅에 지독한 기근이 생겼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생존을 위한 보다 나은 선택으로 애굽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아브라함의 첫 불행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는 애굽에서 그의 아내 사라를 바로에게 빼앗기고 만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사라를 팔아버렸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매우 소심하고 두려워하며, 조금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연약함을 목격하게 된다. 이 모든 굴욕과 수치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던가. 불과 창세기 12장의 4절과 10절 사이에 이 큰 모순은 발생했다.

 

하란에 머물 때 아브라함이 가나안 이주를 계속해서 추진할 수 있었던 동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갔던 것이다. 그러나 애굽으로 이주할 때는 아니었다. 그가 애굽으로 이주한 주된 동기는 기근이었다. , 현실적인 어려움. 어떤 곤란이었다. , 아브라함은 그 기근의 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어여야 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배제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말씀을 위배했다. 기근이라는 현실 앞에서 그는 본능적으로 이 곤란한 현실을 피하고, 보다 나은 생존의 길을 스스로 모색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능에 충실한 것이었지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가치에 충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기근은 피했지만 사라의 정조를 버리는 또 다른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할 것이 있다. 우리가 곤란한 경우를 만나야 한다라면 그것은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곰을 피하다가 뱀에게 물린다. 우리는 필연적인 곤란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정면돌파 해야 된다.

 

(12: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을 향하는 여정도 서쪽으로 이동이다. 이주하는 여정에서 아브라함이 장막을 친 곳에서도 서는 벧엘이고, 동은 아이성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 서쪽이 분명하다. 성경에서 서쪽은 하나님의 방향, 동쪽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이 나아갈 방향도 서쪽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서쪽으로 하나님의 뜻에 머무는 방향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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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와 그리스도인의 균형_2013.02.03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8.)

 

( 4:27, 개역)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오늘날은 지식의 풍년시대다. 물론, 앞으로 언제까지 세상이 더 지속될지 모르지만 후대에는 더욱 그러할 것 같다. 이러한 지식이 풍족함은 비단 세상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도 지식이 풍성한 세대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원한다면 희망한다면 지식의 풍족함을 맛보고 경험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의 저술과 설교에서 시작되었다면, 그 후세대의 수많은 개혁주의 신앙에 그 뿌리를 둔 수많은 기독교 저술가들이 그들의 신앙사상을 글로 남겼다.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더라도 그 이전 세대의 글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접한다.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 요한 크리소스톰 등 성경이 기록되어 오늘의 세대에까지 이어진 것처럼 신앙인의 수많은 저작들이 글로써 오늘날까지 그 영향력을 끼친다. 뿐만 아니라, 시대가 흘러가면서 성경의 감추어진 많은 비밀들이 더욱 드러나는 시대가 되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성경을 깊이 있고, 현실감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시대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많고, 많은 만큼 가르치는 것에도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이 많다. 오히려 스스로 가르치려는 이들도 많다.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독교적 지식을 많다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할 수는 있지만 불리한 것도 많다. 무엇이든 동전의 양면과 같은 양면성은 있다. 적게 안다는 것은 그만큼 겸손할 수 있고, 가르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교만해지기 쉽고, 가르치고 드러내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그러나 많이 아는 것은 늘 많이 적용하고, 많이 행동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야고보 사도의 권면은 우리 시대의 철칙이 되어야 할 것 같다.

 

( 3:1-2, 개역)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에 굴레 씌우리라』

 

많은 청년들이 지식의 산을 열심히 오른다. 배울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을 쫓아가며, 스스로 탐구하고 연구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의 참된 의미가 되는 것일까? 성경말씀의 의미를 좀 더 이해하고, 성경의 난해구절을 해석할 줄 아는 것이 완전해져 가는 지식일까? 성경이 만약 교과서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학습지가 아니다. 성경은 성령님의 의해 운동하시는 능력이다. 인간의 영혼과 삶에 깊숙이 개입하신다. 그것은 경험과 체험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성경은 인생이며, 과학이기도 하고, 철학이나 역사이기도 하다. 성경은 마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아우르는 대백과사전 처럼 모든 것을 담아내는 동시에 영혼과 내세, 영원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정의 내리지 못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동시에 보지 못한 하나님을 증거한다. 그 성경이 그저 지식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고, 배워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이 성경을 많이 안다는 의미일까?

 

성경을 많이 알기 위해서는 지식의 영과 묵상의 영을 필요로 한다. 지식의 영이라 하면 우리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지식의 개념 그대로이다. 성경은 역사적 사회적인 배경을 가진 기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그 사회의 문화와 관습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이 오셨던 시기가 로마시대 였다라든지. 두 렙돈이나 데나리온이 얼마의 가치인지. 유대와 사마리아가 어디에 위치했으며, 갈릴리가 어디인지 그 지형과 기후는 어땠는지. 그러한 역사적. 사회문화적인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물론, 그것을 몰라도 성경을 읽는데 어려움은 없겠지만 이해하는데는 많은 제약이 따를 것이다. 또한, 신학적인 지식도 필요하다. 삼위일체와 그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는 성경구절. 구원론, 인간론, 신론, 죄 등등 조직신학을 이해하는 것도 성경을 많이 아는 지식이 한 부분이다. 신학을 쉽게 분해하면 교리이다. 교리는 어렵고 딱딱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신앙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이론적 토대이며, 뼈대이다. 이렇게 신학도 성경을 많이 아는 지식의 한 부분이다. 한편, 성경은 많은 예언적 기록이 있다. 예언에 대한 풀이와 해석에 대한 지식. , 예언적 지식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성경을 많이 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많이 안다는 의미를 이러한 지식의 앎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것도 고작 지식의 한 모퉁이를 곡괭이질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지식의 영 못지 않게 묵상의 영도 필요하다.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한 곱씹음과 사색, 관찰, 검토의 과정을 거치는 일련의 묵상을 통해서 성경의 깊이 있는 진리와 지혜의 샘을 캐낼 수 있다. 그것 역시 성경을 많이 아는 하나의 방법이다. 묵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성령의 조명하심이다. 지식은 성구사전이나 주석 등을 통해서 배울 수 있지만 묵상은 개인적인 성령님의 조명하심 안에서 얻어지는 진리이다. 다른 의미에서 영성을 필요로 한다. 깨어있는 기도와 깨어있는 삶 속에서 성령님의 조명하심은 영혼 안에 밝게 비춰진다. 그 빛의 조명을 따라 말씀 한 구절, 한 구절 안에 담겨진 많은 보화 중 어느 일정한 깊이의 어느 한 부분을 자기 믿음의 분량에 맡게 길어 올린다. 그리고 그러한 묵상의 뒷받침에는 또 다른 도구들이 있다. 바로 논리와 감성이다. 묵상은 그냥 영적인 횡설수설이 아니다. 그것은 논리 안에서 재정립되면서 성경의 일반적인 원칙과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성경적 근거와 타당성을 지니는 진리여야 한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사고와 비판적인 사고가 요구된다. 뿐만 아니라, 감성도 살아있어야 한다. 머리로만 분석하고 비평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느끼는 감성도 있어야 한다. 그것을 느껴보고, 살펴서 가슴에 와닿는 그것. 바로 그것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 바로 묵상의 영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묵상의 영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성령님의 감화와 조명이다. 더불어 중요한 한 가지 진리. 바로, 경험이다. 실제로 이 부분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결핍을 안고 있다. 경험이 없는 지식은 말 그대로 교과서에 담겨 있고, 머릿속에만 정립 되어진 하나의 형이상학적 진리일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며 우리 삶 속에서 투쟁적으로 나타나는 실상이다. 경험은 참된 지식의 분명한 스승이다. 신앙의 체험과 경험이 없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성경을 많이 알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약점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준비자체가 충분치 못하다. 경험은 성경을 가슴과 눈물로 읽게 한다. 그것을 사실과 진리로 자신의 영혼에 아로새기게 해준다. 그것은 사변적인 지식이 아닌 살아있는 지식으로 생기를 불어주는 어떤 힘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을 그저 지식의 영을 좀 아는 정도로, 묵상의 영을 조금 맛보는 수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은 지식의 영과 묵상의 영, 경험의 영을 두루 아는 것이다. 다양한 방법과 도구들을 통해 성경을 균형적으로 이해하고 접근해 가는 것. 그것이 성경을 많이 알고, 제대로 공부해가는 그리스도인의 균형 잡힌 성경지식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균형 잡힌 신앙을 갖는 것임을 생각해본다. 어느 하나만 위대한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볼 줄 알고, 많은 것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책을 읽을 때도 그러하다. 균형을 잃거나 어떤 사상과 이론에 휩쓸려 중심을 잃고 떠내려가면 안 된다. 객관적으로 비평하고, 그것을 구별해서 적용하면서 유익한 것과 그릇된 것을 가려서 취할 줄 알아야 한다. 신앙의 위인들도 마찬가지다. 모두에게 배울 점이 있지만 모두가 동일하지는 않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수도사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의 임재 체험하기의 잔느 귀용. 이러한 책들이 유익할 수 있지만 또한, 묵상과 기도에 심취한 그들의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드러난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책은 한 사람의 사상과 가치관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로이드 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책을 읽는 동안 그 사람은 책 속에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어느 한 사상에 휘둘리고 있다.’ 그렇다. 그러므로 객관적이 균형 잡힌 시각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여러 비평가들 사이에서 가장 건전한 평가를 받는 것일 거다.

 

단지, 에드워즈 뿐 아니다. 목회.설교.신학을 다 아울렀던 칼빈이나 청교도 여러 저자들이 건전한 비평을 얻는 이유도 다양한 경험을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게 경험한 것이 많이 경험한 것을 이기기는 어렵다. 성경을 단지 주석과 난해구절 해석정도에 대한 지식으로 많이 안다는 헛된 자부심을 버리고, 성경을 제대로 알고 깊이 알기 위해서는 얼마나 폭넓은 가르침이 요구되는지 알 때, 우리는 겸허해 진다. 모래사장의 한 켠에서 조개껍질 한 조각을 줍고 있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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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 받지 않는 교회 속에 불완전한 그리스도인_2013.01.26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7.)

 

( 1:22-23, 개역)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헬라어 에클레시아. 구별된 무리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교회라는 간판이 붙어진 건물은 은밀히 교회가 아니라 교회당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무리를 가리킨다. 신약의 세계는 교회시대, 성령시대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종료된 후, 성령께서 그 사역의 바통을 이어받으셨고 교회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던 기록을 담은 복음서에서는 교회란 표현이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단 두 번 나타난다.

 

(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18:17, 개역)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울 것을 베드로에게 설명하는 장면과 범죄한 형제에 대한 마지막 권면의 권위가 교회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부터 실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께서 오순절 강림하시면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교회는 오늘날까지와 역사의 그 종국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을 탄생시키는 영혼의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감당케 될 것이다. ?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분신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 한다면 교회가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존재와 의미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교회에 대한 중요하고 수많은 진리가 있겠지만 오늘 이 지면에서 생각해보고 싶은 주제는 과연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성경은 판단하는 것을 특별히 경계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기준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이 판단한다라는 개념에 대해 우리가 정리해야 할 부분도 있다. 왜냐하면 과연 우리가 판단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느냐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판단하는 존재이다. 무엇을 판단하고, 분별하고 이해할 수 없다면 그건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살아서 지정의(知情意)를 본능과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이상 우리가 판단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행위일 뿐이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든 판단을 경계하고 정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준과 가치관, 지식의 고저(高低) 정도에 따라 모든 현상과 사물과 사람과 상태들을 판단하고 비평할 수 있다. 다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판단치  말라라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정죄하지 말라는 의미에 더 가까운 것이다. , 우리는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각이 있지만, 그것을 정죄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을 삼가란 의미이다. ? 하나님께서 만물을 판단하셔서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시고, 상 주실 것과 벌 주실 것을 판단하셔서 정의롭게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지식으로 무엇을 판단해 비평하고, 정죄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다툼과 분열이고 오판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본질을 잘 모르면서 옳은 것도 그른 것으로 판단하고 비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령,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날 병든 자를 치료해 주었다고 해 안식일을 범한 자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일 뿐 아니라 안식일에 누구든지 자기 양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건져내지 않겠느냐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되물으셨던 것이다. 이처럼, 선을 행하는 것조차도 안식일을 범한다는 것으로 정죄하는 것이 율법적 사고였다. 누구나 이러한 고정관념이 있다. 자기 기준에서 옳고 그른 것으로 사람을 비평하는 본성이 있다.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 어떤 일련의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아왔던 적이 있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제물에 피를 섞은 일과 망대가 무너져 18명의 사람이 죽었던 사건을 언급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의 오판을 정확히 꿰뚫고 권면해주었다. 그들이 너희들 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너희들 역시 회개치 않으면 그렇게 망할 것이라고 말이다. , 그들은 그 망한 자들이 특별히 더 죄가 많아서 그런 횡사를 당한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이는 오판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판단치 말 것을 우리에게 종용한다고 할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판단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어떤 누군가가 교회를 판단할 수 있을까? 분명, 그 대답은 ‘NO’이다. 교회를 판단하게 되고, 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 사람은 교회의 구성원들 즉, 성도라 불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불완전에 대해 지적한다. 그러나 분명이 잊지 말고,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교회를 판단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며, 교회를 판단하는 근거조차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며, 교회가 그의 몸이라는 사실이다. , 교회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현현이다. 교회를 판단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다만, 교회 안에 판단할만한 일들이 있는 것은 아직은 불완전한 그리스도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완전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이 완전해진 것은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영혼과 내세의 문제일 뿐이다. 여전히 연약한 본성과 죄의 유혹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육체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8:10) 그러므로 우리가 혹 성도간의 허물이 있을 수는 있고,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해 판단케 되는 경우가 혹 생길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교회를 판단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불완전한 사람에 대한 판단이 교회에 대한 판단으로 까지 확대되는 것으로 그 초점을 일직선상에 놓는 것은 명백한 패착이다. 불완전한 사람의 부족으로 인해 마치 교회 자체가 잘못되고, 큰일이나 난 것처럼 말하는 것은 명백한 실언이다. 우리는 그것을 구분해야 한다. 교회의 주인 되신 주님은 아무 사람에게도 판단 받지 않으신다. 오히려 주님은 우리 모두를 판단하실 것이다. 그날에 감추인 것이 드러나고, 각 사람 마음의 은밀한 것이 다 드러나고 판단하시게 될 것이다.(고전4:5)

 

또한,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교회와 성도를 판단하기 좋아하는 그리스도인 본인은 완전한 것일까? 우리가 역사와 위인에 대한 조금의 지식만 가지게 되어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누구도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없었으며, 완벽한 교회가 없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주님의 몸인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그 권위와 권세 있어서 완벽하다.(1:22,16:18) 다만, 구별된 무리인 성도들의 모임으로써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 불완전한 사람인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란 차원에서 완벽하지 않다는 의미다.

 

과거 종교암흑의 시기, 카톨릭의 이단적인 교리 아래에서 영혼들이 죽어갈 때 인쇄술의 발명과 더불어 종교개혁의 방아쇠를 당긴 존 칼빈. 그는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아버지처럼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 역시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다. 당시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부정했다. 그러나 칼빈은 그러한 재세례파의 신념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러므로 칼빈은 재세례파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핍박을 허용했던 것이다. 카톨릭이란 거대 세력으로부터 박해받던 프로테스탄트에서, 프로테스탄트가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하는 모순이 나타났던 사건이었다. 위대한 부흥사 조지 휫필드는 노예제도의 찬성론자였다. 영국대각성운동의 또 다른 중심인물인 존 웨슬리는 구원받은 성도도 또 다시 타락하면 지옥에 갈 수 있다는 그릇된 가르침을 전했다. 개혁신앙의 정통진영의 주요 인물들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휴거에 있어서 후천년설을 믿었다. , 어느 세대 어느 위대한 인물이 되었든 그 어디에도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어 꼬투리 잡힐 그 어떤 허물과 약점이 없이 주님을 섬겨왔던 것이 아니다. 언제나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교회로부터 부족함이 있을 수 있고, 우리의 형제 자매로부터 연약함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의 교회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실로 인정한다 라면, 하나님은 각 세대와 각 족속에 따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모습과 모양으로 그 세대에 충분한 교회를 허락하신다. 나는 그런 측면에서 완전하신 나의 하나님을 믿는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복음이다. 복음 하나면 충분하다. 복음이 아니고서 도대체 뭘 더 바란단 말인가. 충분히 말했다. 칼빈도, 휫필드도, 웨슬리도, 에드워즈도 그 누구도 완벽한 교리, 완벽한 신앙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런 만큼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 모인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역시 완벽하지 않았다. 다 그 나름의 부족과 연약함이 있었다. 그러나 완벽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복음이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고, 교회는 주님의 몸이라는 변치 않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가 교회를 판단할 수 있으며, 누가 교회를 비난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의 부족에 대해서는 혹 흠을 잡을지언정 그것조차 그렇게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다. 동일한 복음을 나누었기 때문에 말이다.

 

교회를 폄하하고, 교회를 판단하면서 무엇이 옳고 바른지를 말할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있다 하더라도 그 역시 불완전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생각이 다른 또 누군가는 불평할 것이다. 사람은 다 기준이 다르다. 생각하는 범위와 넓이도 다르고, 판단하는 기준과 가치관도 다 크고 작게 다르다. 그러므로 복음 하나만 생각하면 그 모든 오해와 차이를 뛰어넘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의 만물보다 가장 높고 존귀한 교회를 그렇게 쉽게 비평하지 않을 수 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이 주신 직분과 역할, 그 질서에 대해서도 우리는 존중할 수 있다. 불완전한 사람과 사람이 사귀는 그 안에 종종 어려움과 갈등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교회의 질서와 윤리를 벗어난 불만표출이나 반항과 같은 어떤 것이 되었을 때는 숭고해질 수 없는 법이다.

 

(엡 4:11-12, 개역)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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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의 그리스도인_2013.01.20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6.)

(삼상 24:4-6, 개역) [4]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공평한 이름이다. 왕 같은 제사장이요 맡형을 따라 동일한 대제사장, 아들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일한 지위를 갖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교회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각각 그 지체와 그 역할이 있다. 이로써 직분도 다르고, 그 역할과 권한도 달라진다. 누구는 사도, 누구는 선지자, 누구는 복음 전하는 자, 누구는 목사이자 교사이다.(4:11) 그러므로 마땅히 교회는 질서가 있다. 그것은 진리이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다윗은 사울을 해칠 수 있었지만 그저 겉옷을 베는 것에 그쳤다. 그 후 가슴아파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기름 부으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도 사람을 세우신다. 지금도 질서는 변하지 않는다때때로 그리스도인도 그 겉옷을 베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직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후에는 가슴 아파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질서를 결국 부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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