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터졌다. 희대의 스캔들이라며 '디젤게이트 사건'으로 까지 회자되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폭스바겐. 독일의 명차 브랜드이며 도요타와 함께 세계 1위를 다투는 자동차그룹이다. 특히 아우디, 포르쉐, 람보르기니, 부가티, 벤틀리 등 잘 알려진 고급 브랜드를 소유한 자동차 거대집단인 셈이다.


이 거대 자동차회사가 전세계를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였다는 사실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발단은 폭스바겐이 개발한 Clean Diesel. 디젤엔진의 경우 질소산화물이 다량 발생되는데 이 물질은 수분과 반응해 산성비가 되고, 오존층을 파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수입차에 대한 배기규제를 유럽보다 2배 더 강화하고 있다. 결국 디젤엔진의 배기정화기술이 더 요구되는 셈이다. 사실 배기가스 정화만 놓고보면 어려운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정화장치가 강화될수록 자연히 공기배급도 불편해지기에 결과적으로 엔진성능이 크게 떨어지게 된다. 그런데 폭스바겐은 이러한 기술적 한계를 뛰어넘었다며 Not a concept car를 표방하며 클린 디젤을 미국에 수출해왔다.(참고로 현대차는 기술이 없어 디젤차를 미국에 팔지 못했음.) 하지만 이것은 조작이었던 것이다.


폭스바겐은 기술적한계를 뛰어 넘었던 것이 아니라, 배기가스 검출을 위해 정차중일 때는 테스트모드가 작동해 정화장치가 가동되게 했고 실제주행모드에선 정화장치가 꺼져 엔진이 원래성능을 발휘하도록 프로그래밍했던 것이다. 그 결과 실제주행시에는 기준치의 40배에 달하는 질소산화물이 발생되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사기였던 동시에 클린 디젤은 여전히 컨셉의 영역이었던 셈이다.


사건이 터지자 폭스바겐의 시가총액은 무려 40조원이 증발해버렸고, 미국은 최대 21조원에 이르는 벌금을 내릴 수도 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리콜대상차량은 전세계 1100만대를 웃돌고, 집단소송 움직임까지 보이면서 사실상 폭스바겐은 폭망했다고 말한다.


폭스바겐의 이번 사건은 지난 도요타 리콜사태와 더불어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준다. 도요타의 경우 '마른 수건도 다시 짠다.'라는 기치 아래 철저한 원가절감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해왔고, 모든 제조업체의 표준이 된 '도요타 웨이'가 있다. 그러나 지나친 원가절감으로 품질에 누수가 생기기 시작했고 리콜비용을 막고자 로비로써 해결하려다 들통이나고 말았다. 원가절감이라는 新이 안전이라는 최고의 가치 위에 올라서 주객이 전도되면서 위기를 겪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 제일주의라는 신앙적 가치를 잃으면 다른 신들이 우리 가치의 최상위에 오르게 되고 우리 신앙은 오래지 않아 무너지고 만다. 시험당한 가룟 유다처럼 말이다. 또,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충족한다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윤리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Clean Diesel 인냥 스스로를 과장하고 자신과 상대방까지 기만하곤 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바리새인은 종교적 윤리에 최선을 다하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만큼 의롭지 않고서는 천국에 못 갈 것이라고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세리가 더 의롭다함을 받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가 외적인 행위에만 기반된 것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바리새인의 행위기반 윤리는 천국에 들어갈만큼 의로왔다. 그러나 내면과 양심과 겸손에 있어 자기죄를 보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자기를 의롭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주는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도 꽤나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워졌다고 생각하면 자칫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고 마음이 높아지기 쉽다. 아이러니같지만 사람이 얼마나 행위중심적인 사고기반 위에 있는지 생각해보면 정말 그러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십계명도 지켜야 한다. 그걸 지켜서 천국을 가는 건 아니지만 못 지킬걸 지키지 말라고 주신것도 분명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Not a concept car' 라고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는 것일 거다. 우리 역시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사람들 앞에서 테스트모드일 때와 주행모드일 때가 다르다. 더더욱 우리 양심은 아예 그런 구분된 프로그래밍이 필요치 않을 정도다.


그러나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설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는 그날.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라고. 그날 내 신앙의 시가총액은 얼마나 폭망하게 될까. 내 신앙에 세리가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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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기반아래_2015.06.19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80.)

 

(요한복음65~9)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빌립과 안드레의 대조적인 모습 속에서 믿음의 기초가 어디에 기인하는지 발견한다. 무리가 시장하고 먹을 것이 필요한 시점에서 예수님께서 특별히 시험하실 목적으로 빌립에게 질문을 던졌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빌립은 예수님의 질문 앞에서 현상을 매우 현실적으로 직시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이백 데나리온의 큰 돈으로도 이 많은 무리를 먹일 수 없다는 것이다.

 

빌립이 암울한 답변을 하였을 때, 또 다른 제자 안드레가 물끄러미 끼어들었다. 그리고 작은 도시락 하나를 예수님께 건넸던 것이다. ‘이거 한 아이가 건네준 도시락인데, 이게 아무 것도 아닌 건 압니다…’

참 놀라운 일이다. 이백 데나리온의 떡으로도 모자랄 판에, 어린 아이야 그 순진함에 자기 도시락을 내놓을 수 있었다지만 안드레 마저 그 도시락을 예수님께 내놓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보이신 것이다.

 

상황을 바꿔보자. 만약, 그 아이가 자기 도시락을 빌립에게 가져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얘야, 이건 너나 먹으렴. 지금 이걸 가지고 나노조각으로 나눠서 주란 말이냐

 

빌립과 안드레의 차이가 무엇이었을까. 안드레 역시 도시락 하나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적어도 도시락을 예수님께 가져다 드릴 믿음의 순수함 정도는 있었다. 어째서 예수님께서 빌립을 시험코자 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예수님은 빌립과 안드레의 대조되는 모습을 통해 믿음의 기초에는 당위적으로 순수함이 수반하여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신 것이다.

 

우리가 믿음의 삶에 있어 범하기 쉬운 오류는, 성경에서부터 교회운영과 교회생활에 이르기까지 너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위에서 이해하려 든다는 것일 거다. , 신앙이 논리 위에 있어야 하는데 논리가 신앙을 지배하려는 것이다. 그것을 쉽게 자기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표현으로 대신하곤 한다.

 

그렇다. 우리가 성인이라면 아이처럼 순진하긴 어려울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 믿음의 기반 아래에는 안드레처럼 초라한 도시락을 예수님께 의탁시킬 수 있는 만큼의 그냥 그런 순진함과 순수함은 바탕 되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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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들어 각종 매체에서 연일 어느 뮤지션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생전에는 종종 비호감과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던 그이다. 그러나 새삼 그의 죽음이 증명해 낸 것은 수만은 안티들의 수면 아래 있던 조용한 팬들의 애도였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3,40대 층이다. 나 역시 어느덧 30대 중반이기에 그의 음악적 궤도를 지켜본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나 역시 중고교 학창시절에 그의 음악을 사색하며 지나왔다. 사실 최근에는 더 그러했겠지만, 당시에도 그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지극히 대중적인 동시에 불편한 진실을 감수해야 할 처지였다. 자기만의 음악세계와 철학이 너무나 분명한 뮤지션이었기에 대중의 호불호도 분명했고, 더구나 그의 안타까운 전력이 더욱 그를 기괴한 인물로 전락시켜놓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가 19살 구원을 받기 전까지는 거의 모든 음악장르를 구애 없이 잡식하던 터라 적어도 그가 어떤 뮤지션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뮤지션으로서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보통의 대중음악이 흥을 돋우거나 정서적 공감을 누리는 것이었다면, 그는 자기성찰을 통해 음악으로 사색할 수 있는 재료를 제공해주었다.


한편, 이제 영원한 죽음의 문을 지나간 그는 오늘의 나에게는 사실 그 어떤 의미의 대상도 아닐 것이다.그런데 한가지의 여운은 남겨준다. 바로 열망이다. 그는 가수가 아니라 뮤지션이었다. 좋은 곡을 받아 노래를 부르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기스타가 아니었다. 심지어 아이돌의 계보로 출발하였음에도 스스로 그 자리를 비켜갔다. 보통 싱어송라이터라도 전성기가 지나면 더 이상의 자기 음악적 색깔을 담은 새로운 창작물을 생산하기 힘든 법이다. 음악에 대한 도전과 열정, 새로운 철학과 장르에 대한 개발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히 프로듀서로 전향하면서 후배들의 음악을 만들어주는 일에 주력한다.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음악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는 자기만의 곡을 만들어 왔다. 그 의미는 음악에 대한 단순한 열정을 넘어 소위 소명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란 의미다. 그는 종종 음악을 향한 자신의 열망을 노랫말로 말해왔다.

생애 처음 기타를 사고 음악을 하기로 맘 먹었을 때, 비웃는 친구들 걱정하는 친구들 함께 음악을 시작한 친구들이 있었지만 지금 그의 곁에는 그 친구들이 없노라고. 그러나 나는 영원히 원한다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세상에 길들어지는 것이지만 남들과 닮아가는 사이 꿈은 우리 곁을 떠난다고. 즉, 그는 음악으로 평생 밥 먹고 사는 것이 힘든 현실에서 세상에 길들여져야 했지만, 꿈을 잡았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불안한 미래 때문에 함께 하자고 말하지 못했다고 두 번이나 노래했다. 사랑보다도 음악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의 장례식장에 울려 퍼진 민물장어의 꿈도 그렇다. 민물장어인 자신이 민물이란 생태적 근원을 넘어 바다의 거친 파도 아래까지 가고자 하는 음악적 목표를 위해 자기를 깎고 따뜻한 저녁과 가족의 웃음소리까지 고갤 흔들어 잊어버리며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쉬지 말고 가라하는…. 그만큼 음악을 향한 그의 열정은 고독하기 짝이 없었고, 음계 위의 수도사처럼 음악에 자기 삶을 걸었던 것이다.

 

언젠가 구원을 받은 후 이 곡을 듣게 되었을 때, 마치 난 이 곡이 오지에서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죽어가는선교사의 노래처럼 들렸다. 그에게는 음악이 곧 복음이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유가 우리에겐 정말 우울한 명제일테지만. 그런데 이 우울한 명제가 내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너의 복음은 무엇이냐라고. 그가 노래한 것처럼. 이것 아니면 진짜 죽음, 이거 아니면 정말 끝장 내 전부를 걸어보고 싶은 니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한때는 청년의 그 순수한 열정으로 정말 오지의 선교지로 가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죽을 수 없을까? 죽기 싫어진 걸까? 지금 누리는 것이 많아서 포기할 수 없다라는 단지 그 변명이 아니었다. 그때의 순수한 열정에 못 미치는 것도 물론 중요한 변명의 하나이겠으나, 오히려 더 두려운 변명이 생긴 것이다.

 

이제는 나 하나 희생하고 죽어서 될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이토록 큰 두려움일 줄은 과거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열정뿐 아니라 오히려 신앙의 패기와 자신감마저 움츠러든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길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는 아도니람 저드슨과 허드슨 테일러를 동경했지만 이제 나는 처자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하지 않으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그 말씀 앞에서 망설이고 심각하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열망이란 것이 대상을 향한 그저 자기 혼자만의 열정으로만 결론 지어지는 것도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열정도 중요하지만 자기에게 책임지어진 어떤 기대와 의무 조차도 져버릴 수 있을 만큼 소명과 사명감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던 거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인생을 소명과 사명감으로 불태울 수 있다라면 그것은 가히 위대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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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서쪽으로 가자_2013.08.06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9.)

 

( 12: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라함과 그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 출신이었다. 특히, 데라는 우상숭배자이자,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데라는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서쪽인 가나안으로 이주하기 위해 여정을 시작한다. 가나안을 가기 위해서는 서북쪽에 위치한 하란을 거쳐서 다시 서남으로 이동해야 했다. 지도상에서 보면 갈대아 우르와 하란, 가나안이 삼각형으로 연결된다. 마침, 데라는 하란에 머물 때 사망하고 만다. 아브라함은 낯선 땅에서 아버지를 잃고 만단. 다시 갈대아 우르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다. 하나님은 처음 여정이 목적지였던 가나안으로 이주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간다. 그리스도인은 여호와의 말씀을 좇는 사람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할 때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수많은 이유와 핑계들이 생기기도 한다.

 

( 12: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가나안에 당도한 후 그 땅에 지독한 기근이 생겼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생존을 위한 보다 나은 선택으로 애굽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아브라함의 첫 불행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는 애굽에서 그의 아내 사라를 바로에게 빼앗기고 만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사라를 팔아버렸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매우 소심하고 두려워하며, 조금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연약함을 목격하게 된다. 이 모든 굴욕과 수치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던가. 불과 창세기 12장의 4절과 10절 사이에 이 큰 모순은 발생했다.

 

하란에 머물 때 아브라함이 가나안 이주를 계속해서 추진할 수 있었던 동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갔던 것이다. 그러나 애굽으로 이주할 때는 아니었다. 그가 애굽으로 이주한 주된 동기는 기근이었다. , 현실적인 어려움. 어떤 곤란이었다. , 아브라함은 그 기근의 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어여야 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배제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말씀을 위배했다. 기근이라는 현실 앞에서 그는 본능적으로 이 곤란한 현실을 피하고, 보다 나은 생존의 길을 스스로 모색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능에 충실한 것이었지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가치에 충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기근은 피했지만 사라의 정조를 버리는 또 다른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할 것이 있다. 우리가 곤란한 경우를 만나야 한다라면 그것은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곰을 피하다가 뱀에게 물린다. 우리는 필연적인 곤란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정면돌파 해야 된다.

 

(12: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을 향하는 여정도 서쪽으로 이동이다. 이주하는 여정에서 아브라함이 장막을 친 곳에서도 서는 벧엘이고, 동은 아이성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 서쪽이 분명하다. 성경에서 서쪽은 하나님의 방향, 동쪽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이 나아갈 방향도 서쪽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서쪽으로 하나님의 뜻에 머무는 방향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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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와 그리스도인의 균형_2013.02.03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8.)

 

( 4:27, 개역)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오늘날은 지식의 풍년시대다. 물론, 앞으로 언제까지 세상이 더 지속될지 모르지만 후대에는 더욱 그러할 것 같다. 이러한 지식이 풍족함은 비단 세상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도 지식이 풍성한 세대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원한다면 희망한다면 지식의 풍족함을 맛보고 경험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의 저술과 설교에서 시작되었다면, 그 후세대의 수많은 개혁주의 신앙에 그 뿌리를 둔 수많은 기독교 저술가들이 그들의 신앙사상을 글로 남겼다.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더라도 그 이전 세대의 글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접한다.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 요한 크리소스톰 등 성경이 기록되어 오늘의 세대에까지 이어진 것처럼 신앙인의 수많은 저작들이 글로써 오늘날까지 그 영향력을 끼친다. 뿐만 아니라, 시대가 흘러가면서 성경의 감추어진 많은 비밀들이 더욱 드러나는 시대가 되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성경을 깊이 있고, 현실감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시대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많고, 많은 만큼 가르치는 것에도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이 많다. 오히려 스스로 가르치려는 이들도 많다.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독교적 지식을 많다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할 수는 있지만 불리한 것도 많다. 무엇이든 동전의 양면과 같은 양면성은 있다. 적게 안다는 것은 그만큼 겸손할 수 있고, 가르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교만해지기 쉽고, 가르치고 드러내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그러나 많이 아는 것은 늘 많이 적용하고, 많이 행동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야고보 사도의 권면은 우리 시대의 철칙이 되어야 할 것 같다.

 

( 3:1-2, 개역)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에 굴레 씌우리라』

 

많은 청년들이 지식의 산을 열심히 오른다. 배울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을 쫓아가며, 스스로 탐구하고 연구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의 참된 의미가 되는 것일까? 성경말씀의 의미를 좀 더 이해하고, 성경의 난해구절을 해석할 줄 아는 것이 완전해져 가는 지식일까? 성경이 만약 교과서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학습지가 아니다. 성경은 성령님의 의해 운동하시는 능력이다. 인간의 영혼과 삶에 깊숙이 개입하신다. 그것은 경험과 체험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성경은 인생이며, 과학이기도 하고, 철학이나 역사이기도 하다. 성경은 마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아우르는 대백과사전 처럼 모든 것을 담아내는 동시에 영혼과 내세, 영원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정의 내리지 못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동시에 보지 못한 하나님을 증거한다. 그 성경이 그저 지식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고, 배워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이 성경을 많이 안다는 의미일까?

 

성경을 많이 알기 위해서는 지식의 영과 묵상의 영을 필요로 한다. 지식의 영이라 하면 우리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지식의 개념 그대로이다. 성경은 역사적 사회적인 배경을 가진 기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그 사회의 문화와 관습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이 오셨던 시기가 로마시대 였다라든지. 두 렙돈이나 데나리온이 얼마의 가치인지. 유대와 사마리아가 어디에 위치했으며, 갈릴리가 어디인지 그 지형과 기후는 어땠는지. 그러한 역사적. 사회문화적인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물론, 그것을 몰라도 성경을 읽는데 어려움은 없겠지만 이해하는데는 많은 제약이 따를 것이다. 또한, 신학적인 지식도 필요하다. 삼위일체와 그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는 성경구절. 구원론, 인간론, 신론, 죄 등등 조직신학을 이해하는 것도 성경을 많이 아는 지식이 한 부분이다. 신학을 쉽게 분해하면 교리이다. 교리는 어렵고 딱딱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신앙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이론적 토대이며, 뼈대이다. 이렇게 신학도 성경을 많이 아는 지식의 한 부분이다. 한편, 성경은 많은 예언적 기록이 있다. 예언에 대한 풀이와 해석에 대한 지식. , 예언적 지식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성경을 많이 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많이 안다는 의미를 이러한 지식의 앎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것도 고작 지식의 한 모퉁이를 곡괭이질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지식의 영 못지 않게 묵상의 영도 필요하다.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한 곱씹음과 사색, 관찰, 검토의 과정을 거치는 일련의 묵상을 통해서 성경의 깊이 있는 진리와 지혜의 샘을 캐낼 수 있다. 그것 역시 성경을 많이 아는 하나의 방법이다. 묵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성령의 조명하심이다. 지식은 성구사전이나 주석 등을 통해서 배울 수 있지만 묵상은 개인적인 성령님의 조명하심 안에서 얻어지는 진리이다. 다른 의미에서 영성을 필요로 한다. 깨어있는 기도와 깨어있는 삶 속에서 성령님의 조명하심은 영혼 안에 밝게 비춰진다. 그 빛의 조명을 따라 말씀 한 구절, 한 구절 안에 담겨진 많은 보화 중 어느 일정한 깊이의 어느 한 부분을 자기 믿음의 분량에 맡게 길어 올린다. 그리고 그러한 묵상의 뒷받침에는 또 다른 도구들이 있다. 바로 논리와 감성이다. 묵상은 그냥 영적인 횡설수설이 아니다. 그것은 논리 안에서 재정립되면서 성경의 일반적인 원칙과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성경적 근거와 타당성을 지니는 진리여야 한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사고와 비판적인 사고가 요구된다. 뿐만 아니라, 감성도 살아있어야 한다. 머리로만 분석하고 비평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느끼는 감성도 있어야 한다. 그것을 느껴보고, 살펴서 가슴에 와닿는 그것. 바로 그것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 바로 묵상의 영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묵상의 영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성령님의 감화와 조명이다. 더불어 중요한 한 가지 진리. 바로, 경험이다. 실제로 이 부분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결핍을 안고 있다. 경험이 없는 지식은 말 그대로 교과서에 담겨 있고, 머릿속에만 정립 되어진 하나의 형이상학적 진리일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며 우리 삶 속에서 투쟁적으로 나타나는 실상이다. 경험은 참된 지식의 분명한 스승이다. 신앙의 체험과 경험이 없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성경을 많이 알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약점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준비자체가 충분치 못하다. 경험은 성경을 가슴과 눈물로 읽게 한다. 그것을 사실과 진리로 자신의 영혼에 아로새기게 해준다. 그것은 사변적인 지식이 아닌 살아있는 지식으로 생기를 불어주는 어떤 힘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을 그저 지식의 영을 좀 아는 정도로, 묵상의 영을 조금 맛보는 수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은 지식의 영과 묵상의 영, 경험의 영을 두루 아는 것이다. 다양한 방법과 도구들을 통해 성경을 균형적으로 이해하고 접근해 가는 것. 그것이 성경을 많이 알고, 제대로 공부해가는 그리스도인의 균형 잡힌 성경지식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균형 잡힌 신앙을 갖는 것임을 생각해본다. 어느 하나만 위대한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볼 줄 알고, 많은 것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책을 읽을 때도 그러하다. 균형을 잃거나 어떤 사상과 이론에 휩쓸려 중심을 잃고 떠내려가면 안 된다. 객관적으로 비평하고, 그것을 구별해서 적용하면서 유익한 것과 그릇된 것을 가려서 취할 줄 알아야 한다. 신앙의 위인들도 마찬가지다. 모두에게 배울 점이 있지만 모두가 동일하지는 않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수도사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의 임재 체험하기의 잔느 귀용. 이러한 책들이 유익할 수 있지만 또한, 묵상과 기도에 심취한 그들의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드러난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책은 한 사람의 사상과 가치관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로이드 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책을 읽는 동안 그 사람은 책 속에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어느 한 사상에 휘둘리고 있다.’ 그렇다. 그러므로 객관적이 균형 잡힌 시각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여러 비평가들 사이에서 가장 건전한 평가를 받는 것일 거다.

 

단지, 에드워즈 뿐 아니다. 목회.설교.신학을 다 아울렀던 칼빈이나 청교도 여러 저자들이 건전한 비평을 얻는 이유도 다양한 경험을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게 경험한 것이 많이 경험한 것을 이기기는 어렵다. 성경을 단지 주석과 난해구절 해석정도에 대한 지식으로 많이 안다는 헛된 자부심을 버리고, 성경을 제대로 알고 깊이 알기 위해서는 얼마나 폭넓은 가르침이 요구되는지 알 때, 우리는 겸허해 진다. 모래사장의 한 켠에서 조개껍질 한 조각을 줍고 있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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