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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4일 간의 항해_2011.04.14.

 

 

사도행전 27:8-44까지 바울이 로마로 가면서 승선한 배의 위기로부터 발견하는 징계와 회복의 묵상

 

 

1.

(27:8-12, 개역)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성에서 가깝더라 [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 편은 동북을, 한 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바울을 태운 배가 시돈에서 항해를 시작해 이제 미항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은 미항이 불편했고, 그래서 가능한대로 뵈닉스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금식기간이 지난 9-10월 이었으므로 바다의 풍세는 좋지 못했고, 항해를 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한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경계시켰으나 그들은 한낱 죄수 바울의 의견은 존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뱃꾼의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뵈닉스로 재차 출항했던 것이다.

 

바울이 그들의 출항을 경계시킨 것은 객관적으로 항해하기에 힘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말미암는 권면이었다. 그러나 황실군대 백부장 율리오는 뱃꾼의 말을 더 존중한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말씀과 권면을 듣지 않고 불순종하는 모습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 바울은 뱃꾼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말은 존중되지 않았다. 오히려 선장과 선주는 뱃꾼이기 때문에 좀 힘들지만 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린 것을 존중해주었다. , 무엇보다 미항은 아름답지만 불편했기 때문에 그들은 편하게 머물 수 있는 뵈닉스로 가길 원했다. 그러므로 무리한 항해를 시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2가지 주요 원인을 살펴보게 된다. 먼저, 우리는 현재의 상태에 불만족하고,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려는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과 교만, 허영심과 명예욕 때문에 하나님의 권면을 무시하고 무리한 항해를 시도하게 된다. 또한, 그들이 어려운 조건에서도 항해를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배를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배를 다룰 수 있는 기술이 부족했다며 그들은 애초에 무리한 항해를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능력과 달란트로 말미암아 쉽게 교만해지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높임으로써 불순종하게 된다. 우리는 쉽게 우리의 재능으로 상대적인 비교우위에 서고, 조건들을 따지면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요구를 할 수 있다고 정의내려 버린다. 그럼으로 불순종하고 시험을 자초하는 것이다.

 

(1:14-16, 개역)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능과 능력을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 한편, 모세의 경우도 이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12:3, 개역)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20:10-12, 개역) [10]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모세의 최대 장점은 온유함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광야에서 반석의 물을 내면서 분노한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함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자격을 잃어버렸다. , 모세는 자신이 가진 최대의 장점을 제어하지 못한 한번의 결정적인 실수로부터 가나안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장점과 재능이 있다. 그러나 이 재능이 오히려 우리를 실패하게 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뱃꾼들이 그들의 항해술을 믿고 무리한 항해를 시도한 것처럼.

 

 

2.

(27:13-17, 개역)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14]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그들의 무리한 항해는 그 첫 출발이 매우 좋았다. 그들은 바울을 비웃었을 것이다. 죄수 주제에 뱃길도 모르는 녀석이 나섰다고 말이다. 그들은 거만했고, 득의한 줄 알고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그 다음 14절이 된 것이다. 불과 오래지 않아, 전혀 예기치 않은 갑작스런 유라굴로 북동풍이 바다에 내려치기 시작했다. , 징계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 징계의 전부가 아닌 처절한 징계의 시작에 불과했다.

 

한편, 요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할 목적으로 니느웨의 반대편인 다시스로 도망하고자 욥바항으로 내려갔을 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던 것이다. 분명, 요나는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배가 다시스로 출항했을 때 풍랑(아마도 유라굴로일 것이다.)을 만났으며, 요나는 바다에 던져져 고래 뱃속에서 징계를 받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 나아갈 때, 우리의 능력을 의지해 보다 나은 이기심을 쫓아갈 때 처음 그 시작은 득의한 것처럼 순조로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내 유라굴로가 대작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 중 누군가는 이 유라굴로 앞에 있을 수 있다.

 

이내 배는 밀려 바람에 휩쓸리는데로 흘러갔다. 이는 징계에 휘말려 들어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유라굴로를 일으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바람을 일으키고 물결을 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모든 환경을 움직이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의 치심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그리고 가우다란 작은 섬 아래로 지나는데 그들은 가우다로 갈 수 없었다. 징계 중에 작은 소망이 보이지만 그것은 다가서기에 멀고, 징계의 물살로부터 다가서 안전을 얻기에 불가능하다. 그들은 가우다로 향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우다를 지나면서는 겨우 거루를 잡아끌어 올려 단단히 묶을 수 있었는데 마치 이 모습은 징계에 놓이면서 근신하고, 회개하고, 경계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동시에 거루를 놓치지 않음으로써 징계는 있으나 멸망은 없을 것임을 암시해준다.

 

두렵고 조심스레 그들은 풍랑에 휩쓸리면서도 스르디스 곧, 모래톱에 걸릴 것을 조심한다. 그러나 그냥 물살에 쫓겨 갈 뿐이다. 징계 중에 있을 때 우리 역시 더 큰 징계, 더 큰 난관에 처하지 않을까 근신하도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징계의 물살에 갈피를 못 잡고 떠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징계 중의 우리 모습인 것이다.

 

 

3.

(27:18-19, 개역)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선장과 선원들, 율리오와 군인들까지 모두가 심한 풍랑으로 심한 애를 써야만 했다. 그 밤낮으로 휘몰아치는 광풍과 비와 성난 파도의 한 가운데서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키를 잡고, 각자 배에서 사투를 벌였다. 이와 같이 징계의 풍랑은 우리의 영혼 깊은 것을 뒤흔들고 우리로 하여금 깊은 고뇌와 괴로움, 고통과 쓴 잔을 마시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원들은 짐을 바다에 벌었다. 자발적으로 배의 기구들마저 버렸다. 그들이 버린 짐 가운데는 매우 중한 것들도 있었을 것이다. 징계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회개하고 근신하는 가운데 우리가 평소 귀중품처럼 끼고 있던 자기의 오만과 허영심, 교만과 욕심, 불순종하는 마음을 버린다. 그리고 선원들은 배의 기구마저 버렸다. 그것은 배의 장치들이었다. 장치들에는 배를 운용하고, 수리하고, 배가 항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마저 버렸다. 마치 치열한 징계속에서 우리는 짐을 버릴 뿐만 아니라 차츰 자기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자기의 의지, 자아마저도 포기하고 버리게 된다. 저희 손으로 버렸던 것처럼 자발적으로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전적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의지하게 된다. 자기 생각과 뜻을 버린다.

 

 

4.

(27:20-22, 개역) [20]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여러 날이 지나도록 날씨는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광풍과 비와 성난 파도와 더불어 사투해야 했다. 그러므로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질 지경이었다. 징계의 때가 길어질수록 우리는 차츰 낙심하고 좌절하게 된다. 다시는 회복되지 못할 것만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여겨질 정도가 된다. 그러므로 구원이 여망이 없어졌다는 것은 오랜 징계로 말미암아 절망에 빠진 우리의 마음상태를 말해준다.

 

또한, 오래 먹지 못했다. 밤낮을 사투하다보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 이는 징계의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발생하는 영육간의 결핍과 곤핍을 말해준다. 그리고 바울은 결정타를 날린다. ‘내 말을 들었더라면...’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을 처음 순종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반성에 휩싸인다. 덧붙여 바울은 순종했더라면 타격과 손상을 면했을 것이라고 뼈아픈 사실을 말해준다. 그렇다 징계의 기간은 사실 소모전이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다면 징계는 안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손상이 있지만 그것이 영구적인 손상이 되지는 않는다. 징계로 인한 일시적인 손상에 불과하다. 징계로 인해 우리 영혼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2:11, 개역)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리고 바울은 이어 말하길 이제는 안심하라고 했다. 이는 징계 중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이다. 생명에는 아무 지장이 없고, 오직 배만 손상될 것이라 했다. 이처럼 징계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영적인 손해를 야기시키는 것은 아니다. 징계로 인해 우리가 멸망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오직 배만 손상된다. ,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그 수단이 파괴된다. 그러므로 징계의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 영혼에 어떤 손해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려고 했던 그 수단과 방법을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 파괴시켜버리시는 것이다.

 

5.

(27:26, 개역)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우리가 주 안에 머물고, 올바르게 근신하고 회개할 때 징계에도 끝이 있다. 이 한 섬은 징계로부터 우리를 다시 건지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해두신 하나의 기회이자, 회복의 장소, 회복의 시기이다.

 

 

6.

(27:27-32, 개역) [27]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쫓겨 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28] 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9]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30]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 이에 군사들이 거룻 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14일 간의 항해 끝에 그들은 차츰 구원의 여망에 가까워지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서 14일 간의 항해란 것이 결론이 나서 망정이지 그들이 이 14일 이란 기간을 채우기 전까지는 도대체 언제가 끝일지 모르는 막연함과 공포와 두려움 속에 그 망망대해의 바다를 해와 달조차 보지 못하고 먹구름과 미친 바람과 성난 파도와 더불어 사투해야 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정신적인 공황이자 공포, 고통과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14일의 방황이 채워져서야 그들에게 구원의 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우리가 징계의 기간을 보낼 때 얼마나 보이지 않는 구원의 막연함 속에서 고통 받게 되는지 짐작케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14일은 적어도 이 묵상에서는 상징적인 의미의 기간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징계의 기간이 몇 달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몇 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차츰 회복의 시기와 기회에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여전히 암초에 걸릴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우리가 징계의 때에서 차츰 벗어날 시기가 될 때에도 여전히 암초와 같은 위험은 도사리고 있다. 특별히 마귀는 우리가 징계를 벗어나 회복되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그럼으로 마귀는 우리가 좀 더 좌절해 있고, 용기를 잃고 있고, 징계 아래 놓여 있을 수 있도록 암초를 마련해둘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암초를 피하기 위해 성급히 육지로 향하기만을 선택하지 않고 조금 인내하고 날이 새길 기대했다. 날이 새어 주변이 온통 밝아지면 뱃길도 보일 것이며, 물길도 보일 것이며, 바다 아래 암초도 볼 수 있을 것이므로 그들은 암초를 피해 안전히 항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구원의 기회에 가까웠을 때 잠시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고 밝게 나타나기를 잠시 기다려 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정확히 분별해서 나아갈 수 있다.

 

한편, 날이 새어 주변이 밝히 보이자 사공들이 도망하려고 거룻배를 내리고자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군인들은 거룻줄을 끊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여기서 이 사공들이 도망치려는 모습은 우리가 오랜 징계를 통과하다보면 그 고난에 지쳐 섣불리 안전을 얻고, 건짐을 받고 싶어하는 성급함에 유혹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바울이 허락지 않고, 그들이 배에 있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한 것처럼 우리는 속히 징계를 벗어나 회복되고, 안전을 얻기 위해 섣불리 나서는 실수를 제어해야 한다. 배에 그들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섣부른 행동과 판단의 실수를 제어하란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인들은 거룻배의 줄을 끊어버렸다. , 구원을 얻으려는 자기수단과 방법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7.

(27:33-38, 개역) [33]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34]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인이러라 [38]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다시 안정을 얻은 배 안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그동안 그들이 심히 굶주렸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음식을 먹을 것을 권했다. 징계의 고난 속에서 우리는 영육간의 결핍과 곤핍을 경험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긍휼에 목마르다. 그러나 이제 음식을 먹으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회복되고, 다시 공급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다 먹고, 배부르게 먹고 남은 밀은 바다에 버림으로써 더 이상 과욕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징계를 통과할 때 우리는 이제 겸손하고, 과욕을 부리지 않고 순박해지며, 자기의 분수를 알게 된다.

 

 

8.

(27:40-41, 개역) [40]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41]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가니

 

그들은 접어둔 돛을 다시 올려 펼쳤다. 지난 14일 동안은 그 거친 풍랑으로 그들은 돛을 펼치 수 없었다. 만약, 그 풍랑 속에서 돛을 펼친다면 그것은 배가 뒤집힐 것이므로 자살행위였다. 그러나 이제는 돛을 펼 수 있었다. 그럼으로 바람을 받아 적절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돛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 삶의 목적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우리의 목적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나아가는 방향이 달라진다. 폭풍 속에서는 이 돛을 펼 수 없다. 목적과 방향을 잃고 파도가 치는대로 휩쓸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돛을 폈다. 그리고 구원의 소망이 있는 그 연안으로 돛의 방향을 맞추어 나아갔다.

 

그러나 갑자기 또 하나의 난관에 부딪혔다.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에 이르러 갑자기 배는 모래톱에 부딪힌 것이다. 그러므로 배의 앞편은 모래톱에 묻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배 뒤편은 파도에 깨져가기 시작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구원의 여망 앞에서 또 다른 고난과 위기일발인가?

 

여기서 우리는 이 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바울은 오직 이 배만 손상될 것이라 앞서 말해주었다. 이 배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이 배는 구원의 항구에 당도해야할까? 아니다. 이 배는 이 바다에서 파괴되고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우리가 징계의 터널을 통과해 다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항구에 도착할 때는 우리의 불순종하는 수단과 방법들은 버리고 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 두 물이 합류한다는 것은 난관이기보다 불순종의 수단을 가로막아 하나님의 회복시키시는 그 연안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는 필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두 물은 아마 순종과 회개 또는 하나님 앞에 정직함 등의 의미를 내포할 것이다.

 

 

9.

(27:42-44, 개역) [42]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43]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 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한편, 여기서 또다른 위기가 재발되고 있다. 배가 모래톱에 걸리고 파선해가지 그들은 모두 이 배에서 탈출해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그러므로 죄인들이 도망칠 소지가 다분해졌고, 그래서 군인들은 죄인들을 죽이자고 말한 것이다. 이는 곧, 바울을 죽인다는 말이다. 그러나 백부장 율리와 그것을 가로막고 나섰다.

 

여기서 군사들과 율리오는 사로 대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모두 큰 징계의 풍랑을 지나왔다. 심지어 군사들은 사공이 도망치려 할 때 바울이 그들을 붙잡아야 할 것을 말하자 거룻줄을 끊으면서까지 바울의 말을 존중했다. , 처음 바울을 무시했지만 바울의 말처럼 큰 어려움을 겪은 후 그들은 가난해졌고, 겸손해졌고, 바울의 말을 존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다시 바울을 죽이려 하는 것이다.

 

이 군사들과 율리오는 징계를 통과한 이후에 나타나는 두 부류의 사람을 보여준다. 먼저, 군사들은 징계의 큰 고난을 통해 바울의 말을 존중하게 되는. , 회개와 큰 교훈을 얻었지만 이내 그 교훈을 망각하고 다시 오만방자해지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 큰 징계를 통과한 후 그들은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해야할 것을 교훈 받았음에도 이내 다시 교만해지고, 받은 교훈을 죽여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그들은 복습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한편, 이 율리오는 징계를 통과한 후 바울의 말을 신중하게 듣고, 존중하게 되는 즉, 하나님 말씀 앞에서 신중해지고 정직하게 되는 사람들. 징계를 통해 큰 교훈을 받고 주의 율례를 지키게 된 사람들이다.

 

또한, 이 배를 버리고 사람들은 탈출하기 시작했다. 이 배는 버려져야할 배였다. 탈출하는 사람들은 크게 2~3부류로 나뉜다. 수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헤엄쳐 해안가로 나아갔다. 그러나 수영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널조각이나 배의 물건을 의지해 해안으로 나아갔다.

 

징계로부터 회복의 시기와 기회가 왔을 때도 그러하다. 말씀 안에 성장한 사람이나 스스로 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해안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구원의 기회 앞에 왔지만 어떻게 가야할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 , 교제와 권면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결국 전부다 육지에 당도해 구원을 얻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징계의 궁극적인 결과이다. 우리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망하고 실패하고 잃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시다. 하나님의 목적은 언제나 선하고 아름답다. 그들이 다시 땅을 밟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쁘고 감격했을까!

 

특히, 그들이 당도한 이 섬은 말타란 섬으로 결과적으로 그들이 로마로 항해하는데 있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섬이었다. , 그들은 그 성난 파도 속에서 휩쓸려 갔지만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떠내려간 것이 아니라 사실은 로마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징계 중에서도 우리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보내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처럼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소원의 항구로 나아가도록 이끌어가시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그 징계의 처음과 끝까지 태연하게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며 동행했다. 바울은 그가 결코 바다에서 죽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미 오래전 하나님은 바울에게 로마로 가게 될 것을 계시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징계의 고통 속에 함께 참예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이 바울의 의롭고 완전한 모습은 우리가 징계의 크나큰 고통을 겪고 그 긴 터널을 통과해 나올 때까지 변함없이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을 것이다.

 

 

10. 결론

 

무엇보다 우리는 이 바울의 항해와 풍랑의 사건을 통해 근본적으로 이러한 큰 시련과 징계가 어디서부터 말미암았는지 되짚어보고 교훈을 삼아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면을 존중하고 순종하지 않았고, 육신적인 편리와 이기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한 얄팍한 시도와 가능성에 더 비중을 두었다. 우리는 항상 말씀을 듣고 배운다. 우리의 욕망, 자기의 뜻과 의지, 자아를 쫓지 말고 하나님을 쫓고 고난에 참예해야 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은 비록 우리가 아는 바지만 사실은 내 욕망과 이기심과 나의 편리와 허영심과 오만과 교만과 명예욕과 자랑을 쫓아 행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덧붙여 우리는 자기가 가진 능력을 의지하고, 과신하며 그것을 비교우위에 두고 교만해져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어떤 근거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불순종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쫓고 있진 않은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지 판단해야 한다.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할 때 정말 그것이 내 신앙에 유익되어 하고자 하는 것이지 분별해야 한다. 우리가 오히려 고난에 참예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시고 영광을 주신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고 얄팍한 꾀를 쓰고, 고난을 피해 육신적인 영광을 얻으려 할 때 하나님은 오히려 고난의 풍랑으로 휩쓸려가게 하신다.

 

한편, 배에 그 선원들이 그 풍랑의 기간 동안 배의 짐과 기구들을 내버린 것처럼. 그들은 큰 회개와 반성과 그릇된 판단으로 무리한 항해를 시도한 것을 후회했을 것이다.

 

(고후 7:10-12, 개역)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이 근심은 신령한 근심이다. 신령한 근심, 회개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이다. 그들은 진실한 회개와 근심 속에서 간절했고, 자기 잘못을 쭉 열거하고 되짚어보면서 그릇된 결정에 대해 변명했다. 반성했다. 자기의 부주위와 정직하지 못함에 대해 분노했다. 두려웠다.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했다. 정직을 사모하고 열심 냈다. 자신의 그릇됨을 스스로 자책함으로 벌했다. , 배의 짐과 기구를 내버림으로써 그들은 일절 깨끗함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간절함과 참된 회개와 반성은 바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 할 것들이다. 우리는 종종 회개와 반성을 간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말뿐으로 그칠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후회와 각성과 회개는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근신함과 회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쏟아 부어져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은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신다고 말씀한다.

 

(7:10, 개역)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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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1.참된 복음을 통해 전파되는 구원_2010.08.14.

 

 

(데살로니가전서1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1. 문제제기 : 복음이냐 구원이냐

2. 능력으로 이른 복음.

3. 성령으로 이른 복음.

4. 큰 확신으로 이른 복음.

5. 적용.

 

 

1. 문제제기 : 복음이냐 구원이냐

데살로니가전서는 환난 중에 승리하는 교회의 표상이라 일컬을 만큼 견고한 믿음의 본을 보인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한 바울의 첫 번째 서신이다. 보통 바울의 서신들이 1장에서부터 문맥적 치밀함을 통해 일련의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면 다소 이례적으로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는 비교적 간결하게 교훈과 진리들을 소개하듯 나열하고 있다.

특별히 15절에서는 바울의 전도로 말미암아 데살로니가 성도에게 전달된 복음이 무엇인지 정의내리고 있다. 우리는 이 정의로부터 복음에 대한 우리의 무딘 개념을 재정립해야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통상적으로 복음과 구원이란 개념은 모호하게 혼용되어 쓰여지는 경향이 있다. 보통 우리는 구원이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신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은밀한 의미에서 그건 복음이라 할 수 있다. 죄로 인해 멸망 받을 운명에서 어떤 소망도 없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속죄의 소망이 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복된 소식, 복음인 것이다. 그러나 구원이란 것은 이 복음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각자의 마음에 믿어짐과 동시에 실제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내주하게 되는 상태 그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 안에서 단순히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설명하는 상태를 놓고 그것을 구원이라고 단정하거나, 교회학교에서 제자들의 구원을 교사가 확정해주는 일은 실로 어리석고 무모한 것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본문으로 돌아가 바울은 이 복음이 전파된 방식에 대해 부연하고 있다.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이 복음의 전달은 앞서 말한 것처럼 단순히 말 몇 마디로 이뤄진, 들어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만으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만약, 그렇게 복음이 전파된다면 그것은 말로만 전파된 것이지 실제 복음 안에 있는 복음의 구성요소가 누락된 즉, 생명이 없는 복음일 뿐이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 이어지는 참된 복음의 전파에는 복음의 어떤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인지 이어서 설명하고 있다.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우리는 참된 복음이 지니고 있는 이 세 가지의 요소가 무엇인지 충분히 고찰해봄으로써 진정한 생명의 복음이 어떤 것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2. 능력으로 이른 복음.

 

능력이란 것은 하나의 힘이며, 운동력을 지닌 어떤 것으로 물리적 또는 물리적인 영향을 끼치는 어떤 것이다. 다시 말해, 복음 안에도 능력이 있음으로 해서 복음이 전파될 때 어떤 힘과 운동력이 나타나며, 물리적인 변화내지 물리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능력은 복음 그 자체로는 완전하진 못하다. 왜냐하면 실제적인 복음의 능력은 성령을 통해 증거될 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증거 되지 않는 복음에는 능력도 생명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내 죄로 인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있지만 어떠한 참된 변화를 야기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복음의 능력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먼저, 구원의 능력이 있다. 복음이 전파되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로마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1:16, 개역)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복음에는 생명의 능력이 나타난다.

(4:28, 개역)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베드로전서 123-25절에는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되지 않고 썩지 아니할 씨로 되었는데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말씀은 씨앗으로써 복음을 믿는 자의 마음에 심기워져 싹이되고, 이삭이되고, 곡식이되는 자람이 있는 것이다. 바로 복음으로 말미암는 생명의 현상,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생명의 참된 현상이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이 참된 복음이라고 말하기 어렵니다. 만약, 그런 생명의 현상 없는 복음이 옳은 것이라면 성경은 다시 고쳐써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 복음의 능력은 실로 무섭다. 바울은 거듭나기 전 자신을 교회의 포행자요 핍박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을 맛본 바울은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러므로 갈라디아126절에서는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회고한다. 단순히 바울이 전도자로 잘 해서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다 저렇게 교회를 핍박하고 살인하던 사람도 복음의 능력이 충돌하니까 완전히 바뀌는구나 그것 때문에 영광을 돌린 것이다. 복음의 능력이란 실로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말로만 전파된 복음이 아무런 힘과 능력, 물리적, 물리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함에 비해 참된 복음은 철저한 변화를 일으키는 신령한 능력으로 운동하고 있다.

 

 

3. 성령으로 이른 복음.

 

복음은 성령으로 이른 것이다. 성령으로 복음이 이르는 것이 아니라면 말로만 이른 복음으로도 능력과 구원이 나타나야 될 것이다. 그렇나 그렇지 않다. 오직 복음의 진수는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성령은 복음을 증거하신다.

 

(8:11-13)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휴거 이후 복음을 듣고자 전세계를 찾아해맬 어떤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씀이다. 휴거의 날 성령님도 올라가신다. 이 땅에 더 이상 성령의 사역은 없다. 그럼으로 복음을 듣기 위해 온 세계를 누비지만 얻지 못해 갈하여 쓰러진다. 복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우리에게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62절에서는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또한, 성령은 복음 증거하고 계신다. (요일 5:7, 개역)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이렇게 복음은 성령의 사역과 증거하심으로 전파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복음이 믿는 자에게 전파될 때 성령도 그 사람 속에 실제로 임재하시는 것이다.

(1:13, 개역)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렇기 때문에 성령 없는 복음은 없으며, 성령의 인치심 없는 구원도 없다. 그러므로 복음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참으로 성령께서 인치시고, 들어와야 그는 복음으로 인해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것만이 환희의 날 그 사람의 기쁨을 보장해 줄 것이다.

 

 

4. 큰 확신으로 이른 복음.

 

성령의 인치심으로 인해 증거된 복음은 충분히 큰 확신을 가져다 준다.

(고후 13:5, 개역)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여기서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는 본인 외 그 누구도 그 구원을 확신해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생명의 능력으로 간접적으로 구원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확신은 언제나 각자 자기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다만, 어떤 경우는 정말 구원받은 것처럼 생활하고 확신도 있어서 본인을 비롯 주변의 그리스도인도 그 사람의 구원을 확신하는데 그럼에도 훗날 그 사람이 이제야 참으로 구원받았다.’라고 고백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놀랍다. 그래서 단순히 거듭난 듯한 행위만으로도 완전한 증거가 되진 못한다. 증거는 오직 성령이시다. 아무튼 참된 복음의 전파에는 큰 확신도 따른다.

 

(요일 4:18, 개역)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복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 복음이 확실할 때 심판의 두려움은 쫓겨난다. 확신이 없는 복음이라면 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릴 것이다.

 

종합해볼 때,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 복음에 대한 참된 정의는 매우 훌륭하고 명쾌하다. 결코 몇 마디 말로 이 복음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건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에 불과하다. 참 복음은 구원의 능력과 생명의 능력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복음에는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뒤따른다.

 

 

5. 적용.

1)복음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

2)자기 구원에 대한 거짓된 확신을 가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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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26-8)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음_2010.07.10

 

 

1. 2장을 통해 알 수 있는 골로새교회의 상태

2. 사실상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된 것.

3.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낳고.

4. 적용

 

 

1. 2장을 통해 알 수 있는 골로새교회의 상태

 

골로새서는 에베소서와 더불어 쌍둥이서신으로 알려져 있다. 에베소서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강조한다면, 골로새서는 교회의 머리된 그리스도를 부각시킨다. 한편, 골로새서가 기록된 중요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2장을 통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사실상 2장에서 골로새교회에 야기된 문제들이 무엇이었는지 적나라하게 언급되고 있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9절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초대교회 등장한 치명적인 이단사설은 영지주의였다. 신령한 그리스도께서 사악한 육적존재로 나타날 수 없다하여 이른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 이 사상의 요지였다. 따라서, 바울은 영지주의적 가르침에 반격해 그리스도의 신성의 모든 것이 육체로 거하신다는 것을 언급해야 했다.

*11절 할례, 14절 의문의 증서, 16절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종합적으로 볼 때, 이것은 유대교적 율법주의였다. 육적 할례의 필요성도 대두되었다. 그럼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설명한다. , 율법이란 의문의 증서는 십자가에서 도말되고, 못 박혔다고 강조한다. 한편,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의 구분, 유대교의 기념비적인 절기들의 준수문제, 월초의 금식, 안식일준수 등 유대교적 전통율법의 규례를 지키는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의 결론은 명쾌하고도 단호하다.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8절 거짓 겸손과 천사숭배, 그 본 것을 의지함.

-이것은 일종의 신비주의였다. 그리스도의 겸손의 본이 아닌 거짓된 겸손으로 눈속임하며 천사숭배로 유인하고 있었다. 또한, 환상도 비중 있게 다뤄졌다. 그 본 것을 의지하고, 헛되이 과장했다.

*21절 말고 말라

-금욕주의도 기승을 부렸다. 일체의 접촉을 금했다. 어쩌면 이것이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금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자의적 숭배와 몸을 괴롭게 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이교적 가르침과 거짓 교리에 대한 바울의 종합적인 견해는 20절에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세상의 초등 학문’.

이와 같이 세상의 초등 학문이 파고든 골로새교회의 실태를 이해할 때 우리는 2장에서 궁극적으로 사도가 제공하고자 하는 교훈과 주장하는 바의 목적을 이해하게 된다.

-2절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고 싶었다.

-4절 아무도 공교한 말로 속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7절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고 싶었다.

-8절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하는 자들을 주의하도록 경계심을 일으키고 싶었다.

 

 

2. 사실상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된 것.

 

전반적인 배경이 파악되었다면 우리는 좀 더 깊이 있는 탐구를 시도해야 한다. 사도는 골로새교회에 파생된 다양한 문제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지적한다.

 

(골로새서26-8)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로새교인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받았지만 그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너무나 개방적이었고, 귀가 얇았다. 그들은 믿음의 정확한 중심과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데 무능력했다. 사실상 모든 세상 초등학문에 귀를 열었다. 어느 것 하나도 그들에게 중대한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경계심을 유발시키지 못했다. 어떤 노략질하는 자들을 주의하지 않았다. 그들의 뿌리는 너무나 얕아서 언제든지 뽑아서 다시 옮겨 심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처음 받은 교훈을 믿음으로 굳게 지키지 못했다. 다른 모든 교훈들도 그들에게 흥미를 돋구었다. 그들의 분별력은 매우 유치한 수준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시 그들을 복음의 소망 안에 세우는 수고를 감수하기로 맘먹었다. 121-23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거룩하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고 싶어하십니다. 만약, 당신들이 이 믿음 위에 심기우고 복음의 소망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바로 나 바울은 이 일을 위해 복음의 일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다시 당신들을 위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기로 맘먹었습니다. 당신들은 무분별한 초등학문을 무차별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또 다른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난마저도 제 육체에 채우겠습니다. 당신들이 잘못 배운 것들을 바로잡아주겠습니다. 비록 그것이 내게 괴로운 일일지라도!”

 

, 하나 문제의 원인은 2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부족이었다.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모든 부요함,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살펴볼 어떤 통찰력내지 지식의 능력이 있었다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 피상적이었다. 교회 안에 자리 잡아야 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 중심에 자리 잡지 못했다. 교인들은 제각각 자기 성향에 맞는 대로 외부로부터 들려주는 가르침에 혼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유발시키고 있었다.

 

 

3.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낳고.

 

27절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 된다.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여기서 특별히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란 사도의 권면이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도는 여기서 왜 갑자기 감사에 대해 말하는가. 그리고 이 감사는 어디로부터 유발된 것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었을 때, 올바른 교훈을 쫓아 믿음에 굳게 섰을 때 유발되는 감사함이다. 그때야말로 감사함은 넘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이 교훈을 재정립해야 한다. 이 말씀은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 믿음과 교훈의 깊고 넓은 것에 뿌리를 박으면 박을 수록 감사함이 넘치게 될 것이란 것이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믿음의 터를 세우지 못하고, 깊이 박히지 않게 될 때 우리는 감사와는 멀어진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골로새 성도들에게 파생된 또 하나의 치명적 문제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처음 받은 교훈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성육신한 그리스도를 통해 전달된 복음의 기쁜 소망을 망각해버렸다. 처음에 그것은 그들을 참으로 깨닫게 한 날부터 자라게 하는 어떤 원동력이자 큰 기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지금은 영지주의와 유대교적 율법주의, 신비주의와 금욕주의가 혼재되면서 참된 복음의 소망과 기쁨, 감사와 즐거움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린 복음은 존재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사도가 7절에서 특별히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언급하는 이유를 명쾌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골로새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지 못함에 따라 받은 교훈을 망각해버렸다. 믿음 위에 세워지지 못했다. 그 결과 자연스레 그들은 혼미하게 되었다. 바울의 복음이 맞는 것인지 율법주의와 신비주의가 맞는 것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 결과 그들은 감사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한편, 이는 사도가 우리에게 주는 궁극적인 치료책이 무엇이지 알게 해준다. 적어도 우리가 골로새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과 그 원인을 이해할 때 우리가 그와 같은 이단적 학설과 감사를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힘써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그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탐구하는 시도를 해야한다.(2:3) 더불어 그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하는 원동력이다.

 

 

4. 적용.

1) 오늘날도 많은 이단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한다. 사도의 경고처럼 누가 철학내지 헛된 속임수로 우리 믿음을 노략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이란 것은 대학강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견해며 사상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생활 속에 우리가 만나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 속에 이미 수많은 철학이 산재해 있다. 우리는 특별히 사람들의 말과 사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있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갖게 되는 소위 불신앙적 생각이나 하나님에 대한 오해의 많은 부분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던지는 불신앙적 질문과 발언으로부터 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두려워해야 된다. 그리고 명심해야 된다. 우리는 사람의 생각과 사상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2) 최근 신천지 사상이 성도들을 노략질하고 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우리를 당혹케 하는 일도 있다. 오랫동안 교회의 중앙부에 있다고 생각했던 분들도 노략된 것이다. 우리는 좀처럼 그런 현상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의 터 위에 굳게 심기우지 못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른 의미에서 감사를 잃어버린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우리는 특별히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바울이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이 넘치게 하라고 당부하는 것을 기억하자. 감사는 신앙의 원동력이며,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감사함이 아닐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일종의 극기훈련이 되고 만다. 인내하는 것과 극기는 다르다. 많은 이들이 신앙의 중반기로 접어들면서 처음 신앙의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리자 차츰 의무와 습관으로 신앙생활을 한다. 마치, 지쳐있지만 멈춰 서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그저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것일 뿐이다. 바로 그것이 극기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라도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런 생각을 위안 삼아 단순히 걷고 있는 것이 시험이란 것이다. 누구든지 그런 사람 옆에 와서 치면 넘어질 것이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말씀처럼 어디서부터 떨어졌는지 고민해야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탐구하고, 감사함을 경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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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혜와 계시의 정신_2010.02

 

 

(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17-19 지혜와 계시의 정신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이 가져다주는 변화와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내 생명의 은인이 있는데 그의 직업과 재산, 그의 성경과 사회적 관계를 알찌라도 그 은인된 사람을 그 자체로 모른다면, 그와 인격적 관계가 없다면...

 

우리가 기독교의 많은 교리와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익숙할지라도 정작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실제적인 진리들을 적용하고, 그 가치를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된다. 하나님을 알 때 기독교 진리의 모든 기초가 되는 원리도 이해하며 적용하고 다양한 진리들을 엮고, 응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는 그 어떤 기독교 진리와 가르침 윤리가 통용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의 청년들에게 성결된 삶을 가르쳐보라.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성도 안에서도 하나님을 잘 모를 때 성경적 가치관과 진리가 무시되는 것을 발견케 될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 담배 피우지 말란 말씀이라도 있나요?”

그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 성경을 모르는 것이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비춰질 때 성경으로 돌아간다. 성경에 착념한다. 하나님을 알고 깊이 있게 이해해 간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진다. 분별력과 통찰력을 얻는다. 영적인 일은 영으로라야 분별한다는 말씀처럼 신령한 이해력이 강화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의 그 무엇을 살펴보는 능력이 있다. ,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그 계획과 깊이를 더욱 넓고 깊게 아는 것이며 더욱 진리 가운데 행하게 되는 것이며 삼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깊이 알수록 자연히 그 법 아래 순종, 구속되는 삶에 가까워진다. 교통법규, 신호를 알수록 설 때와 갈 때를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갈 수록 온전한 성도가 되어 간다.

처음 교제도 잘 안 나오던 사람이 교제만큼은 자리잡게 된다. 봉사하지 않던 이들이 봉사하게 된다.

 

한편, 마음의 눈을 밝힌다는 것을 좀더 깊이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고 마음의 눈을 밝히신다. 이를 두 가지로 재설명하며 이와 같다.

 

하나,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는 이유는 마음의 눈을 밝히시기 위해서다.

, 마음과 눈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필히 하나님게로부터 오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필요하다.

종합해서 하나님은 어떤 이유 즉, 소망과 영광의 풍성 등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능력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기위해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혀주시길 원하는데 이는 지혜와 게시의 정신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다른 의미에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부족할 수록 마음의 눈은 어두워지며 하나님의 부요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서 보다 높은 분별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마음 눈이 어둡다는 것이다. 누구는 영화롤 보고, 맛집을 다니는데 자주 시간을 쓰지만 누구는 그 시간을 아까워한다. ? 지헤와 계시의 정신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을 사랑치 말라고 했다.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없는 것이라 했다. 앞서의 표현을 빌리면 세상을 지배하는 유행과 오락이 친밀할수록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부족한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윤리와 도덕적 기준이 낮은 것이다. 성경의 윤리와 도덕이란 것은 세상의 기준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심지어 성경 말씀은 벧전1장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고룩하라고 말씀한다. 솔직히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럼에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라. 물론, 영화를 보는 것을 무조건 죄로 여기는 건 아니다. 절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오락이 필요하다. 다만, 순수한 오락이 필요한 것이다. 순수한 오락이란 지나치지 않고, 너무 흥분되지 않고, 마음을 배앗기지 않는 절제된 적당한 오락을 말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마음의 눈이란 표현을 생각해보자. 마음에 눈이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 그렇습니다.’이다. 마음엔 입도 있고, 행위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의 입이 읽고 내려간다. 불쾌할 때 마음의 입이 불평한다. 종종 형제, 자매님을 평가하고 저주하는 말도 마음의 입이 내뱉는다. 매우 독특하다 마음이 말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은 행위도 있다. 의지의 출처가 마음에 있다. 행동이 나오기 전 주로 마음의 의지가 먼저 행위를 조장한다. 마음의 의지는 감정의 동기부여와 지원도 받는다. 그러면 생각은 실제 행동을 위한 수단과 방법을 고안하는데 나아간다.

 

그러므로 마음의 눈을 밝히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 영광의 풍성, 능력의 크심을 알길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의지에 동인을 제공하는 지혜와 게시의 정신이라는 수단을 사용해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히도록 인도하신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마음 안에 있는 1차적인 의지는 작동하며, 눈을 뜨게 한다. 그 눈은 처음 하나님이 목적하신 소망과 영광의 풍성, 능력의 크심을 발견하는 일을 시작하고 이루게 한다. 이로써 우리는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할 필요성과 당위성까지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는 눈은 등불이며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고,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둡다고 하셨다. , 눈이 밝으면 구별해서 행동하게 된다. 눈이 밝을수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라는 물리적 존재의 특성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작용하셔서 진리로 이끄시는지 탐구해보라. 더불어 마귀 역시 이것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를 범죄에 빠지게 하는지도. 마귀는 정욕과 탐욕의 정신을 계시해준다. 우리 마음 눈은 흐려진다.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둔감해진다. 정욕적이고, 세상적인 즐거움과 유혹에 민감해진다. 우리의 감정과 마음의 의지가 정욕에 굴복된다. 자주 이방인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고, 맛집을 다닌다. 2-3달에 한 번은 신작 영화를 본다. 유흥을 위해 종종 돈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훈련은 부족하고, 읽어도 맛이 없다. 헌금과 같은 신앙의 기본적인 의무를 수행하데는 한계를 느낀다. 마음의 눈이 어두우므로 온 몸이 어둡게 된 것이다. 구별된 행위가 적은 것이다. 순종하는 삶이 적은 것이다.

 

그러므로 눈이 어두운 그리스도인은 눈이 밝은 그리스도인을 헤아리지 못하지만 눈이 밝은 그리스도인은 어두운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감찰한다. 어째서? 영적인 일은 영으로라야 분별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좀 어두운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몇 마디 말로 금방 구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비그리스도인은 그의 정체가 드러난 것을 모를테지만.

 

, 마음의 눈은 그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다라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한다. 그 능력은 영적 능력이기도 한데, 영적 분별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자.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달라고 기도하고, 죄를 자백하고 버리기를 쉼없이 연습하고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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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그리스도안에서_2010.02

 

 

(1:3-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3-13 그리스도 안에서

 

3절부터 13절까지에만 9번이 반복되는 어절이 있다. 바로그리스도 안에서이다.

 

1)구원(1:3-7)

 

하늘에만 있는 신령한 복이 있는데 그 복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택함 곧, 구원이다. 구원은 가장 신령한 복이다. 구원의 복주시는 목적은 흠없게 하기 위함이다. 구원을 통해 우리는 아들의 권세를 취득한다. 이로써 우리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헤의 풍성함은 구원으로 나타났는데 이 구원은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과 대속적 죽음으로 흘린 피로 실현되었다.

 

2)구원의 계획(1:8-12)

 

구원의 계시와 함께 하나님은 지식과 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신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을 발견하고 이해하며 그 넓이가 넓어진다.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개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유를 통일케 하는 것을 포함한다.

세상은 마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과 통일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피의 복음으로 다시 분리된 것을 통일코자 하신다. 하늘의 것이든 땅의 것이든, 자유자든 종이든, 영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이든, 유대인이든 헬라이든 전부 말이다.

하나님게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고자 계획하신 구속의 계획을 통해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시켜 나가는 일을 해나가신다. 그리고 통일은 오래지 않아 이뤄질 것이다. 연합지 않는 세력은 심판의 날 소멸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들은 하나님의 통일, 구속의 계획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자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자들이고 연합된 자들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 뒤를 이은 복음의 기업이며, 성도의 기업이며, 하늘나라의 기업이며, 구속의 기업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찬송받기 합당한 하나님과 그 영광 찬송함을 회복케 될 것이다.

 

3)구속의 보증(1;13-14)

 

구속의 보증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다. 또한, 하나님의 구속의 게획 안에 있다. 누군가 보증을 도장 찍었다면 먼저 보증서가 있는 법이다.

먼저, 진리의 말씀이 있었다. 그것은 천지는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다. 하나님의 실존에 있어 말씀이란 것은 증거이다. 확증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다시 말해, 말씀이 없는 하나님은 없으며, 말씀이 없는 신앙은 없으며, 말씀이 없는 그리스도는 없으며, 말씀이 없는 구속은 없으며, 말씀이 없는 속죄는 없으며, 말씀이 없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신앙의 김족인 진리를 죽이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 구원의 복음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제역할을 다 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듣는 것이다. 로마서 1017절에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했다. 구원의 복음을 듣고 받아들일 때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이 생기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쳐진다. 믿음은 말씀을 듣는다는 전제를 둔다.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었기에 언제나 우리 구원의 재확증도 말씀으로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 그가 못박히신 것은 더더욱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믿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동인이 무엇인가. 말씀이다. 우리 믿음과 구원의 근거는 문자로 쓰여진 성경이기에 말씀의 부족은 종종 구원의 의심으로 야기된다.

성령은 공개적으로 약속되었다. 그리스도는 구약과 신약되었지만 조금은 어렵다. 그라나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직접 약속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성령님은 성도 안에 임재하고 내주하심으로 성도의 구원을 확증하고 인쳐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버리운 자라고 했다. 성령님은 마치 완제품의 검사필마크와 같다. 보증이 되시고 보증을 주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안심이 되는가. 성령님의 인치심으로 우리는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다.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을 믿는 믿음에 있어 다시는 재검증, 재설정, 재시도가 요구치 않게 된 것이다. 믿음의 행위가 의심으로 말미암아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일찌라도 참 믿음의 성령 인치심이 있었다면 우리의 의심조차 무능력한 것이란 의미다. 그 어떤 불신과 의심, 두려움도 우리 구원의 보장에 아무런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디 믿고 의심하기에 익숙한 우리의 본성을 생각할 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성령님의 보증으로 말미암아 요한복음 1028절에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령님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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