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왕상19:3-4)

북이스라엘 7대 왕 아합은, 지독한 바알숭배자 아내 이세벨의 치마폭에 휘둘린 무능력한 왕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 450인과 대결을 벌입니다. 이 유명한 갈멜산 대결에서 엘리야의 하나님은 물에 젖은 제단을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450인의 바알선지자를 기손 시내에서 모두 죽입니다.

의기양양해진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아합왕을 배웅하고는 오히려 아합왕보다 먼저 이스르엘 궁궐 어귀까지 달려갔습니다.(왕상18:46) 왜요? 그는 이제 이세벨이 항복할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분노한 이세벨은 오히려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왕상19:2) 결과 엘리야는 도망하여 로뎀 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전혀 예상치 않은 위협적 반응에 당황했던 것입니다. 이후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붓고 역사의 뒤로 사라집니다. 엘리야의 의기양양함과 역습에 당황해 지나치게 낙심했던 것이 그의 사역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교훈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와 같을 것입니다. ‘승리 뒤에는 참혹한 패배의 위험이 있다.’

남아공월드컵에서 원정 첫 16강을 노린 우리나라는 1차 그리스전 승리가 간절히 필요했습니다. 우려와 달리, 우리나라는 화려한 조직력과 인상적인 플레이로 완벽히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2차 아르헨전에서 4-1 참혹한 패배를 했습니다. 물론, 전술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패전의 이유는 감독과 선수들의 지나친 흥분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아르헨전을 앞두고 허정무 감독은 ‘결코 수비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며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잘 하면 아르헨도 이길 수 있을 거란 상상을 했을 것입니다. 선수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참혹한 패배 후 어떤 선수는 ‘더 이상 축구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정확히 엘리야를 연상시킵니다. 승리할 때는 지나치게 흥분하고 패배할 때는 지나치게 낙심하는 것. 그것은 성숙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 점이 한국 축구가 세계 최강팀들의 이면적인 차이일 것입니다. 

선 줄로 생각할 때 넘어집니다. 흥분에 도취될 때 허를 찔립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푯대를 바라보는 차분함이 필요합니다. 영광은 하나님만 받으셔야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들을 낳게 하라_2011.2.15

(창 30:1, 개역)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언니 레아보다 총명했으며, 남편 야곱의 사랑도 특별했던 라헬에게 유일하게 부족함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자(無子)함이었다. 시대적인 정황을 고려할 때 이는 지금보다 훨씬 깊고 큰 고민과 갈등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라헬은 참다 참다 가끔은 히스테리를 일으켰던 것 같다.

그녀가 야곱에게 신경질적으로 요구한 것은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였다. 역시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던 야곱은 라헬의 말에 화를 냈다. 내가 하나님도 아닌데 어떻게 성태케 하겠느냐고.

그렇다. 라헬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궁극적인 문제는 야곱과 라헬의 문제가 아니며, 그것은 하나님의 문제였다. 그러나 워낙에 답답했기에 라헬은 그렇게 말한 것이다.

짧은 이 사건 속에서 라헬과 같은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우리는 잉태의 문제가 아닐찌라도 나름의 고민과 인내가 있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고, 그 분에 토로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종 우리 역시 정답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 곧잘 인간의 수를 쓰려고 한다. 환경적인 문제를 바라보고,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찾고, 요구하고 옆에 있는 사람들을 쥐어짜곤 한다. 너무나 쉽게, 너무나 자주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르우벤의 눈물_2011.2.15

(창 49:3-4, 개역) 『[3]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야곱이 그의 침상에서 열조에게 돌아가기 전이었다. 각 아들에 대한 축복기도 및 그들을 향한 야곱의 마음에 담아둔 생각들이 흘러나왔다.

르우벤. 그는 장자였다. 가계와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가장 유력한 후보. 그러나 그가 장자라는 육신적인 조건에 비해 그의 자질은 충분하지 못했다. 사실 르우벤의 부족은 우리의 부족이기도 하다.

한편, 르우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면 그도 분명 괜찮은 사람이었다.

(창 37:21-22, 개역)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 생명은 상하지 말자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 아비에게로 돌리려 함이었더라』

요셉의 형들이 한 패가 되어 요셉을 죽이려 할 때 르우벤은 장자로서 동생들의 음모를 중재했다. 그는 요셉의 생명을 소중히 생각했고, 아비 야곱을 생각해서 보다 부드러운 방편을 찾으려 했다. 적어도 그가 다른 동생들과 한 패가 되어 질투에 대한 극단적인 보복조치를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지닌 인격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르우벤에게는 결정적인 한 가지 흠이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침상에 올랐다는 사실로부터 드러나는 것이다. 루우벤은 곁에서 만날 수 있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특별히 나무랄 것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적이었고, 자애로움도 갖췄다. 때로는 신중하게 판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충동적이었다. 평온하다가도 일시에 충동에 사로잡혀 행동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일정한 일관성과 안정감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는 종종 감정적이고, 충동적으로 행동해버림으로써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렸다.

야곱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위광이 초등하고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그 안에 얼마나 안타까움이 묻어나는지 생각해보자. 탁월하지만 그의 충동적인 경향성 때문에 그는 결코 탁월해질 수 없었다. 이는 마치 삼손을 연상시킨다. 성령의 감동으로 큰 일을 이뤘지만 그 역시 충동적인 여성편애로 말미암아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다.

우리는 다재다능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부분에서 매우 탁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탁월함을 빛나게 하는 것은 일관성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상한 가르침

‘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 간 제사장 중 하나가 와서 벧엘에 거하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 것을 가르쳤더라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의 지은 여러 산당에 두되…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왕하 17:28-33)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앗수르왕은 사마리아에 이주정책을 펼쳤습니다. 다수의 이스라엘은 흩어지고, 이방인은 사마리아에 정착해 사마리아인이 생기게 되었죠.
이방인이 사마리아에 정착한 후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자 사자(Lion)가 나타나 몇 사람이 죽는 일이 생겼습니다.(왕하17:25) 그래서 이방에 사로잡혀간 이스라엘 제사장을 다시 초빙해 백성들에게 여호와 경외를 가르치게 했습니다. 결과 사마리아는 오히려 하나님과 우상이 혼재되는 종교적 혼합주의가 가중되고 말았습니다.

가르치기는 여호와 경외를 가르쳤음에도 어째 결과는 종교적 혼합주의가 더 득세하게 된 것일까요? 먼저, 이 제사장들은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망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과연, 그들부터 올바른 여호와 경외를 알고 있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또한, 그들은 망국의 신과 백성들이었습니다. 이방인이 볼 때, 여호와의 위상에 비해 드러나는 능력과 그 백성의 모습은 너무 볼품없이 보였을 것입니다.(당시엔 전쟁에서 이긴 나라의 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섬김.)

종합해볼 때, 제사장들의 가르침은 이상한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무능력한 망국의 신의 위대함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조차 불순종과 우상숭배에 엎드러졌으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결과, 이방인들도 유일신 여호와 신앙을 확신하지 못한 채,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대로 우상도 섬기고, 여호와도 섬겼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 3:1-12) 『[1] 제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제구시(오후3시) 유대인의 기도시간,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을 통해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가난한 앉은뱅이가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지나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에 비해 베드로는 그 앉은뱅이를 특별히 주목했습니다.

그는 앉은뱅이였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고, 무엇인가 활동적인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실제적인 노동에 참여할 수 없었고, 그의 생계를 유지할 능력도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는 사람들의 이끄는 손에 매일 그 미문에 앉아 그저 소망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에 의지할 따름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를 불렀을 때 그는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 앉은뱅이 삶의 두드러지는 특징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미문으로 나옵니다. 그는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그를 부르면 혹 무엇을 얻을까 하여 사람을 올려다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동전인지, 빵 한 조각인지 아님 그 어떤 가치 있는 것인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발견해야 할 놀라운 사실 하나는 베드로의 첫 마디입니다. 베드로는 이 앉은뱅이를 보자마자 그를 특별히 주목했습니다. 그가 구걸을 하는 앉은뱅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이 동전 몇 푼이란 사실도 즉각 알아차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첫 마디는 무엇이었습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였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가 무엇을 구하는지 알았고, 그것이 자신에게는 없는 것이란 사실 조차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실망시키려고 그러는 것인지 ‘우리를 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베드로 옆에 있었다면 우리도 지금 먹을 것이 없고, 쓸 돈도 없는데 그를 왜 부르느냐고 말렸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베드로는 그에게 다가가 ‘우리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앉은뱅이가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기어코 그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만약, 그것이 베드로가 내뱉은 말의 전부였다면 분명 상황은 유쾌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진 말이 모든 상황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가지고 있지 못한 금과 은을 주는 대신 다른 무엇을 주었던 것입니다.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이 거지 앉은뱅이가 일어섰습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는 극적인 흥분에 도취해 어린 망아지처럼 펄쩍펄쩍 뛰며 기쁘고 또 기뻐하며 환희 했던 것입니다. 그는 구걸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을 때보다도 더욱 더 자기 생애 그 어떤 날보다 더 기쁘게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하루였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더 이상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당장 주변에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앉은뱅이의 뛰고 걸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환호성을 들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원래 그가 저 미문 앞에 구걸하던 앉은뱅이란 사실을 사실적으로 직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내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서 솔로몬의 행각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교훈 받을 수 있을까요? 이 사건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베드로의 탁월한 통찰력’이라고 정의 내리고 싶습니다. 물론, 이 사건은 수많은 교훈들과 연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주목하고 싶은 교훈은 바로 베드로의 통찰력입니다. 우리는 앞서 이 사건이 비롯된 연유를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그 앉은뱅이는 구걸하는 자였습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가 요구하는 것과 그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구하기 위해 매일 그 자리에 나와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례히 그를 부르는 자마다 그에게 동전과 빵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베드로는 그 필요를 채워줄 능력은 부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를 주목해보고서는 그를 불러 자신을 바라보라고 주문했던 것입니다. 역시 앉은뱅이는 습관적으로 무엇을 얻을까 기대하며 올려다볼 뿐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위대한 것을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앉은뱅이가 비록 매일 같이 그 자리에서 동전을 구걸하고 있지만 정말 그가 필요한 것, 정말 그가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필요로 하는 것은 두 다리로 일어서서 걷는 것이란 사실을 관통해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놀라운 통찰력이 그 이면의 진실을 관통해 바라본 순간 그는 그에게 줄 동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주목했고 그에게 다가섰던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베드로의 통찰력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통찰력과 그가 가진 것을 주지 않았다면 그 앉은뱅이는 그날도 동전 몇 개를 얻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그 다음날도 그 자리에서 구걸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앉은뱅이가 동전을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어서 걷는 순간 얼마나 환희에 사로잡혀 펄쩍펄쩍 뒤면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또 찬미했는지 생각해볼 때 참으로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못했고, 아무도 통찰하지 못했던 그 앉은뱅이의 참된 갈망을 베드로는 통찰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우리 교사들이 여름성경학교를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불과 일 주일 후 우리는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에 모인 모든 아이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영혼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통찰하고 있어야 되며, 그 사실에서 한 순간도 시선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열심히 분반준비를 하면서 ‘아이들을 위한다’는 목적이 있지만 그것에 대한 날카롭고 예리한 감각이 무뎌진 채 내가 열심히 만든 교구들로 아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분반을 안정시키고, 아이들이 즐거워하며 수업에 참여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선 안 됩니다. 그것이야 말로 부족한 통찰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수단과 방편을 통하든 그것으로 말미암아 정말 저 아이의 영혼이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는 그것에 도움이 되려는 맘가짐으로 지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이들을 떠들 것입니다. 아이들은 또 교사들을 피곤하게 하고 지치게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 해서 교사들의 지도를 단순히 사고를 치지 않고, 방해를 하지 않는 것으로 시선을 옮기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그 아이들이 이곳에 온 참된 목적과 그 아이들이 떠들며 반항할지라도 그 영혼의 참된 갈망이 구원이란 진실을 통찰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모든 지도의 목적과 방향과 정신 안에 ‘영혼 구원’이란 참 목적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 하나의 사건이 불러올 파장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당장 그 분반 안에서 선생님과 다른 아이들이 술렁일 것입니다. 분반교사가 정말 모든 노고에 위로와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피곤을 씻어내는 즐거움을 누릴 것입니다. 이 뿐 아닙니다. 이 파장이 확대되면 그 아이가 있는 교회와 가정, 학교에서 파장이 나타날 것입니다. 교회학교가 그 아이의 구원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다른 아이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부러워할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기뻐하는 자녀의 모습에 기이히 여길 것입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달라져 돌아온 친구의 모습에 학교에서 친구들이 기이히 여길 것입니다. 이 모든 현상으로 인해 그 주변에서 또 다른 전도의 기회가 열어질 수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뛰고 환호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솔로몬 행각에 사람들이 모여들자 베드로는 그들에게 전도할 기회를 얻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마지막 우리가 나눌 교훈을 위해 다음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이 사건의 파장으로 사람들이 솔로몬 행각에 몰려왔습니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다름 아닌 ‘저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가 일어섰다. 그리고 저기 저 두 사람이 그런 일을 했다!’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현상에 대해 주목하는 방식이 이러하다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사람들은 ‘사람의 위대함’에 주목합니다. 얼마 전, 부산에서 여자아이 성폭행 살해사건으로 김길태란 용의자가 검거되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은 ‘김길태’에 주목했습니다. 그가 저지른 잔혹함을 놓고 그에 대해 언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런 부류의 사건들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어떤 사회적인 문제나 현실의 문제 및 그런 사건들을 일으키는 부정적인 영향 등에 대한 보다 신중하고 중요한 통찰과 파악에는 소홀합니다. 단지 ‘김길태’만 유명해지고, 회자될 뿐입니다. 그 사람이 그 죄를 지었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만 입씨름을 벌이며, 침을 튀깁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주목하는 방식입니다. 또는, 김연아가 스케이팅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동계올림피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하면 모두 김연아에 주목합니다. 그가 그 영광을 얻기까지 어떤 수고와 어려움과 시련과 눈물을 흘렸는지는 크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그건 뒷켠에 있는 것입니다. 당장 사람들은 그녀가 가진 외모의 아름다움과 그녀가 이룬 업적을 놓고 김연아란 그 사람에게 감탄합니다. 그녀를 위해 뒤에서 누가 어떻게 얼만큼 어떤 수고와 공로를 뒷받침 했는지 주목하지 않습니다. 김연아만 있으면 모든 것이 충분합니다. 곳곳에서 그녀를 초대합니다. cf에서 그녀의 미모와 그녀의 상품가치를 측정해 자기 상품을 팔기 위해 활용합니다. 오직 그녀만 주목 받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람들이 주목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현상을 통해 보다 깊은 통찰과 교훈과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무엇을 찾아보려고 하기 보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에 더 주목하며, 사람에게 주목하길 좋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베드로가 취한 방법은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즉시 그들이 주목하는 방식에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예, 그렇습니다. 그 놀라운 기적은 베드로와 요한의 능력과 실력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이 베드로와 요한의 신기한 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성전에 모여있으면서 말입니다. 또한, 사람의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잊고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 3: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여름성경학교를 위해 분반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서로의 능력에 감탄합니다. 다양한 개성과 다양한 장점과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이 아니고서는 그것을 해낼 수 없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켜 주시기 전까지는 그가 앉아서 일어설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준비하는 과정에서만 국한되지 않을 것입니다. 일주일 뒤, 저기 갈릴리수양관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울산교회 선생님들이 교사들이 준비한 것들에 기대 이상이란 반응을 혹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 아이들이 그런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디어와 노고와 준비된 능력과 실력에 감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베드로의 방식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그들의 왜곡된 관점을 교정해주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사람을 주목하는데 익숙하다는 방식에서 하나님을 주목하는 방식으로 그 관점을 바로잡아주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또, 우리가 바로잡아주어야 할 관점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관점입니다. 비록 여름성경학교가 아이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준비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아이들은 전혀 그런 참 목적을 충분히 이해하고, 숙지하지 않고 참석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정기적인 행사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아이들의 잘못된 관점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이곳에 모인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한 관점을 지도해주어야 합니다. 어떤 아이들은 3박 4일을 지나는 동안 또 다른 대상에 초점을 옮기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미모와 유머능력, 선생님의 직업이나 나이, 선생님의 결혼여부, 애인의 여부 등. 또 다른 친구들에게 관심을 돌리기도 합니다. 그 모든 왜곡된 관심과 시각을 교정해주는 작업을 우리 선생님들이 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러한 관점의 교정을 한 후 본격적인 전도설교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의 첫째 조건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사들도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단순히 참석하고, 교사의 흥미로운 분반에 흥미만 느끼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아이들에게 전달되는 말씀의 효과가 반감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직시하고 아이들의 관점과 시선을 계속해서 성경과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되도록 해줘야 합니다. 그랬을 때 효과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교정으로 교사 개개인의 관점도 교정해야 됩니다. 아이들과 씨름하는 동안 아이들의 영혼구원이라는 목적에 대한 개명된 시각이 흐릿해집니다. 어서 마치고 쉬고 싶어집니다. 마치면 서둘러 애들을 부모님께 보내버리고 저녁엔 다른 교사들과 어울려 매점에서 수박화채를 먹고, 형제자매가 어울려 교제할 것에 대한 기대와 즐거움에 관점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그런 유혹에서 우리 스스로 시각을 아이들의 영혼구원으로 집중시켜야 할 것입니다. 마치면 간단한 교제와 필요한 허기를 채운 후 속히 숙소로 돌아와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내일 분반을 위해 또 효과적인 분반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왜 수박화채에 주목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통해 일어날 구원의 역사는 반감될 것입니다. 3박 4일 동안, 아이들의 영혼 구원 외에 별다른 것에 집중하지 않기로 다짐합시다!

이 모든 교사의 올바른 목적과 관점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통해 일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실제 일하신 하나님을 만나길 기대합니다. 저 역시 상담교사로 참석하면서 귀중하게 쓰임 받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상담말씀과 자료를 다시 재검토하고, 자료를 편집하고 있습니다. 제가 맡은 봉사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행 14: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사도들이 말씀을 증거했지만 그 말씀을 증거하는 주체는 바로 주님이었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통해 친히 주님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선생님들께서 분반수업을 통해 성경에 대한 아이들의 이해와 관심과 반응을 더욱 돈독히 할 수 있었다면 그 모든 것이 주님께서 친히 선생님 여러분을 통해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행 21: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그리고 다시 김해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내 봉사를 통해 하신 일을 간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참 기쁨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 위에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