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목적을 상실한 롯_2011.03.21  


(창 13:9-12, 개역)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삶의 터전을 옮긴 아브람. 당시가 씨족사회였음을 감안할 때 그것은 타 부족간의 배타성에 의해 칼부림도 날 수 있었으므로 목숨을 담보로 한 여정이라 할 수도 있었다. 그때 롯은 삼촌 아브람과 함께 위대한 여행을 시작했다. 그것은 롯 역시 하나님을 따라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롯의 결말은 왜 그토록 서러워진 것일까?

가나안에 정착했고 시간은 흘렀다. 아브람과 롯은 물질적으로도 매우 풍요로워졌다. 그들의 목축사업은 거대해졌고, 심지어 일정한 범주 안에서 함께 거주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시험이 왔다. 아브람은 롯에게 서로의 가계를 따로 세울 것을 권했다. 이제 롯은 독립할 때가 온 것이다.

아브람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부여하자 롯은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봤다. 바로 거기서부터 롯이 바라보는 삶의 방향은 바뀌고 있었다. 그가 눈을 들어 본 곳은 하늘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소유한 가축을 기를 수 있는 땅이었다. 그는 전혀 그의 갈 길을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그가 요단에서 소알까지 바라본 이유는 목축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여호와의 동산이 보였다. 위대한 하나님의 동산 말이다. 그러나 이내 그것은 또 애굽땅과도 같아 보였다. 풍요로우나 영적으로는 죽은 땅 말이다. 어째서 여호와의 동산과 애굽의 땅이 서로 일치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적어도 이제 롯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훌륭한 착시현상이었다. 육적인 것이 영적인 것으로 보였다. 영적인 것이 육적인 것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그렇게 롯의 삶의 목적은 변해가고 있었다. 그의 삶의 목적이 달라졌다는 사실은 그가 소돔까지 그 장막을 옮겨갔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롯, 그는 애초에 아브람과 함께 하나님을 따라 나섰던 사람이다. 그때 그의 목적은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가나안에서 부요해진 그는 차츰 그의 목축사업을 유지하고 그의 가계를 세우는 것에 중요성을 더해갔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제안하던 그 날 롯의 삶의 목적은 사실상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가계를 세우는 것이었으며, 그의 가축을 유지하는 것이 되어 있었다. 롯은 삶의 목적을 상실했으며, 그것을 소돔에서 모든 소유를 불 아래서 잃어버릴 때까지 되찾지 못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불 가운데 얻은 구원이라고 말한다.

우리 삶의 목적은 여전히 하나님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인가 아니면 죽은 하나님인가. 혹 내 삶의 목적이 되는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은 아니신가. 내 삶의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은 왜 그리도 추상적인 것인가. 내 삶의 목적이 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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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로 올라가며_2011.03.15
(창35:9, 개역)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야곱이 외삼촌 라반이 거주하던 밧단아람에서 20년 만에 나왔다. 그는 20년 동안 철저히 훈련을 받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내와 많은 소유를 이끌고 무사히 밧단아람을 나왔던 그는 얍복강에서 형 에서의 위험을 극복하고 세겜으로 이주해 정착한다.

이제 어엿한 독립한 가정으로 재기를 꿈꾸던 그는 세겜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접하게 된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의 처녀들을 보러 나갔다가 세겜족장의 아들 하몰에게 강간당한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은 잔꾀를 부려 하몰 일가를 몰살시킨다.

그리고 그 때 야곱은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야곱은 집안 모든 사람들이 소유한 이방 신상을 상수리 나무 아래에 뭍고, 의복을 갈아입히고 벧엘로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만난다.

그런 야곱에게 성경은 그가 세겜이 아닌 밧단아람에서 벧엘로 돌아왔다고 말한다. 그렇다. 야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야곱의 인생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에게 있어 야곱의 여정에 세겜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벧엘로 직행하길 원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벧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창 31:13, 개역)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우리에게도 각자의 벧엘이 있다. 벧엘의 하나님은 나의 벧엘에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너무나 자주, 때로는 너무나 멀리 벧엘이 아닌 세겜으로 나아가 거기에 머물고 만다. 우리는 내 인생 여정을 가면서 정말 하나님께 묻고 있을까? 나의 벧엘이 어디냐고. 내 직장, 내 가정, 내 봉사 등등 모든 것에서 하나님이 계시는 벧엘을 말이다.

다시 벧엘로 올라가자. 그곳에 나의 하나님이 계신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나를 만나주실 것이다. 모든 구부러진 것이 바로잡아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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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왕상19:3-4)

북이스라엘 7대 왕 아합은, 지독한 바알숭배자 아내 이세벨의 치마폭에 휘둘린 무능력한 왕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 450인과 대결을 벌입니다. 이 유명한 갈멜산 대결에서 엘리야의 하나님은 물에 젖은 제단을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450인의 바알선지자를 기손 시내에서 모두 죽입니다.

의기양양해진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아합왕을 배웅하고는 오히려 아합왕보다 먼저 이스르엘 궁궐 어귀까지 달려갔습니다.(왕상18:46) 왜요? 그는 이제 이세벨이 항복할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분노한 이세벨은 오히려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왕상19:2) 결과 엘리야는 도망하여 로뎀 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전혀 예상치 않은 위협적 반응에 당황했던 것입니다. 이후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붓고 역사의 뒤로 사라집니다. 엘리야의 의기양양함과 역습에 당황해 지나치게 낙심했던 것이 그의 사역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교훈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와 같을 것입니다. ‘승리 뒤에는 참혹한 패배의 위험이 있다.’

남아공월드컵에서 원정 첫 16강을 노린 우리나라는 1차 그리스전 승리가 간절히 필요했습니다. 우려와 달리, 우리나라는 화려한 조직력과 인상적인 플레이로 완벽히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2차 아르헨전에서 4-1 참혹한 패배를 했습니다. 물론, 전술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패전의 이유는 감독과 선수들의 지나친 흥분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아르헨전을 앞두고 허정무 감독은 ‘결코 수비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며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잘 하면 아르헨도 이길 수 있을 거란 상상을 했을 것입니다. 선수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참혹한 패배 후 어떤 선수는 ‘더 이상 축구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정확히 엘리야를 연상시킵니다. 승리할 때는 지나치게 흥분하고 패배할 때는 지나치게 낙심하는 것. 그것은 성숙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 점이 한국 축구가 세계 최강팀들의 이면적인 차이일 것입니다. 

선 줄로 생각할 때 넘어집니다. 흥분에 도취될 때 허를 찔립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푯대를 바라보는 차분함이 필요합니다. 영광은 하나님만 받으셔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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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낳게 하라_2011.2.15

(창 30:1, 개역)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언니 레아보다 총명했으며, 남편 야곱의 사랑도 특별했던 라헬에게 유일하게 부족함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자(無子)함이었다. 시대적인 정황을 고려할 때 이는 지금보다 훨씬 깊고 큰 고민과 갈등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라헬은 참다 참다 가끔은 히스테리를 일으켰던 것 같다.

그녀가 야곱에게 신경질적으로 요구한 것은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였다. 역시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던 야곱은 라헬의 말에 화를 냈다. 내가 하나님도 아닌데 어떻게 성태케 하겠느냐고.

그렇다. 라헬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궁극적인 문제는 야곱과 라헬의 문제가 아니며, 그것은 하나님의 문제였다. 그러나 워낙에 답답했기에 라헬은 그렇게 말한 것이다.

짧은 이 사건 속에서 라헬과 같은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우리는 잉태의 문제가 아닐찌라도 나름의 고민과 인내가 있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고, 그 분에 토로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종 우리 역시 정답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 곧잘 인간의 수를 쓰려고 한다. 환경적인 문제를 바라보고,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찾고, 요구하고 옆에 있는 사람들을 쥐어짜곤 한다. 너무나 쉽게, 너무나 자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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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우벤의 눈물_2011.2.15

(창 49:3-4, 개역) 『[3]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야곱이 그의 침상에서 열조에게 돌아가기 전이었다. 각 아들에 대한 축복기도 및 그들을 향한 야곱의 마음에 담아둔 생각들이 흘러나왔다.

르우벤. 그는 장자였다. 가계와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가장 유력한 후보. 그러나 그가 장자라는 육신적인 조건에 비해 그의 자질은 충분하지 못했다. 사실 르우벤의 부족은 우리의 부족이기도 하다.

한편, 르우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면 그도 분명 괜찮은 사람이었다.

(창 37:21-22, 개역)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 생명은 상하지 말자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 아비에게로 돌리려 함이었더라』

요셉의 형들이 한 패가 되어 요셉을 죽이려 할 때 르우벤은 장자로서 동생들의 음모를 중재했다. 그는 요셉의 생명을 소중히 생각했고, 아비 야곱을 생각해서 보다 부드러운 방편을 찾으려 했다. 적어도 그가 다른 동생들과 한 패가 되어 질투에 대한 극단적인 보복조치를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지닌 인격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르우벤에게는 결정적인 한 가지 흠이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침상에 올랐다는 사실로부터 드러나는 것이다. 루우벤은 곁에서 만날 수 있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특별히 나무랄 것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적이었고, 자애로움도 갖췄다. 때로는 신중하게 판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충동적이었다. 평온하다가도 일시에 충동에 사로잡혀 행동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일정한 일관성과 안정감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는 종종 감정적이고, 충동적으로 행동해버림으로써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렸다.

야곱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위광이 초등하고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그 안에 얼마나 안타까움이 묻어나는지 생각해보자. 탁월하지만 그의 충동적인 경향성 때문에 그는 결코 탁월해질 수 없었다. 이는 마치 삼손을 연상시킨다. 성령의 감동으로 큰 일을 이뤘지만 그 역시 충동적인 여성편애로 말미암아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다.

우리는 다재다능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부분에서 매우 탁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탁월함을 빛나게 하는 것은 일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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