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주님의 종

(갈 1:10, 개역)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우리는 어떤 소유물을 마련할 때 일차적으로는 경제적인 수준을 고려할 것이다. 그리고 조금의 여유만 있다면 가능한대로 좀 더 나은 것을 고르고 싶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는 종종 자기의 편리함이나 이기심도 작용하며 때로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개 무엇이 됐든 이왕이면 좀 더 나아 보이고, 있어 보이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고,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다.

모든 행위에는 어떤 동기와 이유, 목적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직한가 아니면 사람 앞에 정직한가. 사실 일상적인 사안들의 대부분 죄 문제는 올바른 동기와 그릇된 동기로부터 판가름난다. 적절한 때와 필요에 의해 소유물을 구입한다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평판을 고려하고, 좀 더 돋보이기 위해 선택하느냐 아니면 좀 더 검소하고 좀 더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부족한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죄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자주 찬양한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배운다. ‘주를 위해 살리라.’ 그것이 모든 찬양과 말씀의 궁극적인 푯대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찬양부르기 좋아하고, 말씀 듣기 좋아하면서 실제 생활에서는 사회적인 명성과 평판을 신중하게 고려하고, 사람 앞에서 높아지고 대우 받고 인정받기 위한 허영심과 명예욕에 쉼 없이 시험 당한다. 그것이 우리의 슬픔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남보다 더 갖춘 것이 있을지라도 겸손할 줄 알고 감출 줄 안다면 그것은 훨씬 아름다울 것이다. 밝힌다는 것은 일종의 자랑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낙심과 부러움에 잠기게 하는 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하룻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해야 한다.

내 어머니는 예순이시다. 가끔 내가 어머니께 연세도 있으시니 이제 좀 좋은 차를 타셔도 되지 않겠느냐고 권하면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허영심 부리는 거 제일 싫어한다.’ 육신적으로는 내 어머니가 좀 있어보이게 해다니길 원하면서도 그런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 참 어머니가 존경스럽다. 정말 내가 배울 어머님의 미덕은 ‘겸손과 검소함’이다. 사람 앞에게 아닌 주님 앞에 계신 그 어머님의 모습. 그것이 주님의 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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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 받은 믿음의 진수_2011.3.30  


(창 22:9-12, 개역) 『[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한마디로 정의해 ‘훈련 받은 믿음의 진수’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험받는 아브라함의 견고한 믿음을 칭송함과 동시에 그가 이 과정에서 아들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 앞에 깊이 고뇌했을 것이란 가설을 설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믿음을 칭송하는데는 동의하지만 그가 갈등했을 것이란 가설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시험을 받는 이 장면에만 집중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동안 아브라함이 겪어온 시험과 연단, 실패와 회복을 되새겨봐야 한다. 덧붙여 그가 어떻게 이삭을 약속받았으며 그가 어떻게 이삭을 얻었었는지 일련의 과정들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아브라함. 그는 일찍이 하나님의 음성을 좇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긴 거리를 여행했다. 그는 동족을 떠나 타 부족들 안에 거처를 옮길 만큼 용감했다. 그러나 그가 정작 가나안에서는 얼마나 치졸하게 굴었는지도 안다. 그는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사실 그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아내를 누이라 속였으며, 좌절을 맛봤다. 그리고 전쟁 때에 롯을 구출해주었다. 그는 다시 그랄에서 아내를 누이라 속이므로 두 번째 동일한 실수를 범했고, 다시금 수치를 당했다. 정말 그건 수치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약속하셨을 때, 그는 이스마엘이나 살게 해달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그건 사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비웃었다. 물론, 그건 믿음이 아니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당연한 이치였다. 이미 이스마엘은 준수한 소년이었고, 도저히 잉태를 할 수 있는 생리적인 조건의 몸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나치게 늙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이름을 바꾸고, 할례를 하고 난 후 어느 시점에 이르러 사라가 잉태를 했다.

이삭은 유일하게 이미 개명(改名)하고 할례를 하고 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를 통해 태어난 아들이었다. 아마, 이는 이삭의 구별된 출생을 의미할 것이다.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아브라함 100세에 하나님이 약속한 아들을 본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이 받았을 믿음의 깊은 교훈과 뿌리 깊은 반성과 회개는 어떤 것이었을까! 분명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크나큰 교훈이자 반성의 계기이자 견고한 믿음의 동기부여가 됐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아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처음 언약은 무엇이었는가. 아브라함은 생각했을 것이다. 이삭을 통해 열국의 아비가 된다고 했다. 이삭을 통한 그의 후손이 바다의 모래처럼 많을 것이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라보며 처음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약속하신 사실을 되새겼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처음 우리가 다루고자 했던 주제로 돌아가보자. 그것은 창세기 22장에 있다.

이삭이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소년이 되었다. 한 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다시 현현하셨고, 뜻밖의 명령을 하달하신다. 그 명령은 ‘이제 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쳐라.’이다. 그때 아브라함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성경은 분명하게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모리아로 향했다고 말씀한다.

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났을까?  그것은 순종하려는 단호한 의지의 표상이다. 덧붙여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조금도 두려워히지도, 염려하지도, 갈등하지도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처음 아브라함은 부족한 믿음으로 인한 많은 실수와 좌절을 경험했다. 그의 믿음의 부족의 최고봉은 바로 이삭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정말 100세에 이삭을 얻었던 것이다. 그날 그 당시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깊은 각성과 변화를 경험했다. 아마도 그 경험은 아브라함 믿음의 평생에 있어 가장 견고한 터를 마련해주었을 것이다. 그런 믿음의 경험을 얻은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아이고, 이제 내 아들 죽네~’라고 슬퍼 했을까? 아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처음 이삭을 놓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했을 것이다. ‘네 아들 이삭을 통해 네 씨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리라.’ 즉, 아브라함은 절대 이삭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히 11:17-19, 개역)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렇다. 바로 이 히브리서가 아브라함의 숨은 믿음의 근원을 밝혀준다. 아브라함은 절대 이삭이 죽지 않을 것일 믿었다. 자기가 번제로 잡아 바치면 하나님이 다시 살려줄 것을 확신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고, 두려워지도 않았으며,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이제 내가 믿음으로 행하나이다 보소서.’라는 단호한 의지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누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로 향하는 아브라함을 갈등과 고뇌에 사로잡힌 불신자로 묘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추측은 오히려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완전한 아브라함의 믿음에 그대로 투영시킴으로 범하는 오류일 뿐인 것이다.

이제,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해 묶어 칼을 빼들었다. 그때 천사가 소리쳤다. 'STOP!!'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 하셨다.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시험을 견고한 믿음으로 통쾌하게 이겨낸다. 바로, 가나안으로 와서부터 여러 환란과 좌절과 시험. 때로는 불신의 부끄러움까지 겪어가며 훈련된 아브라함의 견고한 믿음의 진수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이것이 바로 훈련 받은 믿음의 진수인 것이다.

한편, 이 모리아 산에서의 사건은 결국 아브라함의 믿음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삭을 번제로 잡을 목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냥 쇼였다. 왜 그런 쇼를 하신 것일까? 그 의도는 순전히 훈련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진수가 무엇인지 우리로 하여금 바라보고 교훈을 받도록 하기 위하심이다. 정말 번제로 잡지도 않을 건데 뭐 하러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까지 오르게 하셨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믿음은 결국 온전한 행위를 통해 증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종종 그 진정성을 확신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우리의 믿음은 참된 경외함이 아니며 참된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근처도 못 갈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훈련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참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결국 완전한 행위로 증거된다는 것을 일깨워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믿음의 푯대란 것이다.

아브라함의 견고한 믿음의 이유는 1차적으로는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믿음이란 것이며, 하나님의 변치 않는 신실하심을 경험함과 동시에 자신의 뿌리 깊은 불신앙을 발견하는 과정을 통한 믿음의 깊은 각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궁극적으로 ‘언약의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약속하신 바에 너무나 신실하신 하나님을 체험했던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토대도 바로 그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믿음의 훈련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보잘 것 없는 믿음에 대한 각성과 통감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우리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언약과 신실하심을 있는 그대로 믿는 믿음의 견고함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절대적으로 확신했기에 자신이 이삭을 죽이면 살려줄 것까지 믿고 칼을 들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낙심치 않고 용감할 수 있는 동기는 기록된 말씀대로 그 약속대로 믿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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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호와로 인하여_2011.03.21  


(합 3:17-18, 개역)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것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 인용되는 구절이 여기 하박국 3장 17-18절이다. 그는 아무런 물질적인 소출이 없어도 오직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일까? 오늘은 이 사람이 가진 것을 통해 잠재력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어 보자.

이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는 이미 많은 것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가 소유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먼저, 그는 무화과나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열매는 모자랐다. 또, 그는 포도나무가 있었으나 열매는 전무한 수준이었다. 또, 그는 감람나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소출이 별다르지 않았다. 한편, 그는 밭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밭에는 식물이 없었다. 또, 그는 양우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양은 없었다. 또, 그는 외양간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소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있었다. 자기 영혼을 구원하신 기쁨의 하나님을.

그러므로 그가 소유한 것을 나열하면 이러하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 밭, 양우리, 외양간 즉, 비록 현재 그는 언뜻 볼 때 모든 것에서 충분한 소출을 얻지 못하는 시골촌뜨기처럼 비춰지고 있지만 사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갖춘 사람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아무리 많은 양을 얻고, 소를 얻더라도 양우리가 없고 외양간이 없다면 그는 양과 소를 되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돈이 있어서 포도열매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많이 사먹을 수는 있겠지만 그 사람이 나무를 소유하기 전까지는 매년 사먹어야만 할 것이다.

이에 반해 세 종류의 유실수와 두 종류의 목축이 가능한 배경을 갖추고 있는 주인공은 언제든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당장은 소출 없이 미약해보였지만 무엇보다 그가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모습, 그의 신앙의 아름다움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소출을 주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은 주실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볼까? 당장 우리 이목을 사로잡는 보기 좋은 열매들과 넘쳐나는 양과 소를 보고 싶어 하진 않은가? 현재 소출의 많고 적음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있진 않은가? 숨은 잠재력을 보지 못하고 있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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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목적을 상실한 롯_2011.03.21  


(창 13:9-12, 개역)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삶의 터전을 옮긴 아브람. 당시가 씨족사회였음을 감안할 때 그것은 타 부족간의 배타성에 의해 칼부림도 날 수 있었으므로 목숨을 담보로 한 여정이라 할 수도 있었다. 그때 롯은 삼촌 아브람과 함께 위대한 여행을 시작했다. 그것은 롯 역시 하나님을 따라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롯의 결말은 왜 그토록 서러워진 것일까?

가나안에 정착했고 시간은 흘렀다. 아브람과 롯은 물질적으로도 매우 풍요로워졌다. 그들의 목축사업은 거대해졌고, 심지어 일정한 범주 안에서 함께 거주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시험이 왔다. 아브람은 롯에게 서로의 가계를 따로 세울 것을 권했다. 이제 롯은 독립할 때가 온 것이다.

아브람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부여하자 롯은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봤다. 바로 거기서부터 롯이 바라보는 삶의 방향은 바뀌고 있었다. 그가 눈을 들어 본 곳은 하늘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소유한 가축을 기를 수 있는 땅이었다. 그는 전혀 그의 갈 길을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그가 요단에서 소알까지 바라본 이유는 목축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여호와의 동산이 보였다. 위대한 하나님의 동산 말이다. 그러나 이내 그것은 또 애굽땅과도 같아 보였다. 풍요로우나 영적으로는 죽은 땅 말이다. 어째서 여호와의 동산과 애굽의 땅이 서로 일치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적어도 이제 롯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훌륭한 착시현상이었다. 육적인 것이 영적인 것으로 보였다. 영적인 것이 육적인 것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그렇게 롯의 삶의 목적은 변해가고 있었다. 그의 삶의 목적이 달라졌다는 사실은 그가 소돔까지 그 장막을 옮겨갔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롯, 그는 애초에 아브람과 함께 하나님을 따라 나섰던 사람이다. 그때 그의 목적은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가나안에서 부요해진 그는 차츰 그의 목축사업을 유지하고 그의 가계를 세우는 것에 중요성을 더해갔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제안하던 그 날 롯의 삶의 목적은 사실상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가계를 세우는 것이었으며, 그의 가축을 유지하는 것이 되어 있었다. 롯은 삶의 목적을 상실했으며, 그것을 소돔에서 모든 소유를 불 아래서 잃어버릴 때까지 되찾지 못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불 가운데 얻은 구원이라고 말한다.

우리 삶의 목적은 여전히 하나님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인가 아니면 죽은 하나님인가. 혹 내 삶의 목적이 되는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은 아니신가. 내 삶의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은 왜 그리도 추상적인 것인가. 내 삶의 목적이 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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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로 올라가며_2011.03.15
(창35:9, 개역)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야곱이 외삼촌 라반이 거주하던 밧단아람에서 20년 만에 나왔다. 그는 20년 동안 철저히 훈련을 받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내와 많은 소유를 이끌고 무사히 밧단아람을 나왔던 그는 얍복강에서 형 에서의 위험을 극복하고 세겜으로 이주해 정착한다.

이제 어엿한 독립한 가정으로 재기를 꿈꾸던 그는 세겜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접하게 된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의 처녀들을 보러 나갔다가 세겜족장의 아들 하몰에게 강간당한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은 잔꾀를 부려 하몰 일가를 몰살시킨다.

그리고 그 때 야곱은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야곱은 집안 모든 사람들이 소유한 이방 신상을 상수리 나무 아래에 뭍고, 의복을 갈아입히고 벧엘로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만난다.

그런 야곱에게 성경은 그가 세겜이 아닌 밧단아람에서 벧엘로 돌아왔다고 말한다. 그렇다. 야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야곱의 인생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에게 있어 야곱의 여정에 세겜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벧엘로 직행하길 원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벧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창 31:13, 개역)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우리에게도 각자의 벧엘이 있다. 벧엘의 하나님은 나의 벧엘에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너무나 자주, 때로는 너무나 멀리 벧엘이 아닌 세겜으로 나아가 거기에 머물고 만다. 우리는 내 인생 여정을 가면서 정말 하나님께 묻고 있을까? 나의 벧엘이 어디냐고. 내 직장, 내 가정, 내 봉사 등등 모든 것에서 하나님이 계시는 벧엘을 말이다.

다시 벧엘로 올라가자. 그곳에 나의 하나님이 계신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나를 만나주실 것이다. 모든 구부러진 것이 바로잡아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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