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팍한 성공이 가져다 준 오만_2011.04.09.

(창 16:4, 개역)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고대로 갈수록 여자에게 있어 잉태와 생산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자 임무였다. 그러므로 무자(無子)하다는 것은 여인에게는 수치임과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는 어떤 죄로 인한 징벌로 해석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아무쪼록 이는 무자(無子)한 여자에게는 안팎으로 곤혹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사라역시 무자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남편 아브라함과 더불어 살았지만 그녀에게는 희한하게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이는 아브라함의 가계(家繼)에서 보자면 단순히 묵인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라는 자신의 부족으로 인해 발생되는 결손을 보충하기 위해 인간적인 방편을 선택했다. 이는 애굽 여종 하갈을 통해 대신 아들을 얻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주효했다. 여러 번의 시도가 필요 없이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들을 잉태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집안의 가계(家繼) 문제는 해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또 그것은 다른 문제의 시작이란 것을 이내 알게 해주었다. 하갈이 득남하기 전까지 비록 사라에게 아들은 없었지만 그것이 하갈의 비웃음을 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하갈이 주인의 아들을 얻게 되자 여주인 사라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미묘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엔 여종으로 사라의 수하에서 그저 고분고분히 시키는 일에 순종하고, 굽신거렸던 하갈이 이제는 주인의 아들 젖을 먹여야 한다고 시키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고, 방안에 앉아 젖을 물리며 사라의 부름에 그다지 적극적이고 공손히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틈만 나면 아들 핑계를 대며 사라의 수하에 복종하는 것보다 주인의 귀한 아들을 양육하는 것이 더 중요한 임무라고 둘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라는 부애가 나기 시작했고, 차츰 그것은 어느 정도의 히스테리적인 경향이 되기도 했던 것 같다. 결국 사라는 하갈을 학대함으로 참다 못한 하갈이 사라의 수하에서 도망쳤기 때문이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얻음으로 사라를 멸시했다. ‘주인 아브라함의 대를 이을 아들도 못낳는 여주인이라니... 나 봐. 몇 번 아닌데도 바로 주인님의 아들을 잉태했잖아. 이제 이 하갈을 통해 난 이스마엘이 주인님의 대를 이을 아들이 되는 거라구!’

그러나 그 아들 이스마엘은 그토록 위대한 아들이었을까? 갈라디아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갈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비록 하갈은 아브라함의 첫 아들을 생산했지만 사실 그 아들은 언약의 아들이 아니었으며, 육신에 속한 자를 표상하고, 율법을 상징하는 것에 불과했다. 참된 아브라함의 후손, 아브라함의 믿음의 혈통을 이을 아들은 여전히 사라의 태를 통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갈은 보다 크고 넓은 하나님의 계획과 자신의 근본적인 처지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고 오만과 방자함에 빠졌던 것이다. 여주인 사라의 태를 통해 얻을 이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처지임을 알지 못한 채 얄팍한 성공에 마음이 높아져 여주인을 멸시한 하갈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 하갈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교훈하는 바가 크다. 우리 역시 얄팍한 성공에 도취되어 자기를 높이고 오만방자하게 굴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보다 무엇이라도 하나 좀 더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재능이든 육신적인 배경이나 조건이든 좀 나은 것이 있다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내 정도 수준이면 이런 이런 정도는 요구할 수 있지. 이런 정도의 밸류는 갖춘 것이 필요하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야 말로 하갈의 오만함과 일치한다.

하갈이 아무리 사라를 멸시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라는 여전히 여주인이란 사실이며, 하갈은 여전히 사라의 수하에 있는 여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또한, 아무리 하갈이 우선적으로 이스마엘을 잉태했을지라도 여전히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아들이 아니란 사실이다. 그에게는 그 어떤 언약도 약속되어 있지 않다. 단지, 하갈이 오만방자해진 것은 여종의 신분으로 주인의 아들을 여주인 보다 먼저 임신했다는 그 자부심 하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이 여전히 여주인 사라를 통해 아브라함 100세 때 얻을 이삭을 통해 예정되어 있음을 하갈이 알았더라면 과연 하갈이 여주인 사라를 멸시할 수 있었을까?

그러므로 그렇게 크게 하나님 앞에 잘나지도 않았으면서, 육신적으로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으면서 겉으로 보기에 좀 부족해보이는 형제, 자매님이 있다고 그것을 자기 수준에는 안 맞게 생각하고, 멸시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하갈식 오만’에 빠진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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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의 때를 극복하는 법_2011.04.01  


(창 12:10, 개역)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부르심을 받아 위대한 여행을 시작한 아브람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오래지 않아 기근이 찾아왔다. 이는 전혀 예기치 않은 고난이었다. 그 먼 거리를 동족과 모든 혈연을 포기하고 떠나왔건만 고작 기근이라니... 그러므로 아브람은 애굽으로 내려갔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아브람의 선택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고 납득할 것이었다. 그러나 애굽에서 그는 사래를 누이라 속임으로 바로에게 아내를 뺏기고 말았다. 그는 더 큰 시련을 만났던 것이다.

분명, 애굽을 선택한 것은 아브람의 실수요 믿음의 부족이라 생각되면서도 동시에 마치 이것은 아브람을 연단시키려는 하나님의 숨은 의도와 목적이 담겨 있는 것만 같다. 기근을 보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기근을 보내심으로 가나안에 머물러야 되는 아브람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으며, 그로 하여금 애굽으로 내려가야겠다는 의지를 시험하셨다. 그때 아브람은 그 시험에 반응하였다.

(창 16:8-9, 개역) 『[8]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사래가 무자(無子)할 때 하갈은 아브람의 씨를 이을 아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오만방자해졌고, 심지어 사래를 비웃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사래의 질투심과 분노에 불이 붙었고, 그는 사래의 학대를 당하게 됨으로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하갈의 정신적 고통이 견디기 힘들만큼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런 하갈에게 하나님은 비통한 말씀하신다. 다시, 사래의 수하로 돌아가 괴로움을 당하라고 말이다.


앞서의 두 사례가 알려주는 공통된 교훈은 견디기 힘든 괴로움과 고난, 시련과 시험의 때에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란 것이다. (아마, 하나님은 이것을 말씀하고 싶어하실 것이다.) 결론은 고난의 장소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결국 하갈은 사래 밑으로 되돌아갔으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에 사래의 밑에서 내어쫓김을 당했다.(창21:10) 결국 아브람 역시, 애굽에서 가나안의 벧엘로 되돌아와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창13:3-4) 하나님 계신 벧엘이 때로는 기근이 있는 고난의 장소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시험의 때를 우리가 어떻게 보내고 극복해야 할 것인지 배우게 된다. 그것은 피하고 싶은 그 현실을 피하지 않는 것이며, 참고 인내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하나님께서 그만이라고 하실 때까지.

(약 1:12, 개역)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서는 말한다. 시험의 때 그 시험을 이기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참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옳다 인정하신다. 죄의 유혹과 같은 시험은 이겨야할 시험이지만 고난의 시험은 참아야 될 시험이다. 그 시험을 잘 참을 때 하나님께 인정함을 얻고 약속의 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험을 참되 옳다 인정하심을 얻기까지 참아야 하는 것이다.


(약 1:2-4, 개역)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고난의 시험을 참는다는 것은 곧, 고난의 때를 인내함이다. 하나님은 이 고난의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한다. 왜냐하면 이 시험이 인내를 유도하며, 이 인내를 이룰 때 보다 완전하고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즉, 고난 중의 인내는 성숙의 씨앗인 셈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말씀 자체가 곧, ‘인내하라’란 것이다.

하나님은 시험을 허락하신다. 그 시험을 통해 인내함을 배우고, 인내함을 통해 약속된 복을 받으며, 그 인내함을 통해 더욱 온전하게 성숙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험의 때를 극복하는 방법이란 어떤 특별한 진통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내’ 그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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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주님의 종

(갈 1:10, 개역)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우리는 어떤 소유물을 마련할 때 일차적으로는 경제적인 수준을 고려할 것이다. 그리고 조금의 여유만 있다면 가능한대로 좀 더 나은 것을 고르고 싶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는 종종 자기의 편리함이나 이기심도 작용하며 때로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개 무엇이 됐든 이왕이면 좀 더 나아 보이고, 있어 보이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고,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다.

모든 행위에는 어떤 동기와 이유, 목적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직한가 아니면 사람 앞에 정직한가. 사실 일상적인 사안들의 대부분 죄 문제는 올바른 동기와 그릇된 동기로부터 판가름난다. 적절한 때와 필요에 의해 소유물을 구입한다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평판을 고려하고, 좀 더 돋보이기 위해 선택하느냐 아니면 좀 더 검소하고 좀 더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부족한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죄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자주 찬양한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배운다. ‘주를 위해 살리라.’ 그것이 모든 찬양과 말씀의 궁극적인 푯대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찬양부르기 좋아하고, 말씀 듣기 좋아하면서 실제 생활에서는 사회적인 명성과 평판을 신중하게 고려하고, 사람 앞에서 높아지고 대우 받고 인정받기 위한 허영심과 명예욕에 쉼 없이 시험 당한다. 그것이 우리의 슬픔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남보다 더 갖춘 것이 있을지라도 겸손할 줄 알고 감출 줄 안다면 그것은 훨씬 아름다울 것이다. 밝힌다는 것은 일종의 자랑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낙심과 부러움에 잠기게 하는 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하룻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해야 한다.

내 어머니는 예순이시다. 가끔 내가 어머니께 연세도 있으시니 이제 좀 좋은 차를 타셔도 되지 않겠느냐고 권하면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허영심 부리는 거 제일 싫어한다.’ 육신적으로는 내 어머니가 좀 있어보이게 해다니길 원하면서도 그런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 참 어머니가 존경스럽다. 정말 내가 배울 어머님의 미덕은 ‘겸손과 검소함’이다. 사람 앞에게 아닌 주님 앞에 계신 그 어머님의 모습. 그것이 주님의 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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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 받은 믿음의 진수_2011.3.30  


(창 22:9-12, 개역) 『[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한마디로 정의해 ‘훈련 받은 믿음의 진수’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험받는 아브라함의 견고한 믿음을 칭송함과 동시에 그가 이 과정에서 아들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 앞에 깊이 고뇌했을 것이란 가설을 설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믿음을 칭송하는데는 동의하지만 그가 갈등했을 것이란 가설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시험을 받는 이 장면에만 집중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동안 아브라함이 겪어온 시험과 연단, 실패와 회복을 되새겨봐야 한다. 덧붙여 그가 어떻게 이삭을 약속받았으며 그가 어떻게 이삭을 얻었었는지 일련의 과정들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아브라함. 그는 일찍이 하나님의 음성을 좇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긴 거리를 여행했다. 그는 동족을 떠나 타 부족들 안에 거처를 옮길 만큼 용감했다. 그러나 그가 정작 가나안에서는 얼마나 치졸하게 굴었는지도 안다. 그는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사실 그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아내를 누이라 속였으며, 좌절을 맛봤다. 그리고 전쟁 때에 롯을 구출해주었다. 그는 다시 그랄에서 아내를 누이라 속이므로 두 번째 동일한 실수를 범했고, 다시금 수치를 당했다. 정말 그건 수치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약속하셨을 때, 그는 이스마엘이나 살게 해달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그건 사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비웃었다. 물론, 그건 믿음이 아니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당연한 이치였다. 이미 이스마엘은 준수한 소년이었고, 도저히 잉태를 할 수 있는 생리적인 조건의 몸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나치게 늙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이름을 바꾸고, 할례를 하고 난 후 어느 시점에 이르러 사라가 잉태를 했다.

이삭은 유일하게 이미 개명(改名)하고 할례를 하고 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를 통해 태어난 아들이었다. 아마, 이는 이삭의 구별된 출생을 의미할 것이다.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아브라함 100세에 하나님이 약속한 아들을 본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이 받았을 믿음의 깊은 교훈과 뿌리 깊은 반성과 회개는 어떤 것이었을까! 분명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크나큰 교훈이자 반성의 계기이자 견고한 믿음의 동기부여가 됐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아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처음 언약은 무엇이었는가. 아브라함은 생각했을 것이다. 이삭을 통해 열국의 아비가 된다고 했다. 이삭을 통한 그의 후손이 바다의 모래처럼 많을 것이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라보며 처음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약속하신 사실을 되새겼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처음 우리가 다루고자 했던 주제로 돌아가보자. 그것은 창세기 22장에 있다.

이삭이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소년이 되었다. 한 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다시 현현하셨고, 뜻밖의 명령을 하달하신다. 그 명령은 ‘이제 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쳐라.’이다. 그때 아브라함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성경은 분명하게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모리아로 향했다고 말씀한다.

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났을까?  그것은 순종하려는 단호한 의지의 표상이다. 덧붙여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조금도 두려워히지도, 염려하지도, 갈등하지도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처음 아브라함은 부족한 믿음으로 인한 많은 실수와 좌절을 경험했다. 그의 믿음의 부족의 최고봉은 바로 이삭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정말 100세에 이삭을 얻었던 것이다. 그날 그 당시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깊은 각성과 변화를 경험했다. 아마도 그 경험은 아브라함 믿음의 평생에 있어 가장 견고한 터를 마련해주었을 것이다. 그런 믿음의 경험을 얻은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아이고, 이제 내 아들 죽네~’라고 슬퍼 했을까? 아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처음 이삭을 놓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했을 것이다. ‘네 아들 이삭을 통해 네 씨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리라.’ 즉, 아브라함은 절대 이삭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히 11:17-19, 개역)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렇다. 바로 이 히브리서가 아브라함의 숨은 믿음의 근원을 밝혀준다. 아브라함은 절대 이삭이 죽지 않을 것일 믿었다. 자기가 번제로 잡아 바치면 하나님이 다시 살려줄 것을 확신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고, 두려워지도 않았으며,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이제 내가 믿음으로 행하나이다 보소서.’라는 단호한 의지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누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로 향하는 아브라함을 갈등과 고뇌에 사로잡힌 불신자로 묘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추측은 오히려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완전한 아브라함의 믿음에 그대로 투영시킴으로 범하는 오류일 뿐인 것이다.

이제,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해 묶어 칼을 빼들었다. 그때 천사가 소리쳤다. 'STOP!!'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 하셨다.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시험을 견고한 믿음으로 통쾌하게 이겨낸다. 바로, 가나안으로 와서부터 여러 환란과 좌절과 시험. 때로는 불신의 부끄러움까지 겪어가며 훈련된 아브라함의 견고한 믿음의 진수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이것이 바로 훈련 받은 믿음의 진수인 것이다.

한편, 이 모리아 산에서의 사건은 결국 아브라함의 믿음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삭을 번제로 잡을 목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냥 쇼였다. 왜 그런 쇼를 하신 것일까? 그 의도는 순전히 훈련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진수가 무엇인지 우리로 하여금 바라보고 교훈을 받도록 하기 위하심이다. 정말 번제로 잡지도 않을 건데 뭐 하러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까지 오르게 하셨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믿음은 결국 온전한 행위를 통해 증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종종 그 진정성을 확신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우리의 믿음은 참된 경외함이 아니며 참된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근처도 못 갈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훈련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참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결국 완전한 행위로 증거된다는 것을 일깨워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믿음의 푯대란 것이다.

아브라함의 견고한 믿음의 이유는 1차적으로는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믿음이란 것이며, 하나님의 변치 않는 신실하심을 경험함과 동시에 자신의 뿌리 깊은 불신앙을 발견하는 과정을 통한 믿음의 깊은 각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궁극적으로 ‘언약의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약속하신 바에 너무나 신실하신 하나님을 체험했던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토대도 바로 그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믿음의 훈련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보잘 것 없는 믿음에 대한 각성과 통감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우리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언약과 신실하심을 있는 그대로 믿는 믿음의 견고함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절대적으로 확신했기에 자신이 이삭을 죽이면 살려줄 것까지 믿고 칼을 들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낙심치 않고 용감할 수 있는 동기는 기록된 말씀대로 그 약속대로 믿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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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호와로 인하여_2011.03.21  


(합 3:17-18, 개역)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것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 인용되는 구절이 여기 하박국 3장 17-18절이다. 그는 아무런 물질적인 소출이 없어도 오직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일까? 오늘은 이 사람이 가진 것을 통해 잠재력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어 보자.

이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는 이미 많은 것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가 소유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먼저, 그는 무화과나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열매는 모자랐다. 또, 그는 포도나무가 있었으나 열매는 전무한 수준이었다. 또, 그는 감람나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소출이 별다르지 않았다. 한편, 그는 밭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밭에는 식물이 없었다. 또, 그는 양우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양은 없었다. 또, 그는 외양간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소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있었다. 자기 영혼을 구원하신 기쁨의 하나님을.

그러므로 그가 소유한 것을 나열하면 이러하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 밭, 양우리, 외양간 즉, 비록 현재 그는 언뜻 볼 때 모든 것에서 충분한 소출을 얻지 못하는 시골촌뜨기처럼 비춰지고 있지만 사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갖춘 사람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아무리 많은 양을 얻고, 소를 얻더라도 양우리가 없고 외양간이 없다면 그는 양과 소를 되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돈이 있어서 포도열매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많이 사먹을 수는 있겠지만 그 사람이 나무를 소유하기 전까지는 매년 사먹어야만 할 것이다.

이에 반해 세 종류의 유실수와 두 종류의 목축이 가능한 배경을 갖추고 있는 주인공은 언제든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당장은 소출 없이 미약해보였지만 무엇보다 그가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모습, 그의 신앙의 아름다움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소출을 주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은 주실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볼까? 당장 우리 이목을 사로잡는 보기 좋은 열매들과 넘쳐나는 양과 소를 보고 싶어 하진 않은가? 현재 소출의 많고 적음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있진 않은가? 숨은 잠재력을 보지 못하고 있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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