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 받은 믿음의 진수_2011.3.30
(창 22:9-12, 개역) 『[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한마디로 정의해 ‘훈련 받은 믿음의 진수’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험받는 아브라함의 견고한 믿음을 칭송함과 동시에 그가 이 과정에서 아들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 앞에 깊이 고뇌했을 것이란 가설을 설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믿음을 칭송하는데는 동의하지만 그가 갈등했을 것이란 가설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시험을 받는 이 장면에만 집중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동안 아브라함이 겪어온 시험과 연단, 실패와 회복을 되새겨봐야 한다. 덧붙여 그가 어떻게 이삭을 약속받았으며 그가 어떻게 이삭을 얻었었는지 일련의 과정들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아브라함. 그는 일찍이 하나님의 음성을 좇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긴 거리를 여행했다. 그는 동족을 떠나 타 부족들 안에 거처를 옮길 만큼 용감했다. 그러나 그가 정작 가나안에서는 얼마나 치졸하게 굴었는지도 안다. 그는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사실 그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아내를 누이라 속였으며, 좌절을 맛봤다. 그리고 전쟁 때에 롯을 구출해주었다. 그는 다시 그랄에서 아내를 누이라 속이므로 두 번째 동일한 실수를 범했고, 다시금 수치를 당했다. 정말 그건 수치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약속하셨을 때, 그는 이스마엘이나 살게 해달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그건 사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비웃었다. 물론, 그건 믿음이 아니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당연한 이치였다. 이미 이스마엘은 준수한 소년이었고, 도저히 잉태를 할 수 있는 생리적인 조건의 몸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나치게 늙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이름을 바꾸고, 할례를 하고 난 후 어느 시점에 이르러 사라가 잉태를 했다.
이삭은 유일하게 이미 개명(改名)하고 할례를 하고 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를 통해 태어난 아들이었다. 아마, 이는 이삭의 구별된 출생을 의미할 것이다.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아브라함 100세에 하나님이 약속한 아들을 본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이 받았을 믿음의 깊은 교훈과 뿌리 깊은 반성과 회개는 어떤 것이었을까! 분명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크나큰 교훈이자 반성의 계기이자 견고한 믿음의 동기부여가 됐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아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처음 언약은 무엇이었는가. 아브라함은 생각했을 것이다. 이삭을 통해 열국의 아비가 된다고 했다. 이삭을 통한 그의 후손이 바다의 모래처럼 많을 것이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라보며 처음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약속하신 사실을 되새겼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처음 우리가 다루고자 했던 주제로 돌아가보자. 그것은 창세기 22장에 있다.
이삭이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소년이 되었다. 한 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다시 현현하셨고, 뜻밖의 명령을 하달하신다. 그 명령은 ‘이제 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쳐라.’이다. 그때 아브라함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성경은 분명하게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모리아로 향했다고 말씀한다.
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났을까? 그것은 순종하려는 단호한 의지의 표상이다. 덧붙여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조금도 두려워히지도, 염려하지도, 갈등하지도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처음 아브라함은 부족한 믿음으로 인한 많은 실수와 좌절을 경험했다. 그의 믿음의 부족의 최고봉은 바로 이삭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정말 100세에 이삭을 얻었던 것이다. 그날 그 당시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깊은 각성과 변화를 경험했다. 아마도 그 경험은 아브라함 믿음의 평생에 있어 가장 견고한 터를 마련해주었을 것이다. 그런 믿음의 경험을 얻은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아이고, 이제 내 아들 죽네~’라고 슬퍼 했을까? 아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처음 이삭을 놓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했을 것이다. ‘네 아들 이삭을 통해 네 씨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리라.’ 즉, 아브라함은 절대 이삭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히 11:17-19, 개역)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렇다. 바로 이 히브리서가 아브라함의 숨은 믿음의 근원을 밝혀준다. 아브라함은 절대 이삭이 죽지 않을 것일 믿었다. 자기가 번제로 잡아 바치면 하나님이 다시 살려줄 것을 확신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고, 두려워지도 않았으며,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이제 내가 믿음으로 행하나이다 보소서.’라는 단호한 의지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누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로 향하는 아브라함을 갈등과 고뇌에 사로잡힌 불신자로 묘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추측은 오히려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완전한 아브라함의 믿음에 그대로 투영시킴으로 범하는 오류일 뿐인 것이다.
이제,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해 묶어 칼을 빼들었다. 그때 천사가 소리쳤다. 'STOP!!'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 하셨다.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시험을 견고한 믿음으로 통쾌하게 이겨낸다. 바로, 가나안으로 와서부터 여러 환란과 좌절과 시험. 때로는 불신의 부끄러움까지 겪어가며 훈련된 아브라함의 견고한 믿음의 진수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이것이 바로 훈련 받은 믿음의 진수인 것이다.
한편, 이 모리아 산에서의 사건은 결국 아브라함의 믿음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삭을 번제로 잡을 목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냥 쇼였다. 왜 그런 쇼를 하신 것일까? 그 의도는 순전히 훈련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진수가 무엇인지 우리로 하여금 바라보고 교훈을 받도록 하기 위하심이다. 정말 번제로 잡지도 않을 건데 뭐 하러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까지 오르게 하셨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믿음은 결국 온전한 행위를 통해 증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종종 그 진정성을 확신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우리의 믿음은 참된 경외함이 아니며 참된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근처도 못 갈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훈련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참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결국 완전한 행위로 증거된다는 것을 일깨워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믿음의 푯대란 것이다.
아브라함의 견고한 믿음의 이유는 1차적으로는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믿음이란 것이며, 하나님의 변치 않는 신실하심을 경험함과 동시에 자신의 뿌리 깊은 불신앙을 발견하는 과정을 통한 믿음의 깊은 각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궁극적으로 ‘언약의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약속하신 바에 너무나 신실하신 하나님을 체험했던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토대도 바로 그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믿음의 훈련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보잘 것 없는 믿음에 대한 각성과 통감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우리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언약과 신실하심을 있는 그대로 믿는 믿음의 견고함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절대적으로 확신했기에 자신이 이삭을 죽이면 살려줄 것까지 믿고 칼을 들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낙심치 않고 용감할 수 있는 동기는 기록된 말씀대로 그 약속대로 믿을 때이다.